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문학 8호 공모작품

▲ 이동숙 약력: 중국 연변 출신, 현재 한국 체류중.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시, 수필 발표 다수.
[서울=동북아신문]오랜만에 수표로 장을 보노라니 한국에 갓 입국했을 때의 에피소드가 생각나서 피씩 웃었다.

1999년에 입국해서 바로 불법체류자로 전환 된 나에게서 수표는 아주 시끄러운 존재였다.

주민등록증이 없는 가사도우미라 수표 쓰기가 여러 가지로 불편했지만 사모님의 지갑에는 수표 뿐이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생활비를 요청 할 때면 스스럼없이 수표를 꺼내줬다.

수표를 쓸 때 마다 "주민등록 번호를 적어 주세요. 여권 번호를 적어 주세요"라고 해서 여간 시끄러 운 게 아니다. 내가 주민등록증이 없다고 하면 영업 사원들이 아니꼬운 눈길로 주민등록증이 왜 없느냐고 따지고 든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나는 그런 불편함을 최소한 피하기 위해 될 수 있으면 쌀 배달시킬 때와 세탁 비를 낼 때에 쓴다. 그럴 경우는 어치장 서러운 것들이 필요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매번 쌀 배달시킬 때 수표를 깰 수도 없는 일이다. 할 수 없이 나머지는 슈퍼나 마트에 싸면서도 무겁고 부피 큰 것으로 배달시켜서 깬다. 그 때는 주민등록증이 필요 없고 집 주소와 전화번호만 적어 넣으면 되니깐 말이다. 그러나 배달시킬 경우 백 프로 먹히는 것은 아니다. 재수 없는 영업 사원을 만나면 진땀을 동이로 쏟을 수 있으니 말이다.

어느 하루, 자주 다니던 슈퍼에서 종전처럼 수표 뒤에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넣고 돌아서는데 수금원이 주민등록증번호도 덧붙이라는 것이다.
"주민등록증이 없는데요. 전에도 배달시킬 때는 안 썼는데요."
"주민등록증이 어찌 없을 수 있나요? 안 돼요." 수금원은 쌀쌀맞게 굴었다.
두 번씩이나 설명해 주었지만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나는 화가 치밀어 사모님한테 전화를 걸어 직원에게 바꿔 주었다. 결국 결산은 끝났지만 불법체류의 신분으로 그 누구에게도 화풀이 할 수 없는 게 너무 속이 상했다.

수표로 크게 골탕 먹은 것은 입국하던 해에 은행에서다. 내가 처음 일을 봐주던 집에서 한 번은 지폐가 아닌 수표로 월급을 줬다. 매번 그랬듯이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수표를 송금하려고 은행에 갔다.

송금 표와 함께 수표를 들이 밀었더니 은행 직원이 "주민등록번호를 적어주세요" 하면서 수표를 도로 내 밀었다. 너무 뜻밖이여서 당황했다. 그 때는 한창 단속중이여서 이미 불법이 된 신분을 밝히기도 꺼림직 했다.

나는 기여 들어가는 소리로 "깜박하고 안 가져 왔어요"하고는 수표를 도로 집어넣고 금방 튀여 나올듯한 심장을 억누르면서 태연한 척 돌아나왔다. 은행 경비원 옆을 지날 때는 덜미를 덥석 잡을 것 같아 몸이 오싹했다. 은행 문을 나서자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그날 진종일 기분이 찜찜했다. 아기를 돌보느라 잠도 바로 못 자면서 힘들게 번 돈이었는데 마치 훔친 돈을 송금하려고 했던 것 같아 속상했다. 나는 주인집에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수표를 현찰로 바꿔가지고 이튿날 다시 은행으로 향했다. 마치 결백함을 증명해 보려는 듯이.

수표를 받으면 어떻게 쓸까 걱정부터 앞섰고 없앴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싫었던 수표가오늘은 나의 쇼핑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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