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심양 소가툰 출생. kbs방송국에 수필 다수 발표, 우수상과 장려상 여러 번 수상, 특집에도 당선.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서울=동북아신문]덥다고 너무 덥다고 저리 가라고 밀지 않아도 머물고 떠날 때를 아는 여름은 어딘가 사라지더니 선들선들 가을 바람을 몰고왔다. 덥지도 춥지도 않는 시원한 공기속에서 운동하기 딱좋은 시기이다. 나는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 속에 끼여들어 아파트 단지에서 막운동을 끝 마치고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는데 한 젊은 부부가 쌀자루를 쓰레기통 위에 올려놓고 아파트 동쪽 출입구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들여다보니 짐작에 열두 근은 잘되어 보이는 약간 뜬쌀이었다. 깨끗이 씻어서 먹는 데는 아무런 지장은 없어 보였다.

쌀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순간 나의 귀전에서는 아버지가 ‘’ ‘쌀알 한알만 버리면 나무 열 짐을 지여 내려야 하한다’는 일 안 잊었지? ”고 하시든 말씀이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동년 시절 끼니마다 그릇에 밥알 한 알만 붙어 있어도 항상 이렇게  반복 하시던 말씀이었다.

버린 쌀 열두근이지만 낭비를 싫어하는 나는 아까워서 어떤 미련도 없이 무조건 계단으로 들고 올라 왔다. 손에 들은 쌀무게가 겨우 열근을 넘어 보이는데 갑자기 몇 십 근의 무게로 느껴지면서 눈앞에서는 지나간 일들이 영화 필림처럼 스쳐가고 있다.

어렸을 때 내가 살던 마을은 단체로 통일로 질서 정연하게 지은 초가 200호가 사는 조선족 마을이였다. 마을 서북으로 유유히 흘러 내리는 부얼강이 둘러싼 평원 산골이다. 한전, 수전 많아서 양식 수확 때는 총 산이 한족 마을의 총 산량의 배를 훨씬 초과하는 향의 보배 창고이기도 했다.

그때 양식 정책이 불투명한 이곳은 풍년이든 흉년이든 우리 집의 식량 부족은 마찬가지이었다. 해마다 양식 곤란을 면치 못했다. 매년마다 분배 받은 식량이 모자라서 구제량을 먹어야 했고 가을이면 당겨 먹은 구제량을 몽땅 대에서 정해진 량을 포함해 버린다. 남은 식량을 나물을 섞어서 죽을 끓여 먹어도 몇 달 식량은 모자란다. 식구넷에 일군 셋이라 가을 분배때면 타기는 하지만 그 돈으로 고가로 식량을 사서 보충하고 나면 경제 곤란은 역시 면치 못한다. 그런데 반면에 어린아이 많고 늙은이가 있는 집들은 가을에 돈을 적게 분배 받았다 하여도 남은 곡식을 고 값으로 팔면 돈을 쓰는데는 일군 많은 사람보다 훨씬 나았다.

겨울철에 산에 가서 나무를 하는 때에도 오빠는 여전히 근기 없는 죽을 먹고 가야만 했다.점심 때도 되지 않아서 몸이 후들후들 떨리니 하루해를 보내려면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마당질을 다한 찌꺼기를 손보면 곡식알조금만은 장만 할수도 있었겠지만 논판에 가져다 버린들 누구 하나 손대지 못하던 그시절에 어머니는 남들이 안보는 기회를 타느라고 정월 초하루와 이튿날을 골라서 들판에 가서 내다버린 북데기를 틀어서 겨우 몇근의 흙 나락을 장만하여 오셨다. 다만 흙 나락이지만 우리에게는 금가루 보다 더 귀중했다. 어머니는 이 흙 나락을 알뜰이 장만하여 나무 절구에 찧어서 가루를 내여 나물속을 넣어 떡을 만들었다. 오랫동안 먹어 보지 못한 떡이여서 너무도 먹고 싶어 했던 나 였다.하지만 이 떡은 오직 산에 나무하러 가는 오빠의 점심 요기인 것이다.그것마저 아껴 먹어야만 나무를 다할 때까지 띄울 수가 있겠는지…….

밤마다 생산대에서 방아를 찧을 때면 매 집에 윤번적으로 밤참을 하여 방아를 찧는 일꾼들에게 먹도록 하였다. 반찬은 어떠 하든지 간에 입쌀밥을 하니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 집 같은 사람들은 할만한 일이기도 했다. “오늘은 제가 방아를 찧겠습니다.” 오빠의 말이였다. 하지만 대장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의 집은 일군이 많아서 일군 없는 집으로 차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수를 받지않고 입 쌀밥 한 그릇만 먹어도 돼요.”  이렇게 사정을 했어야 겨우 대장의 허락을 받았다.

그날 저녁 오빠는 끝내 벼를 찧게 되였다. 밤찬은 최 선생님의 집에서 사모님분께서지으셨는데 마음씨 착한 그 분은 오빠의 공기에다 반질반질 윤기도는 하얀 밥을 꾹 눌러 수북이 담아 주셨다. 그처럼 먹음직한 입 쌀밥을 오빠는 두 수저도 못 넘기고 밥상에서 물러앉았다. 원인은 그날저녁 어머니는 그처럼 밥을 먹고 싶어하는 오빠에게 배추 말랭이 나물을 많이 섞어서 밥을 해주었는데 그만 나물 뭉치에 취였던 까닭 이였다.

어머니는 해마다 남새 밭에다 식량 보탬이 많이 되는 배추, 감자, 무시 등을 많이 심었고 자류지밭에다는 올강냉이를 심어놓고도 여물기도 전에 훑어서 죽을 끓여 먹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얼어붙은 땅이 녹기가 바빠서 뽀얀 모래 쑥을 캐서 죽을 끓여 식량 보탬을 하셨다.어머니는 “이 모래 쑥을 먹으면 근기가 있어 배도 빨리 안 고프고 사람들이 많이 먹으면 여러가지 보약성분을 많이 섭취하니까 많이 먹어도 된다.” 고 말씀하시군 했다.

식구들의 굶주림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여 오신 어머님이셨던가…….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오늘날의 밥상은 더 없이 풍성하다고 느껴진다. 물질의 풍요로움으로 소중함을 모르고 먹고 입는 것 마음대로 챙길 수 있다고 해서 지난날에 어렵게 살았던 날들을 함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쌀 열 두 근이면 밥을 해서 먹어도 혼자서 10 일은 넘게 먹을 수 있다. 돈으로 골라가면서 좋은 쌀을 사도 30원은 충분하다. 돈을 절약하느라고 남이 버린 쌀을 들고 온 것도 아니다. 주어 온 쌀로 밥을 해먹는 동안 배 굶던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님, 아버님이몹시 그리워 진다. 오늘따라 특별히 그분들의 얼굴이 보고 싶고 그분들의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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