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여류시인들 시와 사랑 1

 [서울=동북아신문]본지는 이번호 부터 홍용암선생의 '조선시대 여류시인들의 시와 사랑'이란 연재 글을 싣는다. 이 책은 조선반도의 마지막 왕조인 이씨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그 선왕조인 왕건이 세운 고려를 뒤집어엎고 완전히 새로운 왕조인 이씨조선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킨 1392년부터 그 조선을 침략강점한 일제에 의해 <한일합병>이 실시된 1910년까지 어언 장장 518년 동안 활동한 조선시대 여류시인 27명과 그들의 시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지식성, 학술성, 취미성, 오락성이 모두 고루 있게, 비교적 체계적이자 구체적이고 방대하게 집대성한 아주 가치가 있는 글이다.
  더우기 당대사회의 천만가지 각 방면, 각 분야에서 별처럼 찬란한 빛을 한껏 발산하고 활약하면서 당당하게 절반하늘을 우뚝 떠인 여성들의 재능과 기량, 그 역할이 날로 대폭 증진, 부각되고있는 글로벌시대인 오늘의 이 시점에서 우리 여성들의 자존과 자신, 자부심을 한결 더 불러일으켜주고 있어 남성들은 물론 특히 여성들(더우기 문학을 하는 여류문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한두 번쯤은 읽어볼만한 가치가 매우 큰 저서이다. 이 책을 펼쳐들고 그속에서 전개되고있는 전기적색채가 다분한 가지가지 옛이야기들을 잔잔하게 읽노라면 우리는 저도 모르게 600여년전~10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에서 사회적지위를 상실하고 철저히 소외당하고 외면받던 여성들(여류시인들)의 눈물겨운 사랑과 인생 분투, 시적세계에 깊은 감동과 감명, 충격을 받고 그 여성주인공들과 더불어 때로는 함께 울기도 하고 때로는 같이 웃기도 하면서 한가지 독특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 글을 연재하며 본지는 중국 조선족 문자 표기법을 한글 표기법으로 고치지 않고 그대로 싣는다. 많은 독자들의 애독을 바란다.(편집자 주)

      【 조선시대 녀류시인들 시와 사랑 1 】홍용암 (편저)

 
 
                                                시재가 뛰여난 기생 홍랑의 련시           묏버들 가지 꺽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줄로 여기소서!                         ㅡ 홍랑 시조 “묏버들가"     2000년 11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련시로 꼽히우는 상술한 홍랑(洪娘, 1558~1599 추정?)의 시조 "묏버들가"의 원본이 드디여 공개되였다.     이 서첩에는 가람 리병기선생의 발문이 있는데 그는 이 시의 내용과 표현이 “보배”와 같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한 조선중엽의 이름난 예기(藝妓)이자 녀류시인이기도 한 홍랑의 이 시조는 우리 문학사에서도 아름다운 련시로 손꼽히우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기생을 "녀악"이라고도 불렀다. 관동지방 기녀들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을 잘 불렀고, 함흥의 기녀들은 "용비어천가"를 잘 읊었다고 한다.     그들은 비록 출신이 비천했지만 직업특성상 학식있는 량반계층과 상대하고 어울리며 그들의 주흥과 시흥을 돋구어야 했던만큼 어려서부터 각종 악기와 가무, 시문의 기량을 열심히 배우고 닦았으며 또한 그렇게 품을 들인만큼 썩 잘했던것이다.     가끔 몸을 팔기도 하였지만 그때의 기생은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학문적 소양이 우선 필요했다. 노래와 춤도 알아야 했고 한시도 지을줄 알아야 했으며 악기도 연주할줄 알아야 했고 례의범절도 알아야 했다. 현재 우리가 아는 기생의 이미지는 단순 몸파는 녀자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 시대의 기생은 사실상 대체로 지배층 인사들에게 시와 예술을 제공하던 사람들이였다.     벼슬도 좀 높은 벼슬을 해야만 기생과 어울릴수 있었으며 아무리 지체높은 량반이라고 해도 기본소양을 갖춘 고급기녀는 절대 너무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 당시 기생들의 교양적 소질과 학문적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그런 연고로 조선시대의 기생들중에는 자연히 홍랑처럼 뛰여난 시재를 깆춘 녀류시인들도 꽤나 많이 생겨나게 되였다. 홍랑도 그런 시기(?妓)들중의 대표적인 한사람으로서 좋은 시조와 한시를 썼으며 후세에 길이 남겼다.     비록 천민신분이였지만 그 시대의 기생들은 남자와 시를 사랑하며 의식중이든 무의식중이든 민족시가의 발전에 거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또한 민족예술보존자의 역할도 한몫 톡톡히 한셈이다.     그들은 녀자이니깐 남자를 사랑하고 기생이니깐 시를 사랑할수밖에 없었을것이다. 아무튼 동서고금을 통털어 사랑은 아름답고 위대하며 강하다. 큰 기적을 낳는다.     사랑이 발휘된 불가사의한 힘이 결국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힘의 원천이고 동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의 이야기는 더더욱 아름답고 소중하고 귀하다.   
 

 

                                        세상천지 허허벌판에 홀로 남은 천애고아

 

   홍랑(洪娘, 1558∼1599 추정?)은 함경도 홍원(洪源)에서 아주 가난한 선비네 집의 무남독녀 외딸로 태여났다. 그녀의 원래의 이름은 애절(愛節)이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서로 의지하며 매우 어렵게 살았으나 어머니는 딸에게 문자와 례의범절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녀가 12살나던 해의어느날,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드러누워 위중하게 되자 애절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꼬박 사흘을 걸어서 80여리 떨어진 고을의 약방을 찾아갔다.     의원을 보자 다짜고짜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고 애원을 했다. 그 소리는 애절하다못해 피울음소리에 가까왔다.     “제 목숨이라도 드릴테니, 제발 불쌍한 우리 어머니를 꼭 살려주세요...”     그토록 먼 왕진길에 나설 생각이 애당초 없었지만 너무도 간절하게 애걸하는 어린 녀자애의 효심에 마음이 움직여진 최의원은 마침내 애절을 나귀에 태우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으나 그때 어머니는 이미 숨져있었다.     애절은 울면서 아버지 무덤옆에다 어머니를 모시고 시묘살이를 했다. 그 소문을 전해들은 최의원은 석달뒤 너무나도 불쌍한 애절을 집으로 데려왔다.     “문자는 아느냐?”     “예, 어머니께 좀 배워서 눈을 떴습니다...”     최의원은 애절에게 약방의 심부름을 맡기고 수양딸처럼 키웠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워낙 뛰여난 애절은 천부적인 리해력, 암기력, 표현력이 있었다. 최의원이 소유한 여러 서적을 다 읽고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달았다.     동네잔치에서 보고 들은 노래며 춤사위도 놓치지 않고 모두 데꺽 배워냈다. 최의원이 사람을 시켜 가야금을 가르쳤더니 이내 가르친 사람을 릉가하였다.     가난한 집에서 자주 배를 곯으며 살다가 유족한 최의원의 집에 와서 인젠 음식도 잘 챙겨먹으니 그 용모가 푸른 련못에 활짝 핀 한송이 련꽃 같았다.     열다섯살이 되자 계례를 올릴 나이였다. 여기저기서 혼사도 들어왔다. 하지만 애절은 부모의 묘가 걱정되였다. 아무리 산소라도 오로지 부모님 옆에 가보고싶은 생각뿐이였다.     “그동안 잘 키워주셔서 그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요!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애절이 간절하게 청구했다. 하지만 그 결심은 단호했다. 최의원은 더 이상 붙잡을수 없음을 느끼고 약간의 재물을 주며 눈물로 보내주었다.     “힘이 들면 언제든지 돌아오너라...”     애절은 다시 한번 엎드려서 큰절을 올렸다...      고향 홍원으로 돌아온 애절은 비바람에 씻긴 부모의 묘소를 다시 살피고 텅ㅡ 빈 옛집의 거미줄을 걷어냈다.     그러던 어느날, 오래전에 애절이네와 이웃으로 살았던 홍원 관아의 로기(老妓)가 문득 찾아왔다.    “자네가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네. 지금 관기를 뽑고있는데 특히 의녀(醫女)와 녀악(女樂)이 필요하다네..."     시가와 춤, 가야금에 능하고 최의원 집에서 의술까지 익혔으니 애절이야말로 홍원 관아에서 꼭 필요한 가장 리상적인 적임자였다.     여러날을 고민하며 심사숙고하던 끝에 애절은 끝끝내 결단을 내렸다. 즉 그 늙은 기생의 말을 따르기로 한것이다.      어린 나이에 의지가지할데도 없고 혈혈단신으로 세상천지 허허벌판에 홀로 남았느니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여 차라리 홍원관아의 기적에 스스로 이름을 올리고 어릴적 쓰던 애절이라는 애명대신 홍랑(?娘)이라는 기명(妓名)을 얻었다.     홍원 관아에 들어간 홍랑은 그 자색이 참새무리속의 공작새라고 할수 있을만큼 가장 절색의 미모였지만, 그 문학적 소양과 재주도 어느덧 그 어느 량반사대부나 유명한 시인묵객들에게도 조금도 뒤지지 않을만큼 뛰여나게 자라났다.      더우기 절개가 굳었다. 일부종사를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기생의 몸이였지만, 홍랑은 오로지 언젠가 깨끗한 자신의 정절을 바쳐 뜨겁게 사랑할만한 한 남자와의 운명적 만남만을 기다리면서 그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로 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녀의 미색에 침을 질질 흘리는 량반들의 유혹과 수작들도 점점 도를 더해갔으나 홍랑은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홍랑과 재사 최경창의 운명적 만남과 리별       홍랑이 사랑했던 련인 최경창(崔慶昌, 1539~1583년)은 자가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며 조선 선조때의 시인으로서 당대 대문호였던 송강 정철과 교류하면서 조선중기 "8대문장", "삼당시인"으로 불리웠던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률곡 리이는 고죽 최경창의 시를 가리켜 '청신준일'하다고까지 높이 평가할 정도였다.      그들의 눈물겨운 사랑에 대한 일화는 조선시대 기생들의 이야기를 담고있는 "조선해어화사"에도 꽤 상세히 소개되여있다. 그리고 두사람의 행로를 추적할수 있는 기록은 고죽 최경창이 써놓은 서첩의 서문에도 있다.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재사 최경창은 과거급제후 서울에서 천리가 훨씬 넘는 함경북도 경성에 북평사로 부임하게 된다.      1573년 가을, 고죽 최경창이 경성으로 가던 도중 홍원 관아에 들리자 고을 사또가 새로 부임하는 그를 위해 취우정(翠羽亭)에서 연회를 마련했다. 그곳에서 당시 35세인 고죽은 16세의 홍랑과 운명적 만남을 한다.      연회에서 사또가 특별히 배치했는지 천하절색의 예기(藝妓)인 홍랑이 옆에 앉아 최경창에게 술을 자주 따라올렸는데 고죽은 첫눈에 그녀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권커니 작커니 술이 몇순배 오가고 주흥이 무르익자 좌중의 요청에 의해 홍랑이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한수 읊었는데 그것이 면바로 고죽의 시였다.       물론 옆에 모시고 앉은 사람이 그 시의 작자이고 자기가 가장 흠모하는 대문장가인 고죽인줄을 전혀 모르고 읊은것이다.      그 시를 들은 최경창이 홍랑이힌테 물었다.      "요즈음 누구의 시를 제일 좋아하느냐?"      “저는 고죽의 '채련곡'과 '궁원'을 가장 좋아합니다.”      홍랑이 조금도 망설임없이 선뜻 대답하자 사또가 허허 웃으며 그녀의 옆에 앉아계시는 이분이 바로 그 유명한 고죽이라고 알려주었다.      홍랑은 금시 두눈이 휘둥그래지며 황송해서 어쩔바를 몰라한다.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될 정도로 너무 큰 영광이고 뜻밖의 행운이였다.      당시 시와 풍류를 잘 아는 재사 최경창과 뛰여난 미모에 시적 재질을 모두 겸비한 명기 홍랑의 만남은 붙는 불우에 장작얹기였다. 정신적인 교감이 너무나 잘 통하는 그들은 만나자마자 첫눈에 서로 반하며 인차 깊이 열렬한 사랑에 빠지고 만다.      두사람의 농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더욱 깊어져 결국 홍랑은 군사임무를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최경창과 함께 기거하며 부부처럼 매일 정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사대부가의 관리와 기생의 사랑은 원래 바람같은것이다. 얼마 안가 고죽은 임기를 마치고 인차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만나자마자 한눈에 서로 반하고 그동안 미칠듯이 죽을듯이 사랑해왔는데 그렇게 깊이 정이 들자 곧 리별이다. 너무도 야속스러워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것만 같있다.      눈물로 온밤을 지새운 홍랑은 떠나는 고죽을 따라 며칠간 함께 걸어 배웅하게 되는데 함관령까지 갔을 때 날은 어둡고 비가 내리자 홍랑은 련인이 돌아가는 길이 심히 걱정스럽기도 하고 또 마음을 흔드는 그 정분을 도무지 참기 어렸웠다.      그때 그녀의 눈에 띄는것이 있었으니 바로 길옆에 아무렇게나 흐드러지게 피여있는 산버들이였다. 울음을 삼키면서 다가간 홍랑은 그 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주면서 구슬프게 본문의 첫대목에 나오는 시조 "묏버들가"를 읊는다.     <<산버들 가지를 꺽어서 리별하는 님의 손에 쥐여서 보내드리는데, 부디 님이 자시는 창밖에다 꼭 심어두고 보시라! 그러다가 내리는 밤비에 그 가지에 새잎이 돋아나오거든 초췌한 나를 보는듯이 여겨달라>>는 애절한 리별의 부탁이 담긴 홍랑의 이 시조는 가히 시조의 백미이고 천고의 절창이라고 일컬을만 하다.     버드나무는 리별을 상징하는 나무로서 그 가지를 꺽어서 마르지 않게 잘 간직했다가 언제든 축축한 땅속에 꾹 박아 심으면 인차 싹을 틔우는것이 특징인데, 다시 만날것을 기약하는 정표로도 많이 사용된다.      이 시조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홍랑의 작품들가운데서 유일한 시조작품이기도 하다.  
 
                                         목숨건 사랑은 파직과 추방을 부르고      서울로 돌아온 최경창은 날마다 두고온 홍랑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몸살을 않는다.           깊은 어둠 그 사이로 은은한 새벽빛          야밤 5경 꿈속에서 료양에 도착했네         외로운 꾀꼬리 내 시름을 거둬가고          가여운 이슬비가 해당화를 적시네.      날로 사무치게 더해가는 그 그리움과 상사병으로 최경창은 끝내 크게 몸져눕게 된다.      이 소식을 접한 홍랑은 즉시 눈물범벅이 되여 무작정 혼자 짐을 꾸려가지고 일주일 밤낮을 달려 최경창이 있는 한양에 도착한다. 뜻밖에 먼곳에서 꿈속같이 절로 찾아온 홍랑이 조석으로 지극정성 살뜰히 간호해준 덕분에 거의 다 죽어가던 최경창의 병은 기적같이 씻은듯이 낫는다.     그런데 이런 두사람의 뜨거운 사랑의 소문이 조정에 들어가자 금시 시끌벅쩍한 뒤공론으로 번지면서 크게 말밥과 구설수에 오르게 되고 결국 최경창은 이 일로 인해 파직을 당한다.     때는 바로 명종비의 죽음으로 온 나라가 비통에 잠긴 국상기간, 더우기 조정이 동서인으로 치렬하게 나뉘여져 당파분쟁이 엄청 심하였던 시절이라 이들의 감동적인 사랑행각이 오히려 반대피들의 집중적인 공격과 비방, 중상의 과녁으로 그만 희생제물이 되고만것이다. 뿐더러 또한 당시는 법적으로 지방과 지방(특히 함경도)의 경계를 나라의 특별한 허락이 없이는 절대로 함부로 제마음대로 넘나들지 못하게 되여있던 그런 시대였다.     나라의 법을 어겼으니 지엄한 국법에 따라 그 장본인들에게 싱응한 처벌이 내려지기 마련이다. 최경창의 파면은 물론 홍랑도 즉시 다시 원래 살던 함경도지방으로 강제추방되고 만다.      억지로 헤여지는 홍랑에게 최경창은 피눈물로 석별의 시 한수를 적어준다.                        송별 (送别)/고죽          玉頰雙啼出鳳城, 曉鶯千?爲離情;         羅衫寶馬河關外, 草色??送獨行.         고운 뺨에 눈물 얼룩 한양을 나오는데          리별이 쓰라려서 꾀꼬리도 우는구나          말에 태워 강건너 정처없이 넘는 길          홀로 가는 그 길에 풀빛만이 아득해라!      고죽이 주는 슬픈 시를 받아든 홍랑도 즉석에서 "최고죽에게(寄崔孤竹)"라는 시를 써서 화답한다.                    최고죽에게 (寄崔孤竹) / 홍랑           相看脈脈贈幽蘭, 此去天涯幾日還;         莫唱咸關舊時曲, 至今雲雨暗靑山.         물끄러미 마주보다 고운 란초 주노라         이제 하늘끝으로 떠나가면 언제 볼가         함관의 옛노래는 부르지 마소서          지금도 구름비에 청산이 어둡나니...      이토록 그들은 서로 죽을듯이 사랑헸지만 이승에서의 그들의 사랑은 신분의 격차와 "량계의 금(兩界之禁,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출입을 금지하는 제도)"령 법규정에 의해 도무지 이어나갈수 없었다.   
 
 
                                          죽음으로 인한 영별, 그후 홍랑의 행적      홍랑의 일로 파직당한 뒤, 최경창은 평생을 변방의 한직으로 떠돈다.      그러다가 1582년, 고죽은 홍랑이를 만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여 종3품의 벼슬인 종성부사로 특별제수되여 함경도로 찾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얼마안가 동인들의 끝없는 모함으로 또 성균관 직강으로 강등되여 1583년(선조 9년) 3월, 부득불 한양으로 돌아오던도중 최경창은 경성 객관에서 자객에 의해 45세의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아무리 힘들어도 언젠가 사랑하는 님과의 다시 만날 그날만을 손꼽아 꿈꾸면서 살아가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부음은 그녀를 몸조차 가눌수 없을 정도의 큰 슬픔속으로 몰아넣었다.     몇번이고 까무러쳤다 간신히 깨여난 홍랑은 자기도 뒤따라 죽으려다가 문득 객사를 당했으니 그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없을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죽을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 즉시 최경창의 무덤으로 찾아가서 그 옆에 움막집을 짓고 석삼년간 시묘살이를 시작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자색이 뛰여난 아녀자가 혼자서 시묘살이를 한다는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아무리 세수도 목욕도 하지 않고 일부러 더럽고 초췌한 행색으로 막 살아가지만 절세가인 미모의 원 바탕을 감출수가 없었던 홍랑은 원근 남자들이 자꾸 집적거리고 겁탈하려고 들자 스스로 크고 검은 숫덩어리를 한입에 삼켜 벙어리가 되고 또 칼로 자기의 고운 얼굴을 자해하여 몹시 추하게 만든다음 마침내 시묘살이 그 기한을 끝마친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터져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그녀는 다시 마음을 굳게 다잡고 자기가 갖고있는 최경창의 시작품을 잘 보존하고 후세에 길이 전하게 하기 위하여 그 원고들을 소중히 가슴에 품고 정처없는 류랑의 길을 떠난다.     드디여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난 해의 그 이듬해(1599년), 홍랑은 간고하게 해주 최씨가문 문중을 찾아 그동안 자신이 목숨으로 지켜온 최경창의 시원고들을 완전히 맡긴다음 만시름을 놓고 다시 최경창의 무덤을 찾아가서 자결하여 그 무덤우에 쓰러져 죽는다.     홍랑이 죽고난뒤 그녀의 의리와 절개, 지성에 깊이 감동된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한집안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정식 대우하여 해마다 최경창의 제사를 지낼 때 그녀도 함께 더불어 정중히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씨 문중의 선산에 있는 최경창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쪽에 홍랑의 무덤도 하나 만들어주었는데 묘비에는 '"시인 홍랑의 묘(詩人洪娘之墓)"라고 쓰여져있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홍랑을 할머니라 부르며 해마다 성대하게 그녀를 기념하고 기리는 추모제를 지낸다고 한다.     현재 홍랑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율하리에 있으며 그곳에서 전생에 목숨결고 사랑했던 련인 최경창과 함께 영원히 고요히 잠들어있다.      홍랑과 고죽의 사랑이야기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 시대의 신분과 법, 심지어는 죽음과도 타협하지 않았던 홍랑과 고죽 최경창의 세기적 사랑의 배경에는 시대적 조류를 넘어 인간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봤던 새로운 눈이 있었기에 가능한것이 아니였을가?     시대적인 제약이 많았던 조선시대에서 모든 신분과 지위의 격차를 뛰여넘어 서로에게 사랑과 존중과 신뢰로 최선을 다했던 두사람!!! 고죽은 그때문에 사대부로서 권력과 명예는 다소 뒤쳐졌더라도 무엇보다도 소중한 홍랑의 사랑과 시를 얻었으니 인생사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후세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홍랑의 후손을 찾다

     뒤늦은 발견이지만, 조선중기의 학자 남학명(南學鳴, 1654~?)의 문집 <<회은집>>에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이야기를 비교적 소상히 적고있는데 그 <<회은집>>에 따르면 그들 사이에 "유일자(有一子)", 즉 아들 한명을 두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게 사실일가? 그럼 그는 누구일가?? 그후에는 또 어떻게 되였을가...??? )     그것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취재진의 끝질긴 추적결과 끝끝내 해주 최씨가문의 아주아주 오래된 낡은 족보에서 최경창의 서자 최즙의 이름을 찾아낼수 있었다.      그리고 그 최즙의 피줄이 갈래갈래로 내리뻗어간 자손들의 흔적도 력력히 확인할수 있었다.      참으로 경이로운 발견이였다!     그 후손은 현재까지도 계속 꾸준히 그 피줄을 이어내려오고 있고 또 계속 이어내려갈것이다.      서른다섯살의 재사 최경창이 숙명적으로 열여섯살의 절세미모의 재녀 홍랑을 만나 서로 깊은 정을 주고 받으며 함께 사랑한것은 불과 6개월남짓밖에 안되는 아주 짧은 연분이였지만, 그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는 400여년의 유구한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식지 않고 그 후대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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