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철/홍연숙/백운/이다연의 근작시를 중심으로

▲  허인프로필 본명 허창렬, 시인/평론가. 기자/편집 역임. 재한동포문인협회 평론분과장/부회장
 [서울=동북아신문]시적 상상력의 본령은 공자가 언급했다 싶이 ‘시중지도(時中之道)에 있는것 같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일찍 리치가 말했듯이 " 더욱 깊숙히 들어 갈수록 짐승이 보인다"와도 같이 "인성이 아니면 야성"이라도 읽는 이들이 섬찍해 할 정도로 보여져야 비로소 완정한 시라고 할수가 있질 않을가? 이 방면에서 이명철 . 백운. 이다연이 이번에 보내 온 시들은 멋진 퍼포먼스를 기초로 잠깐이나마 그 우울했던 눈동자에서 정열로 반짝이는 카타르 시스를 보여주는듯 하여 희열을 느껴본다. 동일한 균열을 깨고 다시금 새롭게 균형을 맞춰 가야 하는것이 시가 되듯이 총체적으로 읽을 맛이 있어야 하고 또한 재밌게 읽혀져야 비로소 시라고 할수가 있질 않겠는가? 

 이명철의 경우: 다양한 레퍼토리로 읽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또한 상투화된 언어의 사용들을ㅡ 현실적으로 탈피를 시도하여 ㅡ그 언어가 원래 지녔던 심리적 감성의 바탕을 다시금 포착하게끔 하였으며 언어를 기호로서의 그 기능보다는 하나의 실재를 구축하는 형상적 재료로 사용하였다는 점이 높이 평가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모더니즘 계열의 새로운 시도였다고 보아진다. 즉 회화를 특성으로 하는 모더니즘 시에서의 이미지를 중시하여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자신의 시를 새롭게 발전시켰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러한 실례를 우리는 " 표적"에서 뚜렷이 제대로 들여다 볼수가 있을것 같다. /저격수는 노숙자를 겨냥하지 않는다/누군가의 총에 맞아죽는 건 행복한 일이다/에서 찾아 볼수 있는것은 누군가의 " 표적"이 될수 있음직한 그러한 자격지심이다. 총에 맞을수 없는 노숙자의 그 신세마저 부려움의 대상이 될때 이 한구절의 시구가 가지는 의미는 자못 심각하다. 심각하다 못해 이글거리는 불씨를 두꺼운 종이로 덤덤하게 잘 포장하여놓은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즉 무의미한 의미속에 또다른 의미가 있듯이 삶은 균열이 아닌 균형이라고 말하여야 옳을것 같다. /컵 하나가 정의로 채워지기까지/삶의 게임은 비열한 냄새를 풍긴다/에서 찾아 볼수 있는것은 휴머니즘적인 인문주의 사유이다. 이명철의 시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잘 구성되여 있다. /육체의 파산이 슬픔으로 떠난다 하여도/따가운 피는 울먹임으로 약한 잡초를 키운다/눈물이 없어 울지 못하는 이 세상 여기저기에서/또 다시 총소리가 울린다/에서 " 총소리"는 매일이다 싶이 희비가 엇갈리고 생과 사가 공존하는 랭정한 삶의 현장을 나름대로 리얼하게 스케치한것으로 보여진다.  홍연숙의 경우: 시는 인류가 남긴 최고의 문화예술이다. 공자는 역대의 시를 모은 <시경>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중국의 옛 사람 원매는 시를 읽으면 인생이 아름다워진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항살 이런 질문을 많이 한다.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수 있는 겁니까?”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꼭 알 맞는 대답은 아직 없다. 시는 뭐다 정의하기 어려운것처럼 시를 쓰는 특별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시인들이 시를 써오며 공감하고 동의해온 몇 가지 공통점은 시인 개인이 오랫동안 시를 써오면서 굳어진 습관이 있을 뿐이다.  괴테는 64년간 ‘파우스트’에 매달렸으며/ 발자크는 매일 밤 수도사 옷을 입고 촛불을 켜놓고 여섯 시간 이상 작업을 시작해서 작업이 끝날 때까지 60잔의 커피를 마시며 글을 썼으며 ‘보봐리 부인’을 쓴 프로베르는 적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3일 동안 방바닥에서 골머리를 앓은적이 있으며 톨킨은 ‘반지의 제왕’을 18년 걸려 완성하기도 하였다.  홍연숙의 "우리가 찢어 발긴 그녀"는 힘 없고 여린 약자를 무참히 짓밟아 버리던 악습에 과감히 마음 한쪽 구석에 깊숙히 간직되여 있던 자성을 높이 들어 야성에 알싸한 채찍을 시원히 후려 갈긴 삶에 대한 과감한 폭로로 보이며 더우기 쑥스러운 자기성찰로 보여진다. /그녀는 떠나갔어/그녀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어/ 유부남이고 백수에 건달이고/또 난봉군이라고들 수군거렸어.../ 를 베이스로 깔았기에 제일 마지막 결구에서 /그녀는 예뻤어/스물여덟의 등골에서 피여난/ 흔하디 흔한 사랑만으로도 예뼜어/가을비에 젖어버린 저기 저 슬픈 백합만치나/는 사뭇 회오리치는 감정을 빛의 속도로. 시속의 "화자"를 독자들에게 전달시켜 이명감과 함께 공명감이 무척 컸던것 같다. 오랜간만에 읽어보는 스토리가 있고 스스로 삶의 무게에 허덕여 보게 하는 아주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백운의 경우: 시에서의 회화성을 뛰여 넘는 이미지즘의 조형에 선, 공간과 같은 내면성 및 그 의지까지를 이미지화함으로써 모더니즘시가 지향했던 사물시의 한계를 잘 극복했다고 볼수 있다. 백운은 분명 초학자인데 시제가 시사하다싶이 재밌게 시를 요리할줄 아는것 같아 무척 고무적이라고 보여진다./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다/서울에서, 또 바다 건너 그곳에서/서로간 카톡으로 문안했다/멀지 않지만 바쁘다고/서로 사이가 멀다고 생각했다/에서 살펴 볼수 있는것은 초현실주의적인 "거리감" 조성이다. 산다는건 수도 없는 만남과 이별.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수요로 하는 그런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항상 거리를 필수로 하고 있기에 비로소 우리들의 삶은 더욱 흥미진진하다. /어느날, 그가 아프다는 소식 들었다/왜서인지, 눈물이/마음의 강에서 흘렀다/멀고 가까운 사이와 사이에/언제부터 우리가 끼여 있었던가?/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있다.../아주 잘된 한수의 시라고 하여야 겠다. 여기서 /왜서인지, 눈물이/마음의 강에서 흘렀다/멀고 가까운 사이와 사이에/언제부터 우리가 끼여 있었던가?/ 이러한 시구들은 군더더기 하나없이 아주 잘된 표현이라고 보여진다. 허나 시 한수를 잘 썼다고 하여 꼭 "시인"이라고는 할수가 없다. 앞으로 그가 얼마나 더 멀리ㅡ가야 할 지는 인내심을 갖고 조용히 지켜봄이 제일 현명한 처사일것 같다.  이다연의 경우: "산이 크면 골짜기가 깊고 그림자도 크다"는 말이 있다. 이다연은 시가 무엇인지 나름대로의 올곧은 견해를 갖고 있는듯 싶다. "길"은 시제가 너무 식상하여 은근히 근심이 되였었는데 " 변죽을 두드려 제대로 중심"을 울려주었길래 잔잔한 감동들이 모여 결국 크나 큰 감동을 제대로 견인해낸것 같다. /오늘도 토닥토닥//어둠이 가시기 전 동트기 앞서/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부랴부랴 짐 싸고/가방 하나 책 한가득/그리고 가족을 위한 선물/모자 목도리 마스크 하고/한겨울 날 밝기 전 추위에/다정한 당부 또 한가득/터벅터벅 공항버스 타러 가는 뒷모습/고향 다녀가는 그 모습/에서 살펴 볼수 있는것은 옆에서 가만히 지켜 보면 저도 몰래 눈물이 불쑥 날 만큼 바쁜 아버지의 그 일상이다. 이러한 서술은 지루하거나 낯설은것이 아니라 결국 성숙한 익숙함으로써 생활의 한 장면을 카메라에 잘 포착한 느낌을 준다./보이지 않는 어깨위의/산더미같은 짐/아버지라는 짐/묵묵히 걷고 또 걷는/아버지의 머나 먼 그 길……/에서 "짐"은 결국 인생을 깨달아가는 작자의 심층적인 고백이며 인생에 대한 경외심이여서 읽을수록 더욱 마음이 울컥해나는듯 하다. 시란 이렇다.올슨의 투사시ㅡ 긴스버그의 비트시ㅡ 블라이의 심상시ㅡ뭐니 뭐니 해도 시는 나름대로 열린 경험. 기존의 의미체계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자연 발생적 경험을 중시하여야 하는ㅡ 새로운 시학을 나름대로 마련하여야 한다.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나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의 구분이 따로 없는 세계에서 약동하는 생명의 이미지를 찾아야 한다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고 하더니 필자가 재한동포문인협회에 몸 담근지도 어언 일년 가까이 된다. 지난 일년간을 뒤돌아 보면 모르던데로부터 차츰 익숙하게. 조금 더 능수능란하게 시어를 고루고 다룰줄 아는 신인들이 적잖은 것 같다. 그중에서도 필자는 이명철. 홍연숙. 성해동. 백운. 이다연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수가 있어 큰 안위를 느끼곤 한다. 이들은 아직 어린 새싹들이다. 허나 멀지 않는 그 어느날. 마침내 무성한 숲을 이루어 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8년 2월 8일 동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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