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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수기/김명화]고향2018 제9회 전국 어르신 백일장 대회 최우수상 수상작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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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27  08: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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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북아신문]설명절이나 추석, 대보름을 맞이할 때면 나는 어김없이 고향이 있는 쪽의 밤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곤 한다.

 내가 50여년 살아 온 고향은 중국 흑룡강성 오상이란 곳이다. 1992년 한중 수교이후 중국 교포들의 한국행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 나도 부모님이 오매불망 그리던 부모님의 고향 한국 땅을 밟게 되였고, 어느덧 20년째 고국의 서울에서 교포 신분으로 살고 있다.

 처음 고국 서울에 와보니 참 많이 발전했고 화려했으며 사람들 또한 친절하고 따뜻했다. 하지만 황홀함도 잠시, 나는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화장실도 주방도 없는 지하 단칸 월셋방에 살면서 여기저기 다니며 일자리 구하고 궂은 일 힘든 일 마다 않고 일을 했고, 고된 노동으로 팔다리가 부어 아파도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며 쉬는 날 없이 열심히 일을 했더니 수입은 괜찮았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몸에 병이 들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다 견딜수 있었지만 부모 자녀가 보고 싶고 고향이 그리운 건 어쩔수 없었다. 비싼 국제 전화요금이 아까워도 간간이 공중전화로 통화하면서 그리움과 외로움을 달랬고, 아련한 추억이 담긴 "내가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천…" 이 노래를 얼마나 불렀는지 모른다. 이 노래 부르면 흘린 눈물만으로도 몇 함지박은 잘  될 것이다.

   
▲ 중국 흑룡강성 오상시 가을 풍경 일각
  나의 고향은 홀어머니 손에서 자라던 내가 새 아버지를 맞아 자라며 공부하고 결혼 한 곳이고 나의 부모님과 자녀가 살고 있는 곳이기에 나는 고향이 너무나도 그리운  것이다.

 5년간의 꾸준한 노력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나는 바로 중국 고향을 찾았다. 비행기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고향 마을에서 3키로정도 떨어져 있는 강 다리를 건너는데 마치 비 온뒤 감자 줄기를 당기면 감자 알들이 주렁주렁 달려 나오듯 지난 일들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끌려나와 나를 울컥하게 했다.

 이전에는 강에 다리가 없어 고향 사람들은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고 30리 떨어진 시내에 가려면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 다녀야 했다. 이 다리가 놓여진지 10여년이 되였지만 내가 이 다리를 건너는 것은 이번이 두번째이고, 이렇게 잘 닦아 놓은 도로로 버스를 타고 가기는 처음이였다.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킬 방법이 없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였을 때였다. 연일 내린 폭우에 강물이 불어 배가 다니지 못하는 상황이였고 나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아버지는 산으로 돌아 가자고 하시며 이불짐을 지고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산등을 넘어 40여리 빗길을 걸어서 기차역에 도착하여 나를 차에 태워 학교 기숙사로 보냈던 기억에 나는 또 다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당시 자연재해 피해로 먹고 살기도 어려운 형편에 자녀를 기숙사 생활해야 하는 중학교에 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우리 집은 가난한 걸로 치면 동네에서 손 꼽힐 정도였지만 새 아버지는 끝내 나를 고향에서 몇 안되는 중학교 졸업생으로 만들어 주셨다. 

 고향 마을 입구에 들어서서 밭김 매고 계시는 어떤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내 아버지로 보여 자기도 모르게 그 쪽으로 달려 갔다. 내가 한국 가 있는 사이에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 돌아 가셨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채.  고향에 돌아가서 제일 먼저 아버지 어머니 유골이 뿌려진 강변에 가서 제사를 지내 드렸다. 부모님 임종 지켜 드리지 못한 불효한 이 딸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어머니께서 저 세상에서는 아무런 고통없이 잘 지내시라고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친구들의 새로 지은 현대식 벽돌집에도 초대 받아 그들이 직접 가꾼 야채와 손수 키운 닭을 잡아 차린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또 어린 시절 놀던 뒷도랑에 가서 물에 발을 담구고 물 장난도 치며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다. 유치한 것 같았지만 오래만에 동심으로 돌아가서 즐거웠다.

 나의 첫 사랑 성이도 만났다. 그는 평생을 고향의 새 농촌 건설에 힘을 쏟았고 지금도 고향 땅을 지키며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와 함께 강가에 가서 낚시질도 하고 조약돌 주어 돌 팔매 던지며 옛날 추억에 젖어 설레였 던 그 하루도 잊을 수가 없다.

 오래만에 고향에 와보니 고향산천이 예전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고, 고향의 흙도 더 기름져 보였으며 강물도 더 맑았다. 그리고 사람들 삶 또한 더 풍요로워 보였고, 마을과 도로도 잘 건설되어 있어서 마음이 너무나도 뿌듯했다. 고향 사람들의 친절함은  여전했다.

 나의 고향은 아버지 어머니 유골이 뿌려져 있는 곳, 또 내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의 눈물을 심어놓은 곳이기에 나는 내 고향을 잊을 수 없다.

 고향에는 내가 긴 세월 살아온 추억이 담겨 있고 흘린 땀방울이 스며 있기에 고향 생각을 하면 항상 설레고 마음이 아리다.

 고향이 있었기에 내가 젊은 시절 꿈을 키울수 있었고 또 그 꿈을 이룰수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첫 사랑, 동창, 친구가 있는 내 고향이 자랑스럽다.

 즐겁고 설레였던 고향 나들이도 금방 끝나고 아쉬움을 뒤로 한채 고향을 떠나 서울로 돌아 왔다. 서울은 나로 하여금 안정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보낼수 있도록 품어 준 제2의 고향이다. 20여년간 서울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일을 해왔지만 결코 한국 발전에 큰 기여를 하지는 못했다. 내 나이 70이 훌쩍 넘었지만 여생엔 최선을 다해 고국의 발전에 힘을 보태고 이웃을 도우며 보람찬 삶을 살것이다.

 나는 내 고향이 융성발전하고 사람들 또한 풍요롭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며 세상이 부러워 하는 곳으로 거듭 나기를 항상 기도한다. 

 오늘도 고향의 밤 하늘을 바라보며 “명화는 고향을 한없이 사랑한다” 라고 외쳐본다.

김명화 : 중국 흑룡강성 오상시 출생. 중국 서란시 조선족제1중학교 전임 화학교사. 현재 서울 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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