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나와 너’의 참된 만남을 통한 대화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야만 인간이 인간다워진다고 보았다.

인간이 이 세계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다.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이다. 너와 그것을 떠난 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부버의 사상이다. ‘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세상에 순수한 자아란 없다. 자아는 다른 자아들의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나는 너와의 만남에서만 있을 수 있다.

여기서 ‘나와 너’는 관계의 세계이다. 이 관계는 만남과 조우이다. ‘나와 너’의 방식은 우리가 아는 인간관계중 가장 친밀한 인격적 관계이다. 친구와 친구사이의 긴밀한 상호 인격적 관계에서 우리는 인격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실존을 발견할 뿐 아니라 동시에 타자를 하나의 인격으로서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그것’은 인간의 경험의 세계와 관계된 것으로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하여 가지는 활동, 즉 우리가 무엇을 지각한다든지 상상하는 사고와 같은 경우이다. 특정한 공동체만이 아니라 아무리 작은 규모의 사회라도 서로의 대화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더욱이 어떤 우월한 지도자가 존재하는 공동체나 사회라고 해도 대화가 원활하지 않다면 아무리 그가 정신적으로 고매한 지도자라 해도 그 사회는 존속되기 어렵다. 대화의 기본 조건인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전제가 없다면 또한 그런 전제가 주어진다 해도 진지한 대화가 없다면 공동체를 이루기는 힘들다.

부버가 ‘나와 너’에서 주장한 대화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공동체라는 뜻이 맞는 사라들끼리 언제나 같은 뜻으로 오순도순 살아가는 꿈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서로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 본질적으로 인간인 한, 뜻이 맞을 수 없기에 서로의 뜻을 끝없이 확인하며 그것을 존중하고 토론하여 하나의 새로운 대화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대화란 흔히 말하는 의견을 일치하기 위해 서로의 생각을 좁혀 가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생각을 분명히 드러내며 그것을 서로 열심히 듣고 각자의 생각을 진지하게 성찰함으로써 새로운 결론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바로 대화다. 서로 일치하는 결론을 맺지 못하더라고 그것을 향한 진지한 노력이 있었다면 가치 있는 대화다.

부버가 말하는 대화란 그야말로 대화의 어원인 ‘서로 다른 이성’ ‘이성을 나눔’이다. 부버의 사상이란 남이나 세상을 물건 취급하여 그것이라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대하며 너라고 여기자는 것이다. 세상을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의 관계로 만들자는 것이다. 즉 서로 떨어진 이기적인 인간들이 대화하고 이해하며 진실한 관계 속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진실한 삶의 길을 나누자는 것이다. 참된 대화에서 각자는 상대와 반대 입장에서 설지라도 상대를 함께 사는 인간으로 마음으로 긍정하며 승인할 수 있는 것이다. 대립을 없앨 수는 없어도 참된 대화를 통하여 그 대립을 중재할 수 있다.

부버는 이 믿음에 근거하여 ‘나와 너’의 대화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지금 한국은 다문화나라이다. 외국인이 157만 명으로서 한국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외국인들에 대해서 틀림으로만 알고 있는데 그것은 틀림이 아닌 서로의 다름이다. 얼마 전 한국 이주여성인권센터의 행사에 참여한 적 있는데 동영상에서 한 베트남여성이 보통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사과의 껍질을 깎는데 안으로부터 깎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깎았고 한 필리핀 여성은 숟가락이 아닌 손으로 밥을 먹고 있었다. 낯섦과 설렘 그리고 어울림이란 이날 행사의 포스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런 모임을 통해 내국인과 외국인의 참된 만남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대화 유토피아를 희망해 보았다. 부버는 만남을 통한 삶의 길을 주장한다. 만남을 통해 배움, 성장, 삶, 사랑, 영원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땅, 분단된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부버는 어떤 의미일까? 이 분단은 남북 분단만이 아니라 계층의 분단, 빈부의 분단,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인한 각종의 인연적 분단 등 수없이 많은 분단을 말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만큼 만남의 대화가 필요한 경우가 또 있을까 싶다.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르고 각각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어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권력도 지배하지 않는 자치의 영역을 확보하며 그런 권력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길 일 뿐이다. 부버는 지금 이 땅의 우리야말로 그런 길을 추구해야 할 필요가 절실함을 말해준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잘못된 지배적 삶의 원리를 거부하고 만남의 삶, 대화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으로 함께 스스로 다스리는 공동체를 자연 속에 이루는 길이다. 우리는 대화로 위장한 독백이나 독설의 세계에 살뿐 진정한 대화가 없다. 사랑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런 참된 대화와 참된 공존의 태도, 그야말로 ‘나와 너’의 관계가 빈약하기 때문은 아닐까? ‘나와 너’의 참된 만남으로 대화 유토피아를 이루어 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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