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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련 칼럼니스트
서울=동북아신문]내가 언제 불안을 느꼈었나. 생각을 해봤다. 지금 인 것 같다.

장학금을 논의하다가, 고등학생에게 줘야 하나 대학생에게 줘야 하나 하는 질문에 나는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너무 무기력했다. 가족이 나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주지 못하면 그 대로 너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있는 것을 쪼개서 연명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대신 대학생인 나는 스스로 돈을 얼마 밖에 안 될 지라도 벌 수 있는 기회를, 나만 간절하다면 만들 수가 있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나의 인생에 대하여 나 스스로 선택할 기회가 조금이나마 더 생긴 거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와 상반된 생각이 든다.  나의 인생에 대하여 선택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그때는 그야말로, “나”는 “나”라는 인간 하나의 일이었다.  비자발적으로 어느 날 나는 나의 의식 또는 무의식에 의하여 많은 사람의 인생에 불러 들여졌다. 지금의 “나”의 직관적인 선택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 호재로 누군가에게 악재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의 불안은 자라나기 시작했나 보다.  사윤이가 막 태어났을 때 나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만큼 폭군이었다. 그만큼 불안했던 것이다. “엄마”라는 이름을 위하여 나의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강박감과 함께 나는 어떤 사람 그리고 무엇을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전혀 생각이 없는, “나” 였던 것 같다.  이 아이가 예민하고 잠을 못 자면, “불안 한가, 엄마를 많이 못봐서 그런 건가, 아님 그냥 예민한 건가, 아님… “이렇게 설쳐 댔었다. 이 아이가 걷기 시작하고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할 때 어디나 다 웃으면, “발육이 부족한가.. “ 다른 아이를 밀면, “폭력적인가… “나의 무지함에 의한 무작위의 상상과 불안함이 폭발했고,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내가 감히 “엄마”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것에 더 불안하고 더 미안하고 그랬었던 것 같다.  그냥, 이렇게, 나는 나날이 불안해 졌다. 왜냐면, 비자발적으로 나의 행동 하나하나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조금 씩 조금 씩 더 느껴가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불안”이란 어떤 정서일까.  현실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제대로 된 예측이 불가하기 때문에 생기는 건가. 아니면 나만이 특유한 부정적인 정서와 감정과 판단력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발전해 나갈 때 심히 부정적인 결과를 도출할 것이라는 그런 상상과 예측 때문인가.  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으로 “불안”한가.  1. 가족 계획 나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내가 인정받았던 포인트가 있다. 나는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는 지와 관계없이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집중에 살려고 순간순간 노력하고 있다. 놀랍게도, 인정을 노리지도 않았던 포인트에서 나에게 인정의 목소리가 몰렸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두 아이의 엄마, 워킹맘, 대한민국 며느리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두 아이를 낳은 엄마는 꿈이든 무엇이든 한 개 정도는 포기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리고, 일이 됬든 시댁의 비난이든 한가지정도는 포기하고 겪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보다. 나는 딱히 많은 것을 고민하고 살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제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체력도 그닥 잘난 점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시댁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고 남편도 포용과 사랑을 더 많은 사람을 만난 것도 사실이다. 장담컨데, 나는 그래서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그렇다면 내가 인정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그냥 이런 포인트에서 불안 한가 보다.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아서 살아가고 엄마로서 직장 “여성”으로서 그리고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로서의 삶이 많이 두렵고 불안 한가 보다.  이 타이임에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불안한지 이야기 한다면 밑도 끝도 없을 것이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냥, 이런 것이 그 수많은 “불안” 중에 하나라는 것은 고명한 사실일 것이다.  내 아이가 어떻게 살게 될까, 그리고 그런 고민을 나를 망가트리지 않을까, 이런 걸로 불안하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에서 여전히 겁없이 사람을 만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왜 “아이”는 우리에게 겁을 주는 사람이 되었을까.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아이가 어떻게 살아야만 행복할 지,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하여 내가 얼마만큼 포기하고 기여해야 가능한 건지, 도무지 계산이 안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결여된 것은, 철학이다.  철학은 어려운 주제가 아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회사 중요한 회의 도중에 시어머니 또는 어린이집 선생님이 전화를 했을 때 어떤 것이 우선인가. 이런 것이 철학이다. 하지만 우리는 국영수, 아니, 남들에게 보여주는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한 영어를 하기 위하여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2. 금전 계획 돈, 그것은 늘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내가, 나는 내가 번 것을 다 쓰고 가는 것이 꿈이라고 했더니, 어떤 선배가 그러신다. 순간 내가 질병 때문에 나의 삶이 무너질 수도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준비는 있어야 해.  보험은 그런 것으로 돈을 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한 보장으로, 현실 위험의 가중평균치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받으면서.  나는 중학교 때, 1 위안으로 3일을 살아 보았다. 1위안이면 속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중국 “만터우”를 살 수 있고 하루에 한 개에 물을 식사로 채우면서 살아 보았다.  지금은 당당하게 엥겔지수가 굉장히 높다고 하면서 당상 먹고 싶은 것이면 50만원이라도 쓰고 온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것을 두려워한다.  다시, 3일에 1위안 밖에 남지 못하면, 나는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물론, 3일에 1위안으로 단 한번도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이 많을 것이지만, 그러루한 의미에서의 생활의 질의 향상을 느껴본 사람들은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이 그냥 그 당시의 “즐거운”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많은 것을 가지고 나서 과거의 “부족한” “나”를 상상하는 것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라면, 진짜 너무너무 불안하고 불편하고 싫을 꺼라는 생각을 한다.  다만, 하나만 생각해보자.  내가 가장 대단하고 찬란했을 때가 언제인지를.  내가 대단한 시절은 3일에 1위안으로 먹고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를 만들고 하고 싶은 공부와 하고 싶은 취미를 무럭무럭 키우고 있었던 그때인 건지, 아니면 경제적인 어려움과 단 하루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금인지.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사무실 생활을 하는 지금이나 불 앞에서 오징어 한장이라도 더 구워 팔고 싶어하는 또는 그릇이 얼만 든지 오면 다 반짝반짝하게 닦아서 내보내고 당당하게 월급 받아 그에 맞춘 삶에서도 행복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나, 어떤 것이 더 찬란한 나라고 생각하는지.  우리는 철학의 부재 속에서 불안하고 있는 것이다.  찬란한 나, 행복한 나, 그리고 나다운 나가 무엇인 건지에 대한 고민을 할 틈도 없이, 사람들 속의 나, 1%만 갖고 비교하는 나로 살아가고 있는 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편적으로 “행복”한 것을 “행복”한 것으로 받아줄 수 있는 눈, 보편적인 철학인 것이다.  3.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동내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나의 친구와 남의 친구의 차이일 것으로 생각한다.  나에게 남친이 생겼을 때, 친구들은 그런다. “프로필 불어봐. “ 그럼 나는 나이, 키, 외모, 성격,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지낸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남의 친구는 이렇게 질문하더라.  “학교는 어디 나왔어요? “ “무슨 일 해요? “ “차는 뭐 끌고 다녀요? “ “부모님은 뭐하세요? “ “나”는 어떤 사람인가.  (1) 직장에서의 나에 대한 평가 평가 시즌이 되면 다양한 이벤트들이 많이 나온다. 좋은 팀점장이든 별로인 팀점장이든 다 고민한다. 누구에게 어떤 평가를 줄 것인가. 아마 직장에서 지표화 된 첫번째 평가 이지 않을까 싶다. 회사에서 우리는 직급과 직책과 공식적인 그리고 또 비 공식적인 평가를 가지고 산다. 그런 의미에서 평가제도를 바꾸는 것은 의미가 있다. 많은 사람이 신경 쓰는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직급, 직책과 아무 관계 없는 금융회사의 “여자 사람”으로도 살아 보았고, “과장”이 되면서 직급자로도 살아 보았고, “팀장”이 되면서 직책자로도 살아보았다.  솔직히, “통역하는 아이인데 사장님 모신다고 과장 시켜주네. “라는 이야기에 너무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냥, 무시하려고 애썼을 뿐이다. 요즘 3년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묘한 “시간 계획”인 것 같다.  경력직으로 이 동내에 들어 왔을 때, 공채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그것도 한국인도 아닌 나는 그야말로 이방인이었다. 전 직장에서 너무 행복지수가 높아 버릇이 나빠졌다고 스스로 생각한 나는 이 동내에서 무시 당하고 일도 안 주고 평가도 나빠도 그리고 내가 힘들어도 이직을 결정한 이상 3년은 버텨 보고 나서 나에게 적합한 곳인지를 판단 해 보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3년이 나에게 마법같은 시간이 되 주었다.  1년 뒤의 평가를 신경 썼다면, 나는 나에게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려고 안달이 났을 것이고 나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3년이 목표였던 나의 첫 1년의 삶은 너무나 달랐다. 단체 메일을 받고 문제점이 발견 되면, 1대1로 이메일을 보내 주었고 사람들은 “너 뭐하는 애야”라고 했을 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야금야금 경험과 친구가 생겨났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얼마만한 주기로 나의 조직과 나의 주변사람을 바라보는가. 언젠가 인사 적인 고충이 있어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남편이 이런 조언을 한다.  “당신이 지금 다른 사람에게 당신에 대하여 오해를 가질만한 정도의 개인적인 요구사항을 요구한다면, 듣는 사람이 불쾌하고 이미지를 나쁘게 가지고 싫어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단단한 착각은, 다른 사람은 당신의 모습을 오래 기억하고 오해를 오래 가져갈 만큼 당신에 대한 관심이 없어. “ 우리의 마음은 무엇에 흔들리고 무엇에 정착하여야 하는가. 최근에 들었던 가장 훌륭한 조언이 하나 있다. “나의 벨류는 회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켓이 정하는 거야. “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나의 벨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있지, 누가 어떻게 평가하는 지에 있지 않다. “ (2) 동내 사람들이 나에 대한 평가 사윤이가 다섯살 때 집에 와서 이런 질문을 한다. “엄마, 우리 집은 산 거야 빌린 거야? “아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사윤아, 가족들이 행복하게 같이 잘 살면 산 거든, 빌린 거든 그건 집이야. 가족끼리 행복하게 잘 살지 못하면, 산 거든 빌린 거든 집이 아니라 부동산이라는 거야. “ 아파트와 빌라, 아이들도 그 차이를 안다. 큰 차와 작은 차, 아이들은 그 차이를 안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그런 질문에 위축 되거나, 잘난 척 했거나 피하지는 않았는지?  내 손으로 만들어 낸 모든 것은 당당한 것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준다면, 아이들은 “내가 한 것이 아닌 것” 때문에 덜 우울하고, 스스로의 가치와 모습에, 그리고 스스로가 만들어낸 사소한 것에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학부모가 되면서, 직장을 다니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쫄려 본 것은 처음이었다. 다행이 인복이 많은 나는 훌륭한 담임선생님과 훌륭한 엄마들을 만나서 걱정했던 것이 10%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좋은 아이의 좋은 엄마로 “학부모”라는 자격에 정착하게 되었다.  무엇에 눈치를 보았었는가.  나는 내 아이가 아무 근거 없는 엄마가 “워킹맘”이라는 이유 하나로 차별 받을 까봐 걱정했었다. “나”의 생활 때문에 내 아이의 첫 사회생활 진출에 누가 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런 불안의 원천은 나 역시 “워킹맘”이기 때문에 아이에게 소홀하지나 않았나 하는 잠재 값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선생님과 어떤 부모님을 만나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내가 얼마만큼 내 아이의 마음과 성장에 관심가지는 엄마인지, 질문을 바꿔 하기로 했다.  (3) 사람 사람은 참 특이한 족속이다. 조금이라도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 끼리 뭉쳐,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배척하려고 하는 족속이고, 수시로 나와 남에 대한 평가를 멈추지 않고, 수시로 배신을 두려워 하고 수시로 내가 배척했던 사람 만큼의 배척을 당할까봐 걱정하고 살고.  우리는 대부분 내가 했던 행동을 당할 까봐 걱정하고 있지 않을까. 또는 그런 싫어하는 행동을 한번이라도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을까. 아주 온건한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뭣이 중한디. “ 부딪치는 순간의 감정이 중요할 때가 있고, 부딪치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할 때가 있지만 우리는 이를 구분하고 살고 있는가.  4. 망했다! 여행가는 후배에게 싸우지 말고 재미있게 잘 지내고 오라고 잔소리를 했다.  이렇게 쓰고 있는 순간도, 할말 인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인가, 잔소리인가 조언인가 애정표시인가 수도 없는 비난과 판단과 스스로의 잡다한 생각에 시달리게 된다.  온건한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조금만 더, 내 마음에 집중하고 나에게 들이대는 나 스스로 또는 조직 또는 가족 또는 주변사람 등등의 기준 중에서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특정 주기와 기준은 무엇일까를 한번쯤 생각해봐도, 나와 나의 가까운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의 여유와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그림이 잡히지 않을까 싶다.  눈 뜬 내일 아침, 나에게 큰 변화가 닥치게 된다면, 불안할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생각이 없거나 돌아이는 아니니까.  눈 뜬 내일 너무 평온 해도, 불안하지 않을까. 우리의 나이와 생활은 하루 하루 바뀌어 가지만 똑같이 살아가는 것도 불안하기 마련이다.  이왕, 이렇게 “사람”으로 불안한 세상을 살게 될 것이 현실이라면, “망했다!”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필요 없는 생각들과 기준들과 불안들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으면 한다. 나는 “나”로 살기에도 너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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