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을 하늘나라에 보내면서

▲ CK여성위원회 박옥선 전회장(현명예회장), 20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31번, 제19대 대선 더불어민주당 귀한동포권익증진위원회 위원장
[서울=동북아신문]어머니는 위대하다.
어머니가 위대한 것은 가슴이 바다처럼 넓고 강인하면서도 지혜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대지에 비하고 바다에 비한다. 아~ 대지여, 어머니여! 라는 말은 있어도 아~ 대지여, 아버지여! 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아~ 조국이여, 어머니여! 라고 말하지 아~ 조국이여, 아버지여! 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여러모로 우리 삶속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무겁다.

과거 어머니들은 학교 문턱에 발을 들여놓은 적 없거나 겨우 소학 몇 년간 다닌 경력뿐이어서 별로 배우지 못했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지혜가 많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자랑스런 존재이다.
여느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나의 삶에 끼친 영향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컸고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고 나서 어머니가 더 나의 삶의 일부분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컸다. 어머니의 말년은 어쩌면 나의 어머니, 나의 자매, 나의 친구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지내왔는데 세월을 비켜가지 못해 저 하늘나라로 갔으니 나의 심정은 분신을 잃은 것처럼 괴롭고 고통스럽다.

이젠 내가 어머니에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추억을 담은 글을 세상에 남기는 것뿐이다.
나의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 때 초등학교 3학년을 다니던 천진난만한 소녀로서 양부모님을 강원도 양구에서 잃게 되었다. 한창 응석을 부릴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부모를 잃었다. 부모가 없으면 오빠들이 부모역할을 떠맡게 된다. 당시 부모 잃은 소녀는 믿을 건 오빠들이었고 둘째오빠 따라 만주로 가게 되었다.
만주에서 이주민인 조선인으로 살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으나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흑룡강성에 남게 되었던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따라서 조선족신분으로 중국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박씨 가문에 시집와서 조선족이 꽤 많이 거주하고 있는 탕원현에서 살아왔다. 배운 것도 없고 가문도 시원치 않아 시골에서 농민으로 한평생을 지내왔다.
소학교 3년 중퇴 신분인 어머니지만 농촌에서 부녀주임의 역할을 하고 늘 강하고 지혜가 많은 어머니로 살아오셨던 같다.

나는 위에 오빠 하나 아래로 남동생 하나, 이렇게 2남1녀 3남매에서 가운데 자식이었다. 어머니는 늘 자신이 배우지 못한 한을 자녀에게 기탁하여 풀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이와 같은 생각과 행위는 조선족사회 부모들의 보편적으로 있었던 일이지만 나의 어머니는 여느 부모들에 비해 조금 특이했던 것 같다.
내가 11살 되던 여름 어느 하루, 어머니는 나를 불러 놓고 정색하여 말씀한다.
“도시에 사는 큰아버지께 말씀드렸는데 너를 그 학교에 전학시키기로 했느니라.”
어머니의 홍두께 같은 말씀에 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이 모질면 11살 되는 계집애를 타지에 보낸단 말인가?
당시 어린 나이인 나의 머리엔 어머니의 말씀이 나를 집을 떠나라 뜻으로 들려 화가 나기도 했다. 물론 한창 놀음에 탐할 유년에 어머니의 깊은 뜻을 다 이해할 리가 만무했다.
나의 화난 기색을 살핀 어머니는 더 아무 말씀 없었다.
이튿날 어머니는 재차 나를 불러놓고 차근하게 설명해주었다.
“소를 살찌우려면 시골로 몰아들이고 사람을 출세시키려면 도시로 보내야한다.”
대충 이런 설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너무 어린 나이에 도시에 가서 생활한다는 것이 두렵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도시에 대한 동경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도전이라 할까 아무튼 나는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이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다수는 나의 어머니가 너무 마음이 독하다는 평판이었고 어떤 사람은 “계집애가 무슨 큰 출세한다고 저 어린 것을 집 떠나게 하느냐”고 비난했다.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나의 어머니는 아무런 설명도 해석도 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대처했다.
후에 생각해 보니 어머니가 나를 이른 나이에 도시에 보낸 것은 출세도 출세거니와 집을 떠나 강하게 키우려는 목적이 더 컸던 것 같다.
나는 이렇게 11살부터 남의 눈치 밥을 먹고 성장하게 되었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아무리 잘해주어도 필경 나의 친부모만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배가 고파 죽겠는데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다른 애들과 싸워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서러워 울고 싶을 때가 많았으나 참아야 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면 우울증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겨내는 ‘비결’을 나 나름대로 터득하고 실천했다. 그 ‘비결’이 바로 학교에서 동네에서 남자애들을 포함한 애들 세상에서 대장 노릇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의 별명이 ‘남자번지개’였다.

이렇게 강하게 살지 않으면 도무지 견뎌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당시 나는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누가 괴롭힘을 당하면 그의 편에 서서 싸웠다. 때로는 남자아이들과 주먹다짐도 많이 했다. 이런 생활이 길어지면서 저도 모르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습관이 나의 몸에 배이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강하게 ‘남자번지개’로 살아도 생리상 여자는 여자였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어머니가 곁에 없이 초경을 겪었던 사실이다. 이 사건은 여자로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크게 출세는 하지 못하고 고향 탕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냥 선생 노릇이나 착실하게 할 것이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병’이 도져 괜히 동네 남의 일에 끼어들어 풍지풍파를 맞게 되었고 집이 폭격 맞은 것처럼 풍비박산 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평온하던 마을에 아이 셋(4살, 6살, 8살)이나 딸린 막가파 과부가 우리 마을 노총각한테 재가로 오게 되었다. 시어머니인 노모는 예의범절이 무엇인지 모르는 막무가내 며느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못마땅해 잔소리가 잦았다. 이에 위아래가 없는 철부지 막가파 며느리는 앙심을 품고 보복하기 시작하였다. 시어머니가 80세를 훌쩍 넘기자 거동이 불편해 자립이 곤란해졌다. 며느리는 시어머님을 돌보지 않고 방치하던 데로부터 손찌검을 자주 했다. 점점 폭력이 심해지더니 급기야 어느 하루 며느리가 손가락으로 시어머니의 입을 짜개놓았다.

나는 너무 분개하여 <그녀의 앙갚음>이란 제목으로 흑룡강신문에 시리즈로 막가파며느리 행위를 지탄하는 내용의 글을 연재하게 되었다.
신문 글이 나가자 나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런데 그 스타는 오래가지 못하는 반짝 스타였고 금세 지옥에 떨어지는 더러운 ‘스타’로 전락하고 말았다. ‘동네 망신’을 천하에 폭로한 ‘나쁜 년’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옳은 일을 하고도 나쁜 사람으로 몰려 결국 마을 떠나야 했다.
나는 이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어머니도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만약 어머니의 응원이 없었더라면 나는 당시 견뎌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항상 힘이 되는 존재였다.

내가 한국에 온 후 어머니는 1995년경 한국에 와서 부산에서 함박식당(건설현장식당)일을 하다가 가정부로 일자리를 전화하면서 저녁에는 성경공부를 학원에서 시작하여 신학대학까지 나오고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신 장한 어머니다.
어머니는 4년 전 간암초기선고를 받게 되고 작년에는 간암말기 선고 받게 된다.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며칠을 밤잠을 못 이루고 속상해서 눈물로 보내게 되었다. 그 후 새로 개발된 항암약(넥사바)으로 치료를 시도하게 되면서 어머니는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때부터 나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어머니를 돌보면서 치료하고 좋다는 식품이며 약들을 찾아다니고 병원도 분당 차병원, 강남성심병원 서울대병원 다 진료예약을 해놓고 교수님들의 진료를 다 받아보았다. 그러나 모두 똑 같은 답이었다.

암이란 1차 치료 관상동맥 혈전시술(3년간 했음) 2차 치료 수술, 3차는 항암제복용, 4차 방사능치료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3개월을 치료하고 암을 잡지 못하고 방사능치료를 하게 되면서 어머님께서는 많이 힘들어 하였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병원신세로 지내시다가 결국 2017년 2월2일에 저희들을 떠나 하늘나라 천국으로 가셨다.
어머님배속에서 10개월 동안 꿈틀거리면서 성장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 걸음마를 타고 말을 배우게 되고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살아왔던 것이 얼마 안 지난 것 같은데 나는 50대가 되고 어머니는 80세 인생을 맞이하면서 하늘로 가셨다.
우리 3남매는 어머니의 아픔을 지켜 자녀 손주들까지 함께 어머니의 손과 발을 꼭 잡고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그동안 어머니로 훌륭한 어머니 지혜로운 어머니로 살아오셔서 너무 자랑스럽고 사랑했고 앞으로 아픔이 없는 천국에 가셔야 우리들도 나중에 천국 갈 것이라고 어머니의 마음을 달래면서 임종을 지켜드렸기에 어머니께서 오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깨끗하게 예쁘게 임종을 하였음)보고 임종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되고 실상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정도로 어머니께서 많은 지혜와 깨우침의 말씀을 알려주게 된 것 같다. 하늘에서도 알았듯이 어머니 유골을 선산에 모시는 순간에 경상남도 마산의 하늘에선 무지개까지 보였던 것이었다. 이것도 하늘나라 가신 어머님의 신호였던 것 같다

나는 작년(2016년3월) 20대 총선 때 비례대표로 공천을 받고 어머니께 말씀 드렸다. 그러나 기뻐할 줄 알았던 어머니께서 하는 말씀이 다음과 같았다.
“니가 지금 정치인이 될 준비가 되어있나? 정치인의 준비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정치인은 헐뜯기도 밟히고 또한 당선 못되면 일상생활에 돌아와서 정상적으로 일상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자신감과 뻔뻔함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느니라. 마음이 여린 니가 그게 된다면 주류사회진출에 문제없을 것인데 해답은 혼자서 찾아야 한다.”
이용택의 <고정에서 발견한 삶의 지혜>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른다.
아휴인시화 인휴아시복(我虧人是禍 人虧我是福).『명심보감明心寶鑑』(성심, 省心〉의 한 구절이다.
내가 남을 헐뜯는 것은 재앙이고, 남이 나를 헐뜯는 것은 복이다.
내가 남을 헐뜯는데, 그 내용이 그르다면 나는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되고 그것이 옳다면 나는 그의 약점(단점)을 폭로하는 셈이 된다.
결국 그 내용의 진위에 관계없이 상대는 원한을 품게 되고 원한은 보복을 초래한다.
내가 남을 헐뜯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남의 원수로 만드는 것이니 어찌 재앙이 아닌가?
반면 남이 나를 헐뜯는 것은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그 내용이 옳으면 행실을 고치는 계기가 되고, 내용이 그르면 행실을 단속하는 계기가 된다.
나를 헐뜯는 자는 나의 스승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승을 얻었으니 어찌 복이 아닌가?
나는 하룻밤을 자지 않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어머니 말씀을 가슴에 두고 현장에 달려보았던 기억이 있다.

선거 유세현장을 경험하면서 어머니 말씀이 진리가 있고 현실에 맞는 말씀이라고 늘 생각했었다.
어머니는 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머니의 조언과 지혜를 받아 이젠 재한동포, 다문화 사회에 조금이 나마 힘이 되는 역할을 해야 될 것 같다.
한중수교 25주년, 올해는 대 변화가 올 것 같은 정유년이다. 새로운 정부의 출범이 주목되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 권리를 찾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정치활동에 나서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우선 국민의 의무인 ‘투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희생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봉사활동으로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우리 모두 어머님들의 지혜와 아버지의 큰 뜻으로 이 사회의 주인공처럼 살아보자.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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