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내 인생의 리셋 컴퓨터는 리셋(초기화) 버튼을 누르면 재부팅을 하거나 하드디스크를 포맷하고 운영시스템을 새롭게 설치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초기화 작업이 가능하다. 우리 삶에도 이런 리셋의 순간이 있다. 사람들은 리셋이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이 단순히 과거의 것을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 하지만 이것을 한 차원 높게 생각을 하면 리셋은 옛것의 시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론 되돌아 갈수도 없지만) 새로운 시작을 시도하려는 순간을 말한다. 우리 삶에 이런 리셋의 순간이 언제인가?

간단하면서도 극단적인 예로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 사회지도층 반열에 오른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아프리카의 한 원주민 마을에 들어가서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몇 십년동안 재무관리자로 있다가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음대에 들어가서 작곡을 공부한다. 이런 것이 바로 인생의 리셋이다. 한국에서 내 인생의 첫 리셋은 3D업종에 종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방송 일을 하던 나에게 식당종업원이나 청소부일은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배운 것들 , 내가 이루고, 내가 얻었던 것들이 들어가 있는 하드디스크는 포맷이 되어버렸다. 현재까지 누린 익숙함과 편안함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한 한국생활은 ‘억울함’, ‘두려움’, ‘공포감’ 그 자체였다. 의기소침과 자아연민에 빠지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고마운 것은 그때 나에게는 아무런 퇴로도 없었다. 중국에서 이미 직장을 정리했기 때문에 되돌아가도 일 할 곳이 없었고 그렇다고 한국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인맥도 없었다.

나는 식당종업원, 모텔 청소부, 가사도우미 등 육체적인 노동을 하루 12시간, 일주일에 6일 근무를 했으며 휴무 날 파출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4년이 지난 후 조금의 여유가 생기자 사무직에 취직하고 싶었지만 내가 오래 동안 해왔던 글쓰기나 방송일은 한국에서 써먹을 곳이 한곳도 없었다. 중국 조선어와 한국어는 확실한 차이점이 있었고 정확하게 말하면 중국 조선어는 한국에서는 외국어가 아닌 외국어였다. 그 외에도 웬만한 사무직은 국적취득자가 우선이었고 면세점이나 통역일은 50대라는 나이 때문에 퇴짜를 맞았다.

햇볕이 따스한 어느 여름날 나에게도 행운이 다가왔다. 비록 인턴이기는 했지만 여의도의 출근족이 된다는 것은 50대의 아줌마 에게는 신데렐라의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내 인생의 두 번째 리셋이었다. 통역과 비서 일을 병행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비서들과 함께 출입할라 치면 눈치 없는 경비원들은 젊은 비서들에게 친정엄마가 왔냐고 묻기도 했고 사무실에 찾아오신 손님들한테 커피 심부름을 할 때면 나이 든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제일 신나는 일은 중국으로 출장을 가거나 중국에서 오신 손님이나 조선족기업인들이 사무실에 찾아오는 시간이었다. 그들에게 중국어로 통역을 해주고 그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좋은 곳으로 안내해 구경시키기도 했다.

손님초대를 하느라 며칠 간 밖에서 돌다가 사무실에 돌아오면 할 일들이 수두룩이 쌓여있었다. 동영상을 만들고 사진을 편집하고 기사를 올리고 단체문자를 뿌리고 하는 일들은 나에게 익숙하기는커녕 새롭게 배워야 하는 과제들이었다. 가득이나 업무가 많아서 스트레스가 쌓여있는 비서들이 내가 사무실을 비운동안 내 몫까지 하느라 죽을 지경이라 어느새 나는 사무실의 미운 털로 낙인이 찍혀있었다. 안경 없이는 글자가 잘 보이지도 않고 나이 때문에 한번 알려주면 까먹기가 일쑤고 방송기재들에는 영어로만 표기가 되어있어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자식벌이 되는 젊은 비서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애를 썼고 하루라도 빨리 업무에 익숙해지려고 신경을 쓰다 보니 나는 늘 좌불안석이었다. 시간이 흘러 업무에 익숙해질 즈음에 나는 다문화특별보좌관이란 생소한 일을 해야 했다. 특정된 지역에서 외국인들 중에서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선거에 동참하도록 선동하는 일인데 실제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유권자들한테 장시간의 관심과 도움을 주어야 신용을 얻을 수 있는데 선거시기에만 찾아다니다 보니 유권자들의 투표율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비록 힘들고 어려웠지만 여의도의 인턴생활이 나에게 남긴 것은 실보다 득이었다. 시골의 한 아줌마가 여의도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한국의 정계를 엿볼 수 있어 한국사회를 알아 가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여러 가지 사무실업무를 익혔고 중국인과 조선족기업인들과의 인맥을 넓힐 수 있었으며 한국인들과의 소통의 길을 터득하게 되었다.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또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그곳에 가면 또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사람만이 멀리 보고 길게 갈 수 있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한국에서의 내 인생의 리셋은 성숙에로 나가는 인생 2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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