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원의 장편소설 '어둠의 유혹'에 부쳐

 

▲ 우상렬: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학원 박사연구생, 북한김일성종합대학 조문학부 객좌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국어전업 박사, 한국 배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객원교수, 사천대학교 박사후 과정. 연변대학조문학부 교수 및 교연실 주임 역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수필가, 평론가. 저서 다수.

[서울=동북아신문]나는 처음 "어둠의 유혹"(강호원 작, 장편소설, 도서출판 바닷바람 2014)을 대충 보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피의 복수극을 다룬 삼류 추리소설 쯤으로 알았다. 좋게 보아 소뒤마의 "에드몽당테스" 같은 대중소설 쯤으로 보았다. 그런데 좀 깐깐히 볼라니 그런게 아니었다. 거기에는 시시껑렁한 대중소설을 초월한 인간적인 진국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읽으면 읽을수록 이 진국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소설은 뭐니뭐니 해도 하나의 서사다. 이것이 소설의 원초적인 모습이고 그 본령이 아니겠는가. 이런 서사를 통해 인물형상이 우렷이 살아나기도 한다. 이런 서사에 대해 여러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겠다. 현 단계 욕망이 넘쳐나는 시대 욕망서사는 기본이 되겠다. 일반 삼류 대중소설로는 섹스, 마약, 폭력 등의 짬뽕서사를 볼 수 있겠다.

그럼 "어둠의 유혹"의 서사는? 그것은 사나이의 존엄서사에 다름 아니다.
남자면 다 사나이냐? 물론 그렇지 않다. 무깍지 같은 남자들이 많다. 항상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앞에서는 자기 할 말도 못 하다가 뒤에서는 이렇쿵 저렇쿵 궁시렁 거리기만 하는 남자들이 바로 그렇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 여자 앞에서 에헴에헴 하며 거드름을 피우는 그런 못난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는 내일 산수갑산 가더라도 할 말은 뿌러지게 하고 자기 주의주장이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한 약속은 장부일언중천금으로 칼날 같아야 한다. 바로 이런 남자를 사나이라 한다. 그래 사나이는 대장부, 사나이대장부가 아니더냐. 이런 사나이대장부들에게는 호연지기가 넘친다. 이런 사나이대장부를 맹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士라 불렀다. 사나이대장부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 이것이 맹자의 유명한 士可殺不可辱! 사나이대장부는 존엄 하나로 산다는 말이 되겠다. 쉽게 말하면 깡다구 하나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 하여 뻣뻣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강한데 강하고 약한데 약하다. 그리고 다정다감하다. 사나이대장부도 돌아서서는 눈물 흘릴 줄 안다. 大丈夫能屈能伸이 아니더냐!

자, 그럼 "어둠의 유혹"의 매력-사나이대장부의 존엄서사에 골인해보자.
"어둠의 유혹"에서 사나이대장부는 주인공 김호남. 그의 사나이대장부의 존엄찾기가 이 장편소설의 전반 서사가 된다. 이 소설은 완벽하게 존엄상실로 시작되고 존엄찾기로 끝난다. 전형적인 카테고리소설 같기도 하다. 장편으로서 굉장히 복잡다단한 것 같지만 사실 이렇게 간단명료하다.

이 소설은 첫 부분에 주인공 김호남이 그렇게 믿던 짜개바지 친구-현용군으로부터 거액을 사기당하고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는 인격모욕-존엄상실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격으로 아무런 잘 못도 없이 완전히 바보취급을 당한 셈이다. 이로부터 김호남의 분노가 폭발한다. 김호남은 '자존심으로 여태까지 버티고 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술파는 경박한 여자라도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웬간한 애들 서넛을 붙여놔도(...) 상대가 안 되'고 '게다가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김호남의 현용군에 대한 추적이 시작된다. 소설에서 이 추적이 바로 존엄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2012년 중국에서 출판될 때 제목을 "추적"으로 단 것은 어쩌면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그의 이런 추적은 짓궂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자마다 이런 추적에 나섰다. 심수에서, 연길에서, 한국에서, 그의 추적은 이렇게 공간적으로 죽 이어진다.

물론 주로 한국에서 추적이 이루어진다. '꼬치구이 집, 사천 샤브샤브 집, 중국요리 집, 여하간 인근동네 연변사람들이 개장한 영업집이라면 빼놓지 않고 샅샅이 훓기도 했다.' 그는 자기가 존경하는 형이나 사랑하는 여인인 심영자가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겁나서 피하나하는 논리로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다. '현용군은 이미 그의 표적으로 지정되었고 그를 잡는 건 그가 한국에서 완수해야 할 비즈니스의 일부였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감을 잃게 될 것이고 정신적으로 필시 어떤 후유증 같은 걸 남길 것이다.' 그래서 형인 김철남은 '아무래도 동생의 지나친 집착에 시름을 놓을 수가 없어'한다. 그에게는 악을 맞받아치는 사나이기개가 있다. 그는 결국 현용군을 잡아내어 징계할 뿐만 아니라 그 배후 조정자인 박천수도 정면 대결하여 항복시킨다. 그리고 행동대장-갱인 황병만까지 찾아내어 응분의 징계를 한다. 목적을 도달하지 않고는 절대 그만 두지 않는 사나이의 집념을 보인다. 그는 이렇게 징계하고 정면 대결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지혜롭다. 다른 것은 그만 두고라도 그가 현용군이 든 셋방을 눈 아래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옥탑 집에 세를 맡아들고 주도면밀하게 감시한다. 그리고 '진짜 사내'의 품위도 얼마간 갖추고 있는 노련한 박천수와의 맞대결에서 '성질 단속부터 하'며 심리전으로 상대를 굴복시킨다. 실로 완연히 대탐정가 푸얼머스 같다. 그리고 친구 문길준을 동원하여 무역상을 가장하여 전처 오금순을 홀리고 결국 현용군의 거처를 알아낸 것은 실로 한 편의 드라마 같다. 결국 그는 '마치 자기(현용군. 필자 주)나 박천수 신변에 첨단도청장치나 안장해 놓은 듯 모든 것을 장악했'다.

  김호남은 무지막지하지 않고 경우가 바르다. 항상 양지와 도리대로 행한다. 그는 응당 갚을 돈은 갚고 받아낼 돈은 받아낸다. 수수거래가 분명하다. 수수거래 분명 군자라 하지 않았던가. 그는 '영자의 돈은 꼭 갚'을 생각을 한다. 애초에 '여자의 등을 쳐먹'을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그리고 박천수와의 국제통화에서 그의 전호요금까지 배려하는 세심함을 보인다. 그러나 '각자의 몫은 각자가 치르는 거'로 황병만이한테 '현용군의 앞잡이가 되어서 내 형 집에 무단침입 하여 죄 없는 내 형을 구타하고 병원신세를 지게 했으니 그 죄값을 젖혀놓고도 그 동안 병원비, 일 못한 인건비 등등 잡다한 비용은 당연히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닦달한다. 그는 박천수가 현용군으로부터 7천만을 더 뜯어내어 입금시켜 줬을 때 좋아하기는커녕 오히려 '복수가 어딘가 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며 부담스러워하고 '어쩐지 자기가 되려 협잡, 사기꾼으로 된 기분이다.' 그래서 백방으로 돌려주려고 노력한다. 결국 전처 오금순한테 입금하여 돌려주게 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그가 끈질기게 현용군을 추적하고 주모자인 박천수와 맞대결하고 황병만을 응징한 것은 결국 돈 때문에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의 '복수'의 순수성이 드러나며 사나이대장부의 존엄성이 살아난다. 그의 '복수'는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사나이대장부의 존엄을 찾기 위한데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이런 복수는 법에 호소할 수도 있다. 현대인은 무슨 일이든지 이런 법에 많이 호소한다.

법은 사나이대장부 존엄도 지켜줄 수 있다. 그런데 법 노름은 너무 골치 아프다. 법이 아무리 공신력이 있고 공정하고 공평하더라도 그것은 증거 위주로 돌아가는 만큼 거기에는 허점도 있다. 증거가 없는 범죄는 다스릴 수 없고 증거가 있다하더라도 그 지루한 복잡한 절차에 사람들은 질리기 십상이다. 김호남의 '왜 그런 자들을 잡아들이지 않았나요?'라는 물음에 강형사의 '대한민국은 법치의 나라입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지요.'는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그래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리라. 또한 사나이 대 사나이 싸움은 광명정대하게 맞대결이 제격이리라. 유럽의 기사도정신이라는 것은 이런 것에 다름 아니다. 김호남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자기의 적수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격파한다. 그래서 그는 얼마든지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도움을 주겠다는데도 불구하고 필마단기로 악은 '악'으로 치는 맞대결을 한다. 그렇다하여 범법적인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의 '악'은 원초적인 선의를 기초로 하고 어디까지나 악을 응징하고 교훈을 주는데서 마무리한다. 그래서 우리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며 멋진, 아니 우러러보게 되는 사나이대장부형상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다정다감하다. 그러나 그는 정직하다. 그는 '평소엔 그렇게 무뚝뚝하다가 술만 마시면 이 세상과 아주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처럼 변했는데 마치 무릉도원의 동화 같은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사근사근 담소를 나누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어쩌면 미친 사람 같기도 하고 또 재미있기도 했다.' 그는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며 사는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가다판에 뛰어들 한국행도 결심하고. 형제간의 우애도 돈독하다. 그는 어쩌면 형을 위해 복수하기도 한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피아노도 사주고 싶고 닭곰도 끓여주는 자상함과 친절함도 보인다. 그는 친구 간의 우정도 소중히 여긴다. 그와 한국인 문길준와의 우정은 이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는 '죽마고우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한 순간에 원수로 되었다는 게 어쩐지 지금도 실감나지 않았다', '제발 현용군이가 곰상스럽게 어떤 근사한 이유라도 대주길 빌었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자기(오금순. 필자 주) 때문에 현용군을 찾아가 행패 부릴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여자를 만나면 숫기가 좀 죽기도 한다. 술집여자가 아무리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는 자기 형에게 행패를 한 황병만에 대해 어디까지나 버릇을 가르치는 차원에서 혼뜨검을 내줄 뿐이다. 일단 황병만이 반항능력이 없게 되자 티슈에 광천수를 사 와 피 묻은 얼굴을 깨끗이 닦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에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을 안겨준 직접적인 장본인인 현용군에 대해서는 더 인간적이다. 현용군이 완전히 패가망신하고 반주검이 되어 병원에 누워있을 때 그는 인간적인 동정이 앞서며 보호자와 간병인이 없자 주동적으로 맡아 나선다. 여기에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최고도로 발한다. 악은 악으로 치는 것이 아니고 선으로 감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야 내 마음도 편한 것이다. 김호남이 마지막에 중국으로 돌아오며 '되려 현용군이를 돌보는 한 달 동안 증오와 용서의 차이를 알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한 인간을 증오하기보다 용서하는 쪽이 오히려 자신의 속이 더 편함을 깨닫게 된 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세계명작들인 위고의 "비참한 세계"나 톨스토이의 "부활"과 같은 경지다. 악은 악으로 치면 피가 피를 부르는 악성순환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선으로 악을 대하면 그것은 어쩌면 철저한 감화 속에 악이 선으로 바뀔 수 있다. "비참한 세계"의 장바르쟝이나 "부활"의 네흐류도부처럼 말이다. 소설 마지막에 휠체어에 앉은 현용군이 '잘 가, 나 평생 너한테 미안한 마음으로 살게......'하며 김호남에게 그토록 고마워하며 갈라지기 아쉬워하는 것은 그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有智有勇, 有情有義, 지용이 겸비하고 다정다감한 의리의 사나이대장부-김호남, 그 이름이 호쾌한 남아가 아니더냐. 이런 사나이대장부를 어느 여인인들 사랑하지 않으랴! 미인이 따르기 마련! 이 소설에서 '미끈한 몸매에 하얀 피부, 단아한 단발머리, 유명화백이 조각해낸듯 정교하면서도 수려한 이목구비가 어느 면으로 보나 동방미인 그 자체이고 대표작이'고 '음악예술 그 자체'인 심영자가 김호남을 사랑하지 않던가. 영웅+미인이라 해도 대과는 없겠다. 김호남의 사나이대장부 스타일에는 그의 적수도 감복한다.

김호남은 분명 사나이대장부다. 그런데 사나이대장부라 하여 그 무슨 슈퍼맨-초인은 아니다. 미국의 개인영웅주의를 고취한 질 줄 모르는 저 하늘의 뜬 구름과 같이 신비롭기만 한 슈퍼맨이 아니다. 그는 우리와 너무 가까운, 아니 우리 같은 범부에 다름 아니다. 그도 돈을 벌어야 하고 자식 공부도 시켜야 하고 섹스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없는 친절감을 느낀다. 따라서 그의 사나이대장부 같은 모습은 우리를 머리 들게 한다. 고개 숙이고 살았던 사나이대장부 존엄에 눈 뜨게 한다. 그래 우리는 아무리 '협박과 꼬임에 빠지'고 '무시당'하고 '짓뭉개'임을 당해도 한마디 소리도 못 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으며 지내오지 않았던가. 한족말로 '王八'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한마디로 이 소설은 우리에게, 특히 남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 한 모델을 내세워주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멋진 사나이대장부로 사는 것이다. 가진 거는 없어도 사나이대장부의 존엄으로 사는 삶을 말이다. 

  강호원선생, 우리 문단에 보기 드문 장편을 선사하여 고맙습니다.
 강호원-김호남 소설에서 김호남은 서사학에서 말하는 내포작가 색채가 진하다. 바꾸어 말하면 강호원의 그림자가 짙다.

 같이 호쾌한 남자, 사나이대장부여라. 그가 평시에 나한테 준 인상이다. 사나이 같게 불그스레한 얼굴, 딱 바라진 어깨에 체대가 큰 커쿨진 모습. 요새 젊은이들 말로 그는 쿨∽하다. 그러나 그는 사람 좋게 말수는 적어도 얼굴에 항상 인간적인 웃음기를 띠고 있다. 여기에 문학재간둥이라 도문시작가협회 주석에 소설도 척척 써내라. 그는 현재도 한국의 노동현장에서 딩군다. 그러면서 그는 사색한다. 또 어떤 소설을 쓰지? 고로 강호원은 존재한다.

[끝]
20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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