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조원기 사장
[서울=동북아신문]삼라만상이 고요한 이 밤, 지나온 20여 년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국생활과 지나온 과거가 오늘도 나의 눈앞에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중국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에서 태어난 나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한국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이 고향인 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

젊은 나이에 일제의 탄압이 싫어서 고향을 떠나 만주 땅, 현재 나의 고향인 쌍하진에 정착해서 당시 항일 투사인 홍범도 장군의 항일구국 사상의 영향을 받아 해방 전 우리 조선족 사람들이 엄청 많이 집결해 사는 영길현 쌍하진에서 한국교민 청년들로 조직된 "한교청년단"이란 비밀조직에서 단장으로 활동했었다.

해방 후, 중국 사회주의 체제에서 한국이라는 자본주의 국가를 위해 일했다는 아버지의 역사는 젊은 시절 나의 꿈을 완전히 박산냈었다. 전쟁영화를 무척 좋아했던 나는 군대에 가서 권총을 휘두르는 장교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나이가 되어 군 입대 신체검사에서 모든 항목이 다 합격이 돼 들뜬 마음으로 입대날만 기다리는데 당시 민병 련장이었던 김씨가 찾아와서 "아버지 역사문제로 정치심사에서 떨어졌다"고 통보를 했다. 기막힌 충격을 받은 나는 몇날며칠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밖으로 떠돌아다니다가 마음을 다잡아먹고 열심히 일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칭찬과 격려를 한 몸으로 받으며 즐겁게 생활하던 중, 꿈에도 상상 못했던 일이 찾아왔다. 보잘 것 없는 이 농촌 조선족 청년이 몇 천 명이나 되는 쌍하진 젊은이들 중에 단 한명의 명액으로 길림시에서 가장 유명한 대기업중의 하나인 "길림시철합금공장(吉林市铁合金厂)"에 추천된 것이다.

기쁨과 설레는 마음이로 이불짐과 보따리를 다 싸놓고 입사통지만을 고대하고 있는데 날아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 "아버지 역사문제로 탈락되었소"이다. 대한민국을 위해 젊음을 바친 아버지의 과거가 또 나의 창창한 앞날을 가로막아 버린 것이다. 엄청난 충격을 받고 집 뒤 높은 강둑에 하염없이 앉아있는 나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당시 아버지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반나절이나 강둑에 앉아서 다짐한 결심, "모든 것을 잊고 나는 앞으로 이 바닥에서 가장 강인한 남자로 살아가리라!"고 결심했다. 결국 이 한 결심이 나의 평생을 좌우했다. 어린 청년시절에도 세상 겁내는 것이 없었고 특히 의리를 앞세우는 나는 항상 약자의 편에 서서 일을 봐주고 생활하였기에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래서 스무살 중반에 군중들의 선거로 촌의 대장이 되었고, 한국 나오기 직전까지도 우리 지방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업의 사장으로 있다가 동생의 끈질긴 권유로 모든 짐을 내려놓고 한국행을 하게 되었다.

낯설고 물 설은 한국 땅에서 모든 것이 생소하지만 최선을 다해 일한 덕분에 동료들과 사장님의 두터운 신임과 칭찬을 받으며 일하게 되었다. 그 후로 대한민국의 가장 큰 철거 공사인 청계천 철거공사는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동재문운동장 철거공사, 잠실대교 확장공사, 양화대교, 천호대교 등 수많은 철거 현장에서 피와 땀을 흘렸고 아찔한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었다. 동대문운동장 사거리 청계천 바닥 공사현장에서는 갈비뼈가 골절되어 119구급차에 실려 입원생활도 했다. 또 김영삼 대통령취임 후 국민들이 저주하는 안기부, 서울 남산 뒷 켠에 자리 잡고 있는 안기부 본관 5층 역사건물 폭파작업을 위해 제일 위층에서부터 지층까지 기둥만 남겨두고 모든 건물 내부를 짓부수는 작업을 당시 폰크레인 기사인 내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마무리를 지었다. 대한민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건물이라 하여 서울시청에서 직접 사람들이 나와서 영화 촬영하듯이 조명등을 켜놓고 폰크레인 작업 상황을 촬영해갔는데 그때 그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하다.

수많은 작업현장에서 지금까지도 영원히 잊혀 지지 않는, 생각만 해도 오싹한 기분이 드는 한 현장사고가 하나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살고 있었던 상도동 사거리에서 멀지 않은 길옆 5층 빌라건물 1층 내부 철거현장이었다. 2, 3, 4, 5층은 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1층은 가게였다. 현장에 투입된 직원 5명과 용역업체에서 온 인부 10여 명이 시뿌연 먼지 속에서 삽질하는 사람, 산소절단 작업하는 사람, 폐기물 나르는 사람 등등 땀을 흘리며 열심히들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오후 세시쯤 갑자기 뽀얀 먼지 속에서 비명소리에 가까운 치떨리는 부르짖음 소리가 들렸다. "가스통에 불붙었다. 가스통이 폭발한다. 빨리, 빨리 달아나라!" 모두들 자지러 질 듯한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흠칫했다. 건물 중심기둥 밑에 화염 속에 휩싸인 가스통을 보는 순간 일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공구들을 팽개치고 대문을 향해 죽기 살기로 뛰어나갔다. 오가는 차량을 아랑곳하지 않고 길 넘어 까지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나도 쓰던 삽을 집어 던지고 대문 밖까지 뛰쳐나갔었는데, 영문도 모르고 앞에 지나가는 할머니를 보는 순간 점심에 3층 베란다에서 빨래를 너는 할머니와 재롱떨던 손녀가 뇌리를 스쳤다. "아, 저거 폭발하면 건물 다 무너지고, 사람들 다 죽는다! 안 돼, 안 돼! 폭발을 막아야 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죽음의 현장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맞받아 불 뿜고 있는 불길에 휩싸인 폭발직전의 가스통을 향해 뛰어 들어 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시뻘건 집안 먼지 속 기둥 밑에 있는 두 개의 가스통 중 누워있는 가스통에서 뿜어 나오는 거센 불길이 서있는 가스통을 정면으로 달구고 있었다. 추호의 주저할 사이도 없이 서있는 가스통을 발길로 차서 옆으로 굴려놓고 화염에 싸인 불 뿜는 가스통을 밸브를 더듬어 쥐였다. 장갑 낀 손이 순식간에 불이 붙었지만 어떨 새도 없이 결사적으로 밸브를 움켜쥐고 확 들었다. 한껏 열을 맡은 밸브는 잠겨 지지 않았었고, 빤빤한 바닥에 누워있던 가스통은 두루루 구을고 있었다. 아차, 큰일 났다. 더 생각할 겨를 없이 나는 화염에 싸인, 뜨거운 폭팔 직전의 가스통을 가로타고 앉았다. 뜨거운 감각이 전신에 확 느껴졌다. "아, 이제 나는 죽는구나!" 눈을 감으며 이를 악 물고 악 비명소리를 지르며 밸브를 확 틀었다. 팍, 불 꺼지는 소리! 내 귀에는 꽝 하는 소리로 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죽을힘을 다해 길 건너까지 도망갔던 사람들, 먼발치에서 나의 사투하는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불이 꺼지자 한참 있다가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뛰어 들어왔다. 반정신 나가 멍하니 앉아 있는 나에게 다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야, 대단하다, 대단해! 정말 대단하다!" 하고 나를 둘러싸고 칭찬을 했다. 나를 부축해서 어깨를 주물러 주는 사람, 팔을 만지며 등을 두드려 주는 사람……참 몸으로 느끼는 인간미였다. 사람들의 경의에 찬 눈빛을 뒤로 한 채 나는 한 동료직원의 부축을 받으며 현장에서 멀지 않은 약국에 들려 화상 연고로 처지를 했다. 가스 불에 데인 상처의 아픔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홀로 차문을 잠그고 평생 처음 소리 내어 울었다.

가스통에 불붙으면 폭발한다는 사실! 그 위력이 중형 폭탄과도 같다는 사실은 남녀노소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그 위험천만했던 폭발 직전의 아슬아슬하고 급박했던 상황에서 나 자신의 갑작스러운 선택과 행동에 대해 지금도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생각할 수록 가슴이 섬뜩해 난다. 그러나 그 순간에 자신을 이겨나가는 경험을 했기에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짜릿한 이런 추억을 한번 갖는다는 것 또한 행운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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