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현 10중 제23기 졸업 50주년 기념

 [서울=동북아신문]주청룡 객원기자=지난 7월 12일, 우리는 연길현 10중 제23기 졸업 50주년 기념행사를 룡정시 동성용진 인화에 자리잡고 있는 해란강생태민속원에서 가졌다. 오전 8시 우리는 룡정시표광장에 집합하였는데 반갑다고 서로 붙안고 인사를 나누며 떠들썩하는 가운데 이게 누구냐? 하며 낯선 인사를 하고 한참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뜯어보고야 서로 “너 ㅇㅇ옳지? 와! 너 ㅇㅇ구나! 많이변했구나!”하며 서로 뜨거운 포옹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아무리 보아도 누가 누구인지 몰라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서먹거리고 있을 때 옆에서 양쪽에 익숙한 동무가 소개를 해서야 50년전의 누구라는 것을 어슴프레 기억을 떠 올릴 수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1968년 7월 연길현 10중을 졸업하고 10대의 소년, 소녀로 갈라진 것이 20년, 30년 지어 장장 50년만에 처음으로 만난 동창생들이였으니 말이다.

 초중졸업 50주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50년이면 강산이 다섯 번 변하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20세기에서 21세기로 시대도 변하고 강산도 변하고 우리도 변하여 10대의 소년 소녀로부터 70을 바라보는 손자, 손녀를 가진 할아버지 할머니로 변하였다. 
▲ 행사장으로 향한 버스안은 춤과 노래로 들끓다
 인생을 살다보면 그래도 학창시절이 가장 즐겁고 그립다. 가끔은 학창시절을 돌이켜 보며 그때의 우리의 선생님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선생님의 사랑을 받으며 밝은 교실에서 공부하던 정경, 넓은 운동장에서 뛰놀던 정경들을 돌이켜 보게 되며 동창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면서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할가?’ 하는 생각도 하여 보게되었다. 이번 초중졸업 50주년 기념행사에는 모두 27명이 참석하였는데 한국, 상해에서 비행기로 하늘을 날아 온 동무들도 있고 장춘에서 고속철을 타고 온 동무도 있었다. 8시 30분 버스가 룡정을 떠나 해란생태강민속원으로 향해 떠났다. 버스 안은 <동창원무곡>로부터 시작되어 <추억의 노래>, <교정의 종소리> 등 노래와 춤으로 들끓기 시작한 것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버스가 룡정시내를 벗어나 민속원으로 향하면서 멀리는 푸른 산이 보이고 길 양켠은 모두 농민들이 정성들여 가꾼 벼, 옥수수 등 곡식들이 푸르싱싱 자라고 있었다. 대부분 콩크리트숲 속에서 생활하던 우리들로 놓고 말하면 록색으로 물들인 산과 전야를 내다보노라니 마음도 한결 상쾌하였다. 
▲ 50년 만의 모임
 버스가 해란강민속원에 도착하여 보니 배구장, 농구장, 배드민턴장, 줄지어 선 백양나무 밑에 한 줄로 옛날 조선민족이 즐겨쓰던 오지독을 7~8메터 높이로 올리 쌓아 놓고 유람객을 반겨 맞는 주차장, 여러 채의 조선민족의 고풍스러운 한옥, 웅장하게 지어놓은 기석관, 건설중에 있는 수상락원, 유람객을 태운 꽃마차들, 유람객을 태운 뽀트들이 여유롭게 오가는 거울같은 호수, 대형비닐하우스 안의 열대식물원, 정말 듣던바와 같이 그 어느 휴가촌이나 민속원에 비해 시설도 잘 되였고 풍경도 좋았다. 하여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당년의 로반장 리청송이 자유산책하면서 민속원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도록 1시간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동창생들은 끼리끼리 민속원의 호수가며 대형비닐하우스 안의 열대식물원 등 경치좋은 곳을 산책하면서 50년전의 학창시절을 그리며 그립던 정도 나누고 여러가지 포즈를 취하면서 기념사진도 남기였다.  우리의 기념행사 식장은 열대식물원이였는데 식물원 안에 “연길현10중 제23기졸업 50주년기념”리란 천연색 현수막이 두 야자수사이에 걸려있었다. 동창위원회 비서장 서해금이 이번 기념행사를 위해 준비한 “연길현10중 23기졸업50주년”이라고 새긴 반팔내의 단체복 발급하자 모두 그 옷을 입고 야자나무와 현수막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기념으로 남기였다. 그리고 집체로 기석관을 참관하였는데 기석관 안에는 연변 각지에서 나온 별라별 기괴하게 생긴 수석들이 있었는데 주로는 왕청, 도문, 훈춘의 두만강, 가야하, 훈춘강에서 나온 아주 기괴한 수석들이였다. 대부분 동창생들은 수석애호가들이 아니기이에 수석의 진미와 가치에 대해 모르고 “말타고 꽃구경”을 하였지만 그 가운데 몇은 수석애호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수석에 대해 약간의 상식을 갖고 있어 그 기괴한 수석들의 진미와 가치에 대해 자기가 알고 있는것만큼 대략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러자 수석의 진미를 전혀모르는 동창들은 “그게 뭐 보잘 것 없는 돌이 그리 비싸겠는가?”하며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여 그가 해설원을 불러다 물어보니 정말 그 안의 수석들이 몇백원 몇천원 지어는 몇만원에 가는것도 있었다.  
▲ 기석관을 참관하고 행사장으로
10시 반이 되어 식장에 모여 당년의 반장 리청송의 사회로 초중졸업50주년 기념행사를 진행하였다. 첫 순서로는 전체 동창생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자아소개를 하고 간단하게 학창시절의 잊지못할 추억의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였다.  우리가 초중을 다닐 때에는 국가에서 꾸리는 전일제 중학교인 공판중학교(公办中学)와 농민들이 자체로 꾸리는 반농반학(半农半学)의 농업중학교가 있었다. 그때 우리 덕신공사에도 전일제 중학교인 연길현제10중학교와 반농반학의 덕신농업중학교가 있었는데 시험을 쳐 시험성적 순서에 따라 연길현 10중에서는 1개 반을 모집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덕신농업중학교(3개반)에 가게 되였다. 1965년 연길현10중(그 후의 룡정시덕신중학교)에서는 본교 학구에 속하는 덕신공사의 여러 소학교와 동성공사의 장남소학교, 그리고 석정공사의 중성소학교에서 학생모집을 하였는데 세개 공사의 학생들이 연길현10중에 다니게 되였다. 그때 우리 반에는 석정에서 올라 온 학생이 7명이였는데 학교와 거리가 너무 멀어14살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학교에서 숙사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하였다. 그러다가 하루는 불을 너무 세게 때여 가마목에 누운 한 녀성동무의 담요가 괄아 타서 덮지 못하게 되자 전체 숙사생들이 돈을 모아 그의 담요를 새로 지어 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동성공사 장남소학교에서 송선길, 채영수 등 5명이 입학하였는데 이들은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 송선길은 15리 길, 채영수는 고개 하나 더 넘어 20리, 매일 왕복 40리 길을 다녀야 했다. 그러다니 그들은 아침에 닭의 홰치는 소리와 같이 일어나 오솔길을 달려오면 여름에는 풀이슬에 신과 바지가랭이가 다 젖어 교실에 들어섰고 겨울에는 털모자에 성에와 고드름이 새하얗게 끼여 교실에 들어섰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떻게 하나 공부를 잘 하여 상급학교에 간다는 일념으로 지각, 조퇴, 결석없이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그때 우리 반에서 김동호, 우일범, 리숙자는 스케트운동을 잘 하여 1학년에서 벌써 현 속도스케트경기에 참가하였으며 리숙자는 또 달리기를 잘 하여 남신숙과함께 현 륙상경기에 참가하였으며 남신숙은 전 공사운동대회에서 그네 1등을 하여 재봉침을 상으로 탄 적도 있다. 그때 우리는 모두 농촌이라 학교와 거리가 멀기에 저마다 점심밥을 싸고 다녔는데 우리는 한전고장이라 곽밥이라야 일반적으로 조밥에 김치였다. 점심시간이면 끼리끼리 겨울에는 교실에서, 여름에는 교정의 백양나무그늘에 앉아 재미있게 먹었는데 네것 내것 없이 통털어 놓고 먹었으며 누가 더 좋은 것을 싸가지고 오면 그것부터 먹어 없애곤 하였다. 그래도 여럿이 함게 먹으니 소박한 반찬이라도 여러가지 있어 진수성찬 같은 맛으로 먹었다. 참말로 재미있는 학창시절이었다.  
▲ 개회사를 드리고 있는 동창회 주청룡 회장
 그때에는 공판중학교 졸업생들에게는 고중입학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을 주었지만 농업중학교 졸업생들에게는 고중입학시험자격도 주지 않았다. 그러니 공판중학교에 다니여 공부만 잘하면 앞으로 고중, 더 나가서는 대학에도 갈수 있었지만 농업중학교를 다니면 아무리 공부를 잘 하여도 대학은 고사하고 고중에도 진학할 수 없었다. 다시말하면 애어린 싹의 꼭두 순을 잘라 놓은 것이었다. 하여 그때 우리는 연길현10중에 입학한 것을 아주 자랑스러운 일로 여겼다. 그리고 공판중학교에서는 전일제중학교인 것만큼 말 그대로 매일 학습만 하고 농업중학교 학생들은 반농반학인 것만큼 말 그대로 절반 농사를 하고 절반 공부를 하였는데 어떤 날에는 오전에 공부를 하고 오후에 밭일을 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연 며칠 공부를 하고 다음 연 며칠은 일을 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고생스레 일하고 공부를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동년배의 학생으로서 그들이 매우 안스러워 보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렇게 우월한 조건에서 공부를 하는데 어떻게 하나 학습을 잘하여 상급학교에 진학하여야겠다는 결심 하나로 모두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 사회를 맡은 당년의 로 반장 리청송
 그런데 1학년까지 다니고 2학년에 올라가면서1966년 8월에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의 폭풍을 맞게 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 우리 학교에서도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를 타도하자” 란 구호를 외치면서 교장선생님과 교도주임선생님에게 여러 가지 죄증을 만든 대자보(大字报)를 써 붙이고 투쟁하였으며 또 “잡귀신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웨치면서 일반 교원들에게도 대자보를 써 붙이고 고깔모자 쒸워 놓고 투쟁을 하였다. 그리고 또 두 개 파, 세 개 파의 반란파 조직이 나오면서 서로 대립되는 조직에서는 같은 학급의 학생끼리 말싸움, 지어는 무단투쟁까지 벌이기도 하였다. 너무나 어이없는 유치한 노릇을 한 것이다. 어찌 아무런 죄도 없는 자기들의 교장선생님, 교도주임선생님, 담임교원을 고깔모자를 씌워 놓고 투쟁을 하고 같은 학급의 학생들끼리 무단투쟁을 한단말인가? 모두 공부를 잘하여 상급학교에 간다던 우리는 문화대혁명이란 대 폭풍을 맞으면서 2년간 공부도 못하고 광채롭지 못하게 력사적으로 부정을 받는 문화대혁명을 하고1968년 7월 30일 졸업식을 하면서 고중시험도 쳐 보지 못하고 모두 농촌이란 광활한 대지로 내려가게 되였다.  농촌에 내려가서 몇 년간의 농촌단련을 거치고 어떤 동무들은 참군하여 국방건설에서 복무하다가 돌아왔고 어떤 동무들은 상급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좋은 단위에 배치받아 사업하였고 어떤 동무들은 순 자기의 노력으로 당정기관, 사업단위, 학교, 의료계통 등 여러 분야에서 사업하였고 어떤 동무들은 한평생 농촌에서 자기의 고향건설에 있는 힘을 다 하여 왔다. 
▲ 다음의 60주년을 기약하면서 이 술잔을 높이 들자
 이런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50성상의 추억을 하는 사이에 어느덧 한시간이 지나갔다. 다음으로는 동창회 회장 주청룡이 개회사를 하였다. 그는 개회사에서 “동창모임이라면 그때의 우리의 교장선생님, 우리의 담임선생님과 과임선생님들을 모시고 학창시절을 추억한다면 더욱즐겁고 의의가 있겠는데 50년이 지난 오늘 우리 자신도 이미 7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할머니로 된지라 우리가 그리는 그때의 선생님들이 대부분 저 세상으로 가셨고 지금 계시고 있는 리동수(86세), 함동만(82세) 선생님께서도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라 이번 행사에 모실 수 없는 상황이여 너무나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라고 하였다. 그는 또 “그래도 우리 절로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1991년 반주임 전동천 선생님의 환갑연에 14명의 동무들이 참석하여 축하를 드린것이고 2006년 6월에 10명의 동무들이 반주임 선생님과 함동만 선생님을 모시고 덕신에서 즐겁게 하루를 보낸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 개회사에서 “애석한 것은 12명의 동무들이 이미 저세상으로 가고 몇몇 동무들은 병석에 누워 있기에 이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우리도 그들을 그리고 그들도 우리를 그리며 이 뜻깊은 행사에 동창생들을 만나보지 못하는 슬픔으로 하여 한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하였다. 오전의 행사는 이로서 끝나고 경축연회가 시작 되였는데 연회석에는 개고기를 위주로한 산해진미가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세 상이 차려졌다. 점심상에 둘러앉은 우리는 부어라 마셔라 권커니 작커니 하면서 50년 전의 추억과 50년 갈라졌던 그리움으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술도 잘 넘어갔다. 하지만 누구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술좌석이 깨끗하게 끝났다.  오후에는 경축오락판이 벌어졌는데 모두 단체복들 입고 “동창원무곡”과 “추억의 노래”를 합창으로 시작되여 앉은 순서에 따라 차례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자유오락으로 놀기도 하면서 자기의 장끼자랑보다 50년 갈라졌던 동창생 앞에서 자기의 성의를 보이려는 심정에서 못하는 노래지만 성수나게 불렀고 노래실력이 괞찬은 동무들은 마이크를 쥐고 놓기 아쉬운 정도로 노래를 불렀으며 이런 노래에 맞추어 모두 성수나게 춤을 추었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노래와 춤이 끝이 날줄 몰랐다. 그래도 사회를 맡은 로반장 청송이 마이크를 들고 이제는 3시반이 되였으니 돌아갈 시간이 되였다며 오락회의 폐막을 선포하였다.  
▲ 노래와 춤으로 뜨거운 정 나누어 보자
 귀로에 올라서도 버스안은 여전히 노래와 춤으로 들끓었다. 룡정에 도착하여 우리는 다시 간단한 석별연을 차려 석별의 정을 나누고 모두 건강한 몸으로 잘 살아서 다음에는 초중졸업 60주년모임을 가지자고 약속하면서 눈물 섞인 석별의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렇다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살면서 그 60주년을 기대하는마음이다. 2018.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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