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신문, 중국동포타운신문, 한중포커스신문 취재팀

“봉사를 제 인상의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봉사는 우리 아버지의 소원이자 저의 소망이기도 하지요.”

年 36차례 봉사 활동 진행

표창장, 상장, 감사장, 감사패 등 100여 개 수상해

 
“봉사를 저의 인생의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라며 해년마다 큰 봉사 36차례씩 진행을 하여 “봉사의 여왕,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여인이 있다. 여성가족부장관상으로부터 경찰청 청장상, 서울시특별시장상, 심지어는 동사무소 상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상들을 안 받아본 상이 없을 만큼 많다. 그만큼 정부와 지역사회가 인정해주고 있다는 말이다. 그가 바로 다문화봉사단의 중국동포 출신 김영희 회장(1955년 생)이다.

김 회장은 195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유아시절을 평양에서 지내다가 여덟 살 때 부모를 따라 중국 장백현에 이주해 자리 잡았다. 부모의 건강문제로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자 그는 열두 살 때에 그토록 하고 싶던 공부도 못하고 학교를 중퇴했다.

천성이 강한 김 회장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억척스레 농사일에 매달렸다. 성격이 활달하고 사리가 밝아 성인이 되자 촌 부녀주임 직을 맡았다. 배우지 못한 농촌 처녀가 도시에 진출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인 세월에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도시에서 가도판사처 주임까지 역임했다.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1991년 김 회장은 당시 코리안드림의 바람을 타고 한국행을 하였다. 여느 조선족 여성들이 그러했듯 김 회장도 한국에 와서 처음에는 음식점에서 서빙 일을 했다. 이후, 6개월간 번 돈을 종자돈 삼아 그는 철학관을 개관했다. 인품도 좋고 사리가 밝아 그런대로 여유롭게 먹고 살만할 만큼 고객이 많이 생겼다. 철학관에서 번 돈으로 손님들에게 봉사를 했으니 말이다.

 
그가 진정 봉사를 알게 된 것은 1996년이다. 서울 신촌에서 거주할 때 집 주인이 자원 봉사를 하는 것을 보고 따라나서면서 부터였다. 어릴 적부터 “내가 덜 먹고 덜 쓰더라도 타인을 배려하고 베풀 거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봉사는 아버지의 소원이자 곧 나의 소망이다”라는 맘의 자세를 갖고 봉사에 임했던 것이다.

2002년 그는 경기도 인천 간석동에서 김치봉사, 음식봉사, 쌀 나눔 봉사, 옷 나눔 봉사,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용돈을 마련해주는 봉사까지 아주 폭 넓고도 활발하게 진행했었다. 2006년 경기도 부천에 이사를 와서도 똑같은 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2008년 5월 서울시 구로구 구로4동에 이사 와서 그는 철학관을 개설하고 또 봉사에 나섰다. 봉사는 해마다 규모가 늘어 2013년 5월 16일에는 300여 명의 독거노인에게 음식을 초대하였고, 또 해마다 10킬로그램 김치 100박스를 담구어 독거노인들에게 공급했다. 2016년 5월 그는 구로구청강당에서 400여명 구로구 독거노인들에게 경로잔치를 베풀었다. 성대하고 깍듯한 대접을 받은 노인들은 “오늘 정말 행복했어요. 김 회장님은 자식보다 낫습니다”라며 눈물들을 흘렸다.

2016년 10월 1일, 그는 구로리공원에서 <추석맞이 한마음 한뿌리 경축대회>를 개최하여 3천여 명에게 음식을 제공하였다. 10미터짜리 잔치상을 차려 고향을 그리는 중국동포들의 애달픈 맘을 달래고자 망향제(望鄕祭)도 진행했다. 또, 불우이웃과 어려운 학생들에게 생활비와 장학금을 지원하는 행지난 21년 동안 그는 쉼 없이 봉사활동을 해왔는데, 많을 때는 크고 작은 봉사활동을 합쳐 한 해에 36차례나 됐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은 지난 2016년 10월 1일 행사에 무대설치 비용을 구로구청으로부터 받은 것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후원을 조금 받고, 사비를 털어 충당했다.

 
2016년 한해 장부를 따져보니 그의 수입은 6천여만 원인데 지출은 9천여만 원이나 됐었다. 그러니까 3천여만 원 적자를 본 셈이다. 그러나 김 회장은 거액의 적자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기자에게 환한 웃음을 웃어 보였다. 내년에도, 아니 몸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봉사는 계속될 것이라며 다짐했다.

그러면 적자를 보면서 봉사가 어떻게 가능할까? 사실 김 회장에게는 든든한 후원군이 있었던 것이다.

김 회장은 슬하에 2남1녀의 자식을 두었다. 맏아들 김해봉 씨(45세), 둘째 아들 김해군 씨(42세)는 한국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딸 김춘염 씨(39세)도 두 오빠와 함께 부모를 닮아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대단했다. 자식들은 어머니가 사비를 써가며 하는 무료봉사를 못 마땅하게 생각한 적이 종래로 없었다. 반대하거나 싫은 소리 한 번 해본 적 없다고 한다. 오히려 해마다 수천만 원씩 선뜻 출자하여 지원을 하고 있다.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며느리도 시어머니의 유력한 팬이 됐다.

요즘 자본주의 금전만능사회에서 사비로 봉사활동, 그것도 한두 푼 아닌 거액의 돈을 써가며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에 든든한 지원군이 돼 주는 자식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사회적으로 박수 받아야 할 일이다.

김 회장은 해마다 봉사활동을 진행해온 내역들을 주먹구구식이 아닌, 아주 깔끔하고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를 해서 장부를 만들곤 했다. 한 푼의 차이 없이 투명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협회가 법인체도 아닌데 장부를 그토록 투명하고도 깨끗하게 해놓으니 회원들도 김 회장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쳇바퀴 돌듯 엄청 바쁜 회장님이 무슨 시간에 장부를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해 놓을 시간이 있지요?”하고 기자가 궁금해서 물었다.

“훗훗, 농업은행 지점장을 지낸 남편이 도왔어요.” 알고 보니 김 회장의 일가족 모두가 김 회장의 봉살활동을 적극 돕고 있었다.

그는 현재 20여 명의 회원들을 가족처럼 데리고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사심 없이 타인을 대하는 회장의 마음가짐에 회원들은 감복하고 따르고 있었다. 모두가 김 회장처럼 되어 갔다. 그러니 회원들도 구청으로부터 달마다 소정의 생활비를 지급받게 됐다.

그의 사업 성공의 비결을 종합해 보면 우선 본인의 철 같은 봉사 의지와 견지, 가족들의 지원, 그리고 회원들의 한결같은 뒷받침 등 3박자가 잘 조화를 이루었기에 가능했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김 회장은 타인에게 사비를 털어 봉사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돈을 쓰는 데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쓰레바도 5천원 이하짜리만 골라 살만큼 자기투자에는 매우 인색했었다.

그가 또 환경깔끔이봉사단을 운영해 온 것은 3년 전의 일이었다. 이른 새벽 별을 이고 나가 거리 청소를 하고 저녁 늦게까지 별을 지고 돌아올 때가 많았다. 이에 환경깔끔이봉사단은 사업업적을 인정받아, 2016년 3월부터 그는 구로구청에서 운영하는 환경 단속반 공무원이 돼 구로지역 환경단속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환경단속의 주된 업무는 불법쓰레기 무단투기를 적발하는 것이다.

“당신들 뭔데 함부로 내국인들에게 벌금을 안겨?”

“어디서 굴러온 돌이 배긴 돌을 빼려고 들어!?”

“내가 말 안 들으면 어떻게 할래? 중국인이 감히 우리를 어떻게 할 건데?”

 

그는 단속 중에 내국인들한테 욕도 많이 먹었다. 이쯤의 욕은 ‘양반’이다. 입에 담지 못할 육두문자 쌍욕도 비일비재로 듣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는 원리원칙대로 단속하고 범칙금을 안겼다. 물론 범칙금을 안기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설득하여 다시는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인데 단속에 걸린 일부 내국인들은 동포출신이라고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텃세를 피우고 상욕을 해댄다. 그래도 그는 절대 물러서지 않고 범칙금을 안겼다. 일부 몰상식한 내국인들은 현수막을 찢고 포스터나 전단지를 난도질하면서 “중국에 가라”고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환경단속업무가 정말 힘들고 괴로워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동포밀집지역의 환경이 날마다 깨끗해지는 것을 보면 긍지감이 생겨 가슴이 뿌듯해난다”며 그는 환하게 웃었다.

요즘에 그는 또 구로4동 동포자율방범대 고문을 맡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김 회장의 봉사활동은 한두 해도 아니고 장장 21년이나 됐다. 연 36차례 봉사활동을 진행해 온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이러한 기적은 김 회장의 집 삼면의 벽에 가득 채운 표창장, 상장, 공로패, 감사패들이 증명하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 여성가족부 장관상, 서울시장상, 대한민국 경찰청장상, 경기도 지사상 등 큼직한 상 외에, 기타 많은 상들을 지면의 제한으로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이다.

2017년은 풍성한 열매를 주렁주렁 거둔 한해였다. 여러 가지 경사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경사를 꼽으라면 구로구청으로부터 구로4동에 구립다문화경로당을 개설하고자 5억 원의 예산을 확보한 것이다. 이 경로당은 2018년 4월경에 개업할 예정이다.

한국에서 중산층을 평가하는 기준은 월 소득 500만 원 이상에 내 집이 있어야 하고, 2000CC이상 자동차를 보유해야 한다. 순 경제로 중산층을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중산층을 평가하는 기준은 외국어 하나 구사할 줄 알고, 일 년 한 번씩 해외여행 다닐 수 있고, 자원봉사에 적극 참여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김 회장은, 프랑스 기준으로 평가하면 중산층에 속한다. 누가 뭐라고 평가를 하기 전에 그는 “나는 그 누구도 비할 수 없는 마음의 부자이다”라고 말한다.

 

앞으로의 타산을 묻자 김 회장은 “몸이 허락할 때까지 봉사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황혼 인생의 소박하고도 아주 당찬 포부를 밝혔다.

솔직히 요즘 재한조선족사회는 내국인들의 눈에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한국인들의 편견도 있고 조선족 자체 내의 노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김 회장과도 같이 한국정부로부터 인정을 받는 훌륭한 분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중국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김 회장이야말로 한국의 살아있는 ‘뢰봉’인 셈”이다. (글 / 김정룡)

▲ 왼쪽으로부터, 중국동포타운신문 김정룡 주간, 김영희 회장, 한중포커스신문 대표 문현택, 동북아신문 이동렬 순이다. 취재시 기념사진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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