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겸 수필가
[서울=동북아신문]그것은 천으로 만든 필통이었다. 세로줄이 쳐져 있는 두터운 쑥색 헝겊을 사각 모양으로 잘라 덧대어 꿰매고 위에는 지퍼를 달았다. 필기도구를 대여섯 자루 넣을 수 있는 앙증맞은 수공예품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 어느 날, 어머니가 한지로 싼 조그만 꾸러미를 내밀었다. 포장지를 벗기자 헝겊 주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용도로 사용하는 물건인지 알 수 없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는 겸연쩍은 듯 필통으로 사용하면 편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손재주가 좋았다. 시간만 나면 재봉틀을 돌리거나 뜨개질을 했다. 낡은 옷을 다시 뜯어 수시로 체형이 바뀌는 오 남매의 옷을 그럴싸하게 만들어 내었다. 오래된 스웨터의 실을 풀어서는 목도리를 만들거나 장갑을 짜주었다. 위로 누나밖에 없었던 나는 누나의 겨울 코트를 개조한 어색한 모양의 코트를 입고 학교에 갔다가 놀림감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옷들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대학에 갓 입학한 내게 무엇인가 선물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시절, 궁리 끝에 장롱 속에 모아 두었던 자투리 천을 활용하여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필통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나는 그 필통을 책상 서랍 한 구석에 밀어 넣고는 곧 잊어버렸다.

대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다들 취업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공무원시험을 보기로 결심하고 집 근처의 독서실에 틀어박혔다. 하루에 열 시간 이상을 공부하는 강행군이었다.
나는 무엇인가 외우려 할 때는 손으로 글씨를 쓰는 버릇이 있었다. 하루에 백지 수십 장이 새까만 볼펜 글씨로 뒤덮여 버려졌다. 

어느 날, 서랍을 정리하다가 그 필통을 발견했다. 마침 필기구를 여러 자루 담을 만한 필통이 필요했었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금속제 필통은 소음이 나는데다 딱딱해서 휴대하기 불편했다. 헝겊 필통은 바지 주머니에 쏙 들어갔고 독서실을 오가면서 손으로 만지작거리면 어머니의 따뜻한 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잠깐, 뭐 좀 물어봐도 돼요?”
독서실 휴게실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고 있는데 예쁘장한 여대생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가끔 마주치는 얼굴이었지만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다. 무슨 말을 할까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필통, 어디서 샀나요?”
시간이 있으면 차라도 함께 하자는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고작 필통 이야기였다.
“산 게 아니고 어머니가 만든 거예요.”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지고는 이내 공부방으로 돌아왔다.

공무원시험은 논문형으로 이틀에 걸쳐 시행되었다. 과목별로 두 문제씩 출제되었는데 시험문제가 적힌 종이 두루마리가 칠판 위에 걸렸다가 타종 소리와 함께 아래로 펼쳐졌다. 문제지가 사르륵 펼쳐질 때마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어머니의 필통을 부여잡고 기도를 했다.
‘부디 내가 들인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다행히 문제들은 내가 공부한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떠한 체계를 잡아 써내려갈까 생각하면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상한 것은 어머니의 필통 속에서 볼펜을 꺼내드는 순간 평소 공부한 내용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사실이었다. 그 다음은 머릿속의 내용을 기계적으로 답안지에 옮겨 적기만 하면 되었다.
덕분에 공무원시험은 무난히 합격하였다. 그 후 어머니의 필통은 내게 행운의 부적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공무원 교육을 받을 때도 직장 초년병 시절에도 나는 그 필통을 내 분신처럼 지니고 다녔다.

어느 덧 그 필통은 모서리가 너덜너덜하게 닳아 볼품이 없게 되었다. 해진 틈으로 필기구가 빠져 나오기도 해 더 이상 사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필통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어머니의 정성을 저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념으로 간직하려고 서랍 한 구석에 고이 넣어 두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필통은 내게서 마술처럼 사라졌다.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서 오래 묵은 짐들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자취도 없었다. 그 필통과 함께 내 젊은 시절의 추억도 잊혀져 갔다.

이제 구십에 가까워 앙상해진 어머니를 바라볼 때면 나는 귀퉁이가 다 닳아버린 그 필통을 떠올린다. 자식의 장래를 위해 자신의 알맹이를 모두 빼주고 남루한 껍데기만 남은 듯한 그 모습에 속으로 오열하고 있는 것이다.

김태겸 프로필
■ 경기 중·고등학교 (´64 ~´70)
■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70 ~´74)
■ 미국 노터대임 대학교 경영학 석사 (´81 ~´83)
<직장>
■ 제15회 행정고시 합격 (1974년)
■ 강원도 행정 부지사
■ 전국시도지사협의회 사무총장
■ 한국건강관리협회 서울시 동부지부장
■ ㈜바이오인프라 감사 (현재)
<문단>
■ 계간 <문학의 강> 수필 등단 (2014년)
■ <문학의 강> 편집국장
■ 일현문학회, 심지문학회, 서초문인협회 회원
■ 신정부혁신론(공저), 1997, 동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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