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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여섯 형제가 살던 땅 그리고 고려영'... 녕안(宁安) 조선족 이야기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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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03  20: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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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강신문=동북아신문]전하는 바에 따르면 옛날 청나라 황족의 여섯 형제가 각기 한곳씩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옛날 옛적의 이 이야기는 옛 지리서 '녕고탑기약(寧古塔紀略)'에 기록되고 있다. 청나라 초, 녕고탑 현지에서 살았던 오진신(吳振臣)은 이 글에서 만주(滿洲)는 여섯을 녕고(寧古)라고 하며 개()를 탑이라 한다고 설명한다. 녕고탑은 현재의 흑룡강성(黑龍江省) 녕안(寧安)을 이르는 옛 지명이다.
 
그러나 녕고탑의 이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확실한 건 옛날의 그 땅은 탑이 없는 탑으로 지명을 만들고 있다는 것.
 
옛 이야기를 기록한 문인 오진신은 강희 3(1664) 녕고탑에서 태어난 토박이다. 그의 부친은 순치(順治) 14(1657), 과거 시험장의 억울한 재판사건으로 녕고탑에 멀리 정배를 왔다고 한다. '대청률(大淸律)'의 형법은 2천리 지어 4천리 밖으로 정배를 보냈다. 녕고탑은 청나라 때의 이런 '정배 문화'에 속한다는 얘기이다.
 
   
▲ 청나라 때 봇짐을 메고 있는 기인旗人,봇짐을 머리에 이고 있는 조선인 여인이 유표하다
그렇다고 해서 훗날 녕고탑에 나타난 조선족의 선인(先人)들도 그 무슨 사건에 연루되어 이역으로 정배된 건 아니다. '녕안 조선족 100년사'의 편찬에 참여한 한성수(韓成洙) 씨가 밝히는 내용이다.
 
"현지(縣志)에는 광서(光緖) 15(1889), 봉금(封禁)이 풀리면서 조선인 간민(墾民)들이 녕안에 대량 천입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간민은 현재의 녕안 조선족사회를 형성한 최초의 이민이었다. 조선인 간민은 또 녕안 동남쪽 동녕(東寧)과 북쪽 해림(海林), 목릉(穆陵)에도 대량 천입했으며 여러 지역에 조선인 간민촌(墾民村)을 만들었다. 당시 이런 마을은 속칭 '고려영(高麗營)이라고 불렸다.
 
기실 '고려영'은 명나라 말, 청나라 초 만주 기적(旗籍)에 들었던 고려인(조선인) 마을의 옛 이름이었다. 녕고탑의 고려 기인(旗人)은 김씨, 한씨, 박씨, 리씨 등 40여개 성씨였다고 '녕안현지(寧安縣志)'가 기술한다.
 
후금(後金)과 청나라 때 요동(遼東)과 하북(河北) 등 일대에서 많은 고려인(조선인)과 한인(漢人)이 만주 8기군(八旗軍)에 편입되고 있었다. 그들은 기적에 편입되어 만주 공동체의 성원으로 되었다. 와중에 한인 기인은 대부분 순치 10(1653)부터 강희(康熙, 1662~1672) 초년에 녕고탑에 왔다.
 
녕고탑에 천입한 고려인 기인은 일부 강남향(江南鄕) 황기툰(黃旗屯)에 정착했으며 그 외 동경성(東京城)의 합달만(哈達灣), 우장(牛場)에 정착하였다. 옛날 양황기(攘黃旗)와 정황기(正黃旗), 정백기(正白旗) 등은 만주 8기의 상3(上三旗)로 황제가 직접 통솔하는 친병이었다. 강남의 마을은 이름에 황기(黃旗)를 달고 또 고려영이라고 불렸다고 하니, 앞뒤의 퍼즐을 맞춰보면 황기툰 기인의 신분 등이 명백히 밝혀질 것 같다.
 
지명 고려영은 녕안에 군영이 아닌 학당에 또 한 번 나타난다. 광서(光緖) 34(1908), 동녕(東寧, 옛 녕안의 소속) 고안촌(高安村)에 관영 소학당(小學堂)이 설립되었다. 촌장 안종호(安宗浩)의 신청으로 한인(韓人)이 전부 입적하고 서숙을 학당으로 고쳤다. 고안촌의 다른 이름이 바로 고려영이였다.
 
   
▲ 현 녕안조선족중학교 전신인 송강성 제8중 조선부, 졸업사진 뒷쪽의 교사는 고려학교의 옛 건물이다.
"세 마디 안짝에 제 직업의 말을 한다"더니 한성수 씨를 이르는 말이렸다. 한성수 씨가 유달리 '고려영'을 기억한 것은 학당과 나란히 출현하기 때문이 아닐지 한다. 그가 훗날의 서당의 훈장으로 녕안조선족중학교의 전 교장인 것이다.
 
이 조선족중학교의 전신 역시 별종의 '고려영' 학당인 '녕안고려학교'였다. 옛날 현지의 큰 부호 함상기(咸相基)가 세운 학교이다. 학교의 정문 윗쪽에는 함상기의 초상이 액자에 모셔 있었다고 한다. 기실 함상기는 낫 놓고 기윽자도 읽기가 힘든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그가 남달리 학당에 관심이 쏠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슬하의 오누이 가운데 아들은 도쿄대학, 딸은 서울대학에 입학했다는 게 후문이다.
 
함상기는 총명이 과인하고 특별히 상술(商術)에 능했다고 함씨 가문에 전한다. 한때 강동향(江東鄕)의 녕동촌(寧東村)에는 일명 '함씨말뚝'이 박혀 있었다. 녕동촌은 예전에 만족말로 '흰 바윗돌의 벼랑'이라는 의미의 항와툰(缸窯屯)이라고 불렸다. 함상기가 지경 표지물로 땅에 놓은 여섯 개의 바윗돌은 분명 마을 부근의 이 벼랑에서 갖고 온 것 같다.
 
"그때 우리 마을처럼 녕안의 많은 땅은 숙부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어."
 
함상기의 5촌 조카 함명렬(咸明烈)이 이렇게 함씨 가문에 전하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 줄곧 함상기의 집에 기거하면서 글공부를 했다고 한다.
 
함명렬이 부친 함규성(咸規誠)을 따라 두만강을 건넌 것은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함규성은 함상기와는 적자(嫡子)와 서자(庶子)의 차별을 떠나 자별난 사이였다. 그래서 장자 함명렬을 데리고 함상기가 살고 있는 목단강(牡丹江)에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함규성은 고향에서 독립활동의 혐의로 여러 번 투옥된 적 있으며 신변에서 늘 일본 군경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훗날 함씨의 선산 무덤지기의 아들 최병택(崔炳澤)은 이렇게 그의 부친이 전한 이야기를 회억하고 있었다.
 
함명렬과 손영숙 부부 그리고 세 자녀의 가족 사진, 1978년 마을에 사진사가 와서 이 사진을 남길수 있었다고 한다.
 
   
▲ 함명렬과 손영숙 부부 그리고 세 자녀의 가족 사진, 1978년 마을에 사진사가 와서 이 사진을 남길수 있었다고 한다.
"어르신(함규성)은 그때 1년에 두 번 정도만 귀가하셨다고 해요. 모내기를 하는 봄철과 벼가 익는 가을철에요."
 
함규성은 만주로 떠날 때 아들 함명렬과 함께 족보와 토지문서를 독에 넣어 옛집 뜰의 큰 뽕나무 기슭에 파묻었다. 1989, 함명렬은 고국방문을 앞두고 얼결에 이 비밀을 자랑 삼아 누설했다. 미구에 그가 경주 산내면 일부리의 옛집을 찾아갔을 때는 누군가 벌써 그 독을 파헤쳤다라고 한다.
 
함명렬이 새 족보를 만난 그 때는 그가 알던 옛 가계가 아니었다. "고조부의 아들 이름이 바뀌고 있었어. 27대손의 증조부는 원래 함영달(咸永達)이였는데"
 
함명렬의 가문은 함왕(咸王)을 시조로 하며 고려의 개국공신 함규(咸規)를 중시조로 삼는다. 함규의 후손인 함제(咸濟)가 명주(溟州) 즉 지금의 강릉(江陵)으로 이주하면서 함제의 후손들이 양근(楊根, 양평) 함씨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으로 삼았다. 거두절미하고, 26대손 함동근-27대손 함영달(咸永達)-28대손 함두연(咸斗曣)-29대손 함규성으로 잇는 가계는 함규성이 녕안에 갖고 온 친필 가첩(家牒)이 좌증(左證)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함동근의 자손은 29대손 함규성까지 3대 독자이며 함명렬은 제26대손 함동근의 직계 고손자이다. 그래서 함씨 가문에 내밀하게 전승되던 선조 때의 일부 옛 토지문서는 종국적으로 함명렬의 가족에게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 같은 이야기 때문에 잠깐 다른 데로 글이 흘렀다. 함상기는 4촌 형제 함규성에게 땅을 떼어주며 이에 따라 함규성은 녕동촌에 안착한다. 이듬해 함규성은 경상도에 가서 고향에 남아있던 처와 여섯 오누이의 기타 세 아들, 딸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큰 딸은 이미 대구(大邱)에 시집을 가서 가족의 이민 행렬에 가담할 수 없었다. 함씨 가족처럼 녕동촌에 정착한 경상도 이주민은 나중에 10여 가구에 이르렀다. 와중에 함규성과 김필진(金弼振), 최만식(崔萬植) 등은 최초의 이주민이었다. 이 즈음인 1935년 녕안은 조선인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59개 현의 하나로 되고 있었다고 '만주국지방사정(滿洲國地方事情)'이 기록한다. 이에 따르면 1933년부터 1943년까지의 10년 동안 녕안의 조선인은 무려 6,898가구의 29,143명의 인구로 급증했다. 이로써 녕안은 어느덧 흑토의 유명한 조선인 집거지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손영숙(孫英淑, 81) 가족의 녕안 이주는 공화국이 창건된 약 10년 후의 일이다. 1957년 연변 용정(龍井)의 승지(勝地)에서 살고 있던 조선족의 15가구가 흑룡강에는 옥토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집단이주를 했다. 손영숙 역시 함씨처럼 선조의 옛 고향이 남쪽의 경상도이다. 조부 손창영(孫昌榮)은 경상도의 밀양(密陽)을 떠나 함경북도의 어랑(漁郞)에서 한동안 거주, 1910년경 용정 부근의 마을에 와서 행장을 풀었다. 그러다가 사촌형제가 도박으로 밭을 잃게 되어 부득불 심산벽지인 승지의 산수동에 이사했다고 한다.
 
옛 고향의 이웃인 손영숙과 함명렬은 산과 강을 건너 그렇게 이역의 흑토에서 부부의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한 고향의 옛 이웃이라고 해서 그들처럼 모두 금슬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 함규성이 자필로 베껴 가족에 남긴 옛 족보의 일부
 
1960년대 초, 함명렬은 목단강의 어느 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었다. 어느날 함명렬은 수업을 하던 도중 김씨 성의 고향 사람에게 끌려 교단에서 내려왔다. 김씨는 함씨가 경주와 녕안 두 나라 두 지역에 모두 땅을 갖고 살던 부자였다는 '죄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은 새끼줄을 보고 놀란다." 그 후 함명렬은 녕동 부근의 산에 나무를 캐러 갔다가 5촌 숙부 함상기의 옛 머슴을 만났는데, 옛날 함상기에 집에서 숙박했던 그에게 머슴이 알은 체를 하자 나무고 뭐고 허둥지둥 뒤돌아섰다고 한다. 함명렬은 녕동촌으로 압송되듯 돌아온 후 시골의 농부로 한생을 묻어야 했다. 그는 다름 아닌 고향 사람에 의해 비뚤어진 인생을 한탄하면서 늘 술로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함상기는 이런 인생사를 미리 읽고 있는 듯 했다. 그는 19458.15 광복에 즈음하여 조선 청진(淸津)으로 떠나갔다. 이때 대륙 조선인 이민의 반수를 차지하는 약 100만 명이 귀국했다고 하는 통계가 있다. 실제 함명렬도 그 무렵 가족을 이끌고 귀국을 시도했다고 한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의 일이었다. 녕동촌의 경상도 이민들은 그처럼 소지하기 힘든 물건들을 처분하고 귀향길에 올랐다. 나중에 그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두만강 북쪽기슭의 도문(圖們)에 집결했다. 3.8선이 가로 막혔고 변경에 단속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때 경상도 이민들은 일명 '마루 세'라고 하는 집세를 지불하면서 마루를 임시 침대로 삼았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경상도 이민들은 '제자리의 걸음'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모두 녕동으로 돌아왔다.
 
함명렬은 회갑이 지난 1989년에 비로소 옛 고향을 찾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51년만의 재회였다. 경상도 옛집의 뽕나무는 여전히 뜰에서 자라고 있었지만 뽕나무 아래에 파묻은 옛 기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다.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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