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연숙 약력: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시, 수필 다수 발표. '문학의 강'으로 한국문단 등단. 현재 울산 거주
[서울=동북아신문] 가을비
 

화분에 무더기로 올라온 마농들이 바람에 뒤틀린다
마농은 여직 꽃을 피우지 않았다
여름이 저만치에 걸려 헐떡이다가
갈증에 숨이 찢어지도록 잡더니 다듬지도 않은채 놓아준다
추적추적 하염없이 써내려간다
다 읽어보려는 듯이
창문에 심은 눈동자는 얼룩으로 피여있다
페튜니아가 목을 꺾어 추락하고
채송화가 머리채를 흔들며 씨방들을 뽑는다
뜬금없이 가을悲가 가슴골짜기를 따라 흘러나온다
이 시간도 허리 꺾여 좌락좌락 흐른다

너는 지천명의 마지막 가을碑를 세우고 있다

2017.8.17.

 

마지막 인사
ㅡ어느 여불구자의 고독사를 기리며

수없이 기도들였건만
쪽방 하나 빌린 월세는
빨간 십자가만큼 늘어가고
가르치신대로 앞만 보고 달렸는데
내 이름 석자 구겨넣을 자리도 없습니다
죽었던 봄꽃도 되살아나는 이 계절에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악다구니쓰며 오르던
올리막을 포기하고
땅속으로 꺼진 계단을 밟았습니다

이젠 제가 가는 길은 평온합니다

차라리 잘 갔다는 인사가
뱀처럼 늘어나고
병신육갑이라는 얼굴들의 배웅이
꽃샘추위로 떨리는데

그대들은 따뜻한지요

파란 41년생에 반도 못 채운 돼지저금통이
엄마의 약값도 덜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의 짝다리같은 사랑도
남김없이 타버렸으니
그대여, 눈길한번 안줬다고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그날 저의 방을 지나며
창문을 두드렸던 바람이
참 살기좋은 도시의 바닥을 쳐댑니다
테프로 감은 쓰레기봉투의 배가 터지고
도시의 똥 딲은 종이들이 더러운 입자국을
드러내여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 도시의 시민으로서

2018.8.5

 

마른 휴가에 물을 끼얹으며
 

끝없이 추락하는 무엇인가이고 싶다
18층지옥 맨 밑바닥에 떨어지더라도
더는 감추지 않고 활짝 열어버리고 싶다
슬프게도 매달려 있다
해빛에 잘근잘근 밟히는 빨래처럼
매달려서 매달린채 한없이 견디고 있다
미지근한 풍속에서 간지럼을 타면서도
부끄러운 부스럼이 될가봐 참아야 한다
신선하지도 않은 채소에 맑지도 않은 물을 뿌리며
아낙네들처럼 호들갑을 떨어야 한다
터져나오는 고백은 혀를 씹어 삼키고
비상하려는 날개는 부러뜨려야 한다
숨막히는 어느날 몽유병이 도지더라도
삼류의 바보짓은 삼가야 한다
숨막히게 껴입은 화려한 색갈
그속에 비대해진 몸뚱이를 방치하고 있다.
세상의 대접에 안주하고 열심히 비만해지면서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는 찬사를 들어야 한다

하루만이라도 이 세상에 휴가를 구걸한다
하얀 살 드러내고 모든 색을 지우고 싶다
알몸이 달아오르며 질퍽하게 적시는 사랑을
온 천하에 고백하고 참새의 200 섹스를 고집하고 싶다

하루만이라도 휴가답게 살고 싶다

2018.7.31

 

구절초

너를 닮았구나 구절초
너의 환생이구나 구절초

이미 꽃이면서도 풀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기를 더 원했던 구절초

봄부터 가을까지 내내 자다만 꽃 하얗게 피워 올리고
하늘 너머 멀리 소망을 빌어보는 구절초

구절초가 핀 이 가을
하늘마저 푸르디 푸른 이 가을
너를 떠올려
내 눈시울 붉어 지누나

아닌 새벽에 학교 가자며
아직 이불속인 나를 찾아와
울 엄마 눈총에 따악 얻어맞던 넌

이가 아파 학교 못가던 날
울 집 주변 슬슬 돌며
휘파람 실실 불던 넌

그날 넌 왜 학교 안갔지

긴 병으로 누워계시는
아버지의 간식거리 몰래 훔쳐와
퉁퉁 부은 나의 볼에 넣어주며
걱정으로 바라보던 넌
까만 눈동자를 가졌지

학교에서 유명한 왕따쟁이 우리 둘
담장아래에 앉아
교실에서 쫓겨난 도시락을 풀었지
숟가락을 빼먹고 울먹이는 나를 보다
쇠살창 끝을 부러뜨려 불쑥 내밀고
시뚝거리던 너
그립다
그립다
그때가 그립구나

머리 큰 애들 모여와
모래웅덩이에 뛰여내리라고
나를 윽박지를 때
나를 대신해 뛰여 내리다
혀를 깨물어 피를 쏟던 너

네가 거기서 나오는 내내
난 울기만 했지
그래도 나오자 바람으로
조꼬만 어깨에 힘주고
나부터 위안해주던 너

친구들의 따돌림속에서도
니가 있어 즐거운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때는 니가 얼마나 부럽던지
도시락만 들고 학교다니던 니가
숙제 안해도 상관없던 니가
그때 그 작은 질투가
이제는 이렇게 가시가 되여
아프게
아프게
찌르는 구나

백혈병
이름처럼 얼굴이 하얗던 너
웃음마저 하얗게 눈부셨지
어느날 그 하얀 웃음이 바람결에 날려
멀리 가버린 날
우리 소꿉시절 사금파리를 만지작거리다
하얗게 피여난 구절초를 보며
나 역시 하얗게 울었지
하얗게
하얗게

이제는 세월 흘러
내 나이 반백을 바라보지만
지금도 산과 들에 구절초 만발하면은
나는 하얀 얼굴의 너를 떠올린다

내 기억속에
영원한 열한살짜리야
구절초 같은 나쁜 놈아


2017.8.17


믿음을 깨부수며
 

일 끝나면 술 사주는 친절한 사장님
16바늘 꿰매고도 일하는 당신에게
따뜻한 위로와 간사한 몇 장 로임이 더 얹혀진다
집에 가면 쓰러질 듯 그대로 잠들고
새벽이면 기계처럼 출근하지만
사회의 밑바닥은 찰거머리

당신,
돈과 권력으로 몸 감은 사장놈을 의심하라

애 딸린 과부한테 장가들어
둘만 잘 키우자는 당신의 말에
그렇게도 자신없냐며
두번이나 더 임신한 마누라
어쩌다가 정말 어쩌다가 낚시 갔더니
잡아온 고기를 쓰레기통에 엎으며
애들을 잊었냐고 아우성 아우성

당신,
IMF시기 십만 가정이 누구의 가출로 깨졌는가 의심하라

부모의 버림으로 고아가 된 당신
순수한 노동자로 키워준 이 사회의
명령을 거절 못한다
착하게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쳐도
하느님은 당신과 너무 멀다
2018년 7월 19일 불볕더위에
쓰러져 마침내 병원에서 호강하는

당신,
노동을 모르는 계급들의 향락을 의심하라


2018.7.19

 

수정컵

 

그때는 봄이였네요
촉촉한 땅속, 질척한 어둠이 좋아
기쁨 한가득 물고 나팔꽃을 피웠지요
나비의 십자가에 매달려
여자의 꿈을 열달동안 꾸면서 말이죠

그뒤로 여자는 바빠요
땅은 서서히 말라가고 잊혀가고 버려졌지요
검푸른 고독의 시간들이
선분홍 잎들로 왕성하게 뻗쳐 나가고
성난 핏줄들이 불거지고

2002년 월드컵에
한국이 4강까지 흔들리고
온 천지가 빨갛게 물 들었을때
여자의 가랭이로 참고 참았던 울분을 토했지요

경기도 양평 길 병원의 가위와 메스로
도가니탕집의 변기통에 쏟은
선분홍의 시간들을 자르고
피와 살을 나눈 여자를 버리고
불법체류자를 죽였지요

목마른 사막의 계절을 서울에 남기고
울산의 바다바람에 꾸덕꾸덕해진
수정컵이 지금, 러씨아 월드컵으로 시려서
쟁그랑 소리냅니다

2018.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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