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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18.10.17 수 11:45
사회·문화
[문학비평/허인]파편문화의 균일성과 그 저변의 아스라한 기억 몇 조각부산 고안나 시인의 근작시 10수에 부치는 편지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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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11  18:3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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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안나 시인/시낭송가
[서울=동북아신문] 아래는 재한동포문인협회 평론부장 허인의 시평론이다.  고안나 시인의 첫 시집 양파의 눈물(와에세이, 2017)이 시에시선 8번으로 출간 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중에, 김선태 시인이며 목포대교수는 그의 시집 양파의 눈물속에는 활짝 꽃피고 싶은, 물고기처럼 파닥이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지닌 화자가 살고 있다며, "고안나 시인의 시는 짧고 단아한 호흡과 압축미, 섬세한 언어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높이 평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허인 시인(평론가)이 새로운 시각으로 고안나 시인의 시를 평해 韓中시인들의 주목을 받을 듯 싶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한편,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고안나 시인은 2010부산시인2017시에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고, 현재는 시낭송가로도 활동 중에 있다.  [편집자 주]

 

- 들어가면서
- 은유의 절경 환유의 절벽
- 손바닥에 착착 묻어나는 생생한 기억속의 희미한 뼈조각들
- 탈중심화 세계에서 있음의 새로운 시학
- 나오면서


들어가면서

  '시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은 항상 그 무게를 감당할수 없으리 만치 누구에게나 버겁기만 한것 같다. 대략 책 한권 정도의 분량으로 엮어야만 제대로 설명이 될수 있을가 싶을 이 문제를 간혹 어떤이가 '운율을 담은 언어의 예술'이라고 단 한마디로 선뜻이 정의를 내린다 해도 결국은 그 시의 핵이나 내포ㅡ그리고 오늘날까지 꾸준히 쟁점이 되고 있는 시 전체의 "구조"를 옳바르게ㅡ 아주 신명나게 규명하였다 ㅡ고 하기에는 여전히 수많은 의문점이 그대로 남는것 같다.간략하여 설명하자면 극히 소극적인 그 일부분만 들춰 냈을뿐이라고ㅡ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ㅡ 필자는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현대시란 무엇인가?" 마치 그 범위가 훨씬 줄어 들어 얼핏 듣기에는 대답하기가 수월할것도 같지만 솔직히 난감하기는 매 한가지이다.

1.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부터를 현대라고 보아야 하는가?
2. 특정 시기 이후의 시들은 모두 현대시인가?
3.아니라면 현대시의 범주에 포함되는 많은 작품들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하여야 하는가?
4. 현대시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5.왜 그러한 특성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하나같이 명쾌한 대답을 올린다는건 그 누구라도 쉬운 일이 아닌것만은 분명하다. 그럼 후고 프리드리히가 말하는"현대시론"의 골격이 되는 "구조"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것인가? (문학 현상에 있어서 '구조'는 유기적인 구성체,즉 상이한것들속에 내재하여 있는 유형적인 공통점)을 가리키는것이다. 상호간에 크나 큰 영향을 준다고 여기서 섣불리 필자 마음대로 단정 지을수는 없지만 "그 개별적인 특성들이 서로 일치하고 , 상호 해명할수가 있으며, 동일한 성층"成層"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기때문에 절대로 우연으로만 간주하기에는 또한 너무나도 석연치가 않은 구석들이 많은것 같다. 거두절미ㅡ 단 한마디로 간추리자면 "구조"는 (개별 작품사이에서 발견되는 그 공통적인 특성, 그리고 및 그 상동성)을 가르키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수많은 예술. 문학작품들이 하나같이 그 특수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공통성을 찾아서 묶는 그 이론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결코 저항하거나 회피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보여진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시의 범주에 속하는 여러 시작품들속에서 무시되거나 가볍게 간과할수 없는 "구조"를 발견해 내여야 하며 그 "구조"가 현대시를 현대시답게 해주는 가장 주요한 요인임을 평론인들이라면 주장하지 않을수 없다.

   중국 고사성어에 ‘일월양윤 천지안 시서만권 성현심(日月兩輪 天地眼 詩書萬卷 聖賢心)이라는 말이 있다.
"해와 달의 두 바퀴는 하늘과 땅의 눈이요. 시서만권의 책 속에는 성현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즉 하늘에는 해와 달의 두 바퀴가 있어 주야를 밝혀주듯이 인간에게도 두 눈이 있어 세상 사물을 바로보고 정확하게 분별하여 책을 읽고 온갖 지혜를 얻는다는 뜻이다. 그만큼 철 없고 어리석은 자들과 얽히노라면 공연히 마음이 심란해지고 심안(心眼)이 불안해지겠지만 밝고 명랑한 사람들과 어울리노라면 자연히 눈귀가 밝아지고 배움의 희열에 나날이 즐거웁다는 뜻으로 필자는 재해석하고도 싶다.

  한국에 와서 필자가 처음으로 접촉한 시인이 곧바로 고안나 시인님이시다. 고안나시인님은 말 그대로 저렇게 "예뻤나" ,"고왔나"싶었을 정도로 상당히 미인이신 여류시인님이시다. 매번 그의 독특한 시 낭송을 들을때마다 가끔 주체할수 없는 잔잔한 감동에 가슴까지 짜릿한 전률을 느꼈던었적이 결코 한두번이 아니다.
 
  문학은 알면 알수록 더욱 미궁을 헤매는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예를 들면 1920년대에 김소월보다 김억이 훨씬 유명하였던것은 사실이다. 허나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 김소월을 쉽게 떠올리지만 김억에 대하여서는 많이들 생소한다. 예술작품의 경우도 매 한가지다.모네의'인상. 해돋이' 라는 작품은 출품 그 당시에는 한낱 조롱거리였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미술사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이질 않던가?그렇다면 작품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하여야 제대로 평가하였다고 할수가 있을까?말로비치의 ' 검은 사각형' 을 보면 우리는 아예 아연실색하게 된다. 말로비치가 정말로 그림을 못 그려 캔버스를 검정색으로 가득 채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나서도 우리들의 속사정은 조금도 달라지지를 않는다. 마치 어린 아이가 그린듯한 그 그림과 대가의 작품을 일반인들은 구별할수조차 없고 심지어 전문가들도 구별하기 쉽지 않은 이러한 시대에 도대체 예술은 무엇인가?작품에 대한 평가는 또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학은 주관의 영역인가 객관의 영역인가?

  이러한 시점에서ㅡ고안나시인이ㅡ 이번에 보내온 십여수의 심상시(心像诗ㅡ혹은意像诗)는 아녀자의 섬세한 마음의 움직임을 한폭. 또 한폭의 정교한 그림으로 차곡차곡 그려놓아 첫째. 그 리듬감의 균일성이 매우 돋보이고
둘째. 이미지의 실재성으로 환유(欢喻)의 절벽. 은유(隐喻)의 절경을 이루어 낸것같라 가히 놀랄만한 작품들이라고 여기서 잠시 말하여야 할것 같다.

   『현대시의 구조』는 언제나 ㅡ시의 솔직함 그 자체ㅡ즉 '현대성'에 많이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다.그것을 이론적 ㅡ 혹은 논의로적인 해석으로만 그친다면 우리는 정말 공허해진다. 마치 뼈만 있고 살이 없는것 같은 그런 건조함만 남기때문이 아닐가 싶다.말장난을 그만두고 그럼 여기서 우리 다 함께 고안나시인님의 너무 아름다워 왠지 슬퍼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시속으로 조심스레 발자국을 옮겨 보도록 하자.

환유의 절벽, 은유의 절경

  현대시의 구조적 본질은 곧바로 불협화음이며 그리하여 현대시는 현실의 사물을 변형시키고ㅡ언어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문법틀을 과감히 파괴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주는 충격 또한 불가해성을 더욱 지향하여 이성적인 사유에 따른 논리적 이해마저 마침내 거부함으로써 다소 난해하긴 하지만 비실재성에 더욱 가까워지려 하는 그런 특징이 있는것 같다.

  후고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현실과 사물이 연결되는 관계를 나름대로 해체하여 폭력적으로 연결시키는 전체적인 상상력, 그리고 그러한 상상력의 수단인 데포르마시옹
(변형), 추상과 아라베스크, 즉 시 창작의 이론화와 지성의 강조를 엄격한 수학적 통제에 따른 언어 마술의 추구, 추(醜)의 상대적인 격상, 감정이나 자아를 배제하는 탈인간화, 현대 문물에 대한 거부와 매혹의 이중성, 그리고 공허한 이상성을ㅡ 현대시의 기본 "구조"라고 명백히 규명한적이 있다. 그후로부터 우리들은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시대를 지나서야 비로소 시를 현대적으로 만들어 주는 그러한 구조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가까스로 알게 되였다.

  흔히 시인들은 "불협화음"에 의해서 말을 시작한다. 즉 한정적인것들로부터 불확실성을, 간단한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을, 하나의 근거로써 근거 없는 것들을, 하나의 연관으로써 연관성이 없는 것들을, 시간의 표시로써 공간과 무제한성을, 마술적 언어의 힘으로써 추상적인 것들을, 엄격한 형식에 의한 내용적인것으로부터 자의적인 것들을, 감각적인 형상의 부분들로써 불가시적인 형상들을 많이 기술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한마디로 시어의 현대적 "불협화음"들이다. 그 모든것을 이해시키기 위한 시어들은 극단적으로 상이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언어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언어란 마치 어떤 음향과 의미를 생성할지 예견할 수 없는 피아노의 건반과 같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언어와 함께 홀로 있을 뿐이며, 또한 언어만이 그들을 구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현대시는 어찌하여 불협화음을 내재하게 되었는가? 후고는 그 연원을 루소로부터 찾았다. 루소는 기계론적인 시간이 지배하는 현실을 거부하고 내면성의 시간을 되 찾으라고 주문하였다. 과학주의에 의해 탈신비화 되는 세계에 저항하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회복하자는 바로 그것이 목적이였다. 이렇듯 현대시은 세계의 탈 마법화와 궤도를 같이하는데 보들레르 이래로 현대성에 진입한 시인들이 되찾고자 한것은 하나같이 진부하고도 합리화된 세계로부터의 해탈이였으며 해방이였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현실을 파괴하는 상상력이 요구되였으며 현대시의 일그러진 형상은 기계론적 합리성과 과학주의에 저항하는 표식임이 틀림없었다.

  아도르노의 "문학을 이론적인 논의에만 그친다면 정말 공허해진다." 말은 "마치 뼈대만 있고 말랑말랑한 살"이 없는것 같은 건조함만 남는다로 이해하여도 진짜 무탈하고 무방할것도 같다.


 
나는 성질 고약해
움켜잡은 것 놓아주는 법 없지
표정 어둡고 중심은 허망해
열려있다 하나  닫힌문이야
나는 신음 중
아랫도리 움켜잡은 
억센 손 벗어 날 수 없지
품 속으로 뛰어든 잡목 몇 그루
품 밖  재잘대는 새소리가 전부지
간혹 제 성질 다스리지 못해
죽기로 작정한 풀이파리나
누군가 던져넣은 담배꽁초들이
익사체로 떠 다니지
나는 혐의가 없어
지루하고 고독해
가끔 웅크리고 앉아
푸른피 살아 꿈틀대는
대평원을 꿈꾸지
나는 깨어있어
방심은 금물이야

 

빗방울
 
 
나를 매달고 있는 가지는
균형 무너트리기 위해 떨고 있다
벌거벗은 몸
열매처럼 매달리고 싶은데
나를 익게해다오
햇빛 먹고 자라게 해다오
살고 싶은 욕망 
나무를 향해 눈짓하는데
산다는 것은 
끈임없이 견뎌야 하는 것
새 한마리 이 가지 저 가지
떨어졌다 붙었다 조롱하는데
가지 휘어 잡을 힘 없지
지탱할 손 없지
지체할 시간 없지 
지금은 무너질 때
더 이상 연연하지 말라한다

- "늪"과 " 빗방울" 전문

  고대 철학자 탈레스는 ‘물은 만물의 근원이며, 물은 물에서 생겨나고 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지구상에서 생명을 기르는 것은 햇빛. 물. 토양. 씨앗. 그리고 노동력이다. 이것이 생명 보전의 5대 요소요, 하늘이 인간에게 주는 자연을 향한 생명의 새로운 선물이기도 하다. 물은 열을 받으면 수증기가 되어 증발한 후 다시 비나 이슬이 되어 우리들이 고향을 찾듯이 지상으로 되 돌아오고, 냉기를 만나면 얼음으로 변하였다가도 녹으면 다시금 물이 된다. 

  막았다 풀어놓으면 즉시 갈라진 자국도 없이 하나로 되며, 폭포를 만나 뛰어내려도 깨여지지를 아니하며, 흙탕물이 되었다가도 자정(自淨)의 능력으로 청정수로 변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깨끗하게 해주고, 바위틈을 가르고 샘물로 솟아 올라 시내와 강을 이루기도 하며 목마른 생령들의 갈한 목을 추겨주기도 한다. 물은 겸손의 미덕을 항상 보여주면서 더욱 낮은 곳을 향하여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면서 마침내 도랑이 시내가 되고 시내가 강을 이루고, 종래에는 바다에 이르면서 그 폭이 넓어지고 그 양이 엄청 늘어나게 된다.즉 겸손과 미덕이 물의 특징이요, 봉사의 정신이 물의 사명이기도 하다. 

  이를 보고 노자(老子)는 천지 만물 중에 가장 두렵고 힘이 센 것은 물(水)과 대나무(竹)라고 하였다. 물은 맹자(孟子)는 제자들에게 물을 보고 물에서 덕을 배우라고 항상 일렀다. 물은 흐르다가 그 앞에 웅덩이를 만나면 아무리 갈 길이 급하고 웅덩이가 클지라도 반드시 채우고 난 이후에 넘쳐나서 앞으로 나간다는 영과이진(盈過而進)의 철리를 이른 것이다. 물은 겸손과 순종과 질서의 상징이다. 그러나 과하게 넘치면 때로는 노도(怒濤)가 되어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쓸어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물의 속성을 흔들리는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마음"이라는 거울에 담아 그 형체를 가시적 효과로 잘 표현한것이 아마도 고안나시인의 "늪"과 "빗방울"인것 같다.

  /나는 성질 고약해/움켜잡은 것 놓아주는 법 없지/표정 어둡고 중심은 허망해/열려있다 하나  닫힌문이야/에서 찾아 볼수 있는것은 덩어리를 이룬 그 흔하디 흔한 "물"이 어쩌면 세상을 향해 웨치고 싶었던 항변이며 대변이기도 하며 자연을 닮으려는 인간의 심리적 지닥운동을 한폭의 그림으로 섬세하게 보여주려 한다.시란 이렇다. 알고나면 쉽고 쉬운듯이 다룬것 같지만 그 깊이. 너비. 높이 가 제시하는 내용물. 즉 용량은 방대한 하나의 시리즈가 되여 자신만의 세계를 이룬다. 보셨다 싶이 시제가 " 늪"인데 결국은 작자의 예리한 관찰을 통하여 인성화와 "의인화"를 거쳐 "호소력이 되기도 하며 삶이라는 묵직한 각성에 반추된 내재률에 한송이의 구름"을 동동 띄워 놓은듯 하여 그 모습이 현혹하다. 그 다음 련에서/나는 신음 중/아랫도리 움켜잡은 /억센 손 벗어 날 수 없지/품 속으로 뛰어든 잡목 몇 그루/품 밖  재잘대는 새소리가 전부지/
간혹 제 성질 다스리지 못해/죽기로 작정한 풀이파리나/누군가 던져넣은 담배꽁초들이/익사체로 떠 다니지/나는 혐의가 없어/ㅡ이하 생략... 어떤가? 사물적인 현상을 빌어 마음의 움직임 ㅡ 즉 독백의 여운을 마음에 담아 고백에 시퍼렇게 날을 세운 ㅡ 파편화의 균일성으로 ㅡ 그 속성들을 낱낱히 파 헤쳐 보려하는 흔적들이 또렷이 보이지를 않은가?이것이 곧바로 고안나시인의 시 가장 큰 특징으로 보인다. "빗방울의 경우 역시 똑같은 실례로 보여진다.

  /나를 매달고 있는 가지는/균형 무너트리기 위해 떨고 있다벌거벗은 몸/열매처럼 매달리고 싶은데
나를 익게해다오/햇빛 먹고 자라게 해다오/는 얼마나 절묘한 은유의 절경인가?/살고 싶은 욕망/ 나무를 향해 눈짓하는데/산다는 것은 
끈임없이 견뎌야 하는 것/에서 찾아 볼수 있는것은 수많은 텍스트를 거쳐" 삶의 위태로움과 진지함에 경이로움"을 나타내려 한것이 분명해 보인다.한마디로 절창에 절경이라 하여야 겠다

  환유(換喩)는 수사학 기법 중의 하나로써, 개념의 인접 또는 그 근접에 따라 단어의 의미를 확장하여 사용, 비유하는 일종이다. 또한 그렇게 사용되는 단어 자체들을 말하기도 하다. 예를 들면, 월 스트리트는 뉴욕의 거리지만, 경제의 지역이라는 뜻으로 확장되어 사용되기도 한다.환유는 또한 환유(欢喻)로도 표기가 되는데 이 두수의 시에서 은유와 환유는 비경(秘境 )을 이루어 마침내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설레이고 경이롭게 하는듯 하다.


   
▲ 허인프로필 본명 허창렬, 시인/평론가. 기자/편집 역임. 재한동포문인협회 평론분과장/부회장
손바닥에 착착 묻어나는 생생한 기억속의 희미한 뼈조각들


  일찍이 티레(C. P. Tiele)는 세계의 모든 종교들을 神(신)과 人間이라는 요소에 중점을 두고 신권적
(神權的) 종교와 인간적 宗敎(종교)로서 나누면서 여기에는 다만 양적 차이는 있을지라도 本質的(본질적) 차이는 없다고 말한적이 있다. 그러나 啓示(계시)의 종교인 기독교 경우는 그럴 수 있지만, 불교에서는 신이나 인간을 모두 ‘讖(참)에 轉變(전변)된 假象的(가상적) 存在(존재)’에 불과하다고 보므로 티레의 그러한 견해와는 처음부터 질적으로 많이 달리 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그러한 입장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기본교리의 체계를 이해하려고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양교에서 가장 근본 되는 교리의 개념을 관망하여 기독교측 이해로는 聖書觀(성서관)·神觀(신관)·人間觀(인간관)·救援觀(구원관)을ㅡ 불교적인 이해로는 藏經(장경)·佛人間(불인간)·覺(각)의 개념을 핵심으로 하여 그 종교적 체계를 서술해 나가야 한다는것을 우리는 비로소 알수가 있다.

  적어도 基佛兩敎(기불양교)의 질적 차이로서의 기본교리 체계에 대한 이해로는 성서·신·인간·구원·藏經(장경)·佛(불)·衆生(중생)·覺(각) 등의 개념들이 제일 적합하다고 사료된다.한마디로 인간의 삶은 누구라도 삼생(三生)을 벗어 날수가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생이란 곧 전생(前生). 금생(今生). 래생(来生)을 일컫는 말 ㅡ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현재 진행형이기에 수많은 동경과 추억이 고스란히 기억속에 파묻혀 있기도 하다. 그러한 의식들은 무의식이라는 중개매체를 통하여 때로는 아무런 여과없이 우리들의 언행에서 잘 드러나기도 한다. 신 들린 사람처럼 상상이 마인드 컨트롤이 가능한 시인의 영혼은 그래서 이외로 너무나도 진솔하다. 진솔하다 못해 가끔은 절규가 아닌 그 이상의 호소력때문에 오직 시 한수에 온갖 심혈이 몰붓는 모습이 돋보이기도 한다.
 

나팔꽃
 
 
믿음만 있을 뿐 
더듬어 가는 길
심장 박동소리 거세어
뛰어가고 있지
몸 굴리며 가는  
구불구불 발길 무거운데
바람이 이웃사람처럼 다가와
다정히 손 내밀지
밟는 곳마다 법은 있어
헛발질 할 때 
나뭇가지 발 끝 세워
올라가라 재촉하지만
보이지 않는 정상
부르튼 발 끌고가며  
환하게 얼굴 펴는 저것들
고집으로 밀어올린 내 마음일까 
기다리는 이 아무도 없는
가지 끝 나는,
소리죽은 나팔이었어
 
유리창
 
누군가 울고 있어
그 울음에 몸 젖고
결심은 흔들리지
나는 본래 양면
때로는 낯빛 변하지
투명한 얼굴은 두려워
그것은 한없는 긴장
속 들어낸 자가 기다리는 심판 같았어
피할 수 있다면  입김 서리고 싶었지
허나, 지금은 달라
부드럽고 여유로운, 그래서
몰래하는 사랑 꿈꾸기도 하지 
이게 진정한 내 마음이야
흔들리는 장미꽃 넝쿨 좀 봐
덩달아 흔들리고 싶었지
투명한 마음은 어쩐지 불편해
베일에 쌓인채 
영원히 늙지 않는 얼굴이고 싶어

 


 
 
들락거리는 것들은 스스로 발이 있어
소리없이 살짝 들어왔다
말없이 빠져나가지
슬픔은 가냘픈 그림자 끌고 다니지
웅성거리는 숲을 들이기도 하고
쓸쓸한 새의 목청 불러들이지
갑자기 생각난 듯 
웅얼거리는 바람소리 청하기도 하고
짙은 빛깔의 저녁 노을 데리고 오지
바깥 초록을 불러 들이고 싶었는데
느닷없이 찾아던 가시덤불이 가로 막았지
너무 믿지는 말게
사실을 속이고 있는지 몰라
깨닫지 못한것들이 
삐그덕거리며 앓고 있는 중이야
석양이 찾아온다면 기꺼이 환영하겠어
하지만, 잘못 쏜 화살은 막아야 해
열리고 닫히는
피는 꽃과 지는 꽃
그 사이에  

 

파꽃
 
 
단숨에 뛰어올랐지
의문 풀리지 않는
마법에 묶여
좀 외로워도 침묵하기로 했어
이유는 몰라도 좋아
쓰러질듯 고개 꺾여도
함부로 입 열지 않지
솜 방망이 아니야
움켜 쥔 주먹이지
펼치면 달라질 세상
부서지기 싫은 생각들이지
대궁이 쏘아 올린 집 한 채
둥글어지는 고집
꽉 찬 알맹이 
그게 전부는 아니지
갈 곳 정하지 못한
부서질 말

부서질 의문
기다려 봐, 잠시만
 
나팔꽃. 유리창. 문. 파꽃 (전문)

  심상(心像)이란 무의식속에서 꿈틀거리는 초현상의 본체(本体)에 대한 이미지이며 상상력 하나로 찾아내는 " 살아 있는 세계속에 토착하여 있는  우리 '인간들과 만물의 상'이다." 고안나시인의 심상시의 경우 가장 큰 특징이 독백. 고백이 주류를 이룬듯이 보여진다.

"/믿음만 있을 뿐/ 더듬어 가는 길/에서 "길"은 사람이 헤쳐나가야 할 길이지 결코 전생이나 래생으로의 갈망이나 추구가 아니다. 재밌는것은 이러한 현재 진행형속에 무의식이 베이스로 깔려 있어 마치 화자가 이야기를 화자로 역설하고 있는듯 하지만 읽는 이의 심장 박동수는 차츰 빨라지게 된다. /소리죽은 나팔이었어/는 "죽어 있는 모든것이 결국 살아 있는것과 같은 목소리를 낸다"는 불교의 교리와 흡사하여 더욱 절묘함의 찬연한 극치를 이룬듯 싶다."유리창"에서 /누군가 울고 있어/그 울음에 몸 젖고/결심은 흔들리지/나는 본래 양면/때로는 낯빛 변하지/투명한 얼굴은 두려워/그것은 한없는 긴장/속 들어낸 자가 기다리는 심판 같았어/에서ㅡ는 깨달음의 절경을 "유리창"이라는 상관물을 통하여 발라드나 메인송이 아닌 랩처럼 구수하게 엮어놓아 기억의 아스라한 파편조각에 손가락을 찔려 피가 흘러 어찌할바를 모르게끔 읽는 이의 감성을 긴장하게 자극한것이 아니라 읽는 리듬에 맞춰 자각하도록 촉매제 역활을 충분히 하고 있는듯 싶다."문"의 경우 " 자연스레 "발"을 등장시켜 발자국소리를 따라 함께 시속을 거니노라면 이해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것으로 보여진다.

  "파꽃"의 경우 /단숨에 뛰어올랐지/ 의문 풀리지 않는/마법에 묶여/좀 외로워도 침묵하기로 했어/이유는 몰라도 좋아/쓰러질듯 고개 꺾여도/함부로 입 열지 않지/로 삶은 소리없이 피고 지는 "파꽃"같은 존재로써 결국 "침묵이 진리" 임을 가장 잘 나타낸 한수의 좋은 시인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는 " 사물이 말을 걸때까지 기다리라" 고 하였다. 그 말을 달리 해석하면 " 사물이 존재라는것을 인정하려면 사물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안나시인도 사물의 속삭임에 귀 기울릴줄 아는듯 하다. 남들이 듣지 못하는 사물의 소리를 들으려면 사물을 하나의 인격체로 분별하여 볼줄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고 말했던 메를리 퐁티처럼 고안나시인의 시속에는 " 사물들이 시인 안에서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이러한 판별력과 발견은 전생에 자신이 사물이였을수도 있다는 모종의 기억을 되살려냈을때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잡아함경』 (제30권 335경)에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此生故彼生 )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此滅故彼滅 )는 구절이 있다. 세상은 연기(缘起)이다. 하여 시인의 영혼은 성스럽지 않을 이유가 없다.

탈중심화 세계에서 "있음"의 새로운 시학

  현대시의 원리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모순, 혹은 대립되는 것들의 조화 ,혹은 통일'이라는 개념이다. 시란 그 어떠한 구조에서든, 진술에서든, 혹은 상상력에서든 서로 대립 , 혹은 모순되는 가치, 이미지나 정서나 의미지향들이 서로 갈등을 이루다가 결국은 하나로 조화, 통합을 이룬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일찍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시의 본질이 '아이러니'와 '반전(反轉, peripetia)'에 있다)는 견해를 밝힌 이래 그 어떤 유형의 비평론이든 원칙적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비평주의의 아이러니, 패러독스, 텐션, 형이상학적 시, 형식주의 시는 결국 구조주의의 이원적인 대립(binary opposition), 병렬(parellelism), 전환(轉換, conversion) 등과 같은 개념들과 너무나도 흡사하기
도 하다.필자는 영원히 시적인 언어의 하이포그램들속에는 언제나 양극화가 현존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아가 필자는 이 양극화가 결국 그 시적인 본질에 있어서는 필연적이며 더우기 그 언어적 전형을 위해서는 당연한 것이라고도 믿는다. 양극화는 현저한 대조를 야기시킨다. 그것의 해소는 역설, 모순어법 그리고 기상(寄想)을 생성한다. 양극의 대립 속에서 행해지는 그 어떤 진술도 그것의 유사성이나 동의어성의 패러다임을 배양해 내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즉, 그들의 의미론적 영역은 참된 양극의 기하학으로도 되기때문이다

  현대시가 그 본질을 제 가치의 이원적 대립에 두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담고자 하는 세계 혹은 인간의 삶 자체가 모순의 총체성으로 존재하는데서 비롯된다. 무엇보다도 이 최초 개념이라 할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위 '비극적 아이러니'와 기회원인론적(機會原因論的, Occassionalism) 세계관에 토대를 둔 근대 낭만주의자들의 '낭만적 아이러니'가 그 모든것을 잘 설명해 준다. 아이러니에 대한 인식은 그후 현대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철학적으로는 실존주의, 문학에서는 신비평의 초석을 이루게 된다.

  현대시의 본질이 이와 같은 이원적 대립에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존재론에서도 이 세계를 상호 대립과 그 초극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문학이 바로 이 세계를 반영하는 언어의 한 양식인 까닭에 또한 현대시의 구조와 불교 존재론이 만나는 시점이기도 하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正覺)한 내용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삶이 역설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중생은 그 자신의 본성 속에 불성(如來藏心, Tathāgatagarbha)을 구유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끝없는 업의 연기(緣起) 속에서 생사번뇌의 윤회를 되풀이하며, 연기의 이법 또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법으로써, 결국 삶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므로 삶이 있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항아리 
 
 
벌린 입은 닫을 수 없어
처음부터 문은 없었어
무리한 공사였던가
방으로 들어가는 길이 었나
탐색하다 돌아가는 햇살 한 줌 숨겼지
그래도 캄캄해 
누군가 들어오면 또 누군가 나가지
잠 깨우지 마
텅 비었다고 하지만 
꽉 차 있어
철저하게 엄숙해
지나온 흔적 찾기란
황토의 흙내음 따라가는 일
허리춤에 새겨진 꽃은 새롭게 피고
그 위 앉았던 새는 날개를 폈던가
아니지 접었던가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어
물소리야, 흐름을 느껴봐
그렇다면 일찌기 동굴이었던가
아, 닿을 수 없는 저 편
기억해도 잊어도 괜찮아
발설할 수 없는
입 하나 가졌을 뿐


 혀

 
감금하는 것은 잔인해
말을 지킨다 하여
갇혀사는것 취향 아니지
말을 관리하는것 
때로는 권태로움이야
말이 잠든곳은 무덤이지
문 하나 닫았다 하여 
움직일 수 없는 말은 말 아니지
말은 방목해야 해
나는 기수야
말을 부릴줄 알지
혼자 한 발짝도 가지 못해
당신 심장까지 
단숨에 달리고 싶은데
굳게 닫힌 문이 문제야
천마가 되었다가 
낙마도 하지만
치사한 싸움엔 달려가지 않지
어서, 문 열어
소리 조율하고 말 자제할께  
한 마디 탄식 조차 언급한다면
등 돌린채 어디로 튈지 몰라
나는 기수
말의 연금술사
 

꺾인 꽃
  
악몽이야
생각은 있는데
몸이 보이지 않아
몸을 지탱하는 뿌리가 없어
그 뿌리 속 
잔잔히 흐르는 물소리가 없어
온갖 희망에 부풀던 
나비떼 팔락팔락 춤추던 
건들건들 놀다가던 
그 바람이 없어
피를 뛰게 만들던
천둥소리도 죽었어
소리치고 싶은데
입이 열리지 않아
처음부터 닫힌 입술이었어
이 슬픔과 비통
하루 이틀 사흘
덧없는 이 순간이 일생이라니
가지 흔드는 새야
나는 누구의 사랑이더냐

항아리.혀. 꺾인 꽃 (전문)

"항아리"와 " 혀". "꺾인 꽃"의 경우 탈중심 세계에서의 "있음"의 역학에 대한 역설로 받아 드리면 그 해석이 더욱 합리할것 같다. " 항아리" 하면 흔히 그 제조과정이나 내구성(耐久性).혹은 용도성에 많은 시인들이 심혈을 기울리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고안나시인의 경우 여기서 "있음"의 미학으로 인성화를 완성하여 이러지도 못하고ㅡ 저러지도 못하는 칩거상을 속사로 눈에 보이는듯이 그려놓은것 같다. 실례로 /벌린 입은 닫을 수 없어/처음부터 문은 없었어/무리한 공사였던가/방으로 들어가는 길이 었나/탐색하다 돌아가는 햇살 한 줌/ 숨겼지/에서 찾아 볼수 있는것은 무가내한 "존재의 이유"이며 그러한 존재의 이유가 있었길래/그래도 캄캄해 /누군가 들어오면 또 누군가 나가지/.../황토의 흙내음 따라가는 일/허리춤에 새겨진 꽃은 새롭게 피고/그 위 앉았던 새는 날개를 폈던가/아니지 접었던가/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어/물소리야, 흐름을 느껴봐/그렇다면 일찌기 동굴이었던가/아, 닿을 수 없는 저 편/기억해도 잊어도 괜찮아/발설할 수 없는/입 하나 가졌을 뿐/이라는 결과를 과감히 도입시킬수가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 혀" 와 "꺾인 꽃"의 경우도 시인의 태도는 늘쌍 주관적이 아닌 객관적으로써 "있음"이 "없음"과 결국 별다르질 않고 대동소이함을 서술이 아닌 진술로 진실을 말하려 한것 같다.

예술이 인간적이기 위하여서는 모더니즘의 상징적. 신화적.추상적 질서를 추구하는 미학을 버려야 한다. 고안나의 시는 잠시 하나의 매듭을 이루었다가 느슨하게 풀어지거나 끊어지는것이 아니라 또다른 힘의 소용돌이속으로 딮이 끌려 들어가 그 변화무쌍한 힘의 일부가 되는 생성사멸하는 파장을 기록으로 적은것처럼 실감이 나고 감칠맛이 난다. "벽"의 경우 /무슨 까닭인지/홀로 저물고 있어/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생각이/우두커니 서서/안과 밖 살피는 중이야/사과 껍질처럼 단단한/그러나 쉽게 벗길 수 없는/모든 감각 정지시킨 채/나 굴복시키고 있지/ㅡ에서 살펴 볼수 있는것은 삶 자체가 곧 고해(苦海)라는 불교의 교리와 너무나도 일치하다. 이러한 평행유지와 일치함은 /낯설게 돌아 앉아 훔쳐보는 어둠/발 묶인 나,/낮과 밤/기쁨과 슬픔 그 사이/허물고 싶은,/어떤 일도 할 수 없는 나는/라는 무의식의 발로 . 즉 ㅡ 기억의 아스라한 파편 몇조각을 자신의 보드러운 살갗에 그어 현실속의 아픔을 직유도 비유도 아닌 은유로 참으로 적절히 잘 표현한것 같다.

틈 

훔쳐보고 있지
늘 불완전한
마음 속 비밀 감출 수 없지
그저, 바람 한 점 들락거릴 뿐
침묵은 관대하고
적막은 무심하지
그냥 묵묵하게
죽은 듯 가만히
입 밖으로 새어나온 말
보이지 않는 손의 힘
또 다른 운명에 이르는 
피할 수 없는 비상구
정적과 어둠
그 속에서 당신을 찾고 있어

틈 (전문)

삶은 균열의 파편이며 애착 역시 그러하다.애호나 애착때문에 시인은 세상을 가슴에 혼자 그러안고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한 고민들은 균열에 균열을 불러와 혼돈에 가까울 정도로 인색함을 보여줄 때도있지만 객관적인 랭정함은 정성과 관대를 불러 와 포용력을 키우기도 한다. /그저, 바람 한 점 들락거릴 뿐/.침묵은 관대하고 /적막은 무심하지/ 이런 구절은 명구로써 문학사에 길이 남아도 아무런 손색이 없을것으로 보인다. 
 
나오면서

또 한해를 마감하면서 무거웠던 마음이 다소 고안나시인님의 좋은 시 몇수때문에 확 밝아지는 그런 기분이다. 고안나시인의 시 특징은 사물을 대화상대로 설정하여 인성화를 완성시켜 놓고 마치 두런두런 대화내용을 기록하듯이 그 사물의 속성까지 일일히 파헤쳐 놓았으며 진실에 항변하는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변하는 그런 경향을 보이는것도 같다.

부족한 점은 상등한 균일성(均一性)으로써 거의 매수의 시가 같은 양식이라는데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트롯트에 발라드. 혹은 랩을 가끔 섞어 불러 주었더라면 훨씬 리듬감이 돋보이고 더욱 생신한 충격을 주지 않았을가 생각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훌륭한 것들은 모두가 독창성의 열매이다." - 존 스튜어트 밀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남들과 다른 것에 내가 있고 생산적인 힘이 숨어 있다. 그러니 자신의 특기와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 나는 바람이 부는 대로 사는 인생을 살지 않은지?누구나 한번쯤은 깊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것 같다. 끝으로 고안나시인님이 새러운 한해 더욱 멋진 작품들을 써내시길 미리 축복 드린다.

2018년2월29일 경기도 동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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