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길우 : 문학박사, 수필가, 시인 문학의강 문인회 회장 문학의강 영상낭송회 회장 skc663@hanmail.net
[서울=동북아신문]반구정(伴鷗亭)은 황희(黃喜, 1363~1452)가 좌의정 직위에서 물러나서 여생을 보내던 정자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190번지 임진강 강가에 있다.

압구정(狎鷗亭)은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영의정까지 지내고도 관직에 있으면서 즐기고자 지은 정자다. 서울 동호대교 남단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의 뒤쪽 한강 가에 있었다. 지금은 표지석만 있다.

두 정자는 이름 그대로 갈매기[鷗]를 벗하며 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 속뜻을 살펴보면 둘은 큰 차이가 있다.

伴은 “동반(同伴)하다”의 뜻이니, 정자 주인이 갈매기와 함께 살겠다는 것이다. 狎도 “친압하다”의 뜻이니, 갈매기와 친근하게 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伴은 “벗하다[友], 의지하다[倚], 모시다[陪]”의 뜻도 가지고 있으니, 사람과 갈매기 사이가 서로 벗하며, 위해주고 힘이 돼 주는 관계이다. 둘 사이에 위아래가 없이 대등하게 순수한 마음으로 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狎은 그렇지가 못하다. 狎은 “가볍게 여기다[輕視], 소홀하게 여기다[忽待]”의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친근하게 지내고자 한다지만, 사람이 위이고 갈매기는 아래라는 소위 갑을 관계가 담겨 있다. 친구는 친구이되, 사람이 갈매기를 업신여기거나 소홀히 대하는 태도가 느껴진다.

이렇게 볼 때, 반구정이나 압구정이 다 정승을 지낸 사람으로 갈매기와 벗하며 여생을 자연 속에서 지내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지만, 두 사람의 생각은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갈매기를 격의 없이 대하고자 함과, 사람 우위의 관계로 갈매기를 데리고 놀고자 함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압구정은 반구정이 담고 있는 뜻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선지, 황희와 한명회의 그 뒤의 삶도 반구정과 압구정의 뜻만큼이나 달랐다.

황희는 좌의정으로 68세 때인 1430년에 제주감목관의 일에 관계되어 탄핵을 받아 파주로 물러나 반구정에 은거하였다. 본래 낙하정(洛河亭)이었는데 자신의 뜻을 살려 고쳐 부른 것이다. 다음해에 복직 승진이 되어 87세인 1449년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을 맡았다. 1452년에 90세로 작고하고,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한명회는 1466년에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병으로 사임하고, 1469년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또 바로 사임했다. 한명회는 1476년(성종 7년)에 한강 가에 압구정을 지었다.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 ‘압구정’에는 팔작지붕으로 우뚝 솟은 정자로 나온다. 풍광이 좋아 중국에까지 알려져, 사신이 오면 구경하곤 했다.

남효온의 《추강냉화》에는, 한명회가 압구정을 지어놓고도 관직을 떠나지 않자 임금이 그를 송별(送別)하는 시를 지었는데, 이를 본 문사들의 차운(次韻) 시가 수백편이나 되었다고 나온다.

성종 12년(1481, 성종실록)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6월 24일 성종은 명나라 사신에게 압구정은 좁아서 관람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한명회가 사신을 찾아가, 얼굴에 난 종기가 낫지 않아 안 가겠다는 사신에게 “나가 구경하면 병도 나을 거"라며 청하였다. 그리고는 정자가 좁으니 정자 곁에 관청에서 큰 장막을 치게 해달라고 청했다.

성종은 하지 않아도 될 잔치를 하게 만든 한명회에게 화가 나서, “정자가 좁다면 당연히 제천정(濟川亭, 왕실 소유의 큰 정자)에 차려야 할 것이다”고 전교했다. 한명회가 다시 왕실의 보첨(補檐, 처마에 잇댄 천막)을 내려 달라고 청하자, 성종은 “지금 큰 가뭄을 당하였으므로 유관(遊觀)할 수 없다”고 듣지 않았다.

이에 한명회는 부인의 병을 핑계로 제천정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승지들이 국문(鞠問)을 주청하자 추국(推鞫)을 지시했다. 7월 1일 사헌부에서 한명회의 죄상을 보고하자, 성종은 “죄는 크지만 원훈(元勳)이니 직첩(職牒)을 거두게만 하였다.

반구정은 황희가 죽은 후 전국의 선비들이 유적지로 보호하여 오다가 6․25때 불탔다.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에 고쳐지었고, 1983년 9월 19일에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반구정 남쪽에 황희 동상이 서고, 영당(影堂)과 황희의 덕을 우러른다는 앙지대(仰止臺)가 건립되어 있다.

그런데 압구정은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시에도 사신과 고관들을 불러 뽐내고, 임금에게도 무례히 굴어 사퇴를 당한 사연까지 있었으니 누가 보존하고 싶었을 것인가. 사람들이 압구정을 일부러 押(누를/ 거느릴 압)자로 바꿔 부르기도 하였다. 한명회의 오만함이 압구정 정자마저도 없어지게 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