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동국: 룡정시출신, 연변대학 전과 졸업. 재한동포 문인협회 이사
[서울=동북아신문]대소한 추위까지 가려면 아직도 한 달 넘게 남았는데도 어제는 함박눈을 마구 퍼붓더니 오늘은 새벽부터 시베리아 찬바람이 여과도 하지 않고 몰려왔다.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며 휘몰아치고 한기가 뼈 속까지 파고든다.

한국생활 십여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다 보니 여러 가지 처리해야할 일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두 신분증을 요구하고 있었다. 요즘은 기차를 타려해도 신분증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선 신분증 재발급부터 받아야했기에 아침 일찍 길을 나서보니 엄동설한이 따로 없었다. 더구나 며칠 전에 내렸던 눈이 살짝 녹았다 다시 얼려 붙어 어제내린 눈이 발목 까지 푹푹 빠지니 미끄러워 어디를 밟아야할지 몰라 몸 가누기도 어려웠다. 그런대로 뚱기적 거리며 버스 정류장을 향해가고 있는데 저 멀리서 27선 버스가 오는 것이 보였다. 저 차를 놓치면 십 여분 밖에서 얼고 있어야 했기에 급히 걷다보니 오른쪽으로 경사진 곳에서 왼발을 내딛다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면서 다리가 꼬여 땅을 짚을 사이도 없이 통나무가 넘어지듯 넘어갔다. 왼쪽 엉덩이가 찢어질듯 아팠지만 간신이 일어나 절룩거리며 달려가 버스에 올랐다.

때는 출근시간이라 버스 안은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나의 흐트러진 거동과 일그러진 추상을 읽었는지 옆자리에 않은 사십대의 한족아줌마가 자신의 자리를 선뜻 내주었다. 나는 쑥스러운 대로 고맙다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애를 안은 어머니, 임신부 같은 승객이 오르면 누구나 앞 다투어 자리를 양보해주는 것이 요즘 연길시내 버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덕 인 것 같다. 나는 속으로 “그전보다 많이 변했구나!”하고 가슴이 뭉클해 남을 느꼈다.

도시변화는 내 눈을 확 트이게 했다. 깨끗한 거리와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루어 그전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나라에서 “벼슬을 법제의 울타리에 가두라”는 지시에 힘입어 부정부패는 물론 사회질서가 판이하게 변한 모습들이 비록 날씨는 춥지만 내 마음을 따듯이 녹여주었다.

버스가 공원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다리 밑 하천 스케이트장과 저쪽 인민공원 스케이트장에서는 제비가 물 차듯 얼음 위를 미끄는 모습(여름은 연못으로 변한다 한다)들이 보인다. 주변으로 어린이들이 썰매를 타는 모습도 보였다. 그 눈에 익었던 장면을 보고 있노라니 저도 모르게 추억은 동년시절로 돌아갔다.

고향의 육도하는 작은 하천이지만 겨울철이면 얼음 폭이 하루가 다르게 넓어진다. 그것은 얼어붙은 빙판위에 겉물이 흘러들고 얼고를 반복하다보니 입춘쯤이면 얼음 폭이 오십 미터도 더 되었다. 방학이면 우리들은 매일 얼음위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외날 앉은뱅이 썰매를 타고 공치기도하고 스케이트타고 원을 그리며 노 꼬기도 신바람 났으며 이웃동네 아이들과 아이스하키 경기도 하군 하였다.

그날도 얼음위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데 소떼가 기슭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어느 애가 “얘들아 소를 얼음위에 몰아넣으면 재미있어”하고 소리쳤다. 그래서 우리는 소들을 몰아넣으려고 달려가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다 놓치고 겨우 한 마리를 몰아넣었다. 처음엔 몇 발짝 뚱 기적 거리며 걷는가 싶더니 그 다음부터는 조금만 움직여도 미끄러워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고 네다리를 쩍 뻗히고 서있는데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가뜩이나 큰 퉁 방울 같은 눈은 겁에 질려 당장이라도 튀여 나올 것만 같았다. 원래 겨울철이면 소 발굽에 철편을 대고 미끄럼방지용 동철 못을 밖아 주는데 비용 때문에 부림소한테만 그런 혜택이 돌아가고 그 외의 소들은 미끄러워 빙판에 들어설 수 없었다. 착하고 공부 잘하는 애들은 불쌍해서 못 보겠다며 놓아주자고 했지만 공부는 뒷전이고 못된 장난엔 악돌인 나와 몇 놈의 개구쟁이들은 절대로 놓아주려하지 않고 “재미”를 만끽하면서 얼음지팡이로 쫓기도 하고 건드리기도 하였다. 소는 얼음 밖으로 나가려고 안간힘을 써서 발을 내디뎌보았으나 미끄러워 한발작도 못 움직이고 나중에 힘이 빠진데다 우리가 건드리는 바람에 벋디디고 있던 앞발이 미끄러지면서 드럼통이 넘어지듯 “쿵”하고 쓰러졌다. 일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그대로 방치해두면 얼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우리들은 겁도 나고 후회도 들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어른 몇 명이 간신히 소를 얼음 밖으로 밀어 내여 살렸고 우리는 귀뿌리 빠지도록 욕을 먹고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한국에서 십여 년간 불법체류로 있으면서 어쩌면 그때의 그 철없던 시절의 죄값을 치르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한국 사람들도 이민생활 경험해본 사람들은 “이민생활 자체가 겨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생계를 위해 불법체류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은 어떻겠는가? 그 자체가 겨울이고 또 끝도 없는 빙판인 것이다. 항상 몸보다 가슴이 얼어붙고 찬바람소리가 주위를 맴돌면서 그림자마냥 따라다닌다. 정부는 물론 고국의 동포나 먼저 와서 일하고 있는 동포들도 대부분 시선이 차가웠고 관심 같은 건 티끌만큼도 없다. 조금만 잘못하여도 멸시와 조소를 하고, 심지어 조사받거나 구속당하여 강제추방 당하기 일쑤이다. 그러니 내가 서있는 곳은 항상 빙판길이고 앉아있는 곳은 송곳방석이며 누워서도 발편잠을 잘 수 없었다. 마치 내가 빙판에 선 소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살아보겠다는 이유 하나로 한국에 입국해서 3개월 후부터 불법체류자로 되면서부터 “얼음”위에 서게 됐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란, 규모가 잡힌 현장이나 공장 취직은 신분 때문에 엄두도 못 내고 3d업종에서도 제일 열악한 현장에서 영세민 업자 밑에서 일해야 했다. 수당이라도 받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인간성이란 조금도 없는 악독업주를 만나면 실컷 부려먹고도 돈 주기가 아까워 차일피일 미루다가 신고하겠다는 미끼로 수당도 못 받고 나앉을 때도 있었다.

때는 한창 단속이 심할 때여서 불법체류자를 신고하면 포상금을 준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며칠이 멀다하게 대문짝 같은 소식이 실려 나오는데 어디서는 단속을 피해 층집에서 뛰어내렸다가 죽었다는 둥 불까지 질러 자살했다는 등 소문이 나돌 때마다 손에 땀을 쥐고 일해야 했는데 마음은 항상 추종당하는 범죄자의 심정이었다. 퇴근해서도 단속이 들이 닥칠까봐 발편잠을 잘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싱크대 공장에서 일하던 나의 친구는 다른 싱크대 공장의 경쟁업자의 신고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출입국일군들이 들이닥쳐 애매하게 잡혀가서 “희생양”이 되었다. 그 소식을 접한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어 갈팡질팡했다. 나 역시 다른 싱크대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언제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어느 한번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숙소 부근에 경찰차가 서있었다. 누가 신고해서 날 잡으러 온 줄로 알고 노루가 제 방귀에 놀라 뛰듯 혼비백산해서 도망쳐 찜질방에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집에 와보니 아무 일도 없었듯이 잠잠했다. 후에 이웃의 말을 들고서야 경찰차가 지나가다 잠깐 멈추어 있었을 뿐이란다. 며칠 전인가 법무부 인원들이 불법체류 동포여성을 백주 대낮에 괴한들이 납치해가듯 발악하는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개잡아가듯 봉고차에 압송해가는 안타가운 동영상을 보고 두려움과 놀라움을 금치 못해 소주 몇 병을 마시고나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정부에서는 몇 년에 한번 씩 불법체류자 해소정책을 써서 그들로 하여금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빠져나오게 하여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여건으로 그런 기회를 놓치게 되는 불법체류자들이 많았다. 나 역시 몇 번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다음기회를 손꼽아가며 기다리고 있는데 동포사회에 박춘봉이란 인물이 나타나 토막살인 사건을 저질렀다. 언론계는 물론 전국을 들썽하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중국동포들의 이미지가 안 좋은데 동포사회에 먹장구름을 몰아왔다. 색안경을 걸고 보는 일부 보수인들은 북치고 장구 치면서 갖은 비난을 다 쏟아냈다. 사실 지적으로 정상적인 이민자나 불법체류자들이 그런 일을 저지른다는 것은 상상도 안 되는 일인데도 말이다.

재한중국동포 70만대 1밖에 안 되는 지적장애나 변태심리를 가진 자를 놓고 동포사회를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빙판길로 몰아가니 불법체류자인 나도 끝내는 귀향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합법체류자가 돼 '빙판길'을 어느 정도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들지만, 가끔은 역시 벗어날 수 없는 '빙판길'에 서있다는 오한이 들 때도 있다. 소시 적 내가 경험한 빙판에 서있는 소가 나인 듯하다. 예전의 기억은 완전 뿌리 뽑을 수가 없나 보다. 현실에서 차가운 '빙판길'을 만나게 되면 그 기억이 또 업그레이드가 된다. 아마 이는 이민자들이 겪는 똑같은 심리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도 계속 '빙판길'을 벗어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이제는 이 땅위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안전하고 확실하게 앞을 내딛고 마음 편히 살아가고 싶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