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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글/박화순]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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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22  10: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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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화순 약력: 중국 심양 소가툰 출생. kbs방송국에 수필 다수 발표, 우수상과 장려상 여러 번 수상, 특집에도 당선.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서울=동북아신문]나는 아버지가 그립고 생각 날 때면 저 넓고 높은 하늘을 습관적으로 바라본다. 별들은 대답대신 저마다 더 밝은 빛으로 반짝이고 있으며 그중 유난이 더 빛나고 있는 별을 바라보아도 가슴속에 간직하고 두었던 하고 싶은 말들이 마구 흘러나온다. 오늘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반짝이는 어떤 선이 나와 아버지를 연결해 주고 있다.

존경하는 아버지
그동안 하늘 나라에서 잘 계시고 있는지요? 오늘 따라 아버지의 생각이 절절하네요.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고향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셨지요. 우리와 가깝고도 먼 곳 갈수가 없는 남조선이라 하셨지요. 나의 또래들이 “고모, 이모, 삼촌”라고 호칭을 부를 때 저는 그들을 몹시 부러워했죠.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우리도 친척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단다”라고 하셨죠. 물론 마음대로 갈수도 없고 만나 볼 수도 없었지만 그 아주 “많다”는 말씀이 너무 좋았고 온 세상을 모두 나 혼자 다 차지 한 것같아 마음이 얼마나 든든하였는지 몰랐어요. 그때부터 저는 언제야 많은 친척들을 만날 수 있겠는지 꿈을 꾸었습니다.

이제는 묵묵히 우리들의 일거일동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심정 뒤늦게야 이해가 되는 듯싶습니다. 몇 번이나 이사를 하실 때도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낡은 종이봉투에 잘 간직 해 놓은 우리 집 가문의 가책을 참지에다 붓으로 잘 쓰인 글을 펼쳐 보셨다간 다시 잘 접어서 넣어 두시고 또는 잃어버리지나 않았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 하셨죠. 항상 “생명보다 더 귀중한 우리 집 가문의 가책이라면서 절대로 잃어 버려서는 안 된다”고 수도 없이 말씀 하셨죠. 뿐만 아니라 병환에 누워 계시면서도 가책 부탁을 또 하셨지요. 생전에 그처럼 고국을 그리면서 친척을 찾고 싶어 하셨지만 도저히 병환에서 일어나지 못하시고 꿈을 못 이루시고 아버지께서는 한을 품은 체 이세상과 하직 하셨지요.

꿈에도 밟기 힘든 아버지 어머니가 살았던 땅 고국의 문이 열린 것은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 후입니다. 중국의 조선족은 좀 더 잘살아 보겠다는 마음을 지니고 3분의 1 이상이 한국 노무의 길을 떠났지요. 저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돈을 들여서 2000년 8월에 ‘회사 고찰’이란 명분으로 브로커한테 중국에서 만져 보기 힘든 많은 돈을 건네주고 아버지 어머니가 살았던 고국 땅에 발을 디딜 수가 있었지요. 이 땅을 밟게 된 나의 마음은 흐뭇했으나 단 8일밖에 안 되는 비자고 앞으로 헤쳐 나갈 길이 너무 많은 지라 한 면은 극정이 끊이질 않았지요. 수선 저가 갈 길은 빚부터 먼저 갚는 길이였어요.

동포 정책이 지금처럼 자유롭지 않아서 매분 매초 항상 방선 하면서 그 힘든 일과 싸워서 그 많은 빚들을 몽땅 다 갚아냈습니다. 이젠 어느 정도 숨 돌릴 틈이 보여서 아버지의 원을 풀어 들이려고 작심 했어요.
큰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저는 조만간 청가가 쉽지 않았는데 설 명절에 번갈아 휴무를 정했을 때 휴식 청가를 하고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기로 정했어요.

2002년 정월 초하루 설레는 마음을 억제 하면서 서울에서 경북으로 달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지요. 지나가는 고층 건물이며 높고 낮은 첩첩 산들이 너무 좋았고 산 속으로 뻥 뚫은 굴길이며 넓고 똑바른 아스파트 길도 너무 신기하고 좋았어요. 버스는 저가 정한 종점에다 내려놓고  다음 정차할 역으로 향해 씽하며 떠나고 말았지요.

사람들에게 물어서 아버지가 태여 났고 살았던 고향마을 청도 하양면 고평동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앙상한 감나무 가지에 빠짝빠짝 곱게 말라서 있는 나뭇잎과  아직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붉은 주홍색의 감과 가지사이에 예쁘게 앉아 있는 까치 한 마리가  홍시에 붉은 루즈칠 하며 반갑다는 대신 “깍깍”하며 나를 반겨 주었어요.

저가 살았던 동북에는  한 그루의 감나무도 없다보니 해마다 남방에서 들어오는 감을 사 먹을 때마다 아버지는 꼭 감 이야기를 하셨지요. “나의 고향에는 많고 많은 것이 감이란다. 집 앞에도 감, 집 뒤에도 감, 오고 가는 길에도 감, 미처 따지 못한 감은 까치와 새도 처리하기 바쁘니까.”

아, 오늘 이 감나무가 바로 아버지께서 항상 말씀하셨던 그 감으로만 느껴집니다. 아버지께서는 저의 오빠 되실 분이 박~환이라고 하셨는데 박 용환 이란 분을 찾았는데 그분은 저가 찾는 분이 아니지만 저의 문중의 분이였고 십사촌 오빠였어요. 그분의 도움으로 대구에 계시는 문중 책임분과 전화를 걸어 저를 소개 하여 주셨지요. 소개 전화를 받자마자 문중책임 분은 빨리 저랑 만나겠다고 하셔서 지금 저가 청도에 있으니까 대구와 중심이 경산이니까 바로 경산에서 만나기로 정했습니다. 조금 후에 우리는 경산터미널에서 만나서 저가 가져간 가책과 문중의 족보를 펼쳐놓고 끝내 아버지가 찾으시려고 하셨던 분을 찾았어요. 아버지는 박봉술이셨고 동생은 박봉서였어요.

그분은 평생 군에서 군 간부로 한평생 근무 하시다가 어느 날 교통사고로 청각 장애인의 판정을 받았다고 하셨으며 나라에서 받은 상패와 훈장도 많으며 나라의 휼륭한 유공자란 명분을 가지신 분이였어요. 그 분의 자식들 친척들도 한분도 빠짐없이 이 책에 다 적혀 있었어요. 문중의 책임 분은 대구 달서구 여중 교장선생님이셨고 저와는 열촌이 넘는 오빠 박덕환이라고 하셨어요.

덕환 오빠 덕분에 한방에 친척을 다 찾았으나 이날은 시간이 없어서 만남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어요. 빨리 서울 일터로 가야 하니까요. 덕환 오빠는 박 봉서삼촌한테 전화를 걸어도 들을 수가 없으니 자기가 집적 찾아뵙고 이 일을 알려 드리겠다고 하시면서 그 늦은 밤에 자기 자가용으로 경산에서 서울까지 저의 일터까지 데려다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대한민국에 이렇게 인정 많은 오빠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셨지요?

2002년 2월 25일 아침 전화 한통이 걸려 왔어요. “당신이 박봉술이 딸입니까? 나는 박 봉서입니다. 우리 오늘 사간이 되면 서울에서 만납시다”라고요. 그날 덕환 오빠는 대구에서 울산으로 울산에서 서울로 자기 자가용으로 박봉서삼촌을 서울까지 모시고 오셨어요. 꿈에라도 한번 만나고 싶었던 분과 끝내 상봉하였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했고 진한 것보다 뜨거웠어요. 대한민국에 와서 이런 기쁜 일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기쁘고 반가웠다는 것은 이루다 말할 수 없었어요.

삼촌께서는 “이제 부터는 대한민국에 화순이 혼자가 아니라 ‘삼촌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거라. 지금 이 시각부터는 쓸쓸하고 외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말씀이 채끝나지도 않았는데  나의 양쪽 볼 우에서 뜨거운 것이 자꾸 흘러 내렸어요. 아버지가 생전에 그렇게 찾고 싶어 하셨던 삼촌과 여러 친척들을 오늘 꿈이 아닌 드디어 찾았으니까요.

삼촌은 또 제일 먼저 중국에 있는 오빠를 초청해서 만나 보시겠다고 하셔서 저는 서류 작성을 해서 오빠를 고국 땅에 모셔 왔어요. 그때 형님도 같이 초청 했으나 법이 엄해서 오지 못하게 되였으나 1년 후 오빠가 근무 중 갑자기 훼펠스 뇌염에 걸려 포항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간병인이 수요에 따라 저는 모든 서류를 작성해서 광화문 외교 통상부의 심사를 거쳐 부산 중국 영사관에 가서 서류 심사를 끝마치고 형님도 대한민국으로 모셔왔습니다.

저는 이따금 오빠한테 농담이 섞인 어조로 “오빠, 이 모든 일들을 아버지가 아신다면 저를 칭찬하시겠죠?” 그러면 오빠는 “왜 칭찬만 할리가, 만약 내가 먼저 한국에 왔어도 동생만큼 못 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저를 만나면 항상 “은인”이라고 칭찬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은인이라 기 보다는 친 자매로서 응당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대답 합니다.

저의 부부와 오빠 형님은 명절 때마다 삼촌을 찾아뵙고 인사를 나눕니다. 삼촌을 만난다는 것이 마치 아버지를 만나는 기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는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어요. 자식위해 가족위해 묵묵히 인생을 다 바쳐 왔지요. 그런 아버지를 위해 우리 자식들은 더 건강하게 바르게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 아버지께 효도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도 하늘나라에서 그러길 바랄 것입니다. 형제 자매간이 서로 돕고 의좋게 잘 살아 보겠다는 마음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저 넓은 하늘나라에서 별처럼 반짝이고 웃는 아버지의 모습을 매일매일 바라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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