지난(濟南)사람들은, 지난이 마치 주변의 발전이 신속한 정황 하에서 중간이 움푹 패어 들어간 것 같은 것을 발견했다. 북부에는 경진기(京津冀)도시군이 있고 남부에는 강소성(江蘇省)도시군이 있고 서부에는 정저우(鄭州) 및 중부 도시대(城市帶)가 있고 동부에는 성내의 칭다오(青島)가 있다. “제아무리 진취심이 없는 도시라고 해도 이런 국면에서는 초조함이 없으면 안되고 가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터뷰를 받은 한 관원은 이렇게 ‘중국신문주간’에 알려주었다.

 

본사기자/조오췬펑(周群峰)

 

국가중심도시 경쟁의 열조가운데 줄곧 지난(濟南)은 경쟁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은 이 도시의 주요 집정자에게는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올해 2월에 열렸던 산동성 양회에서 이 시의 한 책임자는 말했다. 전에 정저우는 이미 전에 국가중심도시로 확정이 되었는데 “우리들로 놓고 말하면 아주 큰 충격이죠”

서쪽의 쩡쩌우 외에 지난 동쪽의 칭다오도 올 2월에 국가의 중심도시 경쟁에 가입하겠다고 명확하게 표명했다. 이 시의 발전개혁위원회 주임 주퍼이지(朱培吉)는 국가중심도시의 경쟁이 아주 격렬하다고 표시했다. 칭다오는 최선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최종의 명단에 들어가는 걸 쟁취하겠다고 했다.

이 전에, 산동성 정부 신문사무처에서는 이 일에 대한 태도를 이미 명백히 하였다. 2월14일 오후, 산동성정부 신문사무처에서는 성정부에서 인쇄하여 발행한 ‘산동반도도시군발전기획 (2016-2030)’에 대한 해석을 하였다. 이 기획은 기본상에서 지난과 칭다오가 상핵(雙核)발전의 사유에서 “지난을 지지하고 칭다오를 국가중심도시로 건설한다”는데 대해 명확히 하였다.

많은 도시들이 이 문제에서 앞다투어 태도를 표시하는 현재, 지난은 마치 홀시 당한 구석 같았다.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지난 사람들이 남겨준 인상과 부합된다. 오랫동안 지난의 발전은 성내와 주변 성들에 의해 강대한 경쟁에 직면했다. 그러나 지난의 표현은 늘 미적지근했다. 산동성위원상위, 지난시위원서기 왕민(王敏)이 낙마한 후 새로운 시위(市委班子)팀 역시 돌파구를 찾는데 노력하고 있다.

 

“뭇산에 봉우리가 없다”

경제적인 면에서 분석해볼 때 산동의 “큰 성”과 지난의 “작은 성”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2016년, 산동성 경제총량은 전국의 앞 세 번째에 꼽혔다. 중국도시GDP100강 중에서 산동성은 15자리나 독점하여 그 숫자는 기세 좋게 전국의 수석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여러 개의 랭킹은 지난이 성 도시의 강세지수가 좀 낫다는 것을 반영했다. 2015년, 전국 27개 성 도시에서 지난의 성소재지 수위도(같은 성 중에서 성소재지GDP/비(非)성소재지 도시 중에서 GDP가 제일 큰 도시)와 성 소재지 도시가 전 성의 GDP비례 랭킹은 마지막으로 제1위이다.

2016년 중국의 15개 부성급 도시의 GDP중에서 지난은 랭킹 11위였으나 성내의 GDP에서는 칭다오, 옌타이 뒤를 이어 제3위에 속했다.

다시 말해서, 전국적으로 봤을 때 지난은 일선도시에 눌려 전국에서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또한 성내에서도 그의 지위와 발전수준은 역시 충분한 설득력이 없었다.

지난시의 현상태는 산동성 경제의 하나의 돌출한 특점을 역으로 부각시킨다. 뭇산에 봉우리가 없다.

2016년, 산동은 자호감을 느낄만한 “3개1”이 있었다. GDP가 1만억 달러를 넘겼고 인구는 근 1억에 가까웠으며 일인당GDP수는 1만 달러를 넘겼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중국의 도시 GDP 톱 10위, 중국도시종합경쟁력 톱 10위, 중국도시인구 순유입 톱 10위 이 “세계의 톱 10”에 산동성은 하나도 오르지 못했다.

또 한 조의 수치가 있다. 2015년의 수치가 표명하듯이 허난의 GDP는 산동의 60%밖에 되지 않지만 정저우(鄭州)는 허난 전성의 19.8%를 차지하고 안휘의 경제총량은 산동의 1/3밖에 안되지만 허퍼이(合肥)는 안휘성의 25.7%를 차지한다. 우한(武漢)은 호북성의 37%를 차지하고 창사(長沙)는 호북성의 29%를 차지한다. 그러나 지난은 전성의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73%밖에 안 된다.

그러나 일부 “쌍자(雙子)”도시의 성에서 그것이 전 성에서 차지하는 비례수로 볼 때, 산동성은 역시 비교적 낮다. 산동의 지난과 칭다오의 GDP를 합쳐야 산동 전성의 24.7%를 차지하는데 이것은 많은 “쌍계자”도시들이 성내에서 차지하는 비례수보다 훨씬 낮다. 2016년, 난징(南京), 쑤저우(蘇州) 두 도시의 생산총액은 강소성의 34.1%를 차지했고, 광저우, 선전을 합쳐 광동성의 GDP의 49.2%를 차지했고 선양, 따롄 두 도시는 요녕성의 GDP의 67.5%를 차지했다. 스쟈쫭(石家莊)과 탕산(唐山)은 합쳐 하북성의 38.2%를 차지했고 항저우(杭州)와 닝버어(寧波)는 절강성의 42.2%를, 푸저우(福州), 첸저우(泉州)는 복건성의 45%를 차지했다.

2016년 산동성의 GDP는 7.6%를 증가했고 총 17개 지급 시중에서 7개의 도시의 증가수치는 전성보다 낮았다. 그 중 지난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는 5개이다. 각각 타이안(泰安), 라이우(萊蕪), 더저우(德州), 리아청(聊城), 빈저우(濱州) 5개 시이다. 지난시발전개혁위원회 기획 연구실주임 세쿤(謝堃)은 ‘중국신문주간’의 인터뷰를 받을 때 말했다. 이것은 이 “다섯 형제”가 성시와 이웃하며 별로 덕을 보지 못하여 “큰 형님”의 선동작용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

 

관념 응어리(핵심)

 

지난시가 자신의 완만한 발전에 대한 반성은 근년에 줄곧 진행되고 있다. 지난시 전 시장 양루위(楊魯豫)는 지난의 현 상태에 대해 총결을 지었다. 그는 지난의 총적 실력이 강하지 않으며 현지역 경제발전이 정체되고 증량 투입이 부족하며 도시의 지지력이 낮아 충분한 복사 선동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말했다. 특히 산업구조의 층차가 비교적 낮아 “농업은 우수하지 않고 공업은 강하지 않으며 서비스업은 정교하지 않다”

지난의 반성에 대해 관념문제가 늘 제기된다. 산동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소장 장워이궈(張衛國)는 ‘중국신문주간’의 인터뷰를 받을 때 표시했다. 산동은 공자맹자의 고향이고 유가문화의 영향을 겪을대로 겪었다. 유가문화 중의 존사종교(尊是宗教), 성실수신(誠實守信)은 우수한 품성이지만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며 이익에 대한 의식이 강하지 않아 경제적으로는 작은 국면이 많이 나타나고 많은 산업 또한 작은 공방 구조이다. “늘 자기집의 한 무지기 3푼 땅이나 생각하면서 자그마한 풍족에 만족하죠”

 

2013년, 양루위는 이 문제를 언급할 때 말했다. 지난시의 일부 부문. 현 (시) 구역은 주동성이 부족하고 무턱대고 기대기를 좋아한다. 어떤 사람은 체면을 내려놓고 소통하는 걸 꺼리고 어떤 눈길은 맹목적으로 바깥만 향하여 범위내의 도시들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기회와 정책은 모두 쟁취해서 온 것입니다. 행동이 느리면 기회는 금세 사라져버리죠”

“어떤 사람들은 눈앞에서 자원요소가 주변으로 흘러드는 걸 보면서도 어떻게 자체의 우세를 이용하여 기업의 투자를 유치할지를 모릅니다” 양루위는 말했다. 성소재지의 교통구역, 과학교육인재, 금융서비스, 정보소프트웨어 및 일부 전통산업은 모두 독특한 우세를 갖고 있어 같은 범위내의 기타 도시들이 현재로선 비교할 수 없다. 지난은 자신의 우세를 알아야 할뿐더러 우세를 발휘하고 우세를 확산 발전시켜 핵심경쟁력을 창조해야 한다.

지난시의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소장 왕쩡(王征)은 ‘중국신문주간’에 알려주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지난의 많은 국가기업 사장들은 전부 내부에서 선출해 왔다. 그들은 공장에 대해 깊은 감정을 갖고 있으나 안목이 넓지 않고 사상이 개방되지 못했다.

 

그는 ‘중국신문주간’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난의 면방직업은 민국 시기에 시작되어 잠재된 재지와 실력이 높았다. 전성기에 모두 14개의 공장이 있었고 전부 번호가 있었다. “방직여공”은 한때 지난의 뭇사람들의 선망을 사는 직업이었다. 그러나 개혁개방 후, 시장경제의 거대한 열풍속에서 쇄락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왕쩡은 전에 지난 국면(國棉) 제5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는 생산배정을 담당했다. 2006년에 이미 지난사회과학원에서 근무를 했던 왕쩡은 이 공장에 돌아가서 연구조사에 임하였다. 당시에 공장은 불경기여서 많은 공인들은 600위안밖에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면서도 제때에 출근도장을 찍었고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왕쩡은 말한다. 공장의 관리층과 공인들은 어쨌든 합심하여 공장을 살리려고 했으나 관리자의 관념과 능력의 제한을 받아 기업은 손실의 국면을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큰 어려움이 있었다.

“지난사람은 순박하고 자기의 본분을 잘 지키며 충성도가 높아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되요. 사상이 보수적이고 안목이 없는 면은 결국엔 공장을 쇄락하게 만든 원인입니다” 왕쩡은 말했다.

짱워이궈는 복단대학에서 박사공부를 할 적에 ‘쑤루후저웨경제사회발전비교연구(蘇魯滬浙粵經濟社會發展比較研究)’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그가 연구해서 얻은 결론은 전통농경문화와 현대상업문명간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으므로 창조성적인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가문화의 영향을 받아 산동은 현대공업문명을 중시하지 않고 관본위사상이 짙으며 국유경제만 독보적으로 크다. 이것은 산동의 공업수량은 많으나 많기만 하고 강하지 않은 문제를 초래했다.

짱워이궈는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지난 세기 80년대 말, 산동사회과학원경제소소장을 맡은 추이옌썬(崔延森)은 진일보로 보수사상을 타파하자고 제기한 적 있다. 칭다오에 “또 하나의 홍콩을 만들자”고 했다. 그러나 누구도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 “만일 이 제안이 중시를 받아 개혁의식을 증강시킬 수 있다면 현재 칭다오는 훨씬 더 발전했을 것입니다”

짱워이궈는 사상이 보수적인 것이 종종 기회를 놓치는 것을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담력의 문제가 아니라 많이는 의식의 문제입니다”그는 말했다. 지난 산업의 일체화 국면은 이미 오래 전에 제기가 되었지만 오래도록 추진이 안되고 있어 결국엔 많은 기회를 잃게 되었다고.

짱워이궈는 말한다. 그는 지난 세기 90년대에 벌써 토지교체를 통하여 지난의 강철공장과 지난의 연유공장을 옮기자고 건의했다. “환경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지난에 더욱 많은 발전복지를 만들자는 것이었죠”

허나 최근 일년에야 지난강철이 이사를 하는 일이 점차 명랑해졌다. 2016년 11월, 산동성정부에서 나서서 ‘지난강철의 조절과 산동강철의 전환발전공작총체방안’을 말했고 2017년 연말 전으로 지난강철이 지난에서의 강철생산설비는 전부 멈추어야 한다고 확정했다.

사상이 보수적인 것 외에도 지난의 산업분포도가 어지러운 것 역시 경제발전을 제약하는 원인이다.

짱워이궈는 합리적인 성소재지도시라면 산업구조의 분포가 반드시 도시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간에는 CBD(중앙상업무역구), 바깥에는 상업무역물류, 그 바깥으로는 교외농업, 더 바깥으로는 농촌 이런 식이다.

지난의 현재의 산업분포는 제멋대로 뒤섞인 것이 선명하다. 층차감이 없고 산업선택도 뚜렷하지 않다. 짱워이궈는 말한다. 지난의 역사에서 CBD의 구호는 여러 번 출현했으나 2015년에 가서야 겨우 리샤구(歷下區)에 실행할 것이 확정되었다.

이외에 지난의 경제구조도 불합리하다. 더욱이는 제조업이 비교적 결핍하다.

지난시 발전개혁위원회 기획연구소 주임 쎼쿤은 ‘중국신문주간’에 알려주었다. 현재 지난시의 경제발전의 약한 고리는 주요하게는 공업경제, 민영경제와 현역경제이다. 2016년, 지난시의 공업 증가수치는 GDP 비중의 30%도 되지 않았다. 규모이상의 공업의 주영업업무 수입은 칭다오와 옌타이의 1/3도 되지 않는다. 민영경제의 증가치 비중은 약 37.5%이고 비중은 전성의 약 14 퍼센트보다 낮다. 현역의 경제증가치 비중도 43%밖에 안 된다.

“근본적으로 아직 현역의 경제가 강하지 못합니다. 현역경제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공업경제와 민영경제입니다.”쎼쿤은 말했다.

지난시의 전 시장 양루위도 2013년에 제출한 바 있다. 홀시되었던 항목들을 발전시키자, 산업은 이 도시발전이 비교적 늦은 하나의 원인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적지 않은 주택을 지었으나 다른 사람들의 산업을 이끌어준 셈이 되었죠. 가구, 인테리어재료는 외지에 가서 사고 사람들이 사는 옷도 전부 외지의 것입니다. 현지의 옷공장이 몇 개 없으니깐요.”양루위는 지난시의 발전은 반드시 사유를 전환시켜 시장을 이용하여 자원을 배치하고 산업구조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표시했다.

이외에, 교통이 막히는 것도 지난에 하나의 어려움을 형성했다. 당지의 인터뷰를 받은 한 관원은 “중국신문주간”에 알려주었다. 지난의 교통이 붐비는 것은 이 도시의 형성이 동서는 길고 남북은 좁은 길 현황과 관계가 있다고 했다.

 

군웅환사(群雄環飼)

 

지난시의 자체의 원인 외에도 산동성이 각 시에 대해 균형적으로 힘을 넣는 것 또한 지난의 수위도가 높지 않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다.

이 문제에서 산동성내에는 다양한 관점들이 있다. 어떤 관점은 산동경제가 “뭇산에 봉우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면바로 산동경제발전의 균형을 말해준다. 이런 균형은 산동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우세이기도 하다.

어떤 관점은 “뭇산에 봉우리가 없는”이런 현상을 볼 때 산동성에는 중점적으로 개별적인 도시를 발전시켜 봉우리를 형성하는 동시에 주변지역의 발전을 추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시는 산동성이 “소재지전략”을 실시하여 지난에 대한 지지의 강도를 높이고 기획과 편제, 정책실시, 개혁시행 점 등 방면에서 정력을 기울이기를 호소한다.

산동사회과학원경제연구소소장 짱워이궈는 “중국신문주간”에 알려주었다. 현단계의 이런 균형적인 발전은 낮은 수준의 균형적 발전이다. “마치 한 마리 한 마리의 게가 한데 연결되어 누구도 멀리 갈 수 없듯이 이런 균형은 우세가 아닙니다”

그는 역사의 진보는 끊임없이 균형과 불균형의 연이은 교체에 의해 이루어진다면서 이것 또한 경제발전의 규칙에 부합된다고 말했다. “오직 끊임없이 국면을 깨고 낮은 수준의 균형을 깨뜨려야 증장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쎼쿤은 “중국신문주간”에 말했다. 이론상으로 볼 때 지역경제의 발전은 균형에서 불균형으로, 다시 더욱 높은 수준의 균형으로 발전하는 하나의 과정을 겪는다. “파워 메커니즘에 반영되면 분극화하여 확산되는 과정이 있죠”그는 분극화의 과정을 이탈하면 필연코 균형의 층차가 높지 않은 것을 초래하게 되고 합리한 경사도를 형성하지 못하며 구역간의 우세로 서로 보완하는 것을 실현하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균형은 효율에 영향주게 됩니다. 이것도 산동성 산업층차가 높지 않은 중요한 원인입니다.”쎄큔은 말했다.

1950년, 프랑스 경제학자 Perroux는 증장극이론을 제출했다. 이것은 서방지역경제학중에서 경제구역관념의 초석으로 여겼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응당 특정적인 지리공간을 택하여 증장극으로 만들어 경제발전을 추진하여야 합니다.”

‘중국신문주간’은 산동에서 인터뷰를 할 때 산동성에서 최근 몇 년 래 “뭇산에 봉우리가 없는”문제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으며 대도시가 한 성에 있어서의 작용 및 주변도시들의 경쟁구조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지역경제와 연구학자, 화남도시연구회부회장 순안둥(孫安東)은 말했다. 산동경제는 사천보다 더 발달했는데 왜 “존재감”은 후자보다 못할까? “제가 보기엔 아주 큰 원인중의 하나는 사천에는 청두가 있는데 산동에는 전국에서 종합영향력을 갖춘 대도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칭다오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오늘의 칭다오는 10년 전의 칭다오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칭다오의 영향력은 그냥 경제에만 국한되어있고 전반적인 정치, 경제, 문화의 영향력이 아닙니다.”

이외에도, 주변의 성과 중심도시의 쾌속 발전은 산동성과 지난시로 하여금 안절부절못하게 하였다. 지난사람들은 원래 자기들과 수준이 비슷하던 도시들, 예를 들면 우한, 정쩌우도 근래 몇해 사이에 발전속도가 엄청 빨라 점점 더 지난과의 간격을 벌리는 것에 유의하게 되었다.

지난 사람들은 주변의 발전이 신속한 정황 하에서 지난은 마치도 중간이 움푹 패어들어 간 것 같은 것을 발견했다. 북부에는 경진기(京津冀)도시군이 있고 남부에는 강소성 도시군이 있고 서부에는 정저우(鄭州) 및 중부 도시대(城市帶)가 있고 동부에는 성내의 칭다오가 있다. “제아무리 진취심이 없는 도시라고 해도 이런 국면에서는 초조함이 없으면 안되고 가만 있을 수가 없다” 인터뷰를 받는 한 관원은 이렇게 ‘중국신문주간’에 알려주었다.             

 

“산봉우리”의 경쟁

 

그러나 지난의 결책자는 주변도시들이 신속하게 발전하는 그중 하나의 원인은 그것이 속하고 있는 성이 성소재지전략을 비교적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지난시의 한 관계자는 말했다. 쩡쩌우, 허페이 등 근년에 발전이 신속한 도시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속한 도시들이 전 성의 힘으로 성소재지를 발전시켜야 만이 이처럼 휘황한 성과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볼 때 지난시의 결책자도 산동성이 지난의 발전을 더욱 지지하고 성소재지전략을 실시할 것을 희망한다.

산동대학의 부교수인 리싸오씽(李少星)은 목전 남북이 협공하는 추세 하에서 지난은 하나의 더욱 높은 전략적 지위가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성소재지전략의 발전사유를 제출하게 된 것이다.

“지난은 현재 여전히 집결 발전 단계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동성 중서부의 발전과 성소재지도시 도시군 경제권의 건설 및 경진기와 장강삼각주 및 중원도시군 등 국가전략지구의 협상발전 과정중에 있으므로 다른 도시는 대체할 수 없는 지위와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소재지전략이 현실적인 기초를 구비하게 하였습니다.”

쎄쿤은 ‘중국신문주간’에 알려주었다. 현재로 보아서는 칭옌워이(青煙威, 산동반도의 3대 연해도시, 칭다오, 옌타이, 워이하이)는 양성발전효과가 선명하여 산동중서부에서 하나의 증장극을 만들기를 절박히 수요하고 있다. “더욱이 지난은 성소재지니 지난을 잘 발전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추세입니다”

주변지구의 성소재지도시에 대한 중시도도 빈번하게 언급이 된다. 안휘에서는 우선 차오후(巢湖)를 기업분할 하여 허페이가 빈후(濱湖)지역으로 변하게끔 했다. 그 다음에는 성 정부를 빈호신구로 옮겨가고 진일보로 허페이를 크게 만들고 강하게 만들었다. 허난에서는 성에서 나서서 폭스콘을 도입하였고 그후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항경제종합실험구의 브랜드를 따서 정저우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애플 휴대폰 생산기지로 되게끔 조력하였으며 천억 급의 전자제조업 산업 사슬을 움직여 항공화물운송과 중유럽반열의 흥성을 이끌었다.

그러나 어떤 주변도시들은 이런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허난일보’에서 주최한 공중계정호 ‘금수하관란’간행물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허난은 결코 한 개 성소재지의 전략을 제출하지 않았다. 지난의 언론은 정저우로 하여금 “총받이”로 되라는 것이다.

산동성내에서도 지난의 성소재지 전략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은 성소재지전략을 제창하는 것은 기타 도시의 자원을 침범하여 불공평을 초래한다고 여긴다. “지난이 커지려면 그래도 자립 자강해야 합니다”

리싸오씽은 성소재지전략이 다른 도시의 자원을 점령한다는 관점은 하나의 오해라고 말한다. “지금은 계획경제시대처럼 행정명령에 의해 모든 자원을 지난에 집중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왕쩡은, 지역경제의 발전은 본래부터 한 판의 바둑처럼 각지의 우세자원이 서로 보충하고 보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성에 만일 많은 중심이 있으면 도리여 자원이 분산되게 하여 전체적인 발전에 불리하게 된다. 성소재지는 다른 형제도시들과 자연적으로 내재적인 협동관계를 이루어 경제발전에서 각자의 이익을 취해야 한다.

“경제발전의 객관적 규칙과 산동의 현 단계 성 상황을 논하지 않더라도 간단하게 ‘공평론’으로 성소재전략을 보면 너무 차원이 낮죠” 왕쩡은 말했다.

그리고 이외에도 인터뷰이는 ‘중국신문주간’의 인터뷰를 받을 때 “성소재지”전략을 실시하는가의 여부는 성소새지가 이 성에서의 무게도 잘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일 무게가 부족하다면 ‘성소재지전략’은 억지스러운 거죠.” 또한 산동성내의 다른 일부 사람들이 봤을 때 지난의 GDP는 산동성에서 겨우 세 번째 자리에 머물러있으니 무게로 볼 때 전 성의 다른 도시들이 지난을 중심으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것은 또한 지난과 칭다오의 관계에도 문제가 된다. 어떤 이는 말한다. GDP가 전 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든 아니면 공업기초이든 칭다오는 지난보다 좋다. 만일 산동성내에서 하나의 중심도시를 찾으라고 한다면 칭다오는 지난보다 기초가 훨씬 좋다.

칭다오의 상황은 국가의 정책과 성내에서의 지지를 쟁취하든 모든 면에서 지난보다 훨씬 더 주동적이다. 지난 세기 80년대, 국가에서 대외개방이 시작단계에 처해 있을 때 연해지구는 국가중점발전의 구역으로 되었다. 칭다오는 독특한 지역우세와 비교적 좋은 기초발전으로 자연스럽게 전 성 경제발전의 중점 부지대상으로 되었다.

그 결과는 칭다오는 계획리스트에 올랐고 경제면에서 직접 중앙과 대화를 하게 되었고 세금의 아주 큰 부분은 직접 중앙 재정국에 납세하게 되다보니 산동성은 작은 일부분만 받게 되었다.

또한 산동성은 칭다오라는 이 커다란 세금원천을 잃은 후에 기타 도시에 대한 세금징수강도가 높아졌다. 이리하여 성소재지의 부담은 자연히 가중했다.

이와 동시에 지난은 발전자금 취득방면에서 산동성내에서라 할지라도 결코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국가투자은행이 매년 산동성에 내려지는 계획 중에서 지난의 분배액은 오랫동안 칭다오보다 적었다.

이 의미에서 볼 때 산동성내의 이 쌍자 도시간의 관계에서 칭다오는 더욱 좋은 자원분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일정한 정도에서는 지난의 부담을 가중화시켰다.

국가중심도시에 대한 문제에서 칭다오시의 한 관원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 도시는 과거에 이미 국가로부터 너무나 많은 혜택을 얻었다. 지난시의 인터뷰이는 두 도시의 경쟁에 대해 많이 다루고 싶어하지 않고 두 도시간의 합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더 선호했다. 리싸오씽은 말했다. 많은 성의 “두 도시 이야기”에는 자원경쟁방면의 문제가 확실히 존재한다. “현재 산동의 ‘쌍중심’의 국면 하에 지난과 칭다오가 서로 돕고 교차적 분공을 잘 하면 산동반도 도시군의 발전을 더욱 잘 지지할 수가 있습니다.”

리싸오씽은 말한다. 지난과 칭다오는 원래는 도로와 철로로 발전할 때에는 서로 상호작용이 별로 크지 않아서 스스로 체계를 이루었다. 현재는 고속철도가 있고 시장의 작용하에서 이 두 도시의 일부 자원은 더욱 합리하게 유동하여야 한다. “이것은 지난과 칭다오의 경합관계를 가속화시킬 것입니다.

짱워이궈는 말했다. 국제적으로는 협동성 경쟁을 제창하는데 도시간에도 응당 경쟁과 합작관계를 강조하여야 한다. “정카이(鄭開) 일체화, 샤짱(廈漳) 일체화, 광선강아오(廣深港澳) 일체화 등은 모두 도시간의 간극을 줄이고 합작관계를 강화했습니다. 지난과 칭다오 역시 반드시 더욱 많은 합작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장워이궈는 개방적인 시선으로 “성소재지전략”을 봐야 된다고 하면서 팔기구성원후대(八旗子弟)의 보수적인 관점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마치 협소한 안목으로 헐리웃을 로스엔젤레스처럼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헐리웃은 전세계의 것이나 헐리웃이 로스엔젤레스를 일떠세웠고 로스엔젤레스가 미국서해안의 굴기를 선동했습니다. 같은 도리로 동경의 발전은 주변의 도시를 선동했고 지난도 발전한 후에는 기필코 주변 도시들의 발전을 추진할 것입니다”

 

포위망을 뚫는 시도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으나 지난에는 이미 일부 변화가 나타났다.

2015년 6월, 지난에서는 새로운 도시발전의 총적 목표를 제출했다. “‘4개의 중심’을 만들고 현대샘도시를 만들자”. 즉 전국의 지역성경제와 금융, 물류중심과 과학기술혁신중심으로 만들어 산동경제문화의 강하고 잘 살핌이 적합한 현대도시로 건설하자는 것이다.

당지의 많은 인터뷰를 받은 관원들은 ‘중국신문주간’에 알려주었다. 지난은 사상해방을 추진하고 발전사유를 제출하는 동시에 상하이, 선전 등 여러 남방도시들과 비슷한 동작이 있었다. 그는 “걸출한 인물들의 견해는 대체로 비슷하다”는 말로 자신의 당시의 감수를 형용했다.

관원들의 사상해방을 격려하기 위해 지난은 이미 “4위일체”의 제도시스템을 구축했다. 내고장성시스템을 건립하고 사람들에게 대담하게 일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시에서는 선후로 4개의 서류를 정식으로 공포했다. 그중 “당원간부의 일을 하고 창업건립에 대한 내고장성면책 메커니즘의 실시방법(시행)”은 담당자가 “밑천을 살리고”“당원간부의 잘못 바로잡기 메커니즘 실시방법(시행)”은 담당자가 “편차를 줄이게”하기 위한 것이며 “당원간부가 일을 하고 창업하는데 착오방지메커니즘 실시방법(시행)”은 담당자가“길을 잘 인도하기”하기 위함이고 “무고하게 모함하거나 서신으로 고발하는 행위에 대한 심사처리방법(시행)”은 담당자가 “걱정 없이”무고하게 모함한 자에게 “칼을 뽑아들 수 있고” 청백함을 위해“뒷받침해줄 수 있게”하기 위해서다.

인터뷰를 받은 한 관원은 말했다. 이 4개의 실시방법은 대담하게 담당자들을 지지하는 “클로즈드 루프”제도시스템을 실현하여 이미 실천 중에서 효과를 보았다.

지난시위원회의 한 관원은 ‘중국신문주간’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황하대교의 제한된 무료통행문제에 관한 일이었다.

2016년 3월 16일부터 지난시의 3개 황하대교(황하도로대교, 건방황하대교와 제양황하대교)는 지난시의 차 번호를 가진 일곱 좌석 이하의 소형 트럭에 대해서 무료통행을 실시했다.

물론 이것은 제한성을 띈 무료이지만 여전히 한 차례의 큰 돌파로 인정되었다. “이익을 인민에게 양보하는 동시에 지난의 물류발전을 가속화했죠.”

한 현지의 관원은 말했다. 여러 해 전부터 산동성시의 양회에서 모두 대표위원회가 지난 황하대교의 무료통행에 대해 건의했지만 자금 등 문제로 오랫동안 실시하지 못했다.

쉬씨안링은 “중국신문주간”에 알려주었다. 과거에는 도로세에만 중시를 돌렸지만 결국에는 깨를 얻고 수박을 잃는 격이었다. 지금은 “한 무지기 3푼 땅”의 시야에서 벗어나 문제를 보고 시야를 넓혔다. “다리세를 취소한 것은 기업으로 놓고 말하면 의심할 나위 없이 강심제작용을 한 셈이죠.”쉬씨안링은 말했다. 황하이북의 지양(濟陽), 쌍허(商河) 두 현의 왕복물류원가는 크게 내려갔으며 이것은 주요 도시구역에 일종의 귀속 감이 생기게 하였다.

쉬씨안링이 제공한 한 조의 수치는 2016년, 지난에서 인재를 끌어들이고 자금을 유치하여 새로이 증가된 외성과의 계약항목 120개였다. 그중에는 투자자금 630억원의 완다문체여행성도 있었으며 260억원의 채석진 여행생태산업성 등 특대항목도 있었는데 계약의 총 투자액은 1994.04억원에 달하여 전 성의 첫 번째에 속했다. 2015년의 15등에 비하면 신속한 발전이었다.

쉬씨안링은 이것이 지난의 기업투자 유치의 한 차례 “역습”이라고 했다. “근근히 1년이란 시간에 전 성의 거꾸로 세 번째에서 정수 첫 번째로 뛰어올랐습니다.”쉬씨안링은 기업투자 유치의 진보는 지난의 상업경영환경의 개변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2016년, 중국은행 산동총부는 칭다오로부터 지난으로 옮겨왔다. 쉬씨안링은 말했다. 중국은행의 주요업무는 주로는 대외를 향한 것으로 지금은 국제업무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난으로 옮겨온 것은 그래도 지난과 산동의 대시장에 대한 전망이 밝기 때문이다.

리싸오씽은 “중국신문주간”에 알려주었다. 개혁개방 후, 일부 연해의 문호도시들은 서서히 행정중심도시를 초과했다. 그러나 성소재지도시는 한 개 성의 지리중심위치에 더욱 가깝기에 더욱 많은 지리적 범위, 인구와 소비능력을 복사할 수 있어 진일보로 시장의 우세를 형성할 수 있다. 옌타이, 칭다오 등 연해도시들은 이런 선천적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

“허난과 비교하면 산동경제는 실력이 더욱 강하고 소비능력도 더 큽니다. 이 방면에서 지난은 정쩌우 등 성소재지에 비해 잠재력이 훨씬 뚜렷하죠”

지난은 과거에 한 단락의 앞서간 역사가 있었다. 최근에 빈번하게 제기된다.

1904년, 청조 광서황제 삼십 년 때 북양대신겸 직립총독 원세개는 산동순무 저우푸(周馥)와 연명으로 조서를 올려 산동성 내에 자체의 통상항구를 열자고 요청했다. 상주문에는 지난성 밖에 자체의 통상항구를 만들어 중외가 모두 그 이익을 얻고 워이현(濰縣)과 쩌우촌(周村)을 함께 통상항구로 만들어 지난의 분관分官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3주도 지나지 않은 5월 19일, 청조정에서는 정식으로 이 조서를 비준하였다. 이때로부터 지난에는 정식으로 개항장이 생겼으며 이후 지난의 형상은 현재의 자유무역구에 해당했다.

이 해 7월의 어느 날 독일인이 건설한 교제(膠濟)철도가 전선이 개통이 되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지난 시민들은 앞다투어 기차역에 달려와 독일의 성냥이며 털실 등 외국물건을 가득 실은 이 “거대한 괴물”을 맞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산품을 경영하던 가게주인들도 너도나도 가게에 외국물건을 잔뜩 쌓아놓았다.

개항장이 있기 전, 지난은 산동의 정치중심이었고 경제는 대략 연해도시보다 수십년이 낙후되어 3류의 상업도시 밖에 안되었다. 통상항구가 오픈된 후 많은 은행, 외국은행, 대대로 내려온 전통 있는 가게들, 상점들은 앞다투어 지난에 몰려들었다. 통계에 의하면 1927년 지난의 성관 및 개항장 두 지역의 가게는 이미 6700여 집에 달하여 지난은 일약 “산동 내륙의 첫 번째 상업무역중심”으로 되었다.

지난시위원회의 한 관원은 이렇게 ‘중국신문주간’에 알려주었다. 만일 선전, 주하이(珠海) 이런 도시들이 최신 유행의 젊은 여성이라면 지난은 더욱 많이는 후더운 어머니 같다. “그는 으시대지 않지만 깊은 정감이 충만 되어있습니다.”

지난의 성격과 발전전망에 대해 이 관원은 또 다음과 같은 비유를 했다. “마치 이 도시의 지하에서 흐르는 샘물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불구불 앞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어느 하루에는 꼭 용솟음쳐 올라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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