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진 :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수필/수기 수십 편 발표.
[서울=동북아신문]우리 회사 A동 B라인 검사장에는 한국 아줌마 서옥선 씨와 베트남처녀 토안, 그리고 중국동포인 나 세 사람이 한 팀원으로 일하고 있다. 며칠 전 작업 중 한담하다가 나와 동갑인 서옥선 씨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박영진씨, 한국에서 15년을 살면서 느낀 우리 한국 사람들 어때요?”, “허, 글쎄요 뭐라고 딱히 말할 수 없네요.”, “호호, 별 부담 갖지 말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총체적인 인상을 좀 솔직하게 말해 봐요. 너무 궁금해서요.”  

   옥선 씨의 짓궂은 질문에 나는 어설픈 웃음만 나왔다. 사실 말이지 나는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평가하고 싶지도 않고 별로 욕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사람 사는 세상에 다 그런 거니하고 말이다. 중국이나 한국 그리고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도 있기 마련이고 착한 사람이 있으면 악한 사람도 있는 법이라는 엄연한 철리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슴깊이 뼈저리게 느끼며 살고 있는 터였다.

   2002년 6월, 나는 <코리아드림>을 안고 오매불방 그리던 고국-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에서 일해 돈을 벌어야 했던 나는 그때 합법적 취업이 불가한 불법체류자인지라 어쩔 수 없이 서울교외에 있는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의 한 으쓱하고 한적한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사단법인 장애인협회 재활용센터에서 저임금을 받으면서 헌옷가지와 신발들을 수거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했었다. 숙식은 주인집에서 제공하고 월급70만원을 받기로 했다. 불법체류인 방글라데시인, 몽골인도 왔다가는 그만두는 그런 형편없이 힘들고 열악한 곳이었다. 

   출퇴근시간은 오전 7시부터 저녁 7시까지라고는 하지만 새벽 5시에 납품차가 와도 주인이 깨우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일해야 했고 퇴근 후 침실에 누워 있다가 밤늦게 납품차가 오면 그냥 모른척할 수가 없어 또 나가서 일을 도와주어야 했다. 건설현장이나 회사일은 근로시간에만 열심히 일하면 되는데 주인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하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마음 편하게 휴식할 겨를이 전혀 없다. 이것저것 일을 만들어 시키는데 한시도 사람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다. 비참한 머슴살이의 설음을 피부로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일이 어지럽고 힘들며 지루한 것은 그래도 견딜 수 있었는데 사람이 먹는 음식을 가지고 치사스럽게 쪽을 놓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최씨네 여자는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난다고 전라도 전주 최가인 사모님은 일꾼들의 하루세끼 식사는 대충대충 해주고는 일만 죽도록 시키지 못해 안달이 나 한다. 

   주인집 냉장고안에는 고기만 꽉 차있어도 일꾼들의 식탁에는 고기구경하기도 어렵다. 한밤중이 되면 주인집 식구들끼리 고기를 구워 먹고 소주, 맥주를 마시면서 즐겁게 보내면서도 우리에게는 함께 먹자는 말도, 고기를 조금이라도 내어주면서 먹으라도 소리는 전혀 없다. 옆방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고기 굽는 냄새를 맡노라니 목구멍에서는 군침이 꼴깍꼴깍 넘어가고 마음속에서는 서러운 피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점심시간에 모처럼 집주인 이회장과 사모님, 그리고 나 세 사람이 식탁에 마주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이때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 농담반 진담반 섞어가면서 우스개로 이렇게 말했다. “회장님, 저도 가끔씩 고기를 먹게 해주면 안돼요? 고기를 먹지 못하고 날마다 토끼처럼 야채만 먹으니 이제는 일할 힘도 안 나요. 곧 쓰러질 것 만 같아요. 한국에 돈 벌러 왔다가 병을 벌어 가겠어요, 흐흐.” 그러자 회장님이 “중국 사람들도 고기를 먹니? 몽골 그쪽 사람들이 고기를 주식으로 엄청 많이 먹는 것은 알지. 중국 사람들은 고기를 싫어하고 왕만두 같은 그런 밀가루음식을 즐겨 먹지 않니? 우리 미스터 박은 고기를 먹는가봐”하고 능청을 부린다. 내가 얼굴을 붉히며 “중국 사람들도 고기를 엄청 좋아하고 고기를 잘 먹거든요”라고 하자 회장님은 껄껄 웃으시면서 곁에서 식사하는 사모님에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여보, 오후에 시장에 가서 삼겹살을 푸짐히 사다가 저녁에 푹 구워주구려. 우리 미스터 박이 고기를 먹지 못해 일할 힘도 없다는데 그러다가 쓰러지면 안 되지.”

그날 저녁 나는 오래간만에 사모님이 구워주는 삼겹살을 실컷 먹고 소주 한 병까지 기분 좋게 마시고는 침실로 들어와 달콤한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전주 이가인 회장은 사모님과는 달리 교양도 있고 인정미도 있는 분이셨다. 이씨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조선역사에 무척 정통하시였다. 이전에 교사사업에 종사하셨다는데 내가 중국에서 대학도 나오고 한국어와 한글에도 능통하고, 또 한국역사와 문화에서도 밝은 것을 알고는 나를 무척 예뻐하고 잘 대해주었다. 기회가 되면 늘 나와 함께 차를 몰고 자주 다니시던 남양주에 있는 남양천으로 가서 물고기를 잡아와서는 시원하고 얼큰한 세치네 매운탕을 끓여서 함께 소주도 마시면서 세상사를 담론하기도 하고 시국을 운운하기도 했다.  

  회장님이 나를 미스터 박 이라고 귀맛 좋게 불러주니 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러나 나와 함께 기숙하며 일하는 이씨 아저씨(충남 공주사람)에게는 늘 “어이 이씨, 이리 와봐”하면서 막말을 늘여 놓아서 나이가 지긋지긋한 이씨 아저씨는 늘 기분이 언짢아했고 화가 치밀어 입이 호빵만 해지곤 했다. 술을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이씨 아저씨를 이회장은 같은 이씨라지만 봐주지도 않고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씨, 이씨 한다고 이회장님을 뒤에서 “죽일놈! 뒈질놈! 썩을놈!……”하면서 욕하던 이씨아저씨가 이곳을 떠나자 이번에는 평택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돈 벌러 갔다가 얼마 전에 한국에 돌아왔다는 마흔 살 나는 변씨형님과 한방을 쓰게 되었다. 성격이 괴벽한 변씨는 말수도 적고 무뚝뚝하며 눈빛도 써늘한 사람이었다. 한국에 와서 지들 돈을 벌어간다고 나를 무척 냉대하고 미워하는 눈치였다. 자기도 미국 돈을 벌려고 태평양을 건너갔다 왔음에도 말이다. 회장님과 사모님과도 친절하지 못하고 일을 해도 눈치만 보고 잔꾀를 부린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내가 바지호주머니를 뒤져보았더니 어제 밤까지만 해도 있었던 돈 4만원이 내가 잠자는 사이에 가뭇없이 사라졌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으쓱한 이런 산에 도둑이 찾아올 리도 없고 회장과 사모님이 내 방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돈이 없어졌으니 변씨가 훔친 것이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두 사람뿐인 방에서 내 돈을 훔쳤다는 것은 나를 불법체류자인 것을 알고 내 돈을 훔쳐도 감히 따지지도 못하고 경찰에 신고도 하지 못할 줄을 알고 그런 것이었다. 어제 사모님한테서 5만원을 가불해서 슈퍼에 가서 간식을 만원어치 사왔었다. 가불할 때 변씨가 이상야릇한 눈길로 훔쳐보는 것이었다. 변씨가 이 정도로 형편없는 인간인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둘이 한바탕 싸우고 싶었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다. 식사시간에 회장과 사모님에게 말했더니 회장님은 “응, 그래? 미스터박의 돈이 없어졌어?”하며 얼굴을 흐리는 것이었다. 사모님은 “우리 한국에서는 돈을 도둑 맞으면 돈을 잃어버린 사람 탓이라고 해, 어디 가서 해볼 데도 없어, 그러게 왜 돈을 잘 간수하지 못했어?”하면서 오히려 나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난 정말 억울하고 기가 막혔다. 이렇게까지 어처구니없고 한심한 일이 위대한 대한민국에서 생길 줄은 난 그때 정말 꿈에도 상상 못했다.

   며칠 후, 중국 연길에 살고 있는 누님한테 문안전화를 했더니 누님이 희소식을 전해왔다. 누님네 민박집에 한국 손님 두 분이 오셨는데 한국에서 건설업을 하는 수원에 사시는 오야지 분이시란다. 남동생이 한국에 돈 벌러 왔다고 하니 저들한테 보내란다. 출퇴근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고 숙식 제공하고 초보로 월급 100만원을 주며 시일이 지나면 월급을 올려준단다. 내가 불법이래도 저들이 다 알아서 잘 돌봐준단다. 어제 매형이 두 분을 모시고 백두산관광을 떠났는데 며칠 후 한국으로 돌아가니 한번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날것처럼 기뻤다. 지긋지긋한 이곳을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비둘기처럼 훨훨 날아 가버리고 싶었다. 일도 힘든데 도둑놈 변씨, 변태 같고 병신 같은 변씨하고 한방에서 지내는 것이 지옥과 같았다. 워낙 천성이 어질고 착한 박가네 남자인지라 그저 꾹 참고 있자니 스트레스와 마음고생인들 오죽하랴!

   그래서 회장과 사모님한테 사정이 있어서 며칠 후 떠나야겠다고 여쭈었더니 두 분 모두 여간만 아쉬워하지 않았다. 하긴 이런 곳에서 나처럼 착하고 일도 열심히 하는 젊은 일꾼을 둔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드디어 떠날 날이 왔다. 시간이 있으면 종종 찾아뵙겠다는 듣기 좋은 인사말을 남기고 두 분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수원으로 떠났다. 오후 6시에 수원역에서 수원 오야지분하고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한국의 푸른 하늘아래서 또 다른 새로운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2018 02 12  전북 김제 제이피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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