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딩시절의 거의 모든 것, 모교 설립 70주년을 맞이하여.

▲ 정련 프로필: 흑룡강성 상지시 조선족중학교, 2002년 흑룡강성 문과수석. 북경대학 경제학원 국제경제무역학과 02학번, 학부 졸업.업무경력 : 2006년 9월 ~ 2010년 9월 우리에프앤아이(우리금융그룹 자회사, 현재 대신에프앤아이), 투자팀2010년 10월 ~ 2014년 6월 동양증권(현재 유안타증권) IB부문 기업금융업무2014년 6월 ~ 현재 유안타증권 기획팀, 비서팀 팀장, 중국변호사
[서울=동북아신문]요즘 공부를 진짜 열심히 한다. 진짜 궁금한 것, 진짜 일에 필요한 것들로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도 하고 밤늦게 까지 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때 지금의 반만 했어도, 박형수 선생님은 아마 나를 예뻐서 업고 다니지 않으셨을까 싶다. 고등학교를 졸업 한지도 만 15년이 되었고, 박형수 선생님을 담임으로 알고 지내게 된지도 만 18년이다. 내가 졸업할 때 선생님께서는 “내 30대 흰머리에 반은 너 때문에 생긴 거야”라고 하실 만큼 나는 말썽을 피웠었나 보다.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내가 개학 전날에 언니랑 동내 시장에서 왼손에 아이스크림 오른손에 꼬치의 자세로 돌아다닐 때였다. 그냥, 우리 학교 선생님이네, 라고 생각하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고 지나갔었다. 개학 날 학교를 갔는데, 어제 어정쩡한 자세로 만났던 그분이 우리 담임이라고 한다. 그야 말로 허-걱, 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인상 속에 선생님은 항상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계신, 어디서나 만나면 반갑게 인사드릴 수 있는 그런 “아저씨”이셨다.  나는 늘 시끄럽게, 밝게 웃고 다녔다.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누구도 모를 정도로 밝게 사는 것이, 그 당시 내가 해내야 하는 일인 거라고 마냥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깔끔하게 교복을 빨아 입고 다니는 나를 조금이라도 집안 사정이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딱히 없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선생님은 알아 내셨다. 아직도 그때 어떻게 아셨는지 여쭈어 보지는 않았다. 어떻게 아셨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알아주시고 거들떠 봐 주셨다는 점이 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늘 나를 든든하게 해주신 것 같다. 내가 알기론, 조용히 식당에 가셔서 내 식당카드 잔고도 확인해 보신 걸로 알고 있다.  학교에 워낙 남자선생님들이 많지도 않으셨지만, 남자선생님을 담임으로 겪어본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미지여야 하는지 선입견도 기대도 딱히 없었지만, 어린 나이에 생각하고 있었던 남자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선생님은 잔소리가 참 많으시다. 요즘은 더 많아지셨을까, 그냥 지치지 않고 계속 잔소리를 하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왜냐 하면, 이것이 그 분의 애정이고 이것이 그분의 에너지였으니까. “하면 된다”가 우리 급훈이었다. “급훈”이라는 개념을 따로 두고 있지 않았을지라도 우리 반의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그런 선생님의 잔소리 패턴이자 집념이었다. 노파심이 많은 선생님은 대부분 기숙생활을 하는 아이들의 이모저모 속속들이 확인하고 물어보고 챙기셨다. 짓궂은 친구들을 필두로 우리 반 친구들은 선생님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며, 강의할 때의 행동, 목소리, 그리고 썰렁한 농담을 우리에게 할 때의 모습 이런 것들을 패러디하기 시작했고, 요즘도 같이 모이면 종종 그런 모습을 잊지도 않고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깔깔거린다.  이제 와서 아이를 키워보니 선생님의 교육철학과 선생님의 관리 철학이 참 나라는 아이를 많이 키워 주셨구나 싶다. 우리의 수학 수업은 좀 특이했다. 선생님은 수업준비를 별로 안하신 티를 팍팍 내면서 오셔서는, 문제를 내시고 다양한 풀이 방법을 아이들에게 설명하라고 한다. 조금 돌아간 복잡한 방법일 지라도, 하나의 문제의 최대한 많은 풀이 방법을 발표하도록 하신다. 나 같은 우리 반의 전통 수학 강자(나는 늘 가장 간단하게 접근하는 방법 하나만 발표하는 편임) 뿐만 아니라, 다른 공식을 적용하고 다른 논리로 접근하는 방법 하나하나를 인정하고 칭찬해 주셨다. 교육이란 문제 하나의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길을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그런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배웠고 어렴풋이 나도 시도해보고 있는 것 같다.  대부분 기숙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다 보니, 선생님은 휴일에 또는 연휴에 갈 데가 별로 없는 아이들을 댁으로 불러 가끔 술도 한잔 같이 하곤 했다. 친구와 가족이 항상 고픈 나로서는 너무나 좋은 일일 수밖에 없었다.  박형수 선생님, 하면 우리는 아직도 모일 때마다, 그 분 아직도 면도하다가 얼굴 흉터 내시나…한다. 면도하다가 얼굴을 베어서, 종종 밴드를 붙이고 오신다. 그리고 아직도 금연, 금주의 결심을 매일매일 결심으로만 하고 계실 거라고. 한 번도 현실화 하지 못한 조깅 계획은 이제는 포기 하셨으려나. 엉성하고 허술한 아제의 모습을 수 없이 보여준 것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 우리는 많은 것들을 서로 이야기 하고 서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가끔 우리 반 다른 친구가 걱정이 되어 나를 불러 놓고 물어보시기도 하시고 조언을 구하기도 하셨다. 그럼에도 우리 반에서 목소리 높여 선생님과 싸워본 아이는 나 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참 “못된 넘”이었던 것이, 야자 시간에 배가 고프다며 대놓고 나가서 뭘 먹고 오겠다고 선생님께 막무가내로 대들고, 선생님께서 말도 안 된다고 하시면, 말씀 드렸으니 무단이탈은 아닌 거라고 뛰쳐나가기도 했다. 나는 참 지각도 많이 하고, 어린 나이에 술도 배우고 야자도 빼먹고 가지가지 했었던 것 같다.  대학입시(수능 같은 시험) 전 2개월의 모이 고사 때, 시험을 두 과목만 보고 언니가 있는 북경으로 기차 열여덟 시간을 타고 도망간 적이 있다. 3박 4일을 편안하게 다 놀고, 돌아오는 북경 기차역에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차분하게 일단 와서 보자고 하신다. 아침에 동내 기차역에 도착해서 옷만 갈아입고 바로 학교로 갔다. 선생님은 나에게 정학 처분 1주일이라며 당장 짐 싸서 가라고 했고, 나는 진짜 마음잡고 공부하려고 돌아 왔으니, 선생님은 저에게 이러시면 안 된다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결국 선생님은 니가 잘한 게 뭐가 있어서 내고를 하냐며 교실에서 쫓아 내셨다. 그 와중에 나는 교실에 떡 하니 붙어 있는 성적표를 보고, 두 과목 밖에 안 봤는데도 등수가 이 정도면 나 너무 잘하는 거 아니니… 하면서 가방을 싸 들고 집에 갔던 것 같다.  여행의 피로 때문에 기숙사에서 하루를 완벽하게 쓰러져 있었고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났는데 선생님께서 기숙사로 전화를 하셨다. “학교로 돌아와. ““저… 선생님, 오후에 나가도 될까요?"“당장 나와."선생님께서 전화를 던지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나는 그 길로 학교에 복귀를 했고, 내가 선생님께 내고했던 마음잡고 공부하려고 왔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나는 한 달간의 숙식, 빨래, 공부 모든 것이 포함된 계획을 치밀하게 짰고 단 1분도 거기에 어긋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물론 마지막 모이 고사에 내 생일이 껴서 친구랑 잠깐 놀러 나갔다가 시험에 잠깐 지각하여 다시 한 번 선생님을 분노하게 한 것 말고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선생님은 우리를 한없이 참아 주시고 한없이 기다려 주셨던 것 같다. 물론 나마저도 무서웠던 순간과 모습은 있다. 내가 고3이었을 때가 한일월드컵인 2002년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대학입시가 7월 초였으니, 한창 월드컵 열기가 뜨거울 때가 우리의 대입을 향한 카운트다운도 거의 다 되갈 무렵이었다. 한국 vs 이태리 전 당일, 우리는 너무나 경기가 보고 싶었기에, 당번을 정해 교무실로 선생님께 질문을 하러 보낸 후 교실에서 소리를 꺼놓고 몰래 축구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중에 한 아이가 허둥대며 교실로 뛰어 왔고 우리는 선생님께서 뒤따라 오고 계심을 직감 했다. 하지만 핀트가 나갔던 대목은, 그 뛰어온 아이는 선생님이 안 계실 때 교실 tv에 손을 대본 적이 없는 아이로, tv를 끄는 법을 몰랐던 거다. 곧 이어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누구야. “ 이런 일에 늘 가장 용기 있고 혼자 뒤집어쓰던 나일지라도 그날만은, “저요” 했다가 당장 창밖으로 던져 버릴 것 같은 선생님의 기에 눌려 잠자코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선생님 붕어찜이 먹고 싶은데, 선생님 집 열쇠 주시면 붕어 한 마리 사서 해놓을 거라고, 열쇠를 뺏어 댁으로 치고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종종 생각이 나는 건, 고3때 나는 만성 맹장염으로 수술을 하게 되었고, 그 때 돈이 없어 선생님께서 비용을 내 주셨는데, 나중에 드리려고 연락을 드렸더니, 그 돈으로 종종 와서 술이나 한잔 사달라고 하신다. 나는 그 약속을 여태 지키지 못하고 있다.  우리 선생님께, 요즘 아이들도 퇴근 못하도록 붙잡고 질문을 많이 하고 있을까. 야자 시간에 끈임 없이 아이들에게 잡혀 있는 선생님께 요즘 아이들도 콜라라도 한 캔 챙겨드리고 있을까.  졸업을 앞두었을 때야 비로서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속절없이 늙어 가며 파릇파릇한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또 모든 것을 잊고 마음속에 묻어가며 또 새로운 아이들에게 정을 붙이려고 노력하는, 그런 고되고 고된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덧 내가 애 엄마가 되어, 아이를 안고 학교를 찾아갔을 때, 너 이렇게 엄마가 되어 오면 우리는 너무 늙어 보이잖아, 라고 하신 선생님의 농담에 이런 나를 묻어 놓고 가끔씩 이렇게 꺼내 보면서 뿌듯해 하는 것이 저분들의 행복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더 성실하게 살고 또 꾸준히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도 해 봤다.  대학 때 선생님께 전화 드려서, “저 다음 주 시험인데, 공부하기 싫어 죽겠어요”라고 했더니, “허허, 그래, 어쩌겠냐, 좀만 버텨라.”라고 하신다. 그 얘기를 하실 때 어떤 표정인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요즘도 간간이 사랑스러운 이 “아저씨”에게 전화를 드린다. "너희들이 졸업하면 전화번호부터 바꿀 거야."라고 하셨지만, 아직도 그 번호 그대로 쓰고 계시고 나도 그 번호 그대로 외우고 있다.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아무렇지 않게 그 긴 열한자리 숫자가 튀어나온다.  학교라는 시간 동안, 선생님은 우리가 그의 전부였다고 믿으시겠지만, 우리에게도 선생님이, 선생님들이 전부였다는 것을, 꼭 말씀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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