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연 프로필: 중국 길림성 반석현 출생 길림성 영길시 조선족고등학교 졸업 교사, 자영업 종사. 현재 아모레 퍼시픽. 1989년 '도라지' 문학지에 수필(처녀작) <천국의 주인은 누구?> 발표. 그후 시 작품 다수 발표. 동포문학 5호 시부문 우수상 수상. 재한동포문인협회 사무국장
[서울=동북아신문]달그락 달그락…… 

주방에서 들려오는 전기밥솥 밥이 구수하게 익어가는 소리와 콧구멍을 헤집고 들어오는 맛있는 반찬냄새가 나의 깊은 잠을 깨우며 눈이 저도 모르게 떠지게 하였다. 기지개를 한번 길게 켜고 주방으로 나가보니 딸애가 내가 쓰던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미역국을 끓이고 있었다. 갑작스런 광경에 나는 굳어져 버렸다. 기척을 듣고 돌아선 딸애가 백합처럼 환한 미소로 생일 축하한다며 두 손을 머리위로 하트를 만들었다. 고등학생인 딸애의 이런 모습을 보자 마냥 어리광만 부리던 애가 아니라 이젠 한해가 다르게 철이 들어간다는 생각에 맘속 깊이 이름 할 수 없는 감동이 온몸을 휘감았다.

매년마다 딸애의 생일상을 차려주고 케이크를 자르고 했는데 이젠 나도 딸애에게 생일상을 받게 된 것이다. 그것도 소고기를 넣고 끓인 미역국까지 받는 다는 건, 엄마가 일찍 돌아간 나에게 있어서 처음이자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딸애가 “이젠 할머니가 곁에 계시지 않으니 어머니 생일날 미역국은 제가 잊지 않고 끓여드릴게요” 라고 볼우물 지으며 하는 말에 나의 두 눈에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뜨거운 것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특별한 음식은 없었으나 고등어를 굽고 오이는 새콤달콤하게 버무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미역국까지 올려놓자 소박한 밥상은 보기만 해도 세상의 어느 진수성찬 부럽지 않을 만큼 풍성해 보였다. 애기속살처럼 파랗고 부드러운 미역국을 김이 솔솔 펴오르는 박속같은 이밥과 함께 한 숟가락씩 폭 폭 말아서 넘기니 바다를 통째로 마신듯했다. 어떻게 미역국 끊일 엄두를 다 냈냐고 하자 요즘은 인터넷에 레시피가 상세하게 나와 있어 맘만 먹으면 다할 수 있다고 했다.

미역국은 출산과 출생을 신성시 여겨 산모와 아기의 건강을 염원해서 먹는다. 또한 엄마가 나를 낳은 기쁨과 고통의 날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미역국을 먹으며 어머니의 은혜를 잊지 않는 감사의 뜻이기도 하다. 생일날 주인공은 사실 본인보다 자신을 낳아 주신 어머니이다. 하지만 요즘은 어릴 때부터 생일파티를 거창하게 하여 아이가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뜻한 미역국을 먹으면서 그 옛날 이 흔한 미역국도 맘껏 못 드시고 첫 칠일 만에 맨발로 논 밭일하러 나가셨다던 엄마의 깡마른 얼굴이 떠올랐다. 위로 오빠 둘은 그래도 아들이라고 할아버지가 미역을 사주셔서 드셨지만 나를 낳고는 딸이라고 할아버지가 미역도 아깝다고 하셔서 우거지 국만 드셨다고 했다. 모유 수유하던 시절에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하니 젖도 모자라고 갓난애나 산모나 둘 다 살가죽만 씌워놓은 듯해서 잔병이 떠날 줄 몰랐다고 했다. 엄마는 2년 터울인 오빠 둘을 벽에서 얼음이 줄줄 흐르는 집에서 낳고는 앉은뱅이가 되어 삼복철에도 솜옷을 입었다. 몇 년 동안 바깥출입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없는 살림에 노동력까지 딸려 집에만 있으니 우울증까지 왔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산후 풍은 멧돼지 열을 조약으로 해서 해산 후 먹으면 낫는 다는 소리에 부득이 나를 낳았다고 했다. 내가 처음에는 딸이라서 아버지도 서운해 했지만 엄마가 드디어 일어서서 걷고 논으로 일하러 다닐 수도 있게 되자 온 집안에서 오히려 엄마를 살린 나를 복덩이라고 하셨단다. 그러고는 한 달 내내 미역국으로 몸보신을 제대로 해서 여태껏 건강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엄마는 가끔씩 외우셨다.

사실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생일을 쉬였지만 오빠들은 어릴 적부터 해마다 생일이 오면 미역국에 계란까지 삶아 주셨다. 그래서 엄마에 대한 서운한 생각이 들었으나 서른 살이 넘어서 나도 애 엄마가 되면서부터 차츰 안개 걷히듯 사라졌다. 그 후로 생일날이면 꼭꼭 엄마한테 이 무더운 삼복 철에 나를 낳느라고 고생했다며 돈 봉투를 드렸다

요즘은 해산시기를 한참이나 앞두고 산후조리원을 미리 예약해놓고 그것도 금액에 따라 편하게 몸조리 할 수 있다. 거기에다가 체형관리까지 주기별로 할 수 있고 잔잔한 음악까지 들려주는 시대다. 지난날 살던 얘기를 하면 딸애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도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었다.

어릴 때에는 이해 못해서 스치고 흘러버린 엄마의 말씀들이 지금에 와서는 구절초마냥 마디마디가 가슴에서 매듭을 짓는다. 그 옛날 엄마의 칡 흙과도 같은 삶을 되돌아보니 마음이 베인 상처마냥 아려왔다. 미역처럼 시퍼런 멍이 든 삶을 걸어오신, 미역줄기 같은 인생살이를 가냘픈 몸으로 버티며 걸어오신 엄마 생각이 샘물처럼 솟아난다. 생일인 오늘 숟가락에 칭칭 감기는 부드러운 미역국을 먹으면서 또 다시 엄마에 대한 미안함을 감출 길 없다. 살아생전 어머니의 생일에 따뜻한 미역국 한 그릇도 못 끓여드린 회한으로 나이가 들수록, 미역국을 먹을 때마다 추억을 접었다 폈다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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