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기수 프로필: 중국 길림성 훈춘시 출생, 수필가. 전 훈춘시 정부 공무원, 전 훈춘시 방송국 편집기자. '고향집', '연정', '고향가는 길', '정겨운 그 소리' 등 수필 다수 수상.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현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에 거주
[서울=동북아신문]멀리서 저 멀리서 휘청거리며 달러온 바람을 막아선 것은 높은 콘크리트 담벽이었다. 그 담장아래 잡초가 무성한 후미진 곳에 체면을 구겨진 채 주저앉은 화분들이 애처롭다

고향에 다녀오느라 한 동한 집을 비운 사이 주객이 전도된 뜻밖의 상황에 당황했다. 어느새 개미군단 흥부네 가족이 화분을 정복하고 있었다. 한물간 꽃나무를 무시한 채 파란 잡초들이 화분위에 머리를 잔뜩 쳐든 모습은 마치 굴러온 돌이 배긴 돌을 빼는 격이었다. 용납할 수 없는 무단침입이었고 한심한 불법체류자들이였다.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잡초와 씨름하며 자라온 나에게 잡초 몇 줌 제거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이다. 허나 잡초에 다가갈수록 여리고 싱싱한 모습에 남자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가당착이었다. 갈퀴 같은 손을 거두고 말았다 청초한 풀들의 순박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삶에 지친 심신에 청량한 기운마저 감도는 것을 어찌하랴. 이 세상에 진정한 잡초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흔히 잡초는 이름 없는 풀 또는 쓸모없는 풀이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기적인 인간들이 자기구미에 따라 야초를 잡초라 부를 뿐이다. 농경지에서 이름 있는 풀도 쓸만 한 풀도 곡식과 섞이면 농부에겐 성가신 잡초로 분류되어 숙청의 대상이 되니 말이다/ 타향살이 20년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편견과 홀대에 부대끼며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나 역시 잡초와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록 고국이라 하지만 돈 벌어 잘 살아보겠다고 달랑 두 주먹만 들고 온 중국동포들은 이 땅에서 그저 약초나 화초가 아닌 잡초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찌하랴,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일월드컵 때는 눅눅한 지하방에서 티비를 켜놓고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응원했고 김연하가 일본의 아사다마오를 제치고 시상대에 오르고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그 순간 한 민족의 자부심에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하지만 새날이 밝으면 또다시 불법체류자의 부실한 신분 때문에 경찰의 단속을 피해 뒷골목을 걸어야 했다. 거지같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설움이 울컥 치밀어 “내가 무슨 죄를 졌단 말인가? 잘사는 나라에서 오면 동포고 못사는 나라에서 오면 이방인이란 말인가?”하고 울부짖기도 했다. 조상의 나라에 왔지만 제자리를 잡지 못한 후손들의 눈물겨운 공황장애였다. 나는 나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역지사지를 좌우명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마음을 비우고 내 자신을 낮추기로 했다. 가슴에 뭉친 갈등을 새김질 하면서 드디어 못난 자신이 잡초 같은 인간이 맞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마음에 평화가 왔다. 자신이 잡초라는걸 과감히 인정하고 보니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를 힘들게 만든 주범은 바로 색 바랜 영광에 대한 부질없는 집착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차라리 잡초가 좋았다. 누가 거들어주지 않아도 홀로 서기로 자수성가하는 기특하고 대견한 것들이 좋았다. 잡초는 못나고 가난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잡초는 끝없는 이기심으로 남을 비방하거나 시기질투하지도 않는다. 관심밖에 밀려나 누구의 발에 짓밟혀도 불평불만이 없다 그 어떤 척박한 환경에서도 내공을 응집하여 빈자리를 파고드는 잡초의 근성은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 민초들에게 귀감이 아닐 수 없다.중년이 익어가는 지천명의 고개를 넘어서니 점차 잡초도 꽃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슬며시 귀소본능이 고개를 든다.  이제 고향에 돌아가면 현기증이 나는 도시를 떠나 산천초목이 우거진 시골에 묻혀 산업화에 지친 영혼을 달래면서 살고 싶다. 그동안 교만과 이기심으로 매정하게 살아온 과거를 반성하고 제멋대로 깔보고 짓밟았던 잡초들에 사과하는 아량을 베풀고 싶다.  자연으로 돌아가 잃어버린 초심을 되찾고 산야를 뒤덮은 온갖 풀들과 대화하면서 초록이 폭발하는 생명의 노래를 듣고 싶다. 비록 넉넉하지는 못해도 작은 것에 만족하는 자세로 고즈넉한 오솔길을 걸으면서 인간덕성의 높은 경지에 오르고 싶다.  그곳에서 나는 그 어떤 정치나 이념의 울타리를 넘어 보름달처럼 둥실 부풀어 오르고 싶고 그 많은 밤하늘의 별들을 한품에 안아보고 싶다. 거짓 없는 자연을 스승으로 생명의 진정한 섭리를 공부하면서 이제 남은 세월 꽃가루가 묻어나는 예쁜 글과 약초 같은 값진 글을 쓰고 싶다.  노랗게 빨갛게 익어가는 서산노을처럼 아름다운 마무리를 꿈꾸면서… 2017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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