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나는 2014년 초에 한국에 온후 열심히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일하다가 그해 7월에 개인일로 중국에 들어가서 거의 두달 머물러있었다. 그리고 좀 전부터 알고 지내온 그녀와 만나 이야기 나눌 시간도 많아졌었다.그녀는 할빈 화평소구의 아파트단지 한쪽에 자리잡은 시장부근에 간의한식이라는 이름으로 노점밥가게를 차린지 몇 년 된다. 그녀는 음식을 판다는 것보다는 상냥하고 따뜻한 이미지로 단골손님들도 많이 만들어가고있었다. 내가 하향한 곳인 민락에서 온 그녀인지라 나도 끌린 듯 가끔 들리군 했다.“어서 오세요”“무엇을 드시겠어요?“요즘은 좀 드물군요.”, “그러네요” 간단한 인사말로도 훈훈해진다“아까 지나는것을 보았는데…”하면서 말문을 떼고 웃으며 바라보는 그 녀의 눈동자에 깃든 즐거움때문에 자연히 이말저말 이야기끈을 풀게 된다.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무엇이라도 더 주고싶어하는 마음이 전해져서 더 사주고싶은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자기집에 놀러온 손님을 대하듯 인심이 훗훗하다. 나는 주로 가게가 한가할 때 찾아가 이야기 나눌 여유를 만들곤 한다. 찾아오는 손님들한데 밥 한술이라도 듬뿍 떠주고 밑반찬도 알뜰히 만들어 내놓으며 부르는 것이 없으면 미안한 표정을 짓고, 그러는 그녀한테서는 예전 조선족 마을집의 푸근한 인정을 느끼게 된다, 사람 맛이 손맛이라고 그래서 손님들의 발길을 더 끄는듯 했다. 하루종일 아무른 색다른 내용도 없었다는 듯한 피곤기와 심심한듯한 텅빈 얼굴로 찾는 사람들에게도 그는 자신의 저그마한 체구에서 뿜겨나오는 에너지로 상대의 기분을 밝게 가셔주기라도 할듯 활짝 웃어주며 말을 걸어온다. 이 거리의 로점상들의 덤덤한 표정에 습관된 사람들은 그것이 좀 특이한 감각일 것이다.이런 그 녀에게서 어둠이 깃든 지난날을 읽을수는 없었다. 언제나 즐거움이 뿜겨져 나올듯한 밝은 모습이였으니깐…. 기실 그 녀에게 삶이 뿌리 뽑히듯한 아픈 과거가 있었다, 90년대 한국나들이 열풍에 온역을 맞은……. 당시 남편은 초청과 비자값때문에 하루 아침에 6만 위안을 날리고 말았다. 그 돈은 그들에게는 천문수자나 다름없었다. 비행장에서 검문대를 거쳐 나갈 때 가짜 비자란것이 드러나 그들은 그자리에서 쇠몽둥이에 맞은듯 돌부처마냥 굳어지고말았다. 그간 쌓은 모든 꿈들이 푸썩 무너지는 절망을 아프게 감수해야만 했다. 이 세상의 허위와 거짓이 한 가정을 낭떠러지에 세워놓는다는 것을 순박한 농촌 사람들인 그들에게는…청천벽력같은 첫 경험이었다. 그것도 당시 이자돈까지 꿔면서 겨우 채운 돈이잖아! 활활 타오르는 분노와 격분의 도가니속에 그들은 며칠동안 재가 되었다. 법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속은 사람만 바보로 된 현실이었다. 후회와 끝없는 원망이 집안을 도가니로 만들고 수시로 쑤시대는 손실과 배반의 아픔이 사람의 머리를 침습하여 정말 머저리로 될것 같은 위기까지 찾아왔다. 그 속에서도 그 간 저축한 부부사랑의 추억이 모지름을 쓰며 서로를 보듬고 지켜주는것을 그들은 느꼈다.원망만 하던 그녀에게는 처음 만났을 때의 남편의 모습이 선히 떠올랐다. 좀 큰 키에 사람 좋은 눈빛을 가진…친구의 소개로 만났는데 첫눈에 반했었다. 많은 세월이 지나 지금도 연애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눈이 빛이 난다.그후 4년간 집식구들 몰래 연애를 하면서 잘 살아가자고 다지던 편지…서로 그리면서 농한기에 만나 잔잔한 정을 쌓아가던 일들, 결국은 그녀를 정신이 들게 해준다.시집가기 전에 돈을 맡기면서 가구를 맘에 드는 것으로 장만하게 하고 가정을 꾸린 후 여왕처럼 대우하며 살림을 좌우지게 한 남편, 그녀는 그런 남편의 실수를 더는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는 농민군 대오에 합세하였다. 친정집에서 돈을 장만하여 겨우 이자돈을 값고 그들은 어떻게 하든 꿘 돈을 갚으려면 농사로서는 택 부족함을 느끼고 무엇이든 해보려고 나섰던 것이다. 무작정 바다로 떠나는 일엽편주처럼 파도에 밀리고 떠도는 신세로 되고 말았다. 비누공장도 꾸려보았고 김치장사도 해보았고 락양으로 중경으로 청도로 두루 다녀보았다. 많은 것이 자신한테 맞고 발전성이 있는 일거리는 아니였다. 중경에서 음식점 일을 거들면서 그녀가 맘에 들어 같이 음식점을 꾸리자는 제안도 들어왔지만 사람 의심증이 골수에 묻친 그녀에게 믿을 만한 파트너가 생기지 않아 그만 두었고, 또 일하던 음식점의 주인이 바뀌면서 적응이 안 되여 그 자리도 뜨고 말았다. 마침 친구의 소개로 북경행을 했고, 거기서 민박점에 가서 음식도 하고 복무원으로 있기도 했다. 그곳에서의 일거리는 힘에 부치지도 않고 돈벌이도 되여 즐거웠다. 그리고 얼마후 그 민박집 경영하던 주인이 한국행을 하면서 그 일감을 그 녀에게 맡기였다. 그후 그녀는 일군을 하나 쓰면서 민박집을 잘 운영해나갔다. 돈도 잘 벌었었다. 그런데 좋은 경치는 길 수 없다고 하는 말처럼 시련이 찾아왔다.이곳 민박이 잘 운영되니 눈을 밝히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거칠게 생긴 몇사람을 앞세우고 나타난 조선족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점잖게 말을 뎄다.“아줌마, 이 민박을 우리에게 넘기세요. 우리가 손해 배상비는 잘 알아서 치루어 줄 겁니다” 손해배상비란 집안장식에 쓴 것 솥 그릇 이불 등등을 말하는 것이었다. 참 웃다가 소꾸러미 터질노릇이다. 남의 잘되는 장사를 넘봐도 유분수지, 잘 되는 장사를 넘기면 바보가 아닌가. 그러나 따라와서 옆에 서있는것들이 만만찮았다. 뒤골목 강도들 같아보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기가 질리면 안되지 싶어 딱 잘라버렸다.그랬더니 여유작작하게 “지금 안 된다고 하지 말고 좀 생각하고 말하세요. 이 주위의 사람들한테도 물어보고…”하고 씨벌였다. 그러더니 오던 기품 그대로 무리를 거느리고 나갔다. 위협적인 말도 아닌데 온 가슴을 엄습하는 음기에 몸이 오싹해난다. 그 후 들은 수소문에 의하면 그 무리들은 자기들의 맘에 드는 자리를 보았으면 강제로도 빼앗는데 여기저기 다 끼고서 손에 넣는 방법도 여러가지라, 혹 심기를 다치면 뼈도 못 건진다는 식으로 손해배상금도 받지 못한다는 소문이다. 일개 아녀자로 닭알로 바위 치는 격으로 맞설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남편한테 의논해보려고도 했지만 일이 커져서 혹시 자존심 대결로 인명사고라도 칠까봐 며칠 끙끙 속으로 앓으며 고민하던 끝에 이 민박을 그 자들의 뜻대로 넘기기로 했다. 또 한번 인생의 비싼 경험을 사게 되였고 힘과 권세의 위력을 느끼게 되면서 동시에 없는 자의 설음, 아녀자의 무력함, 도시에 깃을 내리려는 농민공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뼈저리게 감수했다. “그때 민박집에는 장기간 주숙하고있는 전도사가 있었지요. 그 전도사는 배려심이 많은 분이였고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정확한 진단을 하는 분이어서,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것을 느끼군 했어요”그래서 어느 날, 그녀는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였다. 그녀는 세상의 험악함과 도시의 무상함을 맛보면서 그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었다. 영혼이 목말랐던 것. 허전한 마음을 달랠 안식처가 필요하던 차였다. 그녀는 민박집을 떠나면서 전도사로부터 석별의 선물도 받았다. 그후 일자리를 여러 번 옮기였다가 한 가족이 모여사는 데는 고향과 가까운 할빈이 좋은 것 같아 할빈에 와서 집을 세맡아 김치장사를 하면서 그곳에 있는 교회도 다녔다.그때 남편이 병으로 몸이 불편해서 병원에 가 검사하니 간암초기라고 한다. 그 동안 술로 마음을 달래며 많이 퍼마셔된 것이 원인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깜짝 놀라 약도 쓰고 열심히 기도도 하면서 2-3년간 지나니 거짓말처럼 병이 호전되였다. 그때 그녀는 꾸준한 신앙생활의 혜택을 입은 것 같아 얼마나 고마운지 그 동안 겪은 고생도 모두 보람이 있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농민으로서 도시로 들어와 일자리를 찾으며 보람있게 즐겁게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다. 도시 사막속에 든 것처럼 외로울 때가 많았다. 무슨 일이 닥쳐도 호소할 때도 없는 고독감이 밀려들 때도 많았다. 도시인속에서 열등감이 들때도 있었고…그런데 교회가 있어 서로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 이런저런 고민이나 마음의 질병들을 지닌 사람들이 매주 만나 고민도 아픔도 풀어놓고 새로운 인생철학, 세상사는 방법도 학습하면서 서로가 많이 위로 받고 힘이 되었다. 하여 매주 월요일부터는 새로운 마음으로 한 주일을 열 수가 있었다. 그리고 새로움이 출렁이는 마음을 스스로 느낄수 있었는데 이것은 단독으로 떨어져서는 불가능한 일이였다. 지금 남편이 한국 나와서 일하고 자기는 한국행보다는 현재 생활이 더 행복하다고 하면서 잘 안착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느낌들이 찾아든다. 행복이란 돈에서 오는것도 아니고 자기만족에서 비롯되고 삶 자체에 의의를 느끼는 마음에 담기니…자신을 비우고 아픈 과거의 자신을 치유하면서 나름 삶의 진가를 찾으며 살아가고있음을 느끼게 된다.필자는 기독교신도가 아니다. 무신자다. 그런데 그 녀의 이야기를 여러 날 듣고 질문하고 하면서 찐드기 마음이 생기였다. 그래서 교회밥도 며칠 먹고 설교도 듣고 교회성원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었다. 물론 나에게는 깊은 느낌이 없지만, 일단 긍정해주기로 하였다. 그녀의 진심도 알게 되였고 그들의 마음을 치유해준 목사-교회의 영향력을 느끼면서 다행히도 속세의 불행과 혼돈에서 그들을 건져준 그 어떤 조직적 힘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제 밝히지만, 그녀의 이름은 정경숙이고 오상시 민락향에 살다가 도시 진출한 농민이었다.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이런 저런 마음의 질병에 걸리게 된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병원은 어디에 있을까? 어딜까? 마음이…영혼이 깃을 내릴 언덕은 어딜까? 각자의 답안은 다 다를것이다. 그들이 살아오고 신앙해온 삶의 궤도와 가치관이 같지 않은만큼. 그처럼 행복으로 통하는 길은 나름 다름을 느끼게 된다…. 참으로 이런저런 곤혹에서 벗어나게 하고…자살까지하는 경우를 막으려면 정신을 치유하는 사회적인 그 어떤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