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지난 5월 26일, 우리는 연길현 10중 1967년도 졸업 5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초중졸업50주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50년이면 강산이 다섯 번 변하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20세기에서 21세기로 시대도 변하고 강산도 변하고 우리도 변하여 10대의 소년 소녀로부터 70을 바라보는 손자, 손녀를 가진 할아버지 할머니로 변하였다.

 오전 8시 우리는 동북아버스역 마당에 집합하였는데 반갑다고 서로 붙안고 인사를 나누며 떠들썩하는 가운데 이게 누구냐? 하며 낯선 인사를 하고 한참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뜯어보고야 서로 너 ㅇㅇ옳지? 하며 서로 그리운 포옹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1967년 연길현 10중을 졸업하고 10대의 소년, 소녀로 갈라진 것이 20년, 30년 지어 장장 50년만에 만난 동창생들이였으니 말이다. 
▲ 연길현10중 졸업기념
 1964년 연길현10중(지금의 룡정시덕신중학교)에서는 본교 학구에 속하는 덕신공사의 여러 소학교, 동성공사의 장남소학교와 동명소학교, 석정공사의 중성소학교에서 학생모집을 하였는데 그때에는 국가에서 꾸리는 전일제 중학교인 공판중학교(公办中学)와 농민들이 자체로 꾸리는 반농반학(半农半学)의 농업중학교가 있었다. 그때 우리 덕신공사에도 전일제 중학교인 연길현제10중학교와 반농반학의 덕신농업중학교가 있었는데 시험을 쳐 시험성적에 따라 연길현 10중에서는 1개 반을 모집하고 나머진 학생들은 모두 덕신농업중학교(3개반, 그중 한족반 한개 반)에 가게 되였다. 그리고 공판중학교 졸업생들에게는 고중입학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을 주었지만 농업중학교 졸업생들에게는 고중입학시험자격도 주지 않았다. 그러니 공판중학교에 다니여 공부만 잘하면 앞으로 고중, 더 나가서는 대학에도 갈수 있었지만 농업중학교를 다니면 아무리 공부를 잘 하여도 대학은 고사하고 고중에도 진학할 수 없었다. 다 시말하면 애어린 싹의 꼭두 순은 잘라놓은 것이었다. 하여 그때 우리는 연길현10중에 입학한 것을 아주 자랑스러운 일로 여겼다.  그리고 공판중학교에서는 전일제중학교인 것만큼 말 그대로 매일 학습만 하고 농업중학교 학생들은 반농반학인 것만큼 말 그대로 절반 농사를 하고 절반 공부를 하였는데 어떤 날에는 오전에 공부를 하고 오후에 밭일을 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연 며칠 공부를 하고 다음 연 며칠은 일을 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고생스레 일하고 공부를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동년배의 학생으로서 그들이 매우 안스러워 보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렇게 우월한 조건에서 공부를 하는데 어떻게 하나 학습을 잘하여 상급학교에 진학하여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모두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 초중졸업 50주년 경축모임 합영
 그때 우리 반에서는 원종일이와 지산이가 공부를 아주 잘 하였는데 그 둘은 다 룡암소학교에서 올라왔고 통학거리도 아주 멀었는바 10리, 15리 길을 통학하면서도 학습 성적은 늘 1,2등을 다투면서 공부를 하였다. 하여 동학들은 그들을 가리키며 앞으로 종일이는 청화대학이다, 지산이는 북경대학이다 하면서 특수하게 공부를 잘 하는 그들을 몹시 부러워 하였다. 한번은 우리 반 남학생들이 몇이서 운동장의 한 모퉁이에 서서 놀고 있는데 난데없는 수류탄이 날아와서 ㅇㅇ의 머리에 와서 떨어져 그가 앗!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다른 학급의 한 남학생이 체육훈련 용 수류탄을 뿌린 것이 그만 그의 머리에 와 떨어졌던 것이다.  
▲ 개회사를 하고 있는 당년의 반장 김광석
공사병원에서 응급처치만 하고 현병원에 넘겼는데 그때 교통이라야 버스가 한두 번 다닐 때여서 겨우 버스를 기다려 룡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개산툰에서 오는 버스에 승객이 어찌나 많이 앉았는지 사람을 더 실을 수 없는 상황이었였다. 운전수와 겨우 사정하여 환자와 교원 한명이 겨우 앉아 룡정으로 들어갔다.  수혈을 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남학생들이 같이 가려하였는데 버스에 더 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방법 없이 반장 김광석을 비롯하여7명의 남학생들이 40리 넘는 길을 걸어서 룡정에 갔는데 밤 9시가 되였다. 그렇게 힘겹게 걸어서 룡정에 갔는데 현병원에서도 환자를 또 연변병원에 넘겼던 것이다. 이제는 더 어쩔 방법이 없었다. 지금 같으면 택시를 타고 연길로 들어갔으련만 그때는 낮에 통하는 버스 밖에 없은 늦은 밤이라 어쩔 수 없는 처지였다. 이제 다시 걸어서 집으로 갈수는 없고 하여 여관에서 자야 했는데 그때 학생들에게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할 수 없이 룡정 제2여관에 들어가 사실의 정황을 잘 말하고 사정하였더니 여관의 책임자도 학생들의 그 기특한 정신에 감동되어 그들을 면비로 자게 하였던 것이다.  이튿날 돈이 없어 어떻게 버스를 타고 나왔는지 너무도 오래 지난 세월이라 기억에 나지 않는다. 학교에 와서도 반장 김광석은 전반 학생들을 동원하여 60여개의 달걀을 걷어가지고 연변병원으로 그의 병문안을 간일도 있었다. 참으로 동학지간의 우애심으로 나온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 누가 앞설가
 그때 우리는 모두 농촌이라 학교와 거리가 멀기에 저마다 점심밥을 싸고 다녔는데 우리는 한전고장이라 곽밥이라야 일반적으로 조밥에 김치였다. 점심시간이면 끼리끼리 겨울에는 교실에서, 여름에는 교정의 백양나무그늘에 앉아 재미있게 먹었는데 네것 내것 없이 통털어 놓고 먹었으며 누가 더 좋은 것을 싸가지고 오면 그것부터 먹어 없애곤 하였다. 그래도 여럿이 함게 먹으니 소박한 반찬이라도 여러가지여 진수성찬 같은 맛으로 먹었다. 참말로 재미있는 학창시절이었다. 그런데 2학년까지 다니고 1966년 6월에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을 맞게 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 우리 학교에서도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를 타도하자” 란 구호를 외치면서 교장선생님과 교도주임선생님에게 여러 가지 죄증을 만든 대자보(大字报)를 써 부치고 투쟁하였으며 또 “잡귀신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웨치면서 일반 교원들에게도 대자보를 써 부치고 투쟁을 하였다. 그리고 또 두 개 파, 세 개 파의 반란파 조직이 나오면서 서로 대립되는 조직에서는 같은 학급의 학생끼리 말싸움, 지어는 무단투쟁까지 벌이기도 하였다. 너무나 어이없는 유치한 노릇을 한 것이다. 어찌 아무런 죄도 없는 자기들의 교장선생님, 교도주임선생님, 담임교원을 고깔모자를 씌워 놓고 투쟁을 하고 같은 학급의 학생들끼리 무단투쟁을 한단말인가?  모두 공부를 잘하여 상급학교에 간다던 우리는 2년간의 이런 수치스러운 한 단락의 역사를 종결짓고 1968년 7월 30일(학적으로는 1967년 졸업이지만 문화대혁명으로 하여 일년을 더 다니고 1968년도에 졸업식을 가졌음) 졸업식을 하면서 고중시험도 쳐 보지 못하고 모두 농촌으로 내려갔다.  인생을 살다보면 그래도 학창시절이 가장 즐겁고 그립다. 가끔은 학창시절을 돌이켜 보며 그때의 우리의 선생님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선생님의 사랑을 받으며 밝은 교실에서 공부하던 정경, 넓은 운동장에서 뛰놀던 정경들을 돌이켜 보게 되며 동창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면서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할까, 하는 생각도 하여 보게되었다. 
▲ 노래하고 춤추며 즐겁게 놀아보자
농촌에 내려가서 몇 년간의 농촌단련을 거치고 어떤 동무들은 참군하여 국방건설에서 복무하다가 돌아왔고 어떤 동무들은 상급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좋은 사업단위에 배치받아 사업하였고 어떤 동무들은 당정기관, 사업단위, 공장 등 여러 분야에서 사업하였고 어떤 동무들은 농촌에서 자기의 고향건설에 있는 힘을 다 하여 왔다.  이번 초중졸업 50주년 기념행사에는 모두 24명이 참석하였는데 외국에서 하늘을 날아 온 동무도 있고 국내의 먼 곳으로부터 고속철을 타고 온 동무들도 있었다.  이날 기념모임 장소는 화룡시 투도진 청룡어업 산장이었다. 8시 20분 버스가 연길을 떠나 룡정에 가서 룡정에 있는 동창생들을 싣고 목적지로 향해 떠났다. 버스 안은 <추억의 노래>로부터 시작되어 서로 노래하고 춤추며 들끓기 시작한 것이 산장에 도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버스가 투도진 시가지를 가로 지나 룡문호(아동저수지)로부터는 산천경개가 참으로 수려하였다. 이정표를 보니 룡문호로부터 청룡산장까지 9km었으며 룡문호를 따라 올라갔는데 길 왼쪽은 전부 무성한 삼림이었고 오른쪽은 거울같이 맑은 룡문호이었는데 산장 밑까지 호수가 올리 뻗어 있었다. 집수면적은 300여 평방킬로미터, 총 저수량은 4,000만 립방미터라고 한다. 연변에서는 비교적 큰 저수지이고 풍경은 제일 수려다고 한다. 대부분 콩크리트숲 속에서 생활하던 우리들로 놓고 말하면 산과 호수로 어울린 이런 산천경개를 흔상하노라면 “야! 경치가 좋구나!”하는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버스가 산장에 도착하자 우리는 인차 기념행사를 진행하였는데 송일권이 사회를 맡고 당년의 반장이었던 김광석이 개회사를 하였다.  그는 개회사에서 위챗을 통하여 오늘 중학교 졸업 50주년기념행사를 한다는 소식을 알고 오직 그리운 동창들을 만나보고 싶은 그 한 마음으로 한국에서 날아온 박선옥, 바쁜 일도 제쳐놓고 고속철을 타고 장춘과 소주에서 달려 온 리룡석, 정신애, 비록 피치못할 사정으로 오늘의 이 행사에 참석 못하지만 2,000원의 축의금을 보내온 지옥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애석한 것은 8명의 동무들이 이미 저세상으로 가고 몇몇 동무들은 병석에 누워 있기에 이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우리도 그들을 그리고 그들도 우리를 그리며 이 뜻깊은 행사에 동창생들을 만나보지 못하는 슬픔으로 하여 한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 개회사에서 동창모임이라면 그때의 우리의 교장선생님, 우리의 담임선생님과 과임선생님들을 모시고 학창시절을 추억한다면 더욱 즐겁고 의의가 있겠는데 50년이 지난 오늘 우리 자신도 이미 7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할머니로 된지라 우리가 그리는 그때의 선생님들이 대부분 저 세상으로 가셨는데 우리의 담임교원 한문걸 선생님께서는 지난세기 90년대에 너무 일찍이 돌아가시고 지금 계시고 있는 리동수(85세), 함동만(81세) 선생님께서도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라 이번 행사에 모실 수 없는 상황이다. 너무나도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개회사가 끝나자 유희가 있었는데 모두 7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였지만 모두 자기의 소조가 일등을 하겠다고 청년들 못지않게 민첩하게 동작을 하면서도 큰 실수가 없었다. 혹시 자그만한 실수가 있으면 장내가 웃음으로 끓어 번졌다.유희가 끝나니 점심시간이 되였는데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산해진미가 두상이 차려졌다. 점심상에 둘러앉은 우리는 부어라 마셔라 권커니 작커니 하면서 50년 전의 추억과 50년 갈라졌던 그리움으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술도 잘 넘어갔다. 하지만 누구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술좌석이 깨끗하게 끝났다.  오후에는 오락판이 벌어졌는데 자기의 장끼자랑보다 50년 갈라졌던 동창생 앞에서 자기의 성의를 보이려는 심정에서 못하는 노래지만 성수나게 불렀고 노래실력이 괞찬은 동무들은 마이크를 쥐고 놓기 아쉬운 정도로 노래를 불렀으며 이런 노래에 맞추어 모두 성수나게 춤을 추었는데 맨바닥에 앉아서 자기의 신을 벗어 땅을 내리치며 “내청춘을 돌려달라”는 한탄의 노래도 나왔다. 우리가 이렇게 너무나도 신이나게 열정에 넘쳐 노는 것을 보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를 한족복장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우리의 요청도 없이 우리와 합류하여 도라지 노들강변 조선족 무용에 양걸양걸 두양걸 한족 춤까지 나오다니 우리의 오락판이 한결 더 민족단결의 색채까지 띠였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노래와 춤이 끝이 날줄 몰랐다. 그래도 사회를 맡은 송일권이 호르르, 호각소리를 내면서 이제는 4시가 되였으니 돌아갈 시간이 되였다며 오락회의 페막을 선포하였다.  오락회가 끝나서야 그 생면부지인 그 한족여성들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연길에서 몇몇 친구들이 오늘 여기에 놀러 왔는데 자기네끼리 사람도 적고 모두 여성들이라 민족복장까지 입고 왔지만 놀멋이 없어 불청객으로 성수나게 노는 우리와 합류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들도 반갑고 고마운 일이였다. 이렇게 우리는 그들과 아쉬운 심정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귀로에 올랐다. 버스안은 여전히 노래와 춤으로 들끓었다. 룡정, 연길에 도착하여 우리 모두 건강한 몸으로 살아서 다음에는 초중졸업 60주년모임을 가지자고 약속하면서 눈물 섞인 석별의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살아 그 60주년을 기대하는 마음이다. 2017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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