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오로지 한곬으로 향한 한조각의 붉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巷間에 널리 膾炙된 성구이다

 1388년에 고려 조정에서는 북벌을 계획하였다.즉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요동정벌에 나선것이다.이리하여 출정군은 6월 11일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진주하였다.때는 마침 장마철이라 큰 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여 더 나아가지 못  하게 되자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하여 북진 4대 불가론을 왕께 올려 회군을 청하였다.하지만 받아들여 지지 않자 6월 26일 회군하여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우왕과  최영은 반역을 꾀하는 이성계에게 반격하였으나 끝내 막아내지 못 하고 체포되여 우왕은 강화도로 추방되였고 최영은 고봉현으로 귀양 가게 되였다.이것이 고려말기 위화도 회군이다.

회군한 이성계는 개경을 점령하고 우왕을 폐위하였다.대신 9세의 창왕 (창왕도 후에 이성계를 살해하려 했다는 죄로 강화도로 유배되였다)을 옹립하여 섭정을 시작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당시 신진사대부 사이에서는 개혁의 방향을 둘러 싸고 서로 대립하였다.이색,정몽주 등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실을 보존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한 반면 이성계,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쿠테타를 주장하였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명나라에서 돌아 오는 세자를 마중하기 위해 황주로 나갔다가 사냥중에 낙마하는 바람에 은신해 있자 정몽주는 이 틈에 측근들과 함께 역성혁명파의 핵심세력인 정도전,남은,조준 등을 탄핵하여 유배시킨다.이성계는 낙마로 인해 크게 다쳤으므로 어쩔수 없어 이방원을 불러 정몽주에게 찾아가 자신들의 새 왕조 건립에 참여할것을 권해 보라 지시하였다.이방원은 정몽주와 정자에 둘러 앉아 그를 떠보기 위해 시조 "하여가"를 지어 보였다.그 내용인 즉"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우리도 이 같이 얽혀 천년만년 살고지고".함께 힘 합쳐 새 왕조를 건설해보자는 회유였다.이에 정몽주도 시조"단심가"로 화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한 왕만을 섬기겠다는 신하의 충정심을 나타낸 것이었다.

 정몽주의 마음을 되돌릴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수하 조영균을 시켜 개성에 있는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하였다.역성혁명의 장애물이 제거되자 1392년 7월 정도전,남은,조준,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 나아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하여 태조 왕건의 고려왕조는 474년만에 공양왕을 끝으로 멸망하고 이성계의 519년 조선이 막을 올리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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