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서울=동북아신문]이성계 즉 태조는 조선왕조의 건국시조이다.태조는 무명장수 시절에 고향에서 처로 맞이한 한씨에게서 방우,방과,방의,방간,방원,방연 등 6남을 두었고 개경에서 새로  맞은 처 강씨에게서 방번,방석 등 2남을 두었다.

 태조는 강씨를 수비(으뜸 왕비)로 책봉하고 한씨를 차비(버금가는 왕비)로 삼았다.그리고 강씨 소생인 왕자중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이에 한씨의 소생들이 분을 참지 못 하고 동복형제들과 의기투합하여 태조 7년 (1398년10월 6일)에 난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이 '왕자의 난'에서 강씨 소생인 이방석과 이방번이 살해되고 한씨 소생의 둘째 아들 이방과가 등극하였는데 그가 바로 조선조 2대왕 정조이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쿠테타의 주동자인 한씨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장자승계의 원칙에 따라 왕위를 이방과에게 양보하였다.하지만 왕위를 욕심 낸 이방원은 정종 2년 음력 1윌에 이방간과 함께 제 2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종에게서 왕위를 양위받아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선조 3대왕 태종이다.

 두 번의 '왕자의 난'이 있은후 강빈을 아낀만큼 강빈의 아이들도 아낀 이성계(당시는 상왕)였기에 이방원의 등극을 부정하며 옥새를 가지고 함경도 함흥으로 내려갔다.실은 태조 이성계의 개국대업에는 이방원의 공헌이 그 어느 아들들보다 크다. 공헌이 큰 만큼 이방원의 욕심도  컸다.이방원은 이성계를 불러들이기 위해 수차 신하들을 함흥으로 내려보냈다.

태종 이방원은 선후로 무학대사 성석린 ,환관 김완,예문관 대제학  이직,청원군 심종과 예문관 제학 유창을 보내 이성계를 모셔오도록 하였다.하지만 번번이  이성계에게 살해 되여 돌아 오지 못하였다.

 이것이 함흥차사의 유래가 되는 이야기다.이 이야기가 세간에 퍼지면서 한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으로 씌여져 오늘에 이르게 된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이와 다르다.이방원이 보낸 사람들은 이성계에게 살해된것이 아니라 번번히 퇴짜 맞고 돌아 왔을뿐 죽은자는 없었다.사실은 사실로써 받아 들이면 될것이고 고사성어는 그 뜻만을 새겨두면 좋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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