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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박영진 글/ 살며 생각하며> 거울을 선물하는 남자 (외 2편)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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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07  10:4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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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진 :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수필/수기 수십 편 발표.
[서울=동북아신문]해마다 3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3.8부녀절이다. 오래전부터 부녀절은 이미 그 이름을 떠나서 남녀를 불문하고 더불어 즐기는 명절로 되어있다. 이날에 남자들이 여자한테 무엇을 선물하는가 하고 물으면 어떤 품위 없고 걸쭉한 양반들은 정자(jingzi, 镜子)를 주면 그것보다 더 좋은 물건이 어디에 있냐며 우스개를 피우고유식하고 문명한 신사들은 그래도 거울(jingzi)를 선물하면 가장 의미가 있지 않을까 라고 말한다. 여자들이 거울을 보면서 얼굴도 예쁘게 가꾸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좀 먹어가는 영혼과 양심도 비춰보라는 뜻이리라.

요즘처럼 소위 성적 자기 결정권이나 행복 결정권을 떠들면서 자기중심주의와 향락주의에 빠져 가족이고 가정이며 심지어 자기가 낳은 자식도 나 몰라라 하고 오직 자기 쾌락만 찾아 헤매는 여인들도 많다. 적어도 어린 동심들에 상처를 주는 일만 없어도 얼마나 좋겠는가.

때마침 오늘 애 엄마의 생일이기도 하여 나는 편지와 함께 정교하게 만든 값비싼 손거울을 사서 애 엄마 앞으로 택배로 보내주었다. 이미 깨어진 거울처럼 망가진 가정이지만 내가 선물한 새 거울을 보며 마음도 비춰 보고 즐거웠던 우리들의 지나간 추억들도 떠올려 보며 우리가 좋아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귀여운 아들만은 행복하게 해주자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식을 봐서라도 우리 서로 원망도 하지 말고 미워하지도 말며 서로 축복하면서 잘 지내보자고 말했다.

남녀지간의 인연이란 하늘만이 그걸 알 수 있고, 또 때가 되면 자연히 이루어진다고 한다. 1996년 겨울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그녀와 알게 되었는데 나의 뜨겁고 진정이 어린 사랑의 공세 앞에서 그녀는 드디어 마음의 문을 열어 주었었다. 우리 두 사람의 낭만적인 사랑을 축복하는 듯 그날 밤 하늘에서는 하얀 눈꽃들이 하늘하늘 춤추며 내렸었다. 그때 나는 세상의 모든 행복을 나 혼자만이 독차지한 것처럼 날듯이 기뻤고 가슴 뿌듯하게 느껴졌다.

꿀처럼 달콤하고 꿈처럼 황홀했던 동거생활을 해오다가 꽃피는 봄날 사랑의 계절에 우리는 드디어 연변국제무역청사 웨딩홀에서 남부럽지 않게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명실공이 진정한 가정을 이루었다. 1년 후인 20003월에는 기쁘게도 귀여운 귀동자까지 태어나서 우리 집안에는 즐거운 웃음소리가 떠날 줄 몰랐다.

살다보면 자기의 생각대로 안되는 게 사람의 일인가 본다. 사노라면 산토끼 잡으러 갔다가 집토끼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잘 살아보려고 2002년 겨울 나는 울며 발버둥질 치는 세 살 난 아들과 석별의 눈물을 소리 없이 흘리는 아내를 두고 한국으로 떠나갔다. 그날도 흰 눈은 하염없이 내렸다.

몇 해 후 돈을 벌어 우리 집은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생활형편도 날로 좋아졌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 좋아하는 여인이 생겨서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집사람도 그동안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외간 남자들과 휩쓸려 다니면서 무도장도 다니고 술좌석에도 자주 드나들면서 집안일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중에 감정이 파열된 우리는 결국 이혼장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그날도 흰 눈은 소리 없이 내렸다. 자식은 내가 부양하기로 했다. 그녀는 울며 매달리는 일곱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아들애를 연로하고 병도 많으신 할머니한테 맡기고 아무런 미련도 없이 한 마리 철새처럼 천국 같은 한국으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서울 강남의 부자동네로 데리고 가서 이 세상의 온갖 호강한 생활을 다 시켜주겠다는 말 잘하는 한국인한테 시집을 간 것이었다.

몇 해 후 그녀는 연길로 와서 아들을 찾아보았다. 그날도 흰 눈은 하루 종일 내렸다. 그동안 그녀는 한국에서 자페증 증세가 있는 지적장애자아들을 낳아 키우고 있었는데 별별 고생을 다한 모양이었다. 집도 없고 돈도 없으며 경제내원도 없는 한국사기군한테 크게 당한 거였다.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여러 번 가출도 했었단다. 오래간만에 만난 두 모자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보를 터뜨렸단다. 후에 그녀는 도저히 살수 없어 이혼수속을 밟고 생지옥 같은 그곳을 박차고 나와 자유롭고 즐거운 행복한 새 생활을 시작했단다.

한국에 와서 자기가 직접 한국생활을 피부로 체험해보고 돈도 피눈물이 나도록 힘들게 벌어보고 나니 그동안 한국에서 별별 죽을 고생을 다하며 돈을 벌었을 남편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술상에서 뻥치는 얼치기사내들의 헛소리를 곧이 듣고 한국에는 돈이 길바닥에 널려 그저 가져오는 줄만 알았던 어리석었던 자신이 너무나 미안해난다며 이제라도 그때 멍들었던 내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 못했던 엄마구실도 해보며 살고 싶단다.

이혼해서부터 십년동안 애 엄마한테서 받기로 되어있는 아들의 부양비를 한 푼도 못 받으며 줄곧 혼자 힘으로 힘들게 아들을 키워온 나는 한때 그녀가 너무 괘씸해나고 원망스러워 미쳐 죽을 것만 같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세월도 많이 흘렀고 또 그동안 고통스럽게 살아온 그녀의 불쌍한 사정도 알게 되면서 한국에서 온갖 고생을 다했을 그녀가 무척 불쌍해 났다. 그래도 한때는 뜨겁게 사랑하면서 부부지연도 맺었으며 아들애까지 낳아 키우지 않았던가. 고우나 미우나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엄마와 아빠가 아니겠는가.

나는 애 엄마를 내가 사는 전라북도로 초청하여 전주시내관광과 세계에서 가장 긴 새만금방조제를 구경시켰고 또 그녀가 사는 서울로 가서 그녀와 함께 남산타워에도 오르고 63빌딩에도 올라가 보았으며 청와대가 있는 경복궁구경도 하고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을 돌면서 쇼핑도 하고 명동에 있는 고급요리집에서 맛있는 식사도 함께 하면서 회포도 풀고 상처 받았던 마음도 서로 달래주면서 화목하게 지내자고 했다.

애 엄마하고 자주 연락도 하고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기도 하지만, 이미 깨어진 거울이라 아무리 노력해도 그전처럼 완미할 수 없었다. 회복하여 같이 산다 해도 예전의 달콤한 생활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그저 흘러간 행복했던 추억들이 그리워 나고 가슴 아픈 마음속의 상처는 하루빨리 잊고 싶을 뿐이다.

살다보면 이 세상에 나의 가족 나의 가정처럼 안타깝고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고도 많을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가족끼리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이해하고 아껴주면서 거울처럼 깨어지는 가정이 점점 적어지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맑고 깨끗한 거울을 선물하면 행복한 나의 가정 나의 가족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허황된 꿈을 꾸면서 오늘도 이 남자는 마술거울을 선물한다.

 

 

2.   청명 날의 단상  

 

 청명 날이다. 한국에서 연길로 돌아 온 나는 고향인 왕청 백초구로 가서 조상님들의 묘소를 참배하고 또 연길에 있는 경도릉원으로 가서 몇 해 전에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님도 만나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인생도 삶과 죽음도 그리고 불행과 행복도…….

사람은 태어났으면 죽는 법이고 만났으면 헤어지기 마련이다. 좋은 때가 있으면 나쁜 때도 있을 것이고 웃는 날이 있으면 우는 날도 올 것이다. 그러니 살았으면 즐기고 또 살았을 때 맘껏 즐겨라. 그게 바로 사람이 사는 재미이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우리 인간은 세월이라는 끝없이 긴 여행길에서 인생이라는 작은 역에 잠깐 들린 길손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모자식으로, 친구사이로, 부부지간으로 서로 만나 뜨거운 사랑도 주고 깊은 정도 나누면서 별별 희로애락을 다 겪다가 어느 날인가 말없이 갑자기 하나둘씩 이 세상을 떠나가 버린다. 다시는 못 올 그리고 영영 못 만날 머나먼 길을 떠나가 버린다. 너무나도 안타깝고 눈물겨운 짧은 만남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연변에는 남자 나이 마흔다섯이 지나야 철이 든다는 말이 있고 이곳 한국에는 남자가 환갑이 지나 보아야 비로소 세상을 알게 된다는 말이 있다. 내 나이 이제는 마흔다섯이 지나고 지천명나이를 코앞에 두게 되니 이제야 부모님들의 깊은 사랑을 알 것 같다. 아무리 효도하고 싶어도 아버님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나셨다. 자식은 효도하고 싶은데 부모님은 기다리지 않고 자식은 모시고 싶은데 부모님은 계시지 않네. 너무나도 안타깝고 속상하며 마음이 아프다. 자식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고 조금이라도 일할 수 있을 때 돈을 얼마간이라도 더 벌어서 자식을 도와주고 싶다며 한국으로 와서 숱한 고생을 하시다가 흑룡이 재난을 몰고 온다는 2012년 임진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 한국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갑자기 폐렴으로 객사하시였다.

이렇게 착하고 불쌍한 아버님을 나는 한 때 엄청 원망한 적도 있었다. 권세도 없고 돈도 없는 아버지를 잘못 만난 내가 정말 복이 없고 불행하다고 생각되었다. 부모덕에 출세하여 떵떵 큰소리치며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고 힘없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불쌍해보였다. 하긴 그때가 바로 한사람이 출세하면 그 집안의 개와 닭도 출세한다는 유행어가 나돌았고 부모덕에 용이 된다(wangfucenglong)는 신생성어까지 생겨났던 공화국사상 유례가 없었던 부정부패의 사악한 기풍이 전 중국 땅을 휩쓸었던 1990년대였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너무나도 어이없고 철이 없었으며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아름다운 이 세상에 나를 낳아 키워주시고 가난하고 구차한 시골에서 뼈 빠지게 농사를 지으시며 힘들게 공부 뒤 바라지를 해서 나를 어엿한 대학생으로 만들어 주신 부모님들의 은공과 은혜는 하늘보다도 높고 자식한테서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오히려 조금이라도 도와주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안달이 나하는 부모님의 바다보다 넓은 아량과 깊은 사랑에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 난다. 자식들이 잘 되기를 또 행복하게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이 세상 모든 부모님들의 다 같은 가련한 마음들이 아니겠는가.

효도는 절대로 미룰 수 없는 법인데 사람들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 효도를 하지 않고 부모님들이 저 세상으로 떠나가신 후에야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후회를 한다. 나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에 이 아들이 잘되라고 충고를 해주면 늙은이 주책없이 잔소리한다고 구박을 했고 외로워서 술을 좀 드시면 술주정한다고 아니꼬워했다. 지금 철이 들어 생각해보니 그때 일이 너무나 후회된다. 아버님한테 사랑한다는 말 좋아한다는 말 존경한다는 말을 한마디도 한번이라도 하지 않았던 내가 미칠 듯이 미워난다. 아버님한테 듣기 좋은 말 기분 좋은 말이라도 해드렸더라면 이토록 마음이 아프고 괴롭지 않았으련만…….

한국가요 <불효자가 웁니다>가 내 마음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며 나를 울린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그리운 아버님을 떠올려보고 이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아버님한테 효도를 하지 못했던 불효한 내 자신의 과거를 뼈아프게 후회하면서 소주를 한 병씩 마시기도 한다.

한평생을 깨끗한 공산당원으로 착하고 바르게 살다가 떠나가신 아버님이 하늘나라에서 굽어 살펴주시어 어머님이 정정하게 살아계시어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지 모른다. 아버님한테 다 하지 못했던 효도를 어머님한테 곱절로 해드리고 싶다. 어머님을 근심걱정 시키지 않고 기분 좋게 즐겁게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제일 좋은 효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효도가 또한 나의 기쁨이고 행복이라는 도리를 깨닫게 되었다.

불행이란 만족을 모르는 사람에게 내리는 신의 저주이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불행하다고 여기면서 영원히 행복과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 행복은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인생을 대하며 삶을 열심히 영위해나가는 사람들에게 주는 신의 은총이고 축복이다. 행복이란 결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가 그저 주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바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다.

내가 원망하는 삶을 버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과 남을 대할 때 내 마음의 샘터에서 행복의 단물은 샘솟아 내 마음을 달고도 시원하게 적시여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살아있어 감사하고 건강해서 감사하며 만나니 반갑고 감사하다.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이제는 슬프고 아팠던 나쁜 기억들을 영영 잊어버리고 좋은 일만 생각하면서 기쁘고 즐겁게 살고 싶을 뿐이다.

 

3. 청년시절의 추억 한 조각
    - 그립다, 그때 그 추억
                                  
힘든 세상을 숨 가쁘게 달려오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내 나이도 사십대가 다 가고 이젠 지천명나이를 코앞에 두게 되었다. 십년만 젊었어도 얼마나 좋겠는가고 허황된 생각도 해보고 내 나이가 어때서 하면서 이삼십 대처럼 즐겁게 살아가지만 귀밑머리는 점점 희여만 가고 기력도 해마다 못해져 간다. 어쩐지 자꾸만 옛사람이 보고 싶고 지나간 추억들이 그리워난다. 그래서 젊어서는 꿈에 살고 늙으면 추억으로 산다는 말이 있는가 본다. 이제라도 잊어버린 망각의 바다에서 그때 그 청년시절의 추억 한 조각이라도 건져내어 잠시나마 즐거웠던 연변대학시절로 되돌아가보고 싶다.

때는 1989년 12월 9일, 이날도 나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여느 때처럼 책을 들고 열람실로 찾아갔다. 이때쯤이면 저녁자습을 나온 학생들로 빈 좌석이 없을텐데 오늘따라 열람실은 너무나 조용하였다. 알아보니 오늘저녁 학교강당에서 “12.9학생운동”기념행사가 있어 모두들 그리로 간 것 같다고 하였다. 자습을 마치고 열람실문을 나서니 밖에서는 솜같이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학교의 모든 행사라면 빠지지 않는 열성팬인 나인데 오늘저녁 행사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 여간만 아쉽지 않았다. 혹시 행사가 끝나지 않았으면 잠간만이라도 구경하려고 학교강당으로 갔는데 때마침 행사가 끝나 학생들이 물밀 듯 나오고 있었다. 모두들 즐겁게 웃고 떠들며 야단들이다. 게다가 눈까지 펑펑 내리니 더욱 기분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하긴 마음껏 뛰놀고 제멋대로 떠들기 좋아하는 것이 청춘시절이 아닌가.

침실에 들어서니 많은 동창들이 와있었는데 나를 보자 야단법석을 떨었다. 오늘저녁 행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 대학생예술절의 글짓기응모결과를 발표했는데 글쎄 내 이름도 있더라는 것이었다. 우리 반 이름이 나오니까 귀담아들었더니 내가 수필조 1등이더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언제 그런 글을 썼느냐고 궁금해들 했다. 그들 중에는 나한테 이런 글재주가 있는 줄 몰랐다며 놀라워하는 친구도 있었고 상을 탔으니 오늘저녁 한턱내야 한다고 조르는 친구도 있었으며 우리 반 영예를 떨쳤다며 축하해야 한다고 떠드는 친구도 있었다.

그제야 나는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9월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학교 공시판에 붙여놓은 “대학생예술절 글짓기응모공시문”을 보게 되었다. 워낙 문학에 흥취가 있었기에 나는 무척 궁금하여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읽어보았다. 대학생활을 반영한 글로서 문체와 언어 그리고 글자 수는 상관없이 무릇 본교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다 참가할 수 있었다. 어쩐지 하늘이 나한테 주는 기회 같아서 마음이 들떴다. 또 나의 글짓기실력이 어느 정도일가 궁금하기도 하여 이번 기회에 한번 시험해보고 싶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기에 시간만 있으면 많은 책을 얻어다 보았다. 그래서인지 작문을 지으라고 하면 식은 죽 먹기로 글이 술술 흘러나왔다. 하여 <중학생우수작문선>에도 여러 편이 실렸고 고중 3학년 때에는 내가 쓴 6편의 글이 본보기작문으로 선정되는 영예도 받아 안았다. 그때 작문시간만 되면 선생님이 내가 쓴 작문을 언급하면서 나를 칭찬해주었기에 나는 작문시간이 돌아오기만 손꼽아 기다렸다. 하여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했으니 내가 어깨를 으쓱했던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글쓰기에서 단맛을 본적이 있는 나는 어쩐지 이번에도 꼭 좋은 글을 써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하여 수업시간이 끝난 후 며칠 동안은 학교 뒤 산에 있는 소나무 숲으로 올라가 조용히 작품을 구상해 보았다. 연후에 나는 “침실야곡”이라는 제목으로 대학생들의 침실생활을 반영한 글을 써냈다. 다 쓰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나고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아무리 못해도 우수상은 받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밖에도 1등상이라니 너무나 놀랍고도 기쁘기만 하였다. 나는 나의 글을 예쁘게 봐주신 평심위원선생님들이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5월 4일이 청년들의 명절이라면 12월 9일은 대학생들의 명절이다. 확성기에서 오늘저녁은 평소와는 달리 12시까지 외출을 허락한다는 통지가 흘러나왔다. 모두들 너무 기뻐 우르르 기숙사대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펑펑 내리는 흰 눈을 무릅쓰고 왁작 웃고 떠들며 맥주점으로 향했다.


지금 대학성이 자리 잡고 있는 그곳에 그때 우리의 기숙사가 있었다. 기숙사주위는 철란간으로 빙 둘러막아서 대학교 정문 맞은쪽에 있는 대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했다. 저녁 10시면 대문을 잠갔고 그 후에 들어오는 학생은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때 기숙사주위에는 수많은 단층집들이 올망졸망하게 들어앉아있었다. 장사에 눈을 뜬 사람들이 진작 그곳에다 숱한 맥주점을 차려놓았었는데 장사가 엄청 잘 되었다.

맥주점에 들어선 우리는 술상에 마주앉아 웃고 떠들며 웃음꽃을 피웠다. 오래간만에 동창들이 모여 앉으니 마치 한가정의 친형제처럼 친근하고 정답게 느껴졌다. 조양천에서 온 조기남이 날 보고 농담을 걸었다. “왕청같은 곳에서 온 네가 왕청같은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글재주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자 내가 넉살좋게 받아넘겼다. “왕청같은 짓을 하는 왕청같은 놈은 아니고 아주 착하고 바른 사람이니까 그런 왕청같은 생각이나 왕청같은 말은 하지도 말라.”

내 말에 모두들 우습고 재미있다며 야단들이다. 나는 왕청이라는 말은 만족어인데 물 맑고 깨끗한 고장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해주었다. 하여간 왕청이라는 이렇게 좋은 이름을 못나고 무식한 사람들이 우습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왕청풍파가 금방 잠잠해질까 했는데 이번에는 룡정에서 온 정봉철이 또 우스개를 했다. 자기는 왕청떡박골이라는 말이 있어서 왕청에는 머리가 우둔하고 이상한 왕청같은 사람들만 사는 줄 알았단다.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목에 핏줄을 세워가면서 왕청을 위해 열변을 토하였다. “왕청떡박골의 유래는 왕청떡밥골에서 나왔단다. 산이 많고 험하며 산골짜기가 깊은 왕청현에는 항일근거지가 많았었다. 유명한 오영구항일근거지에는 떡밥골이라는 조선족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늘 밤이면 일본놈들의 눈을 피해 몰래 떡밥을 해서는 항일투사들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겨난 이름인데 그 후에 왕청에는 이렇게 떡밥을 해서 항일유격대에 보내는 떡밥골마을이 점점 많아졌단다. 하여 항일부대들은 왕청하면 우선 떡밥을 떠올리면서 왕청떡박골사람들의 고마움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왕청떡밥골은 점차 사람들의 입에 올라 전해지다가 언제부턴가 외곡 되여 왕청떡박골로 번져 졌단다.”

갈증이 난 김에 시원한 생맥주를 한잔 마신 나는 동창들을 골려주기 시작했다. “머리가 좋다고 자부하는 너희들이 꿈도 못 꾸는 1등상을 왕청같은 내가 타니 무슨 생각이 드느냐? 그러니 이젠 색안경을 끼고 사람을 보지 말고 ‘여산의 진면모’를 보라. 그리고 이후부터는 왕청사람들을 만만하게 보지 말라.”
시간이 이슥해서 맥주점문을 나서니 펑펑 쏟아드는 흰 눈은 어느새 대지를 백설세계로 만들어버렸다. 그날 저녁 우리는 흰 설탕 같은 하얀 눈을 헤치며 즐겁게 숙소로 돌아왔다.

유수처럼 빨리 흐르는 것이 세월이라더니 그때 그 대학시절도 이젠 벌써 28년이 지났다. 하다 보니 대학시절의 아름다운 꿈이 서려있던 대학생기숙사는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었고 우리들이 웃고 떠들며 이야기꽃을 피웠던 맥주점도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도 간혹 그곳을 지날 때면 그때 그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웃음이 절로 나오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지금이라도 기회가 되면 한번만이라도 동창들과 만나서 그립던 회포를 풀고 싶다.

언제면 그런 날이 올는지. 아! 그립다, 그때 그 시절. 아! 그립다, 그때 그 추억!

    2018 03 02

  대한민국 전라북도 김제시 대동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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