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용님을 만나보다

[서울=동북아신문]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이는 시 <향수>의 첫 련이다. 시인 정지용님께서 1923년에 서울을 떠나 고향인 충북 옥천으로 내려가는 기차안에서 지었으리라 전해져 내려 온 시 <향수>는 그야말로 향리를 생각하는 절절한 마음으로 푹 젖어 지금까지도 숱한 우리 민족들에게 잘 읊어지고 있다.

내가 <향수>의 고향 옥천에 가서 정지용님을 만나본 것은 몇년전 어느 일요일 날이었다.

그날 아침, 옥천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불붙듯 하여 일당일 하러 나가려다 말고 곧바로 옥천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보름전인가 형님이 한국 경상 남도에 왔다가 나를 만나보러 오는 길 에 옥천을 지나게 되니 정지용님을 보고 싶은 마음을 걷잡지 못해 옥천에 들러 시흥에 잠겨본 뒤 나한테 왔었단다 . 그 일이 언젠가 나도 정지용님을 만나 보아야겠다는 마음을 또다시 흔들어 놓아 시들었던 풀이 새파랗게 다시 살아나듯 내 맘을 끌었다.

▲ 림금철: 연변작가협회 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시분과장. 시집<고독 그리고 그리움> 등 출간. 수상 다수.
옥천 IC에서 내려 시내를 등지고 약간 걸어가니 정지용님의 모교인 죽향초등학교가 나타났다. 좀 더 가니 커다란 시비가 맞아주었다. 정지용님의 시 <향수>었다. 흥분된 나는 오랜 만에 시를 소리내여 읊으면서 작은 돌다리를 건너 좌회전했다. 정지용님의 생가가 소박하고 수수한 옛날모습을 그대로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시 <향수>가 내 머리 속에서 그 냥 읊어지는 속에서 정지용님의 생가 웃방으로 지금도 시를 쓰고 계실 것만 같은 위인을 그려보며 저도 모르게 발 뒤축을 들고 조용조용히 방안을 우러 렀다.

가 뒤 켠에는 바로 <정지용문학 관>이 들어앉았다. 현대식으로 꾸며 진 <문학관>의 미다지문을 열고 들 어서니 정지용님께서 길다란 의자에 앉아 반갑게 맞아주었다. 검은 테 안 경을 끼고 검은색 우리 민족 저고리를 입으신 그이는 그렇게도 겸손하게 두 손을 무릎위에 딱 올려놓으시고 까딱 않고 앉아 반겨주었다. 막 달려가 악 수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 들어진 모델이었다.

그냥 허리 굽혀 인사하고 들어간 방은 바로 문학전시실이었다. 거기에는 시인이 살아계시던 시대적 상황과 연대기가 그의 시 주제별로 4개 구역으로 나뉘어 전시되었다.

1902년에 출생한 정지용님은 192 2년 <풍랑몽>을 쓰면서 시인의 길 에 들어섰으며 <시문학>, <구인회> 등의 문학동인으로 활동하였고 해방후에는 이화여전교수, 경향신문 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등을 역임했단다. 그의 주요 작품으 로는 <산 넘어 저쪽>, <홍시>, <고향> 등이 있단다.

뮤직 비디오로 된 가곡 <향수>가 흐르는 속에서 나는 정지용님의 시집, <백록담>, <지용시선>, <산문 > 등 시인의 육필 원본을 감상하였고 또 1910년부터 1950년까지 현대시의 변화, 발전속에서 정지용님이 결정 적인 기틀을 마련한 시인임을 다시 한 번 느꼈었다.

전시실에서도 제일 독특하다고 할 만한 것은 현대적인 설비로 손이 스크 린 되여 정지용님의 임의의 시를 읽어 볼 수 있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 시어 들을 검색해 그 시적 표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다음은 영상실에 들어갔다. 거기서 나는 시인의 삶과 문학과 인정미를 서 정적이고도 회화적으로 그린 다큐멘 타리 형식의 영상을 보았고 또 이어폰 을 귀에 걸고 배경영상과 음악위에 자 막으로 흐르는 정지용님의 시들을 맘 껏 읊으면서 세상 더없는 향수를 누렸 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쌀을 찾으려
풀섭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고향에서 그리고 집에서 정지용님의 시를 몇 수 읽어보기는 했으나 이곳에서 읊는 시는 그렇게도 격정적이고 흥분되고 시흥에 빠질 수가 있겠는가. 이제는 시인인 형님이 옥천을 지날 때 마다 내려서 정지용님을 뵈러 달려가곤 하던 그 심정을 가히 이해할 수 있 다.

<정지용문학관>과 정지용님의 생가를 뒤에 두고 옥천시내로 향하는 마음은 오래 동안 가라앉지를 않았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여 조선시를 쓰 지 못하던 시대에 민족어와 풀뿌리 말 을 찾아내고 그것을 갈고 닦아 우리 모국어를 현대화시킨 정지용님, 우리 민족 문단의 새로운 길 하나를 열어간 정지용 시인님이 아닌가.

   옥천시내의 곳곳에서도 <향수의 고향>이라고 씌여진 글과 시 <향수>전문을 적은 글발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버스터미널에서 버스시간표를 보니 아직도 시간 반은 푼히 기다려야 했다 . 마침 배도 촐촐하여 부근에서 한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작고 아담하게 꾸며졌지만 복판 벽에는 시 <향수>가 새겨져 있었다. 저쪽 모퉁이에서는 동네 노인인 듯한 분들이 단란히 앉아 재미나게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향수>를 또 한번 읽어보면서 그것을 안주삼아 한잔 마시고 있는데 저쪽 상에서 주흥이 도도해 시 읊기가 펼쳐졌다. 옥천은 말 그대로 문학의 고장, <향수>의 고향임에 손색이 없는가 보다.

버스터미널로 향하는 나의 귀전에 는 오래오래 그 노인들이 읊던 시가 울린다.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ㅡ청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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