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련 본지 칼럼니스트
[서울=동북아신문]간밤에 생생한 꿈을 꾸었다.

퀴즈쇼 같은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일한 양식으로 자료를 출력하여 코팅하고, 정신 없이 짧은 시간을 쪼개서 이것 저것 준비하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아이 다섯명과 다섯가족이 착석을 하게 되고, 퀴즈쇼가 시작되었지만, 아이가 아니라 함께앉은 가족들이 퀴즈를 끌고 나가는 모습을 시작으로 나는 점점 깊은 패배감에 빠지게 된다.

내가 이틀하고 2시간을 더 걸려서 알차게 준비한 것들은 막상 아무 의미가 없는 화려한 것들 이였고, 퀴즈가 달랑 3개라는 것이, 문제의 핵심을 단단히 비켜 갔음을 깨닫게 된다. 급기야 유명한 게스트 5명이나 모셨으니, 가족 대상 토크쇼라도 해봐야 하나, 라는 생각까지 해봤지만, 이내 포기하고 땀범벅이 되어 꿈에서 깨어난다. 그 또한 문제의 핵심은 아니었으니까.
 
요즘 현장컨설팅이 어지간히나 하기 싫었었나 보다.
역시 간밤의 꿈이였다. 연미랑 현장컨설팅 가는 길에 병원에 들려 몸살주사를 맞고 가자고 했는데, 시간은 5시를 향해 가고 있고, 뭔가 자꾸 잘못되면서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결국 의사는 나의 두 팔에 주사바늘을 6번씩이나 쑤셔 대면서, 연미의 주사바늘로 나를 긁어 대면서 주사약 없이 바늘만 꽂아 놓고 방치하면서 알 수 없는 행동들을 하고, 결국은 이 약을 굳이 다 넣을 필요가 없을 것 같으나, 비싸긴 하고… 하는 말도 안되는 소리들을 한다. 급기야 팔에 박힌 주사들을 하나씩 뽑아내고 지점으로 다시 향하는데, 시간은 5시를 향해 간다.
 
나는 늘 뭐가 찜찜했다.
그리고, 늘 뭐가 화가 났다.
몇번이나 글이라도 써볼까 하고 노트북을 켰다가 웹툰만 보다가 접어두곤 했다.
 
그만큼, 생각을 정리하는 것마저도 피하고 싶을 만큼, 내 머리는 뒤죽박죽이었고, 많은 것들이 엉켜서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급기야 작년 연초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며, 내가 얼마나 어리석게 핵심을 단단히 비켜가고 있었는지 문뜩 떠올랐다.

불면과 다몽이 눈 떴을 때 피하고 싶어하는 생각을 강제로 시켜주는 장점은 있나 보다.
 
本末倒置, 머리와 꼬리가 뒤바뀌다.
 
나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결국,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방식대로 하기에, 뿌리에 물을 주는 행동을 제외하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라는 사람의 나약함은,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하느냐를 생각하기 전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 성급히 판단해버린다는데서 왔다. 그것도 한참이나.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폭군이 될 수 있다. 지배조차 못하는 어설픈 왕은 폭군이 될 가능성마저 가지지 못한다.
좋은 리더를 좋아하고 친하고 싶어했던 나로서는, 그들에게 참 좋은 것도 많이 배웠지만, 폭군이 되려는 조짐들을 보면서 그것을 바꿔보려는 바보같은 짓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좋은 사람이 망가지는 순간은 늘 겪어도 적응되지 않고 늘 나를 아프게 했지만, 그런 좋고 나쁨 또한 그냥 내가 사람을 “좋아하기로” 정해 놓았던 나만의 기준일 뿐이었다.
어떤 선배님의 말씀대로, 사람을 좋아하려면 그냥 좋아할 것을, 사람은 진화가 아닌 변화를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게 되면 그냥 좋아하지 않으면 될 것을, 기대를 해서 상처를 받고 기대라는 이름으로 강요를 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화가 나 있던 이유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아서 인 것 같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면, 결과로 득 볼 사람을 모아서 아군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 사람이 아쉬워 한번 더 나의 “좋아하는” 기준을 가지고 매달려보고 싶은 거라면, 목표를 동시에 이루려는 오만을 저지르지 말았어야 한다.
 
재미있는 기사를 봤을 때, 카톡에서 검색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저들과 공유 해야지.
하지만, 공유하고 싶은 사람을 그룹으로 놓고, 재미있는 기사를 찾는 사람 또한 있다.
받는 이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생각하면서 기사를 찾고 있는 나의 그 마음이 내 인생의 살아있는 구간이라는 것을, 왜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컨설팅은 무엇을 위하여 하는 것이고, 지금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을 좋아하다가 좋아하지 않게 되고, 최선을 다 해 끌고 가다가 방향을 틀어서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랑,
아무 생각 없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게으름 피우다가 느지막이 아무 방향이나 시작한 사람은 그 형태가 전혀 다르지 않지만,
그들이 이미 겪어온 그 생각의 궤적이 그 사람의 무게이자, 그 사람의 냄새요, 그 사람을 좋아하게 하는 이유다.
 
세상 고민을 혼자 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나에게, 그런 사람냄새가 나는 선배들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들은 무거운 발과, 단단한 근본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나 또한 어디로든 튈 수 있고, 좋아해줄 준비도 하지 않을 만큼, 좋아하지 않아야 할 순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지혜란, 꼭 몸으로 처절하게 느껴야만 생각나는 것인가.
 
나의 나약함은, 겪지 않은 것을 이해하고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에서 왔던 것 같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