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동문사회문제연구소 소장, 중국동포신문 주간. 칼럼집/장편소설 다수 출간
[서울=동북아신문]조선족역사의 시작이 언제부터인가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1636년 병자호란 때 60만 명의 인질이 청에 잡혀갔고 3년 후 주화론(主和論)을 이끌었던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이 3만 명을 조국에 데려왔을 뿐 나머지 57만 명이 청에서 살게 되었다. 당시 57만 명이면 웬만한 대도시 인구에 해당되고 그 많은 숫자가 청에서 대대손손 살았으니 조선족역사를 300년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19세기 60년대부터 만주에 이주 간 조선인을 조선족의 1세대로 보고 조선족역사를 150년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후자에 손을 들어주는 입장으로서 조선족역사가 150년이라고 본다.

그 근거는 한 민족공동체의 형성은 주로 문화를 토대로 이뤄진다는 것에 역점을 두기 때문이다. 즉 57만 명이 청에서 300년 살았어도 그들은 민족문화를 갖지 못하고 완전 동화되었기 때문에 조선족역사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19세기 60년대부터 이주 간 조선인은 만주에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3대 요건인 의식주(衣食住)에 있어서 조선집을 짓고, 한복을 입고, 김치 된장국 먹으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왔기 때문에 그때부터 명실상부하게 조선족의 역사라고 정리하는 것이 옳은 주장이다. 

아래에 조선족이 어떻게 독자적인 생활문화로 삶을 영위해 왔는가를 살펴보자.

풍류로 보는 연변 한옥(韓屋)과 한옥(漢屋)
중국 동북지역인 길림성 연변 시골에 가면 가옥의 외관만으로 한족마을과 조선족마을이 쉽게 구분된다.
연변 조선족은 대다수가 한반도 함경북도에서 이주한 과경민(跨境民)이다. 그들은 선조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산 밑에 샘물이 있고 샘물이 내를 이루고 냇물 양쪽에 작은 산맥이 뻗어 있어 포근하고 안온한 곳을 선택해 냇물 가까운 양쪽에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고 살아왔다. 이러한 마을 자연모습을 ‘방곡(坊曲)’이라 하는데 우리말 ‘방방곡곡’이란 어휘가 여기서 유래되었고 만주에 이주 간 조선족1세대들이 한반도 선조들의 ‘방곡’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좋은 증거이다. 

조선족 가옥구조는 6칸짜리가 보편적이고 잘 사는 가문은 8칸짜리였다. 외형상 지붕은 동서 양쪽을 보기 좋게 경사를 지워 좌우 앞뒤의 지붕 높이가 똑 같다. 한족 가옥의 지붕은 조선족 가옥의 지붕에 비해 남북의 경사도가 크고 동서 양쪽은 경사가 없이 깎아지른 듯한 수직절벽 모양인데 지붕꼭대기와 바람벽이 직선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지붕 모양만으로도 한눈에 조선족마을인지, 한족마을인지를 알 수가 있다.
조선족 가옥구조는 부유한 집들은 전통한옥처럼 마루가 있지만 대다수는 마루가 없다. 마루는 나무판자를 깔고 그 밑은 비어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 습기를 방지한다. 여름에 마루에 앉아 식사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책을 보거나 등등의 삶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마루문화는 바람문화(필자가 지어낸 신조어)에서 유래된 훌륭한 풍류의 가옥구조이다.

출입문(연변조선족은 바닥문이라 함)을 열고 들어가면 반 평(坪) 크기에 두 뼘만큼의 깊은 바닥이 있고 바닥 북쪽에 바닥보다 조금 더 크고 세 뼘 깊이의 부엌이 있고 화구(아궁이)가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다. 이렇게 아궁이를 낮게 하고 구새를 높이 하는데 이런 온돌구조는 바람의 원리에 의해 불길이 잘 든다.
한족집은 부엌이 따로 있고 안방이 따로 있는데 주방이 엄청 크고 안방이 굉장히 작다. 이에 비해 조선집은 부엌간이 따로 없이 통 털어 정주간이라 하는데 온돌 면적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조선집은 정주간 서쪽에 안방과 고방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다. 정주간 동쪽에 있는 방은 창고로도 사용하고 또 어떤 집들에서는 소를 키운다. 농경문화에서 소가 가장 소중한 존재로서 사람과 같이 한 집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문은 출입문이 있고 정주간에는 창문이 있고 안방과 동쪽 방에도 출입문이 있으며 고방에는 작은 창문을 만들어 오후 햇빛을 받아들이고 통풍으로 사용한다. 정주간 출입문과 대칭으로 북쪽에 부엌문이라 부르는 출입문을 남쪽 출입문과 같은 크기로 만들어 아침 햇빛을 받을 수 있고 낮에는 집안 밝음에 도움이 된다. 특히 남북 출입문을 동시에 열면 시원한 바람이 통해 환기에 큰 역할을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민족이 풍류원리에 의해 지은 조선집 가옥구조이다.

한족가옥은 가운데 방이 부엌간이며 면적이 굉장히 크다. 부엌간은 조선족가옥과 달리 높낮음의 굴곡이 없다. 아궁이가 밖의 땅바닥과 수평적으로 마련되어 있고 구새가 낮아 불길이 잘 들지 않는다. 연기가 아궁이로 거꾸로 뿜어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한족가옥 부엌간은 남쪽에 출입문만 있고 북쪽에 출입문 혹은 창문이 없어 통풍이 막히고 환기가 되지 않아 아궁이에서 나오는 연기와 볶음요리가 위주인 관습으로 생겨나는 기름타는 냄새와 각종 요리냄새가 빠져나가지 못해 항상 집안에 매캐하게 이상한 냄새가 배어 있다. 간혹 부엌간 북쪽에 환기용으로 구멍을 만들지만 구멍의 크기가 고양이나 드나들 정도로 작기에 통풍과 환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며 집안이 햇볕을 받지 못해 항상 어둠침침하다. 한족도 풍류원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쩐지 통풍이 없고 환기가 되지 않는 가옥구조를 고집하면서 수천 년을 살아왔다.

부엌 양쪽에 같은 크기의 안방이 있고 방안의 특징은 남쪽에 창문만 있고 출입문이 없으며 바닥이 온돌보다 훨씬 더 크다. 조선집가옥구조는 온돌면적이 큰 것이 특징이라면 한족가옥구조는 이와 정반대이다. 그래서 한족가옥은 조선족가옥에 비해 난방이 잘되지 않아 항상 춥다. 온돌 높이는 어른 엉덩이 높이와 비슷하여 오르내리기가 불편해 한족은 하루 종일 신발을 벗지 않고 산다.

석회가 없던 시절 조선집들에서는 백토 흙을 구해 바람벽에 칠하는데 한결 깨끗해 보이고 환히 밝아 보인다. 석회가 생겨난 후로는 조선집이라면 어김없이 석회로 바람벽을 칠한다. 한족가옥은 백토나 석회로 바람벽을 칠하는 법이 없이 거무틱틱한 흙으로 바람벽을 매질하여 몹시 어두워 보인다. 먼 곳에서 바람벽만 바라보아도 조선마을과 한족마을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민족마다 가옥구조가 나름대로의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은 모두 저마다 자연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그에 따라 생활관과 가치관이 다른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한족마을 가옥구조와 조선족마을 가옥구조의 대비를 통해 우리민족이 얼마나 풍류를 중시해왔는가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풍류로 보는 한복(韓服)과 한복(漢服)
중국인(한족)이 우리 조선족을 욕하는 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까오리빵즈(高麗捧子)’이고 다른 하나는 따쿠당(大褲襠)이다.

‘까오리빵즈(高麗捧子)’를 직역하면 고려몽둥이다. 고려몽둥이 유래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수나라와 당나라(당태종 때)가 여러 차례 고구려(고구려와 고려가 같음)를 침략했으나 번번이 패배했다. 그때 고구려인들이 몽둥이를 잘 써 혼났다고 하며 이 때문에 고려몽둥이라는 말이 생겨나고 조선사람을 욕하는 말로 굳어져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필자는 이 설이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까오리빵즈(高麗捧子)’의 진짜 유래는 무엇일까?
필자가 어릴 때 엄마가 빨래 감 옷가지들을 가마에 푹 삶은 후 강가에 가서 방치로 실컷 내리 두드리는 것을 수 없이 보았다. 이불이나 베갯잇 같은 빨래는 풀을 묻혀 두드리고 또 두드린다. 책 좀 봐야 하는데 엄마의 끝없는 방치소리에 진저리나던 생각이 지금도 생생하다. 조선여성들의 끝없는 방치소리에 한족들이 감탄하여 우리를 ‘까오리빵즈(高麗捧子)’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필자는 이 설이 설득력이 강하다고 본다.

남자들의 한복바지가 통살도 굉장히 너르고 가랑이(표준한국어로는 밑위)가 무릎팍까지 축 처져 있다. 이것을 한족들이 따쿠당(大褲襠)이라고 표현하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선사람을 욕하는 말이 되었다.
왜 바짓가랑이를 그토록 너르게 디자인 했을까? 구차했던 세월 옷감을 낭비하면서까지 따쿠당(大褲襠)으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남자들의 거시기는 차게 굴어야 정력이 세다. 전통사회에서 남자들이 부엌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한 것은 가부장적 남자주의에서 유래되었다기보다 남자들의 거시기가 불에 가까우면 정력이 쇠퇴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거시기를 항상 차게 하려면 바짓가랑이를 너르게 디자인하여 통풍이 잘돼야 한다. 이것이 바로 따쿠당(大褲襠)의 비밀이다. 한국남자들이 추운겨울에 아직도 내의를 입지 않는 관습이 바로 이와 같은 통풍원리에서 유래된 것이다.

한복은 매우 아름답다. 중국 56개 민족 중에 한복이 가장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족들이 부러워하는 복장임에는 틀림없다. 연변에서 해마다 자치주성립 기념일인 9.3명절에 운동회를 개최하는데 조선족여성들이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그네 뛰는 모습이 마치 선녀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과 같았다. 또 우리 엄마세대들의 하얀 한복은 산언덕을 넘나들 때면 바람에 치맛자락이 펄럭이는 모습이 신선 같았다.
중국동북지방 한족들은 나이 든 어른은 물론이고 청춘남녀들도 초겨울부터 이듬해 얼음이 풀리는 3월 말까지 윗도리 솜옷은 말할 것 없고 솜바지를 어김없이 챙겨 입는다. 이에 비해 조선족청년들은 미에 손상된다고 솜옷을 입지 않는다. 민족마다 자신들의 복장문화가 따로 있다. 어느 민족복장문화가 우수하고 어느 민족복장문화는 추하다는 주장은 맞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조선족복장문화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관절염이 많고 특히 부녀들이 냉병이 많다. 한족들은 몸을 따뜻하게 굴기 때문에 관절염이 매우 적고 부녀병도 매우 적다.

거시기를 차게 굴어야 정력이 세다는 속설은 배달민족에게는 맞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중국한족남자들한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중국북방, 특히 기온이 찬 동북지역 한족남자들은 늦가을부터 이듬해 청명까지 솜바지를 꽁꽁 챙겨 입어 거시기를 굉장히 따뜻하게 굴지만 그들의 정력은 조선족남자들보다 더 세면 셌지 떨어지지 않는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정력이 약하다면 그 많은 인구생산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웃자고 하는 얘기 아니다. 실제로 한족들과 어울려 생활해보면 한족남자들이 우리조선족남자들보다 정력이 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풍류로 보는 한식(韓食)과 한식(漢食)
조선족자치주 연변에 가면 시장마다 조선고추 있고 한족고추 있다. 조선가지 한족가지, 조선오이 한족오이, 조선마늘 한족마늘,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조선품종과 한족품종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대개 조선품종은 작고 야무지게 생기고 한족품종은 크고 맵거나 진한 맛이 덜하다. 우리 엄마세대들은 한족을 중국 사람이라 하고 고추도 한족고추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중국고추라고 표현하였다. 기타 종류도 마찬가지였다. 2세, 3세로 내려오면서 학교 다니고 문화적으로 중국문화에 적응하면서 차츰 중국 사람을 한족이라 부르고 고추도 중국고추라 하지 않고 한족고추라고 불렀다.

연변의 조선품종 야채들은 이민1세대들이 만주이주 시 몸에 지니고 갔고 대대로 재배하여 먹고 살아왔던 것이다. 만주에서 반세기 넘게 살아왔어도 연변시골에서는 웬만해서는 중국품종을 먹지 않고 조선품종을 고집해왔다. 마늘을 예로 들면 조선마늘이 쪽이 작고 생산소출도 중국마늘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김장철이면 쪽이 크고 양이 많아 까기도 쉬운 중국마늘을 거부하고 줄곧 쪽이 작고 양이 적고 까기 힘든 조선마늘만 사용해왔다. 지금 한국에 와 있는 70만의 조선족은 중국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한국에서 마늘을 비롯해 중국산 야채품종을 많이 먹고 있다. 인간세상은 요지경, 실로 아이러니다.
조선족음식과 한족음식의 가장 큰 차이점을 꼽으라면 조선족음식은 냉식(冷食)위주인데 비해 한족음식은 열식(熱食) 위주이다.

한반도는 산 좋아 나물이 많고 물이 좋아 나물을 날것으로 먹어도 탈이 없다. 중국(한족 발상지인 중원지역)은 물이 매우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끓여 먹지 않으면 탈이 난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냉수를 벌렁벌렁 마시는데 비해 한족은 반드시 끓여 마신다. 백두산(長白山) 산맥을 끼고 있는 연변도 산이 많아 나물이 많고 물이 좋아 냉수 그대로 마신다. 요리도 날것으로 장에 찍어 먹고 양염에 무쳐 먹는 냉식이 굉장히 많다. 특히 조선족이 냉수에 밥을 말아 먹는 것을 목격한 한족들은 마치 외계인을 바라보듯 신기해한다. 필자가 장춘에서 대학 다닐 때 가을에 운동장에서 말리는 배추를 도둑질해서 기숙사에서 고추장에 날것으로 찍어먹는 것을 본 한족학생들은 우리를 야만인 쳐다보듯 이상한 민족으로 취급하였다.

한족음식은 날것으로 먹는 것이 기본상 없다. 예를 들어 조선족은 오이를 날것으로 장에 찍어먹거나 김치 담가 먹는데 한족은 고기 넣고 기름에 볶아먹는다. 토마토도 계란에 볶아먹는다. 이런 식으로 한족음식은 기본상 열식이 위주이다. 우리민족도 열식인 펄펄 끓는 국물을 잘 마신다. 하지만 입술이 데일 정도로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서 ‘아~ 시원하다.’고 표현하는 민족은 세상에서 배달민족밖에 없다.
한국 벚꽃은 4월 중순 전에 핀다. 단풍은 9월 중순부터 10월 초경 절정이다. 이 두 계절이면 날씨가 쌀쌀하다. 그런데도 가족단위로 음식을 챙겨갖고 야외에서 오순도순 나눠 먹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야외음식문화는 바람문화(풍류문화)의 표현이다. 중국한족들은 죽었다 깨도 쌀쌀한 날씨에 야외에서 찬 음식을 먹지 않는다.

모두어 말하자면 조선족생활문화인 의식주(衣食住)를 살펴보면 배달민족 선조들의 산 좋고 물 좋은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의 풍류문화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왔으며 동시에 연변냉면, 연변순대, 고추순대, 감자밴새 등 수많은 음식문화를 창조해왔고 또 중국인과 혼거생활 과정에 중국문화도 많이 흡수하면서 생활해왔던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족은 추석이면 송편 대신 월병(月餠)을 먹고 설이면 떡국 대신 물만두를 먹는다. 그렇지만 조선족의 생활문화는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아직도 전통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어릴 적에 조선족과 한족의 문화차이에 대해 ‘왜 다를까?“는 궁금증이 엄청 많았고 한족과 조선족을 비교하는 과정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엄청 많았다. 필자가 연변에서 소학교는 조선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중국학교(한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일로 기억된다. 어느 날 한족친구가 느닷없이 나보고 “니네 조선여성들의 거시기가 차다는데 진짜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다가 퉁명스럽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내가 아직 해보지 못한 처지에 따뜻한지 찬지 어떻게 아느냐?” 한편 속으로 가령 조선족여성과 성경험이 있어도 동시에 한족여성과 체험해봐야 비교가 생겨 알 것 아니냐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후 사회생활하면서 한족들한테서 ‘조선여성들의 거시기가 차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실제로 한족들은 그렇다고 믿고 있었다. 젊었을 때는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냈는데 나이 들어 역사문화를 연구하면서 진짜일까, 허위일까?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답을 찾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인간은 남자든 여자든 서양여자든 동양여자든 조선족여자든 한족여자든 정상체온이 36℃~37℃로서 똑 같다. 체온이 같다면 거시기의 온도도 같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왜 한족들은 조선족여성의 거시기가 차다고 말하는 것일까? 결론을 말하자면 조선족여성들의 거시기가 실제로 찬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여기는, 그렇다고 여기는 관념상의 인식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즉 조선족여성들이 복장도 엷게 입어 몸이 차고 음식도 냉식이 위주인 찬 음식을 먹기 때문에 조선족여성의 몸이 찰 것이니 거시기도 차지 않겠느냐는 관념인식이 머리에 박혀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지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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