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 소설가

2006 경향신문 신춘 문예 단편소설 | 소설, 수필 2006.01.02
http://blog.daum.net/johta0625/6005326

 



탈의실에서 나온 여성 고객은 알몸이다 . 군살 하나 없는 각선미가 할로겐 등불에 매끈하게 빛난다. 동유는 순간 아차, 했다. 어제 세탁한 타월을 탈의실에 비치하는 걸 깜박했다. 개어놓고 보관함에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도면대로 제작이 안 된 열선베드를 반품시키려고 아침부터 전화를 붙잡고 있었던 게 화근이다. 어쩌면 아내가 다시 수술을 받아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프로페셔널 트레이너의 자존심. 모든 게 완벽해야 한다는 좌우명에 금이 쩍 가는 순간이다. 동유는 급히 스포츠 롱타월을 꺼내 여자에게 건넨다. 여자가 살짝 웃더니 타월을 알몸에 감았다.

사실 이곳 마사지 숍에 오는 여성 고객들은 동유 앞에서 거리낌 없이 옷을 벗는다. 십오 평 남짓한 미니숍 운영자가 동유 혼자여서 부담 없고 편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동유는 그때마다 롱타월로 몸을 감싸줄 것을 요구한다.

동유는 베드 위에 롱타월을 깔고 앞면 베개를 꺼내 커버를 씌운다. 한동안 아내가 사용했던 베드다. 족욕기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41℃. 여자가 원하는 물의 온도다. 주니퍼와 페퍼민트 에센셜 오일을 각각 다섯 방울씩 떨어뜨린다. 살균작용이 강한 오일이다. 실내가 금세 아로마향으로 가득 찬다. 여자는 베드에 앉아 족욕기에 발을 담근다. 동유는 버튼을 눌러 15분 타임으로 맞춘다. 여자는 기포가 형성되며 발 위로 올라오는 수증기를 바라본다. 동유가 재스민 차 한 잔을 따라준다. 그녀가 좋아하는 차다. 전날 밤 스크랩해둔 다섯 장의 건강 자료 파일을 베드 옆에 둔다. 여자는 차를 마시며 화스너 파일을 펼친다.

동유가 스위치를 돌리자 족욕기는 진동모드로 전환한다. 10분. 동유가 아로마 진열실로 가 블랜드오일을 만들어야 하는 시간이다. 여자는 임페리얼 아로마 마사지 10회권 패키지를 이용했다. 10회권을 이용하면 1회 서비스를 원칙으로 한다. 여자는 오늘 그 서비스를 받는 날이다. 임페리얼 아로마 마사지는 동유가 특별히 개발한 패키지다. 2시간3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마사지를 해야 한다.

비커 두 개를 꺼내 헤이즐넛 캐리어오일 50를 붓는다. 헤이즐넛은 피부 보습과 영양보충 효과가 탁월하다. 또한 수렴작용을 해 넓어진 모공을 수축시키는 데 아주 좋은 오일이다. 여자가 10회권을 이용하는 동안 그레이프시드 캐리어오일을 블랜딩해서 사용했다. 콜레스테롤 성분이 없고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그레이프시드는 유분(溜分)이 없어 가볍고 피부에 쉽게 스며든다. 여자의 지성피부에 가장 잘 맞는 오일이다.

어머, 상당히 젊으시네요. 두 달 전 숍을 찾았을 때 여자는 조금 놀란 듯 말했다. 제가 지성피부거든요. 피부 관리실과 마사지 숍을 많이 다녔는데 좋아지질 않아요. 가을이었고 아직 여름의 더위가 남아 있던 화요일 오후였다. 여자는 마사지복으로 갈아입기도 전에 피트니스 하의를 내렸다. 허벅지의 피부는 건강했고 번들거렸다. 그러나 고휘도 LED 9구 랜턴을 꺼내 자세히 보니 거칠고 잔주름이 많았다. 그렇군요. 동유는 짧게 대답했다. 친구가 원장님이 마사지를 잘 하신다고 권해서요. 동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임페리얼 아로마 마사지로 10회권을 이용한다면 반드시 효과를 볼 수 있을 거 같군요. 동유는 자신있게 말했다. 반드시 효과를 볼 수 있을 거 같군요. 이보다 더 명백한 말은 없다. 효과가 확실합니다, 가 아닌 볼 수 있을 거 같군요? 10%로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건지, 100%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건지 불투명하다. 동유는 순간 자신도 여느 마사지 숍과 마찬가지로 고객 확보를 위해 분란이 일어날 소지가 있는 문제를 교묘한 발언으로 피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자신감 뒤에 감추어진 불안감, 방어의 본능, 프로페셔널 트레이너라는 자존심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유는 아주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안마협회에서 스포츠 마사지는 불법임을 대대적으로 선포하고 맹포격을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길은 묘연하기만 하다. 이런 혼란을 빌미로 환불을 요구하거나 몸 상태가 더 나빠졌다거나 하면서 협박성 금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동유도 몇 번을 당해 그동안 저축해둔 돈을 모조리 털리고 말았다. 마사지를 받고 기분 좋게 팁까지 주고 간 고객이 다음날 근육이 파열됐다며 고소를 하는가 하면, 허리디스크를 숨긴 고객이 다음날 허리가 병신 됐다며 책임을 전가하는데 미칠 노릇이었다. 의료법 위반과 상해라는, 범법자에게나 쓰여야 될 용어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에게 동유는 그저 한숨만 쉴 뿐 뾰족한 대책은 없었다. 카르테(Karte)를 만들고 집중분석해서 고객을 걸러 받는 방법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그만큼 상담시간이 길어졌고, 고객이 줄어 숍 운영에 많은 타격을 보고 있었다. 방어만이 살길인 것이다.

여자는 패키지를 오래도록 들여다보더니 동유가 권하는 대로 10회 이용권을 계약했다.

여자의 피부는 수분부족 지성이다. 보습 기능이 약화되어 있고 피부의 투명감이 없다는 것이다. 건강한 피부는 보드랍고 보습성이 강하며 피지를 잘 분해한다. 그러나 지성피부는 피지선기능 활성화로 정상보다 피지가 많이 분비되어 모공이 커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공 축소 마사지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스트레스 해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피부는 겉으로 노출되어 있지만 심부에 자리 잡은 근육, 골격을 비롯한 장기능 트러블이 피부의 건강과 탄력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갑상선이나 간, 신장 질환 또는 변비나 소화불량으로 오는 피부 트러블. 그러나 사람들은 내적 치료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피부만 관리한다. 평생 관리해 봐야 효과를 볼 수 없다. 그것은 숨은그림 찾기와 같은 것이다.

동유는 프로그램을 출력해서 여자에게 주었다. 모과나 딸기, 또는 양배추, 오이 등으로 관리를 하기도 하지만 신선한 과일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숙지시키며, 그러나 가급적 집에서 위의 과일, 야채에다 녹말이나 밀가루를 이용해 팩을 할 것을 권한다. 사실 마사지 트레이너가 피부관리 전문성까지 알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동유는 임페리얼 아로마 마사지를 개발하면서 피부관리 공부를 했다.

동유는 비커에 라벤더를 비롯한 레몬, 베르가못, 로즈메리, 바질, 사이프러스를, 또다른 비커에 유칼립투스, 페퍼민트, 에틀라스시더, 주니퍼, 클라리세이지, 사이프레스 에센셜 오일을 차례로 블랜딩한다. 지성피부를 해소하고 강력한 수렴효과와 함께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오일이다. 또한 근육 트러블을 해소하고 소화, 호흡, 순환계 기능을 활성화한다. 여성들의 부인과 질환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 유리막대로 완전 희석될 때까지 오일을 저어 넓은 차광용기에 담는다.

동유는 무릎을 꿇고 여자의 두 발을 들어올려 타월로 물기를 닦는다. 여자가 파라핀 욕조기에 발을 세 번 담갔다가 뺀다. 동유는 파라핀 용액이 굳어지자 바로 발장갑을 씌워 온도를 보호한다. 오디오 전원을 켜고 셀린디옹의 마이 하트 윌 고 온(My heart will go on) CD 재생버튼을 누른다. 경음악과 함께 원곡이 리플레이된다. 5분 후, 동유는 파라핀용액을 벗겨내고 수건으로 발의 물기를 닦는다. 여자가 몸에 걸치고 있던 타월을 벗고 베드에 엎드렸다. 동유는 타월로 여자의 등을 덮는다. 아로마 테라피 램프에 불을 붙인다. 스위트 오렌지, 라벤더 에센셜 오일 두 방울씩을 떨어뜨린다. 심신 안정과 피로회복의 기초를 제공하는 아로마다.

동유는 자신의 손바닥과 손등, 손톱 주변을 허벅지에 대고 살짝 문질러본다. 손 전체에 미세한 각질이나 굳은살도 있어선 안 된다. 거스러미들은 날카로운 가시가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램프 위에 올려 손의 온기를 높이는 일도 중요하다. 신체에 닿는 순간 따뜻하고 찰진 느낌이어야만 한다.

동유는 두 손을 비비고 꺾으며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다. 목을 좌우로 두 번 돌리고 나서 눈을 감고 긴 호흡을 한번 한다. 타월 하나를 꺼내 여자의 상체를 덮는다.

오늘 특별히 집중적으로 받고 싶은 부위가 있습니까? 동유는 여자에게 묻는다. 어제 산행을 했는데 허벅지가 많이 당겨요. 여자는 잠시 고개를 들어 동유를 쳐다본다. 검은 눈동자가 기대와 설렘으로 반짝이고 있다. 동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하체를 집중하여 해드리겠습니다.

동유는 여자 어깨에서 흘러내린 타월을 덮는다. 여자의 자세를 바로 하고 두 발목을 잡고 흔든다. 엉덩이의 흔들림이 경쾌해야 하고 어깨까지 부드러운 떨림이 스며들도록 천천히 릴렉스한다. 수영하기 전 천천히 발부터 물을 적셔 심장의 부담을 덜어주듯 마사지에서도 심장에서 먼 곳부터 시작하는 건 기본상식이다. 성급하게 머리부터, 또는 어깨부위부터 시작하는 트레이너들이 있는데 무식의 소치다. 동유는 상체의 타월을 허벅지 아래로 덮고 허리부위부터 어깨까지 가볍게 롤링한다. 어깨에서부터 엉덩이까지 무겁게 롤링하고 나서 꼬리뼈에 두 손을 모아 가벼운 진동으로 롤링을 멈춘다. 동유는 타월을 여자 발에서부터 둔부까지 덮는다. 여자 머리 방향으로 선다. 블랜드오일을 손에 묻혀 열이 나도록 비빈다. 독맥(督脈)을 중심으로 12번 흉추에서부터 원을 그리며 어깨까지 올라왔다가 팔을 쓰다듬는다. 다시 어깨에서 허리까지 쓰다듬는다. 피부와 골격근이 긴장감을 풀고 마사지를 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오일이 충분히 스며들도록 반복한다. 흉추 12번을 기준으로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듯 밀며 7번 경추에서 견정혈(肩井穴)까지 내려온다. 여자는 작게 코를 골기 시작한다. 5분. 동유에게 마사지를 받는 모든 고객은 여기까지 진행되면 천천히 수면을 취하게 된다. 스포츠 마사지 또한 마찬가지다. 5분에서 15분 사이에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프로페셔널 마사지 트레이너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을 동유는 마사지를 배우러 오는 제자들에게 분명한 어조로 강조한다.

동유는 지금까지 신원이 확실하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한 이들을 선별해 여섯 명의 제자를 두었다. 재작년부터 1년 집중코스로 스포츠, 발, 경락아로마, 스포츠테이핑, 체형관리를 종합해서 실전에 배치할 수 있도록 강도 높게 교육했다. 눈을 감고 경혈(經穴) 깊숙이 엄지를 눌러 경맥(經脈)의 흐름을 감지해야 한다던 맹인 스승을 떠올리며, 중요한 것은 맹인들처럼 치료를 목적으로 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한다. 동유는 제자들에게 신체의 모든 기관을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근육과 골격은 물론 관절, 피부, 신경, 순환계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12경맥(十二經脈)과 기경팔맥(奇經八脈), 200여개의 중요 경혈(經穴)까지, 그리고 인체에 나타나는 증상(症狀)의 유형까지. 이렇게 집중 공부하다 보면 자신이 신적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계룡산에 올라 도를 닦는다고 날뛰다가 잡신이 들려 무당이 되거나 정신병자가 되기도 한다.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 마사지를 치료 목적으로 공부하기 때문인 것이다. 프로페셔널 트레이너의 자부심과 직업정신이 없는 놈들이다. 동유는 그런 놈들을 혐오한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건강관리 트레이너임을 분명히 경고하는 것이다. 어쨌든 제자들은 프로페셔널 마사지 트레이너의 강한 자부심으로 고객들의 건강을 관리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 두 명의 여제자와 한 명의 남제자는 엉뚱한 곳으로 빠져버렸다.

동유는 블랜드오일을 다시 손에 묻혀 양경(陽經)의 흐름을 따라 경추 7번부터 요추까지 천천히 압박을 가해 미끄러지듯 내려갔다가 올라온다. 마사지를 하는 동안 고객의 몸에서 두 손 중 어느 한 손이라도 벗어나면 안 된다. 두 손은 항상 몸에 밀착시켜 고객이 친밀감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마사지 효과가 높다. 동유가 가장 강조하는 기초 마사지법이다.

팔뚝과 팔꿈치를 이용해 근육을 풀기 시작한다. 5초에서 7초 동안 천천히 근육 결을 따라 가볍게, 때론 근육 깊숙이 무겁게 폐와 심장과 몸속의 모든 장기들을 향해 자신의 기를 불어넣는다. 여자는 가끔씩 짧은 신음소리를 낸다. 살짝 아픈 듯이, 그러나 압박으로 오는 만족감, 인체의 모든 근육과 골격과 피부가 새롭게 재생되는 느낌을 꿈속에서 여자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동유의 임페리얼 아로마 마사지는 중독성이 심하다. 두 번에서 세 번 정도 마사지를 받고 나면 다른 마사지는 우습게 여겨진다. 마사지를 받고 3일에서 5일이 지나면 대소능형근, 극하근 등 어깨 깊숙이 자리한 근육들이 일제히 헐떡이며 마사지를 원한다. 척추기립근을 따라 결림 현상이 온다. 마사지를 받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은 중독성. 동유가 상품으로 개발한 의도는 여기에 있었고 성공했다.

동유는 근육 결을 따라 상지(上肢)로 이동하여 세밀하게 마사지하고 나서 하체를 덮고 있던 타월을 상체에 덮는다. 허리부위를 지나 엉덩이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이때부터 동유는 상당히 긴장하게 된다. 이 여자고객은 둔부와 대퇴부가 흥분점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마사지하면 여자는 잠에서 깨었다가 발 마사지로 이동할 때 다시 잠든다. 여자는 엉덩이에 동유의 뜨거운 손이 닿자마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신음소리를 낸다. 색정의 소리, 오래도록 참았던 갈망의 신음소리란 것을 동유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여자는 아주 오래도록 섹스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마사지를 받으면서부터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면에서 욕구가 점화되고 있음을 말이다.

여자는 10회권을 이용하는 동안 늘 그렇게 신음소리를 냈다. 동유는 그때마다 분산되는 정신을 집중하느라 허덕였다. 그 허덕임은 내면 깊이 감추어 둔 욕망의 발로임을 동유는 알고 있다. 사실 수백 명의 여성고객을 상대로 아로마 마사지를 해왔지만 동유는 흔들린 적이 없었다. 베드에 누워 있는 곡선이 뚜렷한 나신을 보면 남자의 상징인 그것이 일어설 만한데도 불구하고 동유는 무심했다. 고객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초발심의 자세가 프로페셔널의 자존심을 지켜준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동유는 너무 오래도록 관계를 하지 않았다. 아내가 아프기 때문에 해소할 곳이 없어 그냥 무심해졌다. 그래서 감정이 살아 오르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여자고객은 달랐다. 동유에게 어떤 미묘한 감정을 남겼다. 그동안 잊고 무심해졌던 세포들이 펄떡펄떡 살아 뛰는 듯한 야릇한 감정에 휩싸이게 만든 것이다. 한껏 기분이 고조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흔들리면 안 돼. 동유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감정에 빗장을 걸고 10회의 마사지를 해왔다.

그러나 오늘 따라 동유는 많이 흔들리고 있다. 여자가 괄약근을 꽉 조이면 장골의 대둔근과 소둔근이 긴장을 한다. 더불어 길항근(拮抗筋)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늘어나고 있음을 손으로 감지한다. 동유는 길게 호흡을 가다듬고 좌골신경을 기점으로 마사지를 시작한다. 여자가 몸을 뒤틀기도 하고 허벅지를 꽉 조이기도 한다. 마사지를 하는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여자는 하지(下肢)를 끝내는 내내 가늘고도 깊은 신음을 내다가 발 마사지 중간에 들어서야 잠이 들었다.

동유는 1시간20분의 복와위(腹臥位) 마사지를 끝내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는다. 잠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오늘 따라 기운이 많이 빠짐을 느낀다. 마사지는 많은 기(氣)를 소모하는 일이다. 평상시 단전호흡과 운동으로 꾸준히 건강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자를 잠시 바라본다. 편안히 잠들어 있다. 동유는 담배를 꺼내 옥상으로 올라간다. 자리 이탈은 기본상식에 어긋나지만 오늘만은 조금 긴 휴식을 취하기로 한다.

동유는 거리를 내다본다. 은행잎들이 떨어져 내린 거리에 방금 소나기가 지나간 듯 물빛이 반짝거린다. 스산한 바람에 물기가 스며 있다.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깊게 마신다. 트레이너를 하면서 담배를 끊었는데 그제부터 서너 개비씩 피우고 있다.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된 이유는 아내가 또다시 수술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수술비용도 만만찮다는 현실이 불안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아내는 근래 들어 손에 힘이 빠진다고 하소연했다.

아내는 척수공동증이라는 병명을 갖고 있다. 흔치 않은 병이다. 우측측만으로 신경을 눌러버리는 바람에 신경 속에 종양이 생긴 것이다. 6년 전, 팔다리에 힘이 없어진다며 울상이던 아내는 결국 마비증상으로 쓰러졌고 대수술을 받았다. 3개월의 긴 병상을 끝내고 퇴원수속을 밟는데 다시 재발할 수 있다고 신경전문의가 진단했었다. 그때부터 동유는 마사지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내를 회복시키는 방법을 찾아 민간요법, 침술 등 많은 노력을 했지만 허사였다. 민간요법을 파고들수록 마사지가 체형관리에 가장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두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입에 풀칠하기가 막막한 이유도 마사지를 배워야 한다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마사지를 배우면 돈을 많이 번다는 스포츠 마사지 학원 상담원의 유혹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했다.

동유는 학원에서 마사지 자격을 취득했지만 숍에 취직할 수가 없었다. 테크닉은 형편없었고 모든 마사지 숍은 여성 트레이너 비율이 99%였다. 숍을 차리는 길만이 살길이었다. 숍 원장과 트레이너는 50대 50으로 분배한다. 마사지 숍 운영방법이었다. 베드를 많이 갖출수록, 트레이너를 많이 확보할수록 숍 원장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었다. 동유는 아내와 상의 끝에 장모님을 집에 모셨다. 1년 넘게 전국을 다니며 마사지에 필요한 테크닉을 배우던 중 지압과 침술로 유명한 맹인을 만났다. 그에게서 결정적인 테크닉을 전수받았고 임페리얼 아로마 마사지를 개발한 것이다. 그리고 조금의 빚을 얻어 60여 평의 숍을 개업했는데 임페리얼 마사지가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관리소홀로 트레이너와 고객들과의 추문이 잇따르고 의료법으로 고소고발이 이어지면서 숍은 헐값에 넘어갔다.

동유는 아내가 종양수술과 동시에 척추를 바로세우는 정형수술까지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요즘 들어서 대학병원의 신경전문의가 못내 원망스럽기만 했다. 척추의 측만은 신경을 계속 누를 것이다. 그젯밤 늦게 아내는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검사결과는 오늘 오후 늦게 나온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 운영하는 숍을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동유는 답답한 마음에 다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인다.

동유는 양치질을 하고 라벤더 에센셜 오일로 입안을 헹구고 손을 깨끗이 닦는다. 아로마 램프에 손을 쬐며 두 손을 비빈다. 깊이 잠들어 있는 여자를 깨운다. 앙와위(仰臥位) 자세로 여자가 돌아눕자 동유는 하체를 타월로 덮는다. 여자의 가슴이 풍만하고 놀랍도록 아름답다. 수면안대하시겠습니까? 동유가 묻는다. 많이 잤는걸요. 여자는 말하며 고개를 젓는다. 동유는 임맥(任脈)을 중심으로 명치로부터 상완골두까지 천천히 쓰다듬고는 원을 그리며 압박한다. 유방을 가운데로 모아 세우며 음맥(陰脈)을 따라 심부조직까지 아로마를 침투시킨다.

오늘 마사지는 조금 불안하게 느껴지네요. 여자가 동유를 쳐다보며 살짝 웃는다. 동유는 순간 손놀림을 멈췄다가 천천히 미끄러지듯 압박을 가해 내려갔다. 앙와위 자세로 마사지를 할 때 고객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 있게 마련이다. 피곤하면 더 잘 수도 있을 텐데, 마사지를 받는 고객들은 말똥말똥 쳐다보며 말을 걸고 싶어 한다. 트레이너는 고객이 묻는 말에 겸손하고 성실하게, 그러나 확신에 찬 답변을 해주어야 한다. 트레이너의 기본원칙이다. 여자는 10회권을 이용하는 동안 말이 없다가 오늘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건넸다. 동유는 여자가 마사지 효과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네에, 집안에 병자가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죄송합니다. 동유는 명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왼쪽 유방이 하늘 위로 봉긋 솟아올랐다. 동유는 오른쪽 유방을 부드럽게 감싸며 올려 세우기 시작한다. 어머, 미안해요. 여자가 가슴을 조금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아닙니다. 오늘 블랜드 오일은 헤이즐넛에 조금 강한 원액을 사용했습니다. 생리가 다음 주부터니까 영향은 없을 테고요. 마사지가 끝나면 4시간 이후까지 가급적 햇볕을 피하셔야 합니다. 기미나 주름이 생길 우려가 있습니다. 동유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 주의사항을 말한다. 레몬이나 베르가못처럼 직사광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오일은 블랜딩을 하더라도 피부에 감광(感光)의 영향을 받는다. 무조건 햇볕을 쬐지 않는 게 상책이다.

오른쪽 유방 마사지를 끝내고 타월로 덮은 후 복부로 이동한다. 여자는 아이를 낳은 적이 없는 몸매다. 여자의 가슴이나 복부를 볼 때마다 동유는 아이를 낳은 여자와 낳지 않은 여자의 체형을 분석해본다. 이백여 개의 골격들이, 육백 오십여 개의 근육들이, 육십 조나 되는 세포들이 하나같이 들고 일어섰다가 제자리를 찾은 몸뚱이는 아무리 관리를 잘한다 하더라도 만져만 보면 느낌으로 알 수가 있다. 어느 지세간(知世間)이 그런 말을 했다. 아이를 낳을 때 서 말 넉 되의 엉긴 피를 흘리고 아이를 기를 때 여덟 섬 네 말의 우유를 짜 먹임으로 여자의 뼈는 검고 가볍다고 말이다. 실제로 아이를 낳은 여자의 뼈는 처자들에 비해 가벼운 게 사실이다. 골격과 근육들이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추고 퇴화하는 느낌을 받는다. 오직 성장하는 것은 비곗덩어리뿐이다.

복부를 지그시 눌러 트러블이 없는가를 확인한다. 여자는 변비증상이 아직 남아있다. 일곱 번째의 마사지를 받을 때 변비가 상당부분 해소되었다고 여자는 기뻐했다. 대장부위에 숙변이 많이 남아 있음을 동유는 느낀다. 조금 딱딱하면서도 돌출된 덩어리들. 동유는 복직횡근을 뚫고 대장 깊숙이 들어가 장을 청소하듯 트러블이 있는 곳을 집중 마사지 한다. 손님은 많이 오나요? 여자가 조금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리며 묻는다. 조금만 참으세요. 이곳의 문제점을 해소하면 이제 변비는 거의 사라질 겁니다. 동유는 강한 압박으로 그러나 충격이 주는 부작용을 의식하며 중완(中脘), 천추(天樞) 그리고 대거(大巨)의 위경유주혈(胃經流注穴)을 부분적으로 눌러준다. 여자가 복부에 힘을 준다. 아프다는 표시이다. 요즘 경제가 어렵잖습니까. 그나마 고정고객님들께서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겨우 현상유지는 하고 있답니다. 선생님께서 소개를 많이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유는 여자의 눈을 잠깐 바라보며 웃는다. 고객은 절반으로 줄었다. 아이엠에프 때보다 더 힘들어졌다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말한다. 동유는 가볍게 복부를 쓰다듬고 손바닥을 오므려 고타법으로 통통 소리가 나도록 두들기고 나서 복부를 타월로 덮는다. 그럴게요. 변비증상이 많이 좋아졌어요. 피곤함도 사라지고요. 여자는 기분이 상쾌한 듯 통통 튀는 목소리로 웃는다.


풍경소리가 난다. 손님이 온 모양이다. 동유는 여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커튼을 젖힌다. 건장한 남자 둘이 서 있다. 동유는 순간적으로 뭔가 찜찜한 느낌을 받는다. 그네들은 커튼 사이를 힐긋거리며 마사지 좀 받읍시다,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이거, 서비스도 되죠? 조금 뚱뚱한 남자가 새끼손가락을 펴 보인다. 동유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선 불법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아주 건전한 마사지 숍이죠. 동유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톤을 높이고 어깨를 쫙 펴며 그들을 노려본다. 에이, 다 알고 왔는데 뭘 그래요. 어깨가 결려 죽겠네, 한번 받읍시다. 그네들은 소파에 걸터앉으며 능글거리며 웃는다. 동유는 절대 안 된다며 차나 한 잔 마시고 다른 숍으로 가시라고 권한다. 동유는 자신이 하는 마사지는 도덕적 품성과 지적 수준이 높아야만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려다가 참는다. 라벤더차를 따라 찻잔을 내밀자 정말 이러기요? 협박조로 나온다. 동유는 그네들의 언동에 반응을 피하며 형사님들이십니까? 하고 강한 어조로 묻는다. 그네들이 순간 입을 다문다. 계속 이러시면 형사들이라 하더라도 112에 신고를 하겠습니다. 동유는 강하게 밀어붙이며 수화기를 든다. 쭈뼛쭈뼛하던 그네들이 무언가 알 수 없는 눈빛을 교환하더니 말없이 숍을 나간다. 동유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라벤더차를 글라스에 담아 냉수를 붓고는 단숨에 들이켠다.

요즘 들어 부쩍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금처럼 성을 사고자하는 사람들, 불법운운하며 금품을 요구하는 사람들, 손님인 척 가장하고 오는 형사들. 모두 거부하고 싶은 존재들이다. 여비만 충분하다면 외국으로 떠나고 싶다. 프로페셔널 트레이너의 자존심에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나라. 동유는 2002년 월드컵을 떠올린다. 지인의 소개로 국가대표선수들과 함께 숙소에 머물며 마사지를 해주던 때, 동유는 마사지 트레이너가 된 자신이 자랑스러웠고 행복했다. 아내가 아프지만 않았다면 지금도 그들과 함께 했을 것이다.

동유는 커튼을 닫고 블랜드 오일을 손바닥에 비빈다. 타월을 걷고 하체마사지를 시작한다. 여자의 검은 치모가 눈부시다. 동유는 고인 침을 꿀꺽 삼킨다. 팬티를 입으면 좋겠는데 여자는 한사코 거부한다. 숍에는 일회용 팬티가 비치되어 있다. 두 번째 마사지를 받고부터 여자는 일회용에 기시감을 못 느낀다며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동유는 감정이 드러나는 까닭에 조금 호흡이 거칠어진다. 다른 여성 고객들에게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이 여자에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면 깊이 숨겨둔 섹스의 열망과 혐오가 동시에 존재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드러내지 않는 자신과의 투쟁, 그 아름다움이 동유를 흔들리게 했다. 아내의 베드를 제일 먼저 사용한 여자에게서 고즈넉이 잠든 아내를 보았던 이유도 있었다. 베드에 누워 있는 여자를 본 순간 아내로 착각했으니까 말이다.

동유는 여자와 한 몸이 되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을 뿌리치며 위경과 비경으로 다시 담경과 간경으로 미끄러지듯 마사지를 시작한다. 왼쪽 다리를 벌려 구부리고 골반의 근육을 풀어가며 난원형의 섬세한 구조에 탄복한다. 직내근, 박근 등의 대퇴부 근육을 풀어나갈 때 여자는 다시 가늘고도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서혜부(鼠蹊部) 임파절로 노폐물을 방출하기 위해 치부 근처를 집중 마사지한다. 가장 힘든 부위다. 발마사지를 마치고 스트레칭으로 마사지를 마무리한다. 동유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는다. 오늘따라 정말 힘들군. 동유는 신음 비슷한 탄식을 내뱉는다. 여자가 샤워실에서 샤워하는 동안 베드를 정리하고 나서 카르테를 점검한다.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 병원에 가 있던 처제에게 연락이 왔다. 종합검진결과가 나왔는데요, 다시 수술을 해야 한대요. 처제가 울먹이며 말했다. 빨리 수술절차를 밟으라고 하네요. 동유는 한순간 땅이 푹 꺼짐을 느낀다. 저녁에 병원으로 들른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어 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베드를 제작하는 회사였다. 주소지에 도착했는데 문이 잠겨있다는 것이다. 동유는 수위실 창고 앞에 두었으니 도면 그대로 만들어 오라고 조금 언성을 높인다.

두 달 전 문 사장을 마사지하다가 베드 가운데에 금이 갔다. 거북이 등껍데기처럼 단단해진 문 사장의 승모근을 풀기 위해 등에 올라가 족(足)마사지를 했는데 백 킬로의 무게와 동유의 몸무게가 합쳐지면서 살짝 금이 가고 만 것이다. 급한 김에 아내의 베드를 숍에 갖고 오면서 더 좋은 베드를 만들어주겠노라고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베드 회사에서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이다. 동유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며 차 한 잔을 마신다.

여자가 만족의 충만감으로 달뜨게 웃으며 탈의실에서 나온다. 동유는 카르테를 볼펜 끝으로 쿡쿡 누르며 여자의 걸음 상태를 확인한다. 안정감이 있어 보이지만 감정이 들떠 있음을 느낀다. 여자가 소파에 앉자 동유는 레몬버베너 허브차를 따르고 비스킷을 꺼낸다. 참, 개운해요. 고마워요. 여자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한다. 내일 저녁 함께 할 수 있나요? 여자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동유의 눈치를 살핀다. 고객들과 밖에서 만나는 건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동유는 단호하게 말한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나?, 너무 고마워서 저녁식사 대접해드리고 싶은데요. 여자의 눈이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맹렬히 타오르고 있다. 동유는 순간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른다. 말씀만으로 대접받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동유는 카르테를 덮으며 주위를 분산시켰다. 잠깐 침묵이 흐른다. 여자가 비스킷 한 조각을 먹고 차 한 잔을 더 달라고 한다. 숍을 크게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제가 투자를 해드릴 수도 있는데.

동유는 그녀가 숍을 떠나자 카르테를 펼친다.

나이 43세 김주하.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2차 거주. 신장 167㎝. 몸무게 48㎏. 혈액형 B형. 수분부족성 피부 및 변비증상 개선.

기타란에 새로운 정보를 입력한다.

스트레스 완전 해소. 5일 후 방문. 6개월 전,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남편 사망. 현재 독신생활. 투자 가능성 有. 정신적 충격으로 간혹 어지럼증이 있음. ??.

동유는 맹인 마사지사와 사랑을 나눈다는, 백만장자의 상속녀인 어느 외국 여인을 떠올린다. 그의 손길이 없으면 하루도 잠을 잘 수 없다는 전설 같은 사랑이야기를 떠올리며 집으로 향한다. 상속녀는 맹인과 결혼하여 매일 마사지의 부드러움에 취해 한층 젊어지고 있다고?

동유는 수위실에 인사를 하며 베드를 갖고 갔는지 확인해본다. 베드는 창고 앞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누르며 베드를 짊어지고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집안은 난장판이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물을 모조리 꺼냈는지 거실 곳곳에 과일과 빵이 널려있다. 아이들은 잠들어 있다. 베드를 거실 구석에 두고 집안을 정리한다.

동유는 안방 서랍을 열어 저금통장을 확인해본다. 3일 전 카드회사 대금지급 이후 잔액은 제로다. 한숨이 나온다.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피운다. 해저물녘 도시가 스산하기만 하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어요. 냉감증(冷感症)이었거든요. 그 때문에 화가 나서 밤늦게 뛰쳐나간 남편이 만취가 되어 집으로 오다가 그만 교통사고로? 원장님께 감사드려요. 그동안 감추고 살아왔는데 이젠 자신감을 얻게 되었답니다.

동유는 명함 수첩을 뒤적여 부동산을 찾아 마사지 숍을 급매물로 내놓았다. 도와드릴 일이 생기면 꼭 말씀해 주세요. 언젠간 원장님과 저녁식사를 할 수 있길 기대할게요. 여자는 5일 후에 오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김주하.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나는 프로페셔널 트레이너다. 동유는 초발심의 선언을 떠올리며 벼룩신문에도 전화를 걸었다.

소파에 앉아 베드를 가만히 쳐다본다. 아내를 위해 특별 제작을 요구했는데?, 어차피 반품은 힘들겠구나 생각하며 그런대로 쓸 만한 베드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커피 한 잔을 끓여 다시 소파에 앉는다. 어둠이 집안으로 스민다. 슬픈 저녁이다. 아내가 베드에 누워 웃고 있다. 휘어진 척추를 바로 세우려 안간힘을 쓰는 남자를 본다. 임페리얼 아로마 마사지로 죽어가는 신경을 살리기 위해 애쓰던 남자. 베드 위에서 편안히 잠든 아내를 오래도록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남자를 본다. 이제 다시 아내를 위해 마사지를 하는 날이 언제일지 동유는 침울해진다.

아이들을 깨우고 옷을 갈아입힌다. 병원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려다 말고 동유는 잠시 뒤를 돌아본다. 어둠의 정적 속에 비닐커버에 싸인 베드의 스테인리스가 공교히 반짝이고 있다. <끝>


 

 

예년의 2배를 훌쩍 넘는 740여편의 작품 속에서 어렵게 예심을 통과해 본심으로 올라온 작품은 모두 일곱 편. ‘제 입장이 돼보세요’ ‘몸 안의 지도’ ‘베드’ ‘중독’ ‘그녀의 광장은 미끄럽다’ ‘카페 0524’ ‘양장 제본서 전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몇몇 허술한 작품을 제하고는 모두가 물을 거슬러 올라온 물고기들처럼 싱싱하고 녹록지 않게 보인다. 불면의 밤을 지새웠을 작품들 속에는 제각기 시대의 흐름과 삶의 본질을 궤뚫어보려는 작가적 노고와 열정이 녹아들어있는 듯했다. 하지만 문학은 어디까지나 엄격한 예술적인 형태의 율과 격을 요구한다. 특히 단편소설은 작가의 치열한 주제의식과 빈틈없는 구성, 개성적인 문체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살아있는 건축과도 같다. 이런 기준을 놓고 심사위원들이 오랜 시간 토론한 결과 최종적으로 ‘양장 제본서 전기’와 ‘베드’가 남았다.

‘양장 제본서 전기’는 매우 독특한 소설이다. 출생의 비밀을 찾아가는 과정에 깔려있는 기억들의 도착이 복잡한 형태로 얽혀있다. 팬태스틱한 장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현실적인 긴장을 잃지 않고 있다. ‘베드’ 역시 작가의 오랜 절차탁마와 내공이 느껴지는 수준작이다. 꼼꼼하고 섬세한 묘사력, 격을 잃지 않는 전개와 찡한 여운을 남기


는 깔끔한 마무리. 좋다! 우리는 이 두 편을 놓고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두 편 가운데 어느 것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를 집고 하나를 버리자니 나머지 하나가 아까워서 다시 한번 들여다보곤 하였다.

최종적인 결론은, 바늘의 방향은, 보다 고전적인 품격을 가진 ‘베드’로 기울었다. 요즘처럼 실험성이 난무하고 몸의 무게가 실리지 않은 채 머리카락으로만 앓고 있는 소설적 풍토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단정한 소설 한편에 심사위원들은 기꺼이 박수를 보내었다. 더욱 정진하길 바라며, 일호(一毫)의 차이로 아깝게 탈락한 이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흐름이 꽉 막혔다. 문장들이 죽은 채 나열되고 있었다. 다시 머리를 빡빡 밀었다. 몇 줄 통통 튀던 단어들이 맥없이 주저앉았다. 수염을 깎았다. 손톱 발톱을 깎으며 모조리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폭설이 내린 밖으로 미친 듯 달려 나왔다. 순간, 팬티만 입은 아랫도리가 서늘했다. 미친놈. 어디선가 욕설이 들려왔다.

눈 내린 거리는 쓸쓸했다. 초라한 선술집에서 미니족발의 뼈까지 씹으며 막걸리사발을 게걸스럽게 비웠다. 세상 밖으로 나오며 나는 내 작품이 완연한 빛으로 발하기를, 체험을 통해 완성되기를 빌었다. 타히티, 야성, 아타, 문둥병, 죽음, 그리고 다시 타히티, 야성, 아타, 문둥병, 죽음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며, 심연 깊은 곳으로부터 폭발하는 예술적 광기, 정열, 악마적 본성과 사선을 넘어 대작으로 승화한 스트릭랜드를 떠올렸다. 한번쯤 내 생에 삶 또한 강렬하면서도 광기의 폭발을 보고야 말겠다. 오직 취함을 목적으로 화석처럼 굳어버린 몸뚱이를 맹렬히 공격하며 술을 마셨고 아스팔트를 핥으며 전봇대 속을 파고들었다. 다음 날, 냉수 한사발로 쓰린 속을 채우자 단어들이 팔딱팔딱 뛰었다. 베드는 3일 만에 완성되었고 마감시간에 쫓겨 신문사로 달려갔다. 돌아오는 길, 버스는 나를 낯선 종점에 버리고 코를 골았다.

문학의 끈을 놓지 말라던 ‘은비령’ 이순원 선생님


, 문청의 자세를 일러주시던 ‘별나라를 지나는 소 풍’ 강준용 선생님, 작품 활동 잘 하라며 어깨를 두드려주시던 ‘속눈썹 한 개 뽑고 나서’ 유금호 선생님, 그리고 ‘한민족글마당’ 편집위원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돌아보면 아픈 곳 많고 많지만 어루만져준 벗들이 있어 고마웠던 세월이다. 영원한 친구 남영구님, 시를 쓰는 미상님, 은비령 글벗들, 이유자님과 가족들, 지적인 친구 황준호님, 그리고 사랑하는 양천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당선 기쁨도 잠시 천근 추의 무게로 짓눌러오는 막막함, 절망의 벽을 정면 돌파해야겠다. 다시 신인작가상을 준비하는 설렘으로, 경향신문사에 감사를 드린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염무웅, 김영현, 박상우, 손정수, 함정임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후 좋은 작품으로 감사의 보답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