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연 프로필: 중국 길림성 반석현 출생 길림성 영길시 조선족고등학교 졸업. 교사, 자영업 종사. 현재 아모레 퍼시픽. 1989년 '도라지' 문학지에 수필(처녀작) <천국의 주인은 누구?> 발표. 그후 시 작품 다수 발표. 동북아신문 영업부장, 재한동포문인협회 사무국장
송편

깊어가는 가을 밤
별가족이 모여 앉아
보름달을 반죽한다.

너도 나도 빚어 만든
애기 반달들
달콤한 소망 하나에
별하나 심고
고운 날개 접어 올린다.

인고의 시루 속을
벗어난 하얀 반달
한입 꽉 깨물면
쫄깃한 행복이
가슴을 채운다

 

설맞이

구석진 곳에 쌓였던
먼지를 쓸고 쓴다

곰팡이가 덩어리진
하얀 고민을 담아본다

거울에 비친
머리 위로 자란
12만 갈래 뻗은
삶의 얼룩무늬

덥수룩하게 처진
근심을 한 줌씩
싹둑싹둑 잘라본다

가벼워진 수레를 끌고
황금개가 꼬리치며
문고리를 당기면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까?

 

[수필]여명의 소음
 

  한 달 전 부동산 사장의 적극적인 추천하에 다음 달이면 경매로 넘어간다는 집을 불과 십여 분만에 계약서에 사인을 해버렸다. 드디어 내 집을 마련했다는 생각에 기분은 하늘에 두둥실 뜨 있는 연 마냥 날아갈 듯했다. 날짜를 깜빡할 정도로 스쳐 지나가던 시간은 정작 이사 날을 받고 보니 황소만큼 느린 걸음을 하는 것만 같았다. 비단벽지와 고급스런 커튼, 아담한 화분들, 어항까지 준비한 후에 드디어 이사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총 여섯 가구가 살았는데 우리 옆집은 건물 관리하는 동대문에서 옷가게 하는 사십 대 아줌마였고 위층은 신혼부부였다.

  이사 온 지 일주일쯤 되는 날, 점심에 잠깐 집에 들렀는데 올라오는 계단에서부터 사층까지 핏자국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도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계단에 섬뜩하게 피를 그대로 방치한 걸까? 바로 그날 새벽이었다.“엉...엉”초상집에서나 들을 수 있는 애절한 울음소리가 건물의 정적을 뒤흔들었다.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두 시간 동안 계속되는 울음소리는 여섯시가 되어서야 그쳤다. 불길한 생각이 내 전신을 타고 흐르며 더이상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거실로 나와 델레비젼을 켜놓고 나서야 더이상 통곡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늘 계단에서 토한 듯한 피자국과 연상을 해 보니 아무래도 사층의 주인은 무슨 불치의 병에 걸려 저렇게 이 새벽에 통곡을 하느게 아닌가? 나는 뜬눈으로 별의별 상상을 하다가 출근 무렵에야 쪽잠이 들어 푸석푸석한 얼굴로 출근을 했다. 그다음 날 새벽에도 처절한 통곡 소리는 내 수면을 하얗게 쫓아 버렸다. 며칠이 지나도 계단의 핏자국은 방치한 그대로였다. 늦은 시간에 계단을 오르고 나면 마치 사층에서 산발한 여인이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했다. 환각에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세워지며 출입문의 비번을 누르는 사이에 누군가 내 목덜미를 확~거머쥘 것만 같았다. 그 소리는 분명 침실 북쪽 구석진 곳에서 나는 것 같았다. 이제나저제나 그칠까 하고 기다려 온 지가 열흘째 되는 날 시계가 새벽 네 시를 가리킬 때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어디든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 혹시 어른들이 평소에 말씀하던 귀신이 이 집에 있는 건 아닌가? 각혈한 것 같은 피로 봐서는 폐암이나 말기 암같은 선고를 받은 것이 아닌가? 아니면 새벽에 오는 통증을 이길 수 없어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여자가 연상되면서 갑자기 한없이 측은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둠이 몰려와 죽음의 그림자를 떠올리니 내 전신이 영하의 기운으로 소름이 쫙~돋아났다. 내 집을 마련한 지 불과 보름도 안 되는 사이에 이렇게 매일 새벽마다 울리는 통곡 소리에 따끈한 꿈이 채 식기도 전에 산산이 조각났다. 시장에서 물건 사는 일도 아닌데 너무 성급히 집을 산 게 후회막급이었다. 월세나 전세면 기한이 되면 이사라도 훌쩍 갈 수 있지만 내 집이라고 사고 나니 진퇴양난이었다.  

  퇴근 후 올라오는 걸음에 옆집 문을 노크했다. 사연의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사층이 신혼부부라 가끔 주말에 친구들이 와서 늦게까지 모임은 하지만 이상한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했다. 계단에 있던 피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자기 아들이 너무 속을 썩여서 따귀를 쳤더니 입안까지 터진 피라고 했다. 너무 속상해서 아직 청소하지도 못했다며 어줍게 얘기했다.

  시장을 갔다 오는데 사층 주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삼십대로 보이는 그 여자의 가냘픈 모습은 환자로 보일만큼 창백했다. 날씨가 추운 탓도 있지만 헐렁한 옷으로 온몸을 꼭 여민 그녀는 얼굴에 까만 마스크를 꼈다. 딱 봐도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 같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301호에 이사 온 집인데요. 혹시 새벽에 잠을 자지 않고 뭐 하세요?”갑작스러운 물음에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곧 “아~네 소음이 너무 컸나 봐요. 제가 요즘 영화제작 하는 음향을 깔고 하느라 새벽에 작업했어요. 이제 거의 끝났어요.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여자는 거듭 조심하겠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나는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여태껏 상상에 꼬리를 달고 공포에 떨었던 내가 그렇게 멍청하고 어처구니가 없음을 처음으로 느꼈다. 어쩌면 다른 곳으로 생각을 유연하게 돌리지 못하고 막다른 외곬으로만 추측해온 내가 바보처럼 생각되었다. 그날 새벽부터 정체불명의 통곡 소리는 바람에 날러 가듯 사라졌다. 

  층간소음으로 이웃 간의 갈등이 악화하여 살인까지 하고 사회문제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요즘 시대다. 조금의 이해가 사람들 사이에 화목을 불러오고 조금의 사랑으로 상대를 감싸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는가? 여명의 소음은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지금도 새벽에 간간이 소음이 들려오지만 의문이 풀리고 나니 내 귀에 자장가처럼 들릴 뿐이었다.

한 달, 두 달이 내 어깨너머로 훌쩍 지나가자 이제는 잠들면 업고 가도 모를 지경이다. 눈을 뜨면 이른 새벽부터 새들의 아침조회 소리가 나의 아침을 혼곤한 잠에서 깨운다. 따뜻한 햇볕이 창가에서 내 몸을 어루만지며 새로운 아침을 선물한다. 하루하루를 빨갛고 파랗게 행복으로 요리할 수 있어 감사하고 이 집으로 이사를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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