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신문]교토의 거리에서 언제나 그윽한 멀구슬나무꽃(苦楝花)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비 온 뒤의 촉촉함이 스며있고 달콤한가 하면 달지도 않고 떫은가 하면 떫지도 않고 아주 상큼하다. 나무들은 모두 매우 높고 크며 꽃은 무성하게 활짝 피었는데 마치 블루컬러 비단 방울로 장막을 드리운 듯 했다. 바람이 불면 파도마냥 출렁인다.

지하철에서 만난 아이들은 우리가 교토에서 보게 된 첫 풍경이었다. 눈짐작으로 제일 어린 아이는 5살 미만이고 제일 큰 아이라야 10살 좌우인데 남자아이도 있고 여자아이도 있었다. 어른들이 동반하지 않고 제복을 입고 있었다. 동그란 모자, 동그란 얼굴, 짤막한 다리, 재잘재잘 웃는 모습, 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한 시각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한 무리의 작은 산새들과도 같았다. 지하철 출구의 직원들은 아이들과 낯익은 사이인 듯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본토초(先斗町) 야시장에 가는 길에 마침 비가 내렸다. 지하철에서 또 한 무리의 아이들을 보게 되었는데 모두 우산을 안고 있었다. 세 여자 아이는 앉아있었고 서있는 한 남자아이 손에 우산을 맡겼다. 그들은 모여 앉아 만화책을 보면서 웃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말소리는 맑았고 웃는 얼굴은 꽃과 같았다. 지하철을 나와 아이들은 퐁당퐁당 뛰면서 계단을 올랐다. 그 중 한 여자아이가 자기 손에 우산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짧은 다리로 쫑그르르 계단을 달려 내려 까르르 웃으면서 남자아이 곁으로 갔다. 아마 자신의 얼떨떨함을 자책하는 듯 했다. 남자아이는 천진하게 여러 자루의 우산을 들고 그들과 함께 한길을 걸었다. 그리고는 역시 천진하게 우산을 그에게 넘겼다. 그야말로 첫 사랑보다도 더 달콤하고 순진한 동년시절이다.

지하철 앞에 빵 과자 가게가 있는데 간판에 중문으로“시즈(夕子, 유오코)”라고 씌어져 있었다. 아마도 어느 일본 처녀의 아명 같았다. “夕子”들은 아주 깜찍했다. 엷은 찹쌀껍질은 반투명했는데 속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소가 들어있다. 가게는 아주 깨끗했는데 점원들도 모두 깨끗하고 단정한 젊은이들이었다. 카운터에는 손님들이 맛볼 수 있게 여러 가지 샘플들을 진열했는데 바닐라 맛, 콩소 맛, 참깨 맛, 망고 맛, 오렌지 맛, 수밀도 맛…… 들이 있었다. 결산할 때에 교복차림의 두 여자아이가 들어왔는데 나이는 5,6살 되어 보였고 키는 카운터 높이보다 작았다. 그들은 재잘재잘 웃고 떠들면서 접시의 “夕子”를 쥐어 먹었다. 다 먹고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점원들은 보고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아마 가게에 와서 면비로 나라(奈良, Nara) 공원의 노루들은 종이를 즐겨 먹었는데 관광객들의 종이부채를 빼앗는다.

 관광객들은 여러번 잡아 당겼으나 빼앗을 수 없어 아예 포기해 버렸다. 노루는 머리를 흔들며 씹었으나 넘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가게의 주인아주머니가 불풍나게 나아와 괘씸스러운 듯 노루 입에서 종이부채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노루 머리를 손가락질 하며 어서 셈이 들라고 욕했다. 그리고는 관광객들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가게로 달려갔다.

금각사 문 앞은 여러 개의 관광단체로 물샐틈없었다. 중국어 영어 가이드들은 암탉이 병아리들을 몰 듯이 관광객들을 한곳에 모이게 했다. 한 미국 아저씨가 자신만만하게 금각사의 역사를 해설하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에 다가가 면비로 실컷 들었다. 금각사의 본명은 녹원사인데 1397년 제3대 바쿠후장군 아시카다장군이 수건 했다. 장군이 죽은 후 선사 “본다이쇼(菩提所,보리사)”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이다.

내가 한참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는데 그 아저씨가 잠시 쉬었다가 다음 회를 기대해 주세요, 하는 식으로 두 손을 마주쳤다. “중요한 것은, 문어귀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 있습니다. 아이스크림은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단통 아이스크림을 사지 말고 오직 일본에만 있는 퍼프 페이스트리로 감싼 말차 아이스크림을 살 것을 강력하게 건의 합니다."

출구의 아이스크림가게에 과연 “일본에만 있는” 퍼프 페이스트리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나는 소문에 끌려 두 개를 사서 아이들에게 주었다. 크기는 작은 찐빵만큼 했는데 너무나도 달아 단 음식을 즐겨 먹는 아이들도 먹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나머지를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나는 이 물건이 미국 마트에서 큰 통으로 팔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무엇이 일본에만 특유한 것이라고, 아저씨 참 뻥도 잘 치는군.

 금각사 문 앞에서 몇 몇 일본 중학생들을 보았다. 무더운 날씨인데도 남학생들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긴 바지 긴 소매 교복 차림이었고 머리가 귀밑까지 길어 보기에 갑절로 무더워 보였다. 교토의 중학생들은 내가 중국 내륙에서 본 중학생들과 외모상 별반 다를 바가 없었는데 몸매가 수척하고 기질이 침착했다. 대부분 아이들은 콧마루에 안경을 걸고 있었으며 여름 방학 햇볕에 타서 피부가 황갈색을 띄었다. 14,5살이면 몸매가 우람지고 키가 크고 반바지 바람에 스케이트보드가 표준 형상이고 얼굴에 전혀 개의치 않은 표정의 미국 청소년들과 달랐다. 몇 몇 일본 중학생들이 높은 코에 움푹한 눈을 가진 한 관광객 가정을 둘러싸고 영어로 인터뷰하고 있었다. 아마도 앙케트 조사를 작성하는 모양이다. 쌍방의 영어는 모두 괴상한 어투였는데 힘들게 교류하고 있었다. 한 일본 할아버지가 자진하여 번역했는데 관광객에게 어디에서 오셨는가고 물었다. 남성 가장은 짙은 동유럽 어투로: “루마니아”라고 말했다. 

  아라시야마 관광 소형 기관차의 종착역은 파릇파릇한 벼밭이다. 벼밭 한가운데 두루미 한 마리 서 있고 물에는 올챙이들이 노닐었고 튼실한 우렁이도 있었다. 논두렁에 한 아저씨가 도르래를 팔고 있었는데 머리에는 흰 수건을 두르고 장마철이라 땀을 비 오듯 흘렀다. 도르래는 작고 깜찍하고 공예가 정교했는데 단추에 앉을 수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잠자리가 사람 몸에 앉은 것 같았다. 아이들의 발걸음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었다. 가격은 눅은 편이 아니었다. 한 마리에 대개 십 달러였다. 어른들은 쉽사리 망가지느니, 비행기에 갖고 오르지 못하느니 하며 구실을 대여 아이들을 달랬다. 그 아저씨가 아마 알아들은 듯 했다. 그는 곽을 꺼내 도르래를 곽 속에 넣고 둬 번 힘껏 누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치 절대 망가질 리가 없다고 말하는 듯 했다. 아이가 말했다: “도르래 파는 아저씨가 너무 불쌍해요. 아마도 돈이 수요 되는 것 같아요. 이처럼 무더운 날씨에도 난전을 벌렸어요.”

 이렇게 말하는 아이의 두 눈에는 동정과 갈망의 눈빛이 빛났다. 아이의 귀띔을 듣고서야 나는 논에 그 아저씨 한 분만이 본토박이임을 깨달았다. 머리에는 양산도 없었다. 나는 돈을 치르고 도르래를 샀다.
  민박은 바로 강변에 있었는데 5분 거리밖에 안 되었다. 골목길은 매우 깨끗했는데 한쪽 끝은 푸른 산이었고 다른 한쪽 끝은 큰 강이었다. 멀리서도 도도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른 아침에 동반하여 달리는 노인이 있었고 강 한가운데 흰 갈매기와 백로가 있었다.

 교토에서의 마지막 날, 황혼 무렵에 강변에 나아가 산책 했다. 맞은편 기슭에서 누군가 플루트를 불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몸매가 날씬한 여인이었는데 하얀 롬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우아한 플루트 소리는 바람 따라 물결 따라 들려 왔는데 마치 자연의 음향 같았다. 

 무엇이나 다 있다. 만일 전지 밥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시험 삼아 나는 집주인에게 에어비앤비(AirBnb)에 메모를 남겼다. 오래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어 한참 중얼거리고 있는데 집주인한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주말에 외출 했어요, 뒤늦게 회신하여 죄송합니다. 곧바로 전기밥솥을 내려다 드리겠어요.
 5분 뒤에 집주인이 층계에서 내려 왔는데 전기밥솥을 들고 있었다. 이는 서로간의 첫 대면이었다. 우리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 굽혀hello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이것이 괜찮겠는가고 물었다. 우리의 표정은 어색했다. 나는 쌀밥을 지으련다고 말했다. 그녀는 “쌀밥을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하고 말했다. 십 분이 지나 그녀는 또 밥솥을 들고 내려 왔다. 이번에는 전기밥솥 같았다. 덮개를 열어 보니 안에는 물에 담근 입쌀이 그득했다. 그녀는 우리를 도와 플러그를 꽂고 스위치를 눌렀다.
“한 시간 입니다. 한 시간 후이면 식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한 가마의 밥을 우리 넷이서 부지런히 4,5일간 먹었지만 다 먹지 못했다.
 쓰레기봉투를 다 쓰면 언제나 곧바로 보충 되었고, 타월을 사용한 후 언제나 깨끗한 것으로 바꿔 주었다. 매번 물건을 넘겨 줄 때마다 집주인은 어린 딸을 데리고 왔다. 꼬마의 손에는 번번이 완구, 책, 간식을 들고 있었는데 완구는 한 세트의 레고 성보이고 책은 일본 어린이들이 영어를 배우는 그림책이고 간식은 초콜릿 쿠키였다. 꼬마는 수줍어하며 연령이 비슷한 우리 집 아이에게 넘겨주었다. 모녀 두 사람의 몸가짐은 친절하고 겸손했는데 마치 그 무슨 공짜라도 얻은 거래를 하여 미안쩍은 표정으로 다급히 우리에게 묻는다.
  “되겠습니까?” 
 “안 될 리가 있습니까? 이득을 본 건 분명 우리입니다.” 

 떠날 때, 집주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완구며 책을 정리하여 책상위에 놓았다고 메모를 남겼다. 집주인한테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메모가 왔다. 십 여분 지나 딸을 데리고 내려 왔다. 여전히 한 주머니의 간식이었는데 이번에는 초콜렛 쿠키가 아니라 그녀가 직접 만든 뜨끈뜨끈한 다코야키(章鱼丸子)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다 보니 전혀 거절할 수 없었다. 다만 서로 끊임없이 허리를 굽히며 고맙다고 말 할 뿐이다. 다코야키는 아주 맛있었다. 그런데 너무 많아 저녁식사 때 다 먹지 못했다. 이튿날 하는 수 없이 미안한 마음으로 버렸다. 골목길을 나온 후에야 버렸다. 

  교토의 거리에서 언제나 그윽한 멀구슬나무꽃(苦楝花)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비 온 뒤의 촉촉함이 스며있고 달콤한가 하면 달지도 않고 떫은가 하면 떫지도 않고 아주 상큼하다. 나무들은 모두 매우 높고 크며 꽃은 무성하게 활짝 피었는데 마치 블루컬러 비단 방울로 장막을 드리운 듯 했다. 바람이 불면 파도마냥 출렁인다.
 깊은 그늘 속에서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미국에서 성장한 아이는 무슨 소린인가고 물었다. 나는: "매미 울음소리다. 내가 자란 곳에 여름이 되면 곳곳에서 들을 수 있단다."라고 말했다. 말하는 나의 가슴 속에서 이름못할 향수가 넘쳐 올랐다.

 교토 사람들은 얼마나 한적한가. 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소녀다. 등에는 바이올린이 메었고 긴 머리는 황혼의 바람에 흩날린다. 식물원의 젊은이는 연꽃을 마주하고 집중하여 사생하고 있다. 무더운 더위도 잊은 듯하다. 지하철에서 나의 맞은 켠에 앉은 중년 여인이 앉아 있었다. 나보다 몇 살 이상인 듯 했는데 쇼트커트에 와이드 팬츠 차림이다. 조용하고 우아하다. 중국이나 미국에서도 이 나이에 이런 기질을 가진 여인은 보기 드물다. 설령 도쿄라고 해도 보기 드물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