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복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서울=동북아신문]아버지·어머니는 까막눈이었다

누구도 부모님을 얕보지 않았다

정직하게 사시며 정직을 가르쳤다

두 분은 일에 늘 파묻혀 살았다

양지바른 곳에 합장으로 모셨다

자식들은 가르침을 실천하며 산다

조상 대대로 유복했던 부잣집에 난데없이 괴질(怪疾)이 돌았다. 한 해 남녀노소 일가족 열 명이 잇달아 급사(急死)했다. 가세가 속수무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조부모·부모님의 3년상(喪)을 치른 뒤 빈털터리가 되었다…. 우애 좋은 형제는 풍비박산(風飛雹散)의 황망 중에 목숨이나 건질 요량으로 부랴부랴 악몽 같은 그 동네를 벗어나 이웃 마을의 날품팔이가 되었다. 형님과 아우는 다섯 살 터울이었다.

형님은 만삭(滿朔)의 부인과 사별하는 아픔을 거쳐 얼마 후 두 번째 부인을 맞이했다. 하지만 아우는 혼인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형님이 가문의 비극을 탄식하며 술과 눈물로 세월을 보낼 때 아우는 묵묵히 일에만 매달려 근동에서 성실한 일꾼으로 정평을 얻고 있었다.

한편, 졸지에 조실부모(早失父母)한 고아 3남매가 있었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이 되었다. 막내 소녀는 어느 낯선 마을에 들어가 잔심부름과 허드렛일을 하면서 겨우 밥이나 얻어먹는 부엌데기가 되었다. 언니와 오빠는 생사조차 알 수가 없었다. 소녀는 새록새록 자라 부지런한 살림꾼으로 거듭났다.

연분이란 정말 오묘했다. 누군가의 주선으로 ‘성실한 일꾼’과 ‘부지런한 살림꾼’이 신접살림을 차렸다. 우리 부모님이었다. 내외분 사이에는 11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금실이 참 좋았다. 부모님께서는 어린 둘째 딸을 큰집, 즉 형님댁으로 보냈다. 자녀를 두지 못한 형님 내외분의 외로움을 덜어드리기 위한 뼈저린 결단이었다. 부모님은 그로부터 3남매를 더 낳아 모조리 잃고, 새로 얻은 나를 젖 떨어지자마자 또다시 큰집으로 보냈다. 종가(宗家)의 대(代)를 잇기 위해 양자로 바친 것이었다. 인습(因習)이 만들어낸 통한의 생이별이었다. 부모님은 억장이 무너졌다. 내가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양가(養家)와 생가가 빤히 건너다보였다. 거리는 200m쯤 되었다. 모두가 극빈(極貧) 중의 극빈이었다. (큰)아버지는 사방공사(沙防工事) 감독으로, (큰)어머니는 삯바느질로 근근이 연명했다. 사방공사 감독이래야 기껏 봄과 가을에 한두 달씩 벌어지는 사방사업 현장의 일용직이었다. 삯바느질도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한 번씩 일감이 들어올 따름이었다. 양가 부모님들은 한평생 끼니 걱정을 면치 못했다.

생가는 조금 나은 편이었다. 어느 해던가,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멋진 신사 한 분이 어머니를 찾아왔다. 어렸을 때 헤어진 오빠, 즉 나의 외숙이었다.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자수성가(自手成家)한 그분은 당신의 누님부터 찾아낸 뒤, 오랜 수소문 끝에 급기야 여동생과도 상봉한 것이었다. 이로써 왕년의 고아 3남매가 극적으로 재회하게 되었다. 외숙은 나의 생가에 논 여섯 마지기를 사주었다. 그러고는 내가 중학교 들어가던 해에 돌연 작고하셨다.

어머니는 내 밑으로 4남매를 더 낳았다. 10남매 중 결국 7남매가 성장했다. 필자는 위로부터 셋째, 아들만으로 따지면 장남이다. 둘째 누님과 나는 양가에서, 나머지 5남매는 생가에서 자랐다. 필자는 어린 시절 거의 매일 생가에 드나들었다. 부모님의 사랑이 극진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까막눈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 부모님을 얕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정직하고 정확했다. 매사에 빈틈이 없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않았다. 농사일에서부터 석축(石築)에다 멍석과 삼태기, 초가지붕 용마루 이엉 엮기 등 아무튼 못 하는 일이 없었다. 동네 안팎의 정교한 작업은 모두 아버지 몫이었다.

어머니는 학벌 높은 사람들을 뺨치고도 남을 만큼 언변(言辯)이 뛰어났다. 남달리 인정 많고 유식했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뇌리에 콕콕 들어와 박혔다. 동기간(同氣間)에는 콩 한 톨도 나누어 먹어라. 이웃과는 소 한 마리를 가지고도 다투지 마라. 누가 해코지를 하거든 맞붙어 싸우지 말고 차라리 얻어맞아라. 때린 사람은 두 다리 오그리고 자지만, 맞은 사람은 두 다리 뻗고 편히 잘 수 있느니라. 참아라, ‘참을 인(忍)’자(字) 세 번만 생각하면 살인도 면한다. 초년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이 있다. 예로부터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했으니, 괴로움을 잘 견뎌내면 언젠가는 반드시 즐거움이 생길 것이니라…. 지금 생각해도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그런 어머니 또한 아버지처럼 일에 파묻혀 살았다. 부엌일은 기본이고, 잠잘 때 이외에는 한시도 쉬는 적이 없었다. 물 긷고 빨래하고 논밭에서 땀 흘리고 밤에는 희끄무레한 등잔불 아래 길쌈이나 홀치기로 날 밝는 줄 몰랐다.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으면 노상 ‘새끼 많은 소 멍에 벗을 날 없다’고 자탄(自嘆)했을까. 부모님은 어쩌다 장에 가서도 짜장면은 고사하고 불어터진 라면 한 그릇도 사 먹지 못했다.

지난 세월 어른들이 모두 타계하셨다. 특히 어머니는 58세로 일기(一期)를 마치셨다. 기구한 운명이었다. 묘소를 이장(移葬)하느라 봉분을 헐었을 때 아버지가 그랬듯 어머니 또한 광중(壙中)에 백골(白骨)로 누워 계셨다. 아, 가슴이 미어졌다. 우리 동기간이 합심하여 부모님을 양지바른 곳에 합장(合葬)으로 모셨다.

필자는 어느덧 부모님의 향년(享年)보다도 더 많은 나이를 먹었다. 그동안 아버지를 거울삼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천하느라 무던히 애썼지만 갈 길이 멀다. 따라서 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아버지처럼 정직하고 정확하게, 어머니처럼 이웃을 극진히 섬기면서 동기간과 더불어 화목하게 살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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