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남편과 연애 10주년을 맞으면서 올해의 생일 선물로, 나 홀로 이태리 여행을 받기로 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이 10년 만의 나 홀로 여행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선물인지 잘 알 것이다.

6월 6일 나는 인천공항에서 출발하여 꿈에 그리던 이태리로, 나의 첫 유럽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10년만의 어려운 여행에 아쉬움 1%로도 없을 만큼, 이태리는 눈도 즐겁고 마음도 감동 가득한 훌륭한 여행지였다.  
▲ 이태리를 대표할 수 있는 사진이 뭘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콜로세움.
 외모에 큰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카메라를 나에게 들이대고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너무나 불편한 일이었지만, 혼자서 신나게 사진을 찍어 댔고, 얼굴이 반짝반짝하다고 할 만큼 밝게 찍혀 있다. 내가 평소에 늘 하던 짓처럼, 이런 것이 행복이구나! 라고 풀어서 스스로 설득하고 또 설득한 들, 방심했을 때의 내 얼굴이 보여주는 것을 이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솔직하게 느끼는 이런 것들이 진짜 감정이고 감히 행복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아름다움- “하늘색”이 이런 색이었구나!인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구입했다. 꼭 필요하다고 한다. 운전할 때를 제외하고는 선글라스를 잘 착용하지 않지만, 일단 예쁜 신상으로 구입을 했다. 7시간의 시차가 있다 보니, 베네치아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쯤이었다. 가방을 끌고 이동하기 시작할 때부터, 선글라스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늘은 파랗다 못해, 푸른 먹칠을 하고 형광 빛을 뿌려 놓은 듯한 반짝반짝한 색깔이었다.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이런 파아란 배경으로 셀카를 대충 찍어도, 증명사진을 찍기 위하여 한껏 거울 밭치고 조명발을 낸 것보다 훨씬 밝게 나왔다. 6월 초의 이태리는, 낮에 잠깐 덥고, 저녁에 시원한 아주 훌륭한 날씨를 보여 준다. 중국에서 버스나 기차로 10시간씩 이동하다 보면, 산이 하나도 안 보이는 평야도 종종 보이고, 또 킹콩이 나올 법한 먼 곳의 큰 산도 보이며 노는 빈 땅과 띄엄띄엄 있는 집들이 늘 보인다. 여기가 그러하다. 한국이라는 작은 울타리에 너무 오래 살았나 싶을 만큼, 탁 트이는 넓은 벌판과 아무 것에도 쓰지 않는 빈 땅들과 저 멀리 보이는 만년설이 쌓여 있을 법한 산들이 너무 내 마음을 탁 트이게 해 준다. 어릴 적 많이 봤던 모습과 다른 점이라면, 바로 하늘이다. 위도의 차이 때문인가, 공기의 차이일 수도 있다. 내 눈이 더 좋았더라면 하고 원망할 만큼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또렷하고, 모든 곳이 푸르른 하늘이 배경이 되어 완성된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등산모임에서의 나의 별명이 “날씨의 여신”이다. 많이 다녀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내가 산에 갈 때마다 대기의 질과 가시거리가 몇 년에 한번 볼까 말까 할 수준이라고들 한다. 하늘아래는 동일한가 보다. 이태리도 영낙없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로 나를 맞아준다. 문뜩 의문이 생긴다. 여기는 공장도 없고 디젤차도 없는 걸까. 작은 공간을 가득가득 채워서 뭔가 끈임 없이 만들어 내는 내가 살던 동네와 그냥, 사람의 온도와 공기가 다른 건가.  친퀘테레라는 작은 동네에 갔다. 지명이 다섯 개의 땅이라는 말이란다. 그림에나 나올 법한 알록달록한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겹겹이 있는 그런 마을이다. 조금 걸어 나가니, 바다가 보인다. 파란 하늘 아래, 파아란 바다가 집들 사이로 좁게 곱게 보인다. 맥주를 한 병 사 들고 좁다란 돌길의 턱에 걸터앉았다. 참 대단한 동네다. 관광객들이 미친 듯이 몰려드는 이 시간에, 영업시간이 안됐다며 동내 맥주집이며 카페가 하나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소중한 운치를 혼자서 조용히 누리고 있었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이 아니라, 여기의 어느 한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간 쯤 뭘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잠깐 해 봤다. 아침인데, 전혀 분주하지도 않고, 서두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아름다운 동네에 오래 오래 살다 보면, 세상에 급한 것도 당장 안하면 안 되는 것도 없어지나 보다.   
▲ 친퀘때레 해변마을
  
▲ 친퀘때레 해변의 알록달록한 집
  아담한 원색 돌길을 따라 바닷가를 걷다 보면 작은 돌맹이 해변이 나온다. 거제도의 몽돌해변처럼 고른 동글동글한 돌도 아니다. 프라이빗 비치 같은, 붐비지 않고 고즈넉한 느낌의, 그리고 아무렇게나 생긴 돌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편안한 곳이다. 삼면이 높은 돌 산 같은데 둘러 싸여 있고 좁은 바다를 출구로 멀리 넓은 바다를 향하고 있는 해변이다. 늘씬한 현지인들이 띄엄띄엄 돌 위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썬텐(suntan)을 하고 있다. 그 옆에 아무 돌에나 걸터앉아 좁은 계곡을 넘어 넓고 푸른 바다를 잠깐 구경했다. 파란 색이 눈을 편하게 하는 건가. 하늘에 닿아있는 바다가 분명 둘 다 찐하고 반짝 거리는 푸른색인데, 누가 바다인지 누가 하늘인지 정확하게 보여준다. 자연이 보여주는 “색”이란, 같은 듯 다른 듯 풍부하고 깊이 있는 것 같다.   도처가 푸르다, 그리고 아름다움이다. 경치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면 뭐니뭐니해도 쏘랜토일 것이다. 카프리섬을 지중해의 보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는 카프리섬 보다도 쏘랜토항이 더 명물인 것 같다. 쏘랜토항은 산꼭대기에서 뚝 떨어진 벼랑 아래에 작은 항구를 가지고 있는 느낌의 곳이어서 시내에서 항구와 바다를 바라보면, 온통 깎인 듯한 절벽 아래에 신화에나 나올 법한 푸르른 바다가 닿아있는 느낌이라, 그 벼랑 위의 집도, 그리고 그 아래의 바다도 너무 현실적이지 않게 보이면서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웅장함도 보여 준다. 바다를 매일 보면 우울해진다고 하는데, 이 벼랑 위에 살면서 가깝지만 먼 듯한 저 바다를 매일 보면 마냥 행복해질 것 같다.  
▲ 쏘랜토 항

쏘랜토에서 카프리섬으로 들어가는 뱃길을 보며 왜 사람들이 머나먼 길을 달려와 지중해를 보려고 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지중해는 다른데서 보지 못했던 파란 색을 지니고 있다. 가이드 아저씨가, 배를 타고 들어가다 보면 파아란 바다가 보이다가 조금 더 가면 푸우른 바다가 보이다가 다시 파아란… 이라고 할 때 우리는 다 웃었다. 뱃길을 바라보면서 그 파아란과 푸우른의 느낌을 알 것 같아 감탄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가 이리도 궁핍하구나, 자연의 하나의 구석을 묘사하기에도 터무니없이 부족하구나, 하고 너무 절실하게 느꼈다.

 
▲ 지중해 뱃길
  
▲ 지중해의 진주 카프리섬
  이태리 하면 어디 가나 성당, 광장, 탑이라고 한다. 신기한 건, 가는 곳마다 다른 느낌의 성당, 광장, 탑이고 하나의 하늘인 듯 하지만 그 성당 그 광장 위의 조각 각의 하늘들이 다 다른 자태를 보여준다. 자연은 그 자연을 담는 마음이 더 중한가 보다.  이태리는 내가 좋아하는 너무나 많은 역사와 철학과 사람을 담고 있기에 나는 이태리는 문화탐방의 고장이라고 설정하고 갔다. 하지만 버리지 않고 쌓여진 철학과 문화란 그리고 역사란 그러한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태리는 나에게 그동안 가지지 못했던 생각의 장르를 열어가게 한 것 같다.  나의 밀라노에 대한 로망은, AC밀란에 의하여 열리게 되었다. 아쉽게도 이번에 AC밀란의 홈그라운드도 구경하지 못한 채 돌아와야만 했고, 나에게 다시 가봐야만 하는 핑계를 잘 만들어 준 것 같다.  
▲ 밀라노 두오모성당
 밀라노 두오모성당 사진을 두고 조작이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두오모성당은 성당 자체로 커다란 돌덩어리를 구석구석까지 디테일하게 조각을 해 놓은 커다란 조각물, 커다란 예술품이다. 그리고 이 하얀 예술품 뒤에 하늘은 누가 누굴 받쳐주는 건지 모르겠지만, 유난히 하늘이 더 찐하게 파랗게 보인다. 세계 패션의 중심지답게 두오모성당 앞 광장에는 다양한 사람들, 공연들, 전시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넓은 광장에 앉아 멍하니 이 커다란 조각물 앞을 오가는 사람들만 보고 있어도 따뜻하고 반짝거리는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기에 충분히 충실하게 느껴진다.   두오모 성당 앞에 에마누엘 2세 갤러리가 자리하고 있다. 이태리의 유명 브랜드들의 그랜드 샵들이 다 들어와 있고 최신 신상들만 전시하고 있는, 쇼핑몰이라기보다는 명품 전시장 같은 곳이다. 명품에 대하여 일자무식인 나로서는 이런 것들이 있구나 하는 수준에서 둘러보기만 했지만, 명품들보다 명품관의 남자 직원들이 더 명품이라는 점이 나를 크게 호강 시켰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에마누엘 2세 갤러리의 가장 큰 특징은 화려한 바닥이다. 완벽하고 화려한 색감과 무늬와 조금의 깨짐이나 하자가 없는 그 바닥은 사람이 의도적으로 인테리어를 위하여 만들어낸 조각들일 것 같았는데 전부 대리석이란다. 금색 반짝거리는 대리석 바닥이 프라다, 구찌보다 훨씬 감동 적이었다.  이태리의 타 지역의 추종을 절대 불가한 아름다움은 단언컨데, 종교인 성지순례의 고장, 아시시일 것이다. 아시시는 성 프란체스코가 태어나고 자라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가난한 자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했던 곳이라고 한다. 이 작은 도시는 도처가 소박하고 깨끗한 모습인 하얀색 건물과 도로들이다. 작은 골목골목에 간혹 기념품을 팔기도 하고, 또 이태리에서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이 마구 돌아다니는 내가 본 유일한 동내이기도 하다. 입구 쪽의 키아라(글라라) 수녀를 기리기 위한 키아라 성당을 시작으로, 산 루피노 성당, 코무네 광장 앞 성당, 그리고 대미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 까지, 하나 같이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고, 첨으로 기도를 하고 싶은 생각을 심어주기도 한다.  
▲ 아시시
 
▲ 아시시
 종교란 어떤 것인가, 잠시 생각을 해봤다. 익히 보던 동내 교회, 성당, 그리고 사찰, 이런 것들이 나에게 준 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이에 의하여 종교라는 것을 함부로 시답잖게 생각했던 나다. 하지만, 그건 종교를 접하고자 하지 않았던 나의 오만이라는 것을 나는 느끼게 되었다.  아름다운 성당, 아름다운 마을,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 또 다른 여행지에서도 또 다른 나의 마음이 한껏 열어 받아 주겠지만, 아시시의 한적한 마음의 안식처 같은, 종교의 아주 작은 일부의 생각과 아주 작은 일부의 시도인 가난한 순수한 마음의 기도와 봉사를 상징하는 이곳은, 성 프란체스코라는 이름으로 그 정체성을 정의하고 있고 길바닥의 돌 한개 한개마저 그런 정서가 깃들어 있을 만큼 조화롭고 무게 있는, 세상 하나 밖에 없는 그런 곳이다. 그 곳에도 어김없이 파아란 하늘이 배경이 되 주었고, 성곽에서 내려다보면 어김없이 광활한 아름다운 그리고 빈 땅이 많은 여유로운 동내들이 눈에 들어온다. 푸른 하늘과 하얀 도시, 누가 누구를 받쳐 주고 누가 누구를 만들었는지, 그냥 그들은 오랜 시간 그런 조화를 안고 있었다.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은 채로 있어서 아름다운 곳과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아름다운 곳, 그들은 색깔은 다르지만, 자연의 섭리가 똑같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 공통점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의 마음의 움직임 하나하나, 또 그런 것들이 한세대 한세대에 걸쳐 물려 내려가는 그런 것 또한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싶다.  아름다움–철학, 사람이 이렇게까지 살아 봤고, 이렇게 살아남았구나.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을 보고 종교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커다란 건물의 대리석 한 조각마저도 허투루 두지 않는 섬세한 노력과 감성은, 누가 시켜서는 할 수 없는 그 어떤 마음의 표현일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화가가 아닌 철학가로 내가 기억하고 있던 미켈란젤로의 그림들과 조각들을 바라보게 될 때 인간, 정의, 희망과 믿음, 이런 의미들이 그 당시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바였고 그 동내의 종교가 담고 있는 바라는 것을 더욱 깊이 느꼈다.  바티칸에 들어가, 성 배드로 성당까지 갔을 때 나는 드디어 종교에 대한 다른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신들과 사람들이나, 종교가 믿고 있는 수많은 정의와 속죄, 그리고 인생들은 그냥 수많은 마음의 변화를 담고 있는 것이지, 무지하고 무식하고 초인간적인 현실로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천지 창조의 아담 창조 같은 경우,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선악과를 먹는 것들을 담고 있지만, 사람들은 아담이라는 사람이 진짜 그 과일을 먹어서,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영혼이 만들어져 면하게 되는 수많은 유혹들이 있고, 그런 유혹들에 일부 넘어 갈 수밖에 없으며 그러면서 현실의 수만은 갈등과 문제들을 야기하게 된다는 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야말로 우리가 면하고 있는 이 복잡다단한 현실, 관계, 보편 철학인 정의와 제도, 이런 것들이 이렇게 만들어 졌다고, 이런 근본을 바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겨내고 풀어가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종교가 없었던 나지만 기도실로 가서 조용히 기도를 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내가 함부로 긍정을 내려놓고 친절을 내려놓고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나에게 힘과 응원을 달라고! 내가 매일매일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조금이라도, 한번이라도 더 관용을 베풀고 이해를 하려고 노력을 할 수 있도록 힘과 응원을 달라고! 내가 좋은 사람이기 바라는 이 마음이 지치지 않도록 다시 다짐하고 다시 노력할 꺼라고, 성인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기도를 하고 또 했다. 누구나 스스로 느끼는 강도의 어려움을 겪어 왔을 것이고, 그것이 치졸하던 위대하던 그 자신에게는 힘든 시간이겠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놓고 아름다움을 향하여 기도하며 스스로를 다듬고 또 다듬어 왔던 것 같다. 이런 종교와 철학이 만들어 낸 것이, 행복, 선의, 배려, 용서 이런 나에게 용기를 주는 단어들이고 방향들이다.  
▲ 성 배드로 성당의 수많은 기도실 중의 하나
 
▲ 가작 작지만 가장 큰 힘을 가진 나라, 바티칸
 긴긴 세월을 담은 조각 하나 하나가, 그림 하나하나가 그리고 여기를 찾는 사람들의 기도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나에게 감당키 어려운 수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 같은 고집스럽기 그지없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지 궁금하다면, 바티칸을 찾아가 봐야 하고 성 배드로와 같은 긴긴 역사를 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지혜의 현장을 찾아가 봐야 한다고 밖에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이렇게 이태리는 늘 현실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나에게, 새로운 생각의 장르를 열어 주었고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뜨게 하였다.  베네치아라는 아름다운 수상 도시를,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으로 너무 너무 기대했지만 실제로 본 이후는 너무 놀라워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이로부터 약 2천 년 전부터, 높은 산에서 바닷물에도 썩지 않을 수 있는 나무를 한 개 한 개 옮겨 와 바다에 기둥을 박고, 또 더 먼 곳에서 자갈을 한 수레 한 수레 옮겨 와서 그 사이에 깔았으며 그 위에 바닥을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한개 또 한개 올렸다. 이는 수백 년, 거의 천년 가까이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 베네치아의 바닷속의 건물
  
▲ 베네치아, 탄식의 다리
 이런 베네치아를 보면서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그림은 만리장성이었다. 나는 그동안 줄곧 만리장성을 중국 통치자들의 독재와 난폭에 의하여 만들어진 산물로 알고 있었다. 그 높은 산들의 산등성이까지 그 무거운 돌을 이고 올라가 한 개 한 개 쌓아 올린 조상들에게 한없는 동정의 마음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원래 거기에 살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외부 민족의 침입에 의하여 내 가족과 내 친구의 살육을 옆에서 목격하게 되었고, 이들은 바다 속에 도시를 만들어 천연장벽으로서 외부의 침입을 막고자 굳건한 결의를 다졌던 것이다.  우리는 마냥 “문화”와 “문명”은 현대인의 산물인 것처럼 인권과 평등과 생명의 경이로움을 소리 높여 떠들고 있지만, 목숨은 그때부터 소중한 것이었고, 가족에 대한 살육이란 그토록 무서운 것이어서 한번 겪은 그들은 세세대대로 내려오면서 이 수상 도시를 만드는 것이 타고난 숙명이었던 것처럼 살게 되었던 것 같다. 만리장성 또한 그러하지 않았을까. 수시로 들이닥쳐 수시로 나의 가족을 죽이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갈수 있는 두려움에 자유롭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 또한 숙명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란 험악하면서도 따뜻한 현실을 험악하면서도 경이로운 방법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것 같다.  내가 보았던 광장중에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이다. 아름다운 성당, 아름다운 광장 이런 거대한 구조물들은 조용히 그 자리에 남아 한 때 한없이 번창했던 자기들의 과거와 자부심을 뽐낸다.  
▲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의 시계탑
 
▲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
 로마에 갔을 때 트레비 분수 앞에서, 이런 작은 분수가 왜 이태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꼭 보여 지고 싶어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인류는 유목, 정착 등 일련의 변화의 과정을 겪어오면서 추상적인, 정신 적인 많은 것에 대한 신뢰를 가지기 시작하였고 비로소 도시를 만들고 왕국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 명 이상의 도시가 만들어 지게 되었고, 식용수의 조달이 하나의 큰 문제꺼리로 부상한다. 로마는 그 시기에 도심에 관상용 분수를 만들 만큼 발달된 거대한 풍요로운 대세 도시였음을 바로 이 트레비분수를 통하여 마음껏 뽐냈다. 모든 도로가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이 있다. 모든 고대 도시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하나같이 요새에 지어지거나 이런 저런 차단 조치들을 하고 있다. 마치 베네치아와 같은. 하지만 로마는 모든 곳으로 갈 수 있는 넓은 도로를 뚫어서 가지고 있었다. 이는 강대한 대 로마제국에서 나오는 오만 같은 자신감이자 그 당시의 역사와 현실이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은 12세기 한때의 해상 패권을 가진 대국으로서의 실력과 풍요로움을 마음 껏 자랑하는 당당한 아름다움을 간직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겪으면서 많이 나왔던 이야기가 “국가란 무엇인가”이다. 손석희 앵커의 앵커브리핑에서 이런 맥락의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들의 자유를 대가로 우리들을 보호할 수 있는 국가를 요구하고 있다.”폼베이라는 동내를 가보면서, 그 먼 옛날 사람들이 만들고자 했던 “국가”가 어떤 것인지 조금 와 닿기 시작했다.  폼베이는 한 번의 화산폭발 때문에 서기 79년, 순간에 멸망한 슬픈 도시다. 그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놀라운 상황 세 가지를 발견한다.  첫 번째, 서기 1세기의 이 도시에는 역할의 분화가 정확이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은 집에서 밥을 해 먹지 않을 만큼, 각자의 “전공분야”의 장사를 하고 있었고 찜질방 시설까지 달려 있는 목욕탕까지 만들어져 있다. 두 번째, 이 도시의 부자들은 벽에 그림을 붙여놓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장 놀라운 세 번째, 인구 만 오천 명이었던 이 도시에는 연극 등 오락을 위한 원형극장이 만들어져 있다. 그 뜻인 즉, 배우도 있고 스토리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 폼베이 유적지
  
▲ 폼베이, 2천년 전의 공연장
 2천 년 전의 만 오천 명의 이 도시는 현대인으로서의 나의 오만을 깡그리 없애 버렸다. “사람”으로 살고 있는 한 느끼게 되는 그런 “인간다운 삶”이라는 의미는 예나 지금이나 존중 받아야 하고, 이미 수천 년 전부터 흘러 내려왔음을 이 폼베이의 황폐한 도시 유적이 여실히 보여 준다.그리고 이런 것들이야 말로 “국가”란 무엇인지에 대한 보편적 정의가 아닐까 싶다. 나의 “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직접 내 손으로 하지 않더라도, 목욕탕은 제대로 돌아가고 “연극”을 나의 직업으로 하더라도 나에게 안정적인 삶과 보호를 줄 수 있는 그런 공동체!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2천 년 전의 사람들이 남겨 놓은 이 많은 것들은, 2천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람이 무언가를 바꿔 놓기가 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묵묵히 알려주고 있다.  사람–“동네 거지도 헐리웃 미남 급”이라고 하는 소문에 관하여이태리 여행을 간다고 하니, 많은 친구들이, “미남주의보”를 보내온다. 밀라노 명품 매장의 명품남과의 해후를 뒤로 하고도, 진짜 허름한 청바지, 티셔츠 차림의 오토바이 아저씨마저도 주먹만한 얼굴에 수려한 이목구비를 가지셨다는 사실을 수도 없이 확인했다. 이 동내 아저씨들은 나이 먹고 아주 살이 찌지 않는 한 헐리웃 급 미남을 유지하고 있음은 확실한 것 같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사람들의 패션센스와 여유다.  밀라노가 세계 패션의 본고장인 이유는, 뭘 걸쳐도 예쁜 이동내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라고 일행 분이 말씀하신다.  여기에 와서, 내가 알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의 패턴이 존재함에 너무 큰 감사를 느꼈다. 이 동내는 오후 6시가 지나면 문을 열고 있는 가게가 거의 없다. 야근 이런 건 외계 용어로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금융가는 어떨지 알 수 없지만, 동내는 그렇다. 부모님이 소세지 가게를 하고 계셨다면, 그 가게를 물려받아 그 곳에서 조용히 한적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고, 6시 이후는 가족들과의 여유와 즐거움을 가지는 그런 동내라고 한다. 대학교는 공부 하고 싶은 아이만 가는 곳이고, 배관공과 금융회사 임원이 좋은 이웃으로 같이 사는 그런 동내, 낮잠 시간을 마음에 드는 대로 가질 수 있는 동내, 24시간 편의점이 없는 동네.  불편하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아이가 야간 편의점 알바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참 따뜻한 동내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는 남을 쫓아가기에 너무 바빴던 사람들인 것 같다. 항상 뭐든지 빨리, 잘 해야 하고, 그게 잘 안되면 시간을 늘여서 더 많이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은 게으름이라는 편협적인 인식에까지 이르지 않았을까.  
▲ 다빈치와 그의 꽃미남 제자들
 
▲ 신처럼 묘사된 힘있는 성인 인간의 상, 다비드
  물론, 이태리 사람들은 이렇게 살만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많다. 수많은 관광 자산과 자연경관과 훌륭한 지중해 기후 등등. 그 중에서 개인 적으로 가장 부러운 것은 두터운 철학과 미와 행복에 대한 그들만의 고집이다. 우리가 정녕 그렇게 삶이 어려워서, 행복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였고 “성공신화”만이 유일한 사회의 “우등생”의 기준이었던가. 우리 부모님만 본다면, 행복에 대한 추구가 없거나 이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유교”라는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배려를 행동으로만 하는 그런 “과묵”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결국 세상이 빨리 빨리 돌아가면서 “말하지 않는 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 또는 없는 것들로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문제가 뭘까”라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 “나아질 방법이 뭘까”가 훨씬 유의미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이다.   어쨌든, 그들은 우월한 외모와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런 여유를 가족에게 게으름으로, 패션으로, 음악으로, 문화로 누리고 있다. 그리고 수천 년간 그렇게 살아오지 만은 않았겠지만, 그래도 지금 그런 것들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왠지 희망적이고 기분 좋게 한다. 남편의 10년간의 사랑을 고마워하며 앞으로의 10년 동안, 이런 예쁜 것이 있으면 꼭 함께 봐야겠다는 마음을 다져 가면서 가졌던, 나 홀로 이태리 여행이었다.  
▲ 이태리의 땅
 중간 중간 먹었던 맛있는 음식들, 젤라또, 와인, 맥주, 그리고 안주들이 더더욱 이번 일정을 풍요롭게 하고 나를 정신없게 매료 시켰지만, 이렇게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에게 나 홀로 여행을 선물해준 내 남편과 내 아이에게 또 한 번 따뜻함과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 수많은 감동과 생각들이 마음과 머리에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나의 언어와 나의 표현의 한계를 또 한 번 여실히 들춰냈던 것 같다. 그냥, 너무 좋은 여행이었다.  그리고, 내 가족들과 꼭 다시 한 번 하고 싶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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