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지난 5월13일, 우리 재한동포문인협회 소속 일행은 한국문인협회 구로지회와 동참하여 남양주로 문학기행을 떠났다. 주요 행선지는 남양주 종합 촬영소와 김 돈식 시인의 소유인 석화촌 관람이었다. 

문인들의 감성 깊은 시 낭송 열기를 가득 실은 관광버스는 서울에서 떠난지 둬 시간 만에 경기도 남양주시,조안면 북한강로에 있는 종합 촬영소 영상지원 소에 도착하였다. 
 
 영상 지원관은 1층은 영화 문화관, 폴리 녹음 체험관, 영화 원리 체험관, 소품실 의상실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야외 시설에는 박찬욱 감독의 “공동 경비구역 JSA”를 위해 제작된 세트로 판문각, 팔각정, 회담장 등이 있었으며 민속마을 세트로는 한국영화의 대표 감독―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조선후기 천재 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 취하선”이 세트로 되어 있었는데 정말 조선시대의 고을에 들어선 듯한 환각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통 한옥 세트(운당)가 쭉 한눈에 들어 왔고 시네극장도 있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그래도 영화인 명예의 전당이었다. 물론 250여명의 찬란한 이름을 자랑하고 있는 미국 할리우의 명예의 전당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눈과 귀에 익은 우리 한국 영화인들이여서 더 따뜻하고 울렁이는 격동으로 가슴에 안겨왔다. 위대한 영화인 신상옥, 정진우, 감독 유현목,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유명배우 황정순, 김지미, 엄앵란…그 찬란했던 시절이 고스란히 전당에 살아 있었다. 영화문화관을 나와 야외 세트장으로 나왔을 때 한창 무르익어가는 오월의 신록은 조각 된 듯 아름답게 다듬어진 사면의 환경을 휠링의 천국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그런데 나는 저도 모르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불타오르는 요염한 자태로 세상의 눈길을 강탈했던 봄철죽의 화사한 꽃잎들이 벌써 소리 없이 땅에 떨어지며 시들어 가는 모습에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문득 “홍루몽”의 림대옥의 “꽃 묻기”(葬花)의 슬픈 장면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때 지난 철죽을 뒤로 한 채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그 옆에 넓은 언덕바지를 수놓고 있는 갓 피어난 소국화에 몰려 셀카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간들간들 청신하게 작은 흰 꽃잎을 이제 막 피우고 있는 소국화는 그처럼 싱싱하고 향기로웠다. 아아, 한세대를 풍미했던 영사막 그네들의 그 화려함과 영광 또한 결국 누구에게 대체 되었고 지금은 다 어디로 갔나? 나는 뻔한 질문을 던져본다. 그러며 나는 내가 숨 쉬고 있는 소중한 오늘의 태양의 가치를 가슴속에 품는다. 유유히 흘러가는 북한강을 옆에 끼고 우리의 버스는 이천쌀밥 정식집에 이르러 맛있는 이천쌀밥으로 점심요기를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석화촌(石花村)으로 왔다. 
 
 와,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 동산인지 정원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히 정교한 설계와 대자연의 숨은 풍경을 잘 조화시켜놓은 1만2천여평부지의 석화촌은 입구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탄성을 안겨 주었다. 야트막한 산비탈을 융단처럼 휘감은 연상홍의 화려한 향연, 일영산과 백영산, 그리고 자산홍이 주출이 되어 철죽 중에 꽃잎이 가장 크다는 대왕과 홍매화, 주목, 겹철죽, 저먼아이러스, 수선화 등 온갖 종류의 꽃들과 소나무 대나무 등이 석탑, 불상, 나한상, 달마 상, 돌 하루 방. 돌 거북, 해태 상 같은 각종 모양의 돌 조각품 400여점과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우리는 버금 차게 안겨오는 눈요기에 셀 카를 도대체 어디에다 맞추어야 할지 머리가 벙벙해 졌다. 갑자기 하늘에서 비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연못에서 물포가 튕겨 오르기 시작했다. 삼단폭포에서 떨어진 물줄기가 단아한 행각의 돌다리 밑을 지나 연못으로 흘러든다. 용두수성이란 이름의 용조각상에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소리는 가야금 소리를 방불케 하는데 빗소리가 그만 훼방을 놓고 말았다. 우리는 굵어지는 빗줄기 땜에 텐트 같은 천막 속으로 뛰어 들었다. 마침내 걸상들이 구전이 준비되어 있어 우리는 잡담에, 창작에 두서없이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다른 패들은? 제1전망대와 뚱뚱이 달마 상을 보려고, 또 제2전망대에 줄지어 앉아 있는 석상들과 함께 꽃 천지 속에서 명상에 잠겨 보겠다고 삼림욕장으로 들어갔었다. 그들을 기다리며 나와 성좌 문학방 문우들은 작품의 제목의 의의에 대해 진지하게 열변을 토했다. 비가 그치고 우리는 계획보다 조금 일직 귀환버스에 올라탔다. 하루의 피로 속에서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문우들, 또는 폰을 들고 카톡과 위쳇으로 오늘의 향기가 물씬 담긴 멋진 사진들을 친구들에게 전송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 기쁨은 나누면 두 배로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림 금철 시인과 우리 성좌문우들의 흥겨운 노래에 어깨를 들썩이다 송연옥수필가의 감성에 푹 젖은 깜짝 놀랄 노래실력에 급급히 동영상 찍기에 바빠 났다…  그리고 석화촌을 건설한 김돈식 시인에 대해서 생각에 잠겼다. 1922년에 태어난 그는 혜화 전문 문과를 졸업하였다고 하였다. 1950년, “국마리집”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상 되였으며 “귀촉부”로 한미 시작품공모전에 당선 되었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무릉동 산을 꾸려 관광객들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주시는 시인이 정말 좋은 일을 하셨다고 감격하였다. 숨 쉬고 있는 소중한 우리들의 오늘에 또 한줄기의 산소를 보내 준 것이 아닐까 2017, 5월 14일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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