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예금 약력: 중국 (흑룡강 오상) 방송국 1급 아나운서, 흑룡강신문, 흑룡강방송 특약기자. 2015년부터 수필 창작 시작, 흑룡강신문, 요녕신문, 송화강, 청년생활 다수 발표. 수차 KBS 한민족 방송 우수상 획득
[서울=동북아신문]요즘 ‘봉망필로’라는 사자성어와 사자성어는 아니지만 사자성어처럼 쓰이는 ‘장봉노졸’이라는 단어가 자주 떠오른다.

나는 올 봄부터 시낭송의 삼매경에 푹 빠져버렸다. 중독되었다. 가슴에 와 닿는 시, 심금을 울리는 시만 보면 나의 감성세계가 세차게 요동친다. 읊고 싶다! 격정과 낭만이 봇물처럼 터져 주체할 수 없이 흐른다. 처음엔 그냥 읊다가 나중엔 녹음을 하여 들어보고, 감정표현이 미달인 것 같으면 다시 감정 조절을 하면서 읊고 또 읊는다. 무아지경에 빠진다. 녹음한 것을 단톡방에 올려보았다. 반응이 좋았다. 행사에 써야 한다며 산문낭독을 부탁해오는 이도 있었다. 중국 중학교에서 조선어문을 가르치는 동창생은 과문 낭독녹음을 부탁해왔다. 범문으로 쓰겠다며. 취미생활이 재능으로 인정받아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아나운서답다’라는 평판을 들을 때면 마음이 더없이 뿌듯했고 기뻤다. 스스로 전문성이 입증되었다는 결론을 얻어서라고 할까? 그라나 충고 아닌 충고도 들려왔다. 어느 날 지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어떤 여자 분이 여러 시인들의 시를 낭송해서 이런 저런 단톡방에 절제 없이 올려서 많은 사람을 질겁하게 한다, 아마추어 낭송은 듣기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달아올랐던 내 머리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 나도 아나운서이긴 하지만 낭송가는 아니지 않는가.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진 데는 또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었다.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2013년 12월 30일 처음으로 한국에 입국한 나는 안산에서 용역회사를 통해 일용직으로 자동차 부품 조립회사에서 두어 달 일한 적이 있다. 회사엔 한족 직원들이 5,6십 명 되어 통역을 쓰고 있었다. 어느 날 통역이 갑자기 나오지 않았다. 임시회의가 소집되었는데 통역이 없었다. 일용직까지 모두 회의실로 불렀다. 우리 20여명 일용직들은 뒤쪽 구석진 쪽에 몰려 서있었다. 일용직은 회사에서 따로 녹색의 작업복 조끼를 착용하게 해서 아주 유표했다. 대리가 빙 둘러보더니 눈길을 우리 일용직 쪽에 와서 멈추는 것이었다. “방예금 씨, 앞으로 나오세요.” 부장이 회의정신을 전달해야겠는데 나더러 통역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회사 정규직원가운데도 조선족들이 많은데 나에게 통역을 시킨 것이었다. 회의는 약 1시간 진행되었다. 통역이 끝나자 회사 한족 직원들이 너도나도 다가와 이제껏 쓴 통역 중에 최고라고 칭찬해주었다. 몇몇 조선족 직원들도 “말하는 톤이 우리랑 어딘가 다르다, 통역 참 잘한다며,”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점심시간엔 한국인 직원들도 다가와 “말은 못 알아듣겠는데 참 듣기 좋았다, 느낌이 좋았다, 여기서 이런 쇠붙이를 다루기엔 너무 아깝다”고 하였다. 이날 나는 마음이 여간 흐뭇하지 않았다. ‘나 아나운서 헛하지 않았어.’ 당연히 이들은 내가 중국 방송국 전직 아나운서였다는 것을 몰랐다. 

 점심시간이다. 사내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식탁에서 묘한 기류가 감지되었다. 나와 한 용역회사 소속인 일용직들이 누구도 나한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투명인간이 된 느낌이었다. 용역회사 일용직들의 나에 대한 공공연한 따돌림이 시작된 것이다. 본의 아니게 ‘봉망필로’하여 미움을 산 것이다. 특히 회사 지도층에서 나를 통역으로 부르는 날이면 그 분위기가 더 살벌했다. 그 때 나는 나의 옛 직장 동료 네 사람을 떠올렸었다. 나의 방송국 동료 이평과 후춘, 곽영과 김단(이상, 가명)이었다. 이평과 후춘은 나랑 모두 특집부에서 일했었는데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어느 해 연초 이평이 특집부 부부장으로 발탁되면서부터 둘 사이는 급기야 벌어지고 말았다. 나중엔 후춘이 이평에 대해 뒷담을 하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곽영과 김단도 비슷했다. 곽영은 기자였고 김단은 아나운서였다. 둘은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어느 날 신입당원 명단을 공표했는데 그 가운데 김단의 이름이 있었다. 바로 그 이튿날부터 우리는 곽영과 김단이 붙어 다니는 것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곽영의 말에 따르면 김단이 평소에 자기한테 “입당을 해서 뭘 해”라는 소극적인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평과 김단도 본의 아니게 봉망필로하여 가장 가까운 사람들 눈에 낳던 것이다. 사람들은 주변의 사람들이 자기와 비슷할 때는 그럭저럭 잘 지내지만 그 가운데서 누군가 갑자기 튀면 받아드리기 힘들어하는 것 같다. 사람의 심리가 대게 이런가보다. 

 시낭송 앨범을 내려는 ‘꿈’을 간직하고 있는 나는, 그리고 그 지인의 말에 오기도 없지 않아 생겼던 나는 스스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점검해보고 싶어졌고 제대로 한 번 ‘사고’ 쳐 보고 싶었다. 그래서 엔터테인먼트회사를 찾아 시낭송 녹음을 하고 배경음악을 까는 등 섬세한 제작 작업을 맡겼다. 전문가의 손을 거쳐 나의 첫 시낭송작품이 탄생했다. “아나운서 티가 너무 나서 애교가 모자라고 딱딱하다”고 하는 평가도 있었지만 거의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었다. ‘이번엔 본인이 원해서 제대로 한 번 봉망필로 한 것인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한다. 내가 처음에 단톡방에 시낭송 녹음파일을 올려놓은 것도 결국은 잠재의식 속에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방송일과 글쓰기를 오랫동안 하지 않아 사람들 속에서 잊혀져가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당신들과 같지만 다른 면도 있다, 난 전직이 아나운서였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봉망필로’, 국어사전에서는 “재간과 예기(銳氣)를 남김없이 다 드러내다. 능력을 뽐내며 자신을 과시하다.”로 해석했다. 적당히 표현하고 가끔 봉망을 드러내면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지만 도를 잘 장악해야 한다. 세상일을 혼자 다 알고 잘난 체하고 뽐내기 좋아하는 것만큼 꼴불견인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장봉노졸’과 ‘봉망필로’는 완전히 다른 두 가지 개념, 두 가지 처세술이다. 그럼 그 도를 어떻게 장악할까? 나는 그 답을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시 “모든 것에 뛰어날 필요는 없다”에서 찾았다. 시의 마지막 련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추구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고 있다면/겸허한 마음으로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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