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문학 8호 공모작품

▲ 홍연숙 약력: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시, 수필 다수 발표. 현재 울산 거주
[서울=동북아신문]오전 장사가 끝나자 막 책을 펼치고 읽기 모드로 들어가려는데 주방에서 상 나가라고 호출이다. AC하며 오만상을 구기고 담당언니에게 몇번이냐고 물었더니 저기 머슴아 둘이라 한다. 한바퀴 돌아도 머슴아가 보이질 않아 도로 앞다이로 갔더니 31번에 머슴아가 안보이냐며 히죽이는 언니의 눈길을 따라보다가 기함하며 배꼽을 잡을 뻔 했다. 머리가 희슥희슥한 육십대초반쯤으로 되는 아저씨 두분이 열띤 토론을 벌리고 있었다. 반찬들을 셋팅하면서  "머슴아" 두 분의 이야기를 주어 듣는다.

형은 너무 고지식하단 말이야. 형은 그냥 선생님이나 경찰관이 되였어야 해. 아무리 상사가 나보다 어리더라도 상사는 상사야. 우리 이 나이에 또 이 처지에 뭘 가릴게 있어? 저 말 속에 묻어나오는 상처들은 그들이 가파른 경쟁의 밀림속을 얼마나 오래동안 달려왔는지 보인다. 아직 아물지 못한 아픈 몸으로 세상물정 모르는 햇송아지들에게 이리치이고 저리치여도 가슴한번 내밀지 못하고 웅크리는 쓸쓸한 가을 그림자. 가릴게 없는 그들도 한때는 불같은 열정으로 불같이 뜨겁게 달구었던 머슴아시절이 있었겠는데, 맹수처럼 앞만 보고 달렸던 여름이 있었지 말이다.

요즘 불경기로 단체모임이 많이 줄었다. 그래도 삼, 사십대모임은 왕성한 편이다. 주문도 통 크게 하고 팁도 잘 나온다. 오, 육십대모임은 예약 인원수가 항상 예상보다 줄어든다. 모임에 빠지는 분들이 많다. 회사를 그만뒀거나 알바를 뛰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참석은 했지만 가격을 너무나 옴니앞니를 따지는 통에 "째째하게" 공짜만 바라는 염치없는 손님대접을 받는다. 저쪽 젊은 패들은 술을 짝으로 들여 소맥으로 양주로 권커니 작커니 하며 시끌벅적 흥이 가실줄 모르는데 알각잔이 몇번 부딪치다가 깊은 정적에 빠지는 가을의 빈 뜰은 썰렁하다. 그럼에도 서로의 인사의 첫 마디가 일은 하고 있나? 마누라는 잘 해주나? 일 뿐. 마음도 몸도 힘든데 위안을 받거나 위안을 주는 것도 사치다. 건강 제일이라지만 건강을 챙길 여유도 없이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가 존경스럽고 꼬박꼬박 일하러 나가는 남편이 자랑스러운 거다. 낮에는 출근하고 밤에는 대리기사를 하며 "뒷방"으로 밀리지 않으려고 필사를 하는 가을의 머슴아들.

퇴근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오십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만취상태로 인도에 누워있었다. 지나가던 두 여학생이 119에 전화를 했지만 저쪽에서 바로 출동은 하지않고 자꾸만 물어보는게 시간이 걸릴 듯 싶었다. 취한 남자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 두려웠지만 여름밤의 땅은 차고 강바람이 제법 불어 그냥 지나치려니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저씨, 일어나셔요~ 집으로 가셔요. 이러다가 큰일 납니다. 하며 몇번을 흔들었더니 네, 집에는 가야죠. 하면서 겨우 상체를 일으키고 한숨을 내 쉬는데 도로가 꺼질 듯 싶다. 자전거를 끌고 비칠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저 어깨가 한없이 내려 앉는다. 잎이 떨어진 벌거벗은 나무가 달빛으로 눈물겹게 아름답다.

울 가게 설거지 이모는 남편이 조선소에서 잘리는 바람에 근심걱정없던 "사모님" 생활을 정리했다. 가부장적인 남편은 마누라를 꼼짝달싹도 못하게 하는 독불장군이였지만 젊은 후배들에게 고집불통의 권세를 다 내어주고 세월에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거의 삼십여년을 한 직장만 다녔기에 다른 일은 엄두도 못내고 그냥 집에서 백수로 있단다. 언제인가 설거지라고 해놨다는게 엉망이였지만 아무말도 못했단다. 집에 들어가면 풀 죽은 남편이 그렇게 불쌍 할 수가 없더란다. 사회에 길들여진데로 살아온 그들, 다 타버린 미지근한 가을은 고독으로 아련하다.

그들도 오고 싶어서 오고 가고 싶어서 가는 세상이 아니다. 저절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허공을 닮아 영원히 철들지 않는 머슴아들에게는 미련을 멈출 수 없다. 가을 남자의 매력은 그 깊은 슬픔에 있다.

2018.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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