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재중동포시인 홍용암의 시집 <<다리를 놓자>>를 읽고

 

     조선에서 출판된 통일시집 <<다리를 놓자>>
     아름다운 인간이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한다. 

    특히 시는 인간의 심리정서에 깊이 침투하여 그의 내면세계를 직접 표현하고있는것으로 하여 인간의 정신미를 가장 생동하게 펼쳐보여준다. 이로부터 시문학의 서정세계가 아름답고 숭고하다고 할 때 서정적주인공 -- 시인의 정신미를 론하게 되는것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사회적존재인 인간에게 있어서 자주성이 생명인것만큼 그것을 위하여 살며 투쟁하는 자주적인 인간의 생활보다 더 아름다운것은 없다.>>     자주성은 인간의 생명이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주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인간의 지향과 요구는 그로 하여금 자주성을 억압하는 모든 요인과 맞서 운명개척의 힘겨운 투쟁을 벌리게 하며 그 과정에 체험하게 되는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의 세계를 예술적형상으로 구현할 때 진실로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할수 있는것이다.     자주성을 위하여 투쟁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성공의 기쁨, 사랑의 열정도 아름답지만 실패의 고뇌, 증오의 서리발도 아름답다. 높은 지성, 세련된 기교도 아름답지만 천진한 동심, 순결한 소박성도 아름답다. 완성도 아름답지만 완성을 지향하여 전진하는 기상은 더 아름다운것이다. 그래서 세계에 이름난 어느 한 시인은 인간의 미, 인간의 행복을 <<요구의 만족에서만이 아니고, 물론 그 반대의 불만족에서도 아니며 오직 만족과 불만족 사이를 뚫고 전진하는 꾸준하고 줄기찬 탐구의 정신>>에서 찾았던것이다.     그렇다면 아직은 소년기라고 할수 있는 14살의 어린 시기로부터 시작하여 청춘시절의 문어구에 첫발을 들여놓은 22살의 애젊은 시기에 창작된 재중동포 홍용암의 시작품들에서 우리가 찾아보게 되는 매혹적인 미의 세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것인가?     그의 시의 매력은 한마디로 말하여 자주적인 삶을 지향하는 인간의 때묻지 않은 순결성이다. 특히 백의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민족의 운명과 자기의 운명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민족과 함께 울고 웃으며 운명을 같이하려는 깨끗한 민족적량심의 분출이다.     그것은 아직 소년기의 순박성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예술적으로도 미숙한 점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순박성, 바로 그 순결성으로 하여 더없이 아름다운것이다.                  1. 고독을 이기고 ≪큰 사랑≫의 대하에로  
     앞표지의 꺽은 안페지에 써넣은 편집부 말
    고독은 슬픔의 저수지이다. 그것은 사회에서 존엄있고 값높은 삶을 누리려는 인간의 자주적지향과는 인연이 없다.     홍용암동포의 시편들을 일괄해보면 개인적인 상실의 세계에서 부득이하게 마주치게 된 그 가혹한 고독의 슬픔속에서 과감히 일떠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큰 사랑>>의 대하에 합류하여 개인적고독감을 이겨낸 운명적인 모대김을 감수할수 있다.     이 시집에 실려있지 않은 그의 일부 시작품들에서는 어느 평자들이 지적한것처럼 <<상실에 의한 고독의 정감세계>>가 진하게 드러나있다. 극심한 가난으로 하여 대학공부를 중도반단하고 생존을 위한 투쟁마당에 뛰여들지 않을수 없었던 나어린 시인에게 있어서 구원의 손길을 잃어버린 형언할수 없는 고독감과 하염없는 설음의 정서는 필연적인것이였다.               시골마을 한 초가에서              민들레꽃 사랑했던 소년              동구밖 상사나무 아래서              민들레꽃이 되였다네              하염없이 맑은 하늘 바라고 서서              노오랗게 그리움에 불타다가              마침내 두둥실              하얀 민들레씨로 날아올라              정처없이 떠도는 한송이              흰구름이 되였다는 슬픈 이야기...     이것이 그의 시집 <<흰구름이 된 이야기>>의 서시이다.     소년시절 그의 유일한 <<련인>>이였던 시와도 결별하고 경제적자립을 위한 쓰라린 방랑의 길을 걸어야만 했을 때 <<가실 길 없는 쓰라림에/ 종이쪼박처럼 마음이 산산이 찢기던 날/ 고독이 찾아와서 친구로 사귀였습니다// 고독은 우는 나를/ 구태여 애써 달래느라고도 하지 않고/ 말없이 한켠에 조용히 서서/ 저 혼자 실컷 울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라고 노래한 그의 시 <<고독>>의 한구절처럼 그는 어느덧 고독을 사랑하게 되고 고독과 떨어질수 없는 <<막연하고 절친한 사이>>로 되였던것이다.     이 고독속에서 그가 쓴 시집 <<려행자>>의 시편들을 읽어보면 우리 가슴은 어두운 돌무덤속에 갇히운듯 쓰라린 감회에 잠겨든다.     그속에는 <<가장 두터운 얼음층도/ 녹아버릴 날 있듯이/ 가장 뜨거운 활화산도/ 식어버릴 때가 있을가요...>>라고 웨치며 <<당신과 나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두고/ 나는 이제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써야겠습니다...>>라고 눈물짓는 절망의 하소연도 있고 <<불러도 애달파해도 소용없는 하늘아래/ 사무치는 애환과 회한의 피눈물을/ 세차게 쭈룩쭈룩 비줄기로 쏟다/ 또다시 표연히 둥둥 떠가는 흰구름>>의 슬픈 노래도 있다.      만일 그의 시정신이 단순히 <<고독은 나의 영원한 그리움>>이라는 이 개인적세계의 모대김속에만 묻혀버렸다면 오늘 그토록 매혹적인 모습으로 우리앞에 나타난 시인 홍용암은 없었을것이다.     그의 고독의 정감세계에는 누가 그러한것처럼 싸르뜨르의 실존적극한상황론이나 바흐친의 형식주의미학, 지어는 프로이드주의미학의 방법론으로는 해석할수 없는 새로운 점이 있었다. 시인은 고독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정면으로 묵시하면서 한낱 슬픔에만 잠겨있지 않았다.     그는 고독속에서도 아름답고 억센 삶의 길을 모색하였으며 모진 시련에 꺽이지 않고 어지러운 세파에 오염되지 않은 굳세고 깨끗한 시혼을 간직하였다.     <<해외동포들을 노래함>>이란 부제를 단 시 <<이끼>>에는 이런 의미심장한 상징적시상이 그려지고있다.             작은 들을 한벌 덮은 잔디불같이            흙도 물도 없는 천년굳은 바위우에            이끼는 파아랗게 돋아나있다             비록 꽃 한송이 못피웠을망정            여기도 하나의 생명이 살고있다            눈물겨운 강생을 목메여 웨치며            바위를 태우는 푸르름으로            이끼는 세차게 활활활 불붙고있다...     그는 조국의 품을 멀리 떠난 해외동포들의 모습을 <<흙도 물도 없는 천년굳은 바위>>우에 파아랗게 돋아난 이끼의 형상에 담고있다. 비록 꽃 한송이 못피웠을망정 <<바위를 태우는 푸르름>>으로 활활활 불붙고있는 이끼의 목메인 웨침이 가슴치며 들려오는상싶은 이 시적형상에는 비록 고독속에 잠겨있어도 억세게 참된 삶을 아름답게 개척하려는 의지와 기상이 체현되여있다.     그가 쓴 다른 한 시에서는 <<행복하게 못살더라도 아름답게 살 의무>>가 있고 <<슬픈 삶을 아프게 살더라도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고 노래하였는데 이속에는 이국땅에서 겪고있는 험난한 세월의 풍파속에서도 헛된 삶을 살지 않으려는 고귀한 신념과 의지가 깃들어있는것이다.     사랑만이 고독을 이긴다. 사랑을 잃은 고독의 공간은 다른 사랑만이 메울수 있다. 그러되 그것은 더 큰 사랑이여야 한다.     자주적인간은 본성에 있어서 사랑없이는 살수 없는 사회적존재이다. 인간은 사랑으로 자기이외의 대상과 운명적인 결합을 실현함으로써 배가의 힘을 안고 억세게 존재할수 있는것이다.     일부 평자들이 홍용암의 시를 두고 실존의 세계에서 극한상태에 놓인 인간의 고독과 쓸쓸한 나그네의 <<한>>의 넉두리라고 평한바도 있지만 사실 홍용암시인에게 있어서 그런 해석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가장 고달픈 인생의 고비에서도 자기의 운명을 개인적자아의 세계안에서 고찰하지 않았으며 자기 조국, 자기 민족에 대한 더 큰 사랑의 세계에서 자기 삶의 좌표를 찾으려고 고심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그리움>>, 그의 <<기다림>>의 정감세계는 자기 조국, 자기 민족의 운명에 대한 깊은 사색과 잇닿아있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일찌기 고독의 세계에서 체험했던 그 슬픔을 더 큰 사랑의 번뇌로 승화시키며 마침내 그 고독도, 슬픔도 이겨나가려 하였던것이다.     그의 시 <<고백>>은 조국(고국)에 바친 고귀한 사랑의 송가중의 하나이다.              아버지라 부르리까             어머니라 부르리까             님이라고 부르리까              그대에게 향한             이 가슴에 차고 넘치는 참사랑             무엇이라 불러야 하리까              무엇이라 불러야             그 사랑 그 사랑을             제대로 다 표달할수 있으리까              아버지에 대한 거룩한 사랑             어머님에 대한 끝없는 사랑             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 --              누에가 한오리 실밥을 다 토하듯             초불이 마지막 심지를 다 태우듯             그렇게 내 사랑 그대에 주리다              그렇게 한평생             아낌없이 깡그리 바치오다가             그대 발밑에 쓰러져 죽으리다!                    ㅡ 시 <<고백>> 전문   바로 이 <<참사랑>>, 아버지나 어머니, 님에게 향한 그렇듯 거룩하고 끝없고 열렬한 사랑의 열정을 다 합친것보다 더 크고 더 열렬한 조국사랑의 세계에서 그는 고독을 이기고 슬픔을 이길 힘의 기둥을 찾았던것이다.     가장 괴롭고 힘겨운 시각이면 그는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며 목메여 울었다. 그리워도 갈수 없는 정든 고향과 품에 안을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을 두고 가슴밑창을 긁어내리던 애환의 정서는 이 모든 비극의 요인을 조국과 민족의 수난사에서 찾으며 더 큰 의분에로 승화된다.     이 계기에서 그의 시상의 중심을 차지하고있는 어머니와 <<흰구름>>의 모습은 곧 조국의 모습으로, 그 조국을 못잊어하는 그리움의 상징으로 환원된다.             나는 한쪼각 흰구름            오고 돌아가지 못하는 한쪼각 흰구름            산산히 흩어진 한쪼각 흰구름            회오리선풍에 휘말려 오락가락            낯설은 이역만리 타향에서 떠돌다            눈 못감고 승천한 흰옷의 원혼들이            정든 고국 못잊어 죽어서 찾아가는            나는 한쪼각 흰구름             … …             나는 한쪼각 흰구름            어제도 오늘도 한쪼각 흰구름            정처없이 떠도는 한쪼각 흰구름            세월따라 바람따라 하염없이 표류해도            어데 간들 잊으랴 어머니 고국산천            부모형제 그리여 흘린 피눈물            비되여 쭈룩쭈룩 온대지에 휘뿌리는            나는 정녕 한쪼각 흰구름 ㅡ                   ㅡ 시 <<나는 한쪼각 흰구름>> 일부     바로 여기에 그의 고독, 그의 슬픔의 미학이 깃든 아름다움이 있다.     개인적상실의 세계에서 그는 고독하였고 슬펐다. 만일 그것이 단순히 거기에 머물렀다면 그것은 인생포기의 절망적인 한숨과 비관의 황혼에 묻혀 빛을 잃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수난을 조국의 품을 떠난 해외동포 모두의 수난과 결부시켰으며 자기의 눈물도 한도 조국에 대한 사랑의 분출로 전환시키였다. 이리하여 그가 자기 시들에서 깨끗하고 순결하게, 억세고 아름답게 살려는 신념과 의지를 노래했을 때 그것은 실존적인간의 고독한 몸부림이 아니라 조국에 대한 생각으로 작은 가슴을 불태우는 고결한 인간의 숭고한 고뇌로 안겨오는것이다.     시인에게 조국은 때로 첫사랑 ㅡ 님의 모습으로도 표상된다. 시인 자신이 <<님인 조국에 쓰는 사모의 편지.>>라고 주해를 단 시 <<련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쓰고 쓰고 또 써도 죽을 때까지            끝끝내 다 쓰지 못하는 까닭은             세월이 짧은 애매한 그 탓도 아니요            아직도 님에게 못다한 참사랑이            샘솟듯 영원히 남아있는 까닭이라            나는 정말 더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만약 나만한 봉투가 있다면            그리움을 깨알같이 적은 속지대신            아예 나를 송두리채 넣어서            그대로 님한테 부쳐보내드리겠습니다            나만한 편지봉투가 있다면...     천장을 써도 만장을 써도 가슴에 차고넘치는 그리움을 도무지 다 담을수 없는 조국에 대한 사랑의 <<련서>>, <<쓸수록 자꾸 더 길어만 지는 애모쁜 그 사연>>을 사춘기 풋사랑에 눈을 떠서부터 쓰기 시작하였으나 아직 그 끝을 채 못맺은채 늙어 백발아바이가 된다는 랑만적형상도 절절하지만 만약 나만한 편지봉투가 있다면 그리움을 깨알같이 적은 속지대신 아예 나를 송두리채 넣어서 그대로 님한테 부쳐보내겠다는 대담한 표현도 이채롭다.     이 시에 넘치는 시적기백은 이제 그의 온몸이 송두리채 조국 ㅡ <<님>>에 대한 사랑의 덩어리라는 의미심장한 시적환상속에 체현되여있다. 드디여 시인은 개인의 세계를 완전히 초월하여 조국과 민족에 자기 생명을 합침으로써 <<순수한>> 인생철학이나 푸른 <<순수시>>의 령역을 벗어나 조국사랑에 울고 웃는 애국시인으로 솟구치는것이다.     하기에 그의 모든 그리움, 모든 슬픔의 정서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 조국을 떠난 슬픔으로 풀이되며 이로써 진정한 미의 세계에 오를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 그의 고독, 그의 슬픔의 정서와 함께 그의 그리움, 그의 기다림의 정서에 깃든 생활철학의 미를 밝혀낼 단서도 맺혀있는것이다.     자주성을 위한 인간의 투쟁속에는 때로 극복하기 어려운 고독과 번뇌의 순간도 있기마련이다. 더우기 조국을 멀리 떠난 이국살이의 현실속에서 자기 홀로 인생표류의 길을 걸어야 했던 애젊은 소년에게 있어서 이러한 심경은 리해될수 있다. 문제는 그것에 포로된것이 아니고 숙명에 복종한것도 아니며 그것을 맞받아 완강히 자기를 지키고 자기를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슬기롭고 억센 정신에 있다.     힘겨운 생활의 <<나그네>>의 길에서 그의 생명의 <<초불>>, 그를 <<부르는 소리>>는 과연 무엇이였던가?     그의 시 <<초불>>에 그려진 <<어두운 밤이면 밤마다 조용히 켜지는 초불>>, <<그 한몸엔 오로지 그리움만 그득차/ 생의 첫시작부터 림종의 마지막순간까지/ 다함없는 그리움에 불타며 방울방울 눈물짓는/ 생명의 초불>>에 대한 시상은 실로 의미심장한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고독의 순간이면 찾아오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식한다. 고독을 이기고 조국의 아들, 겨레의 한 성원으로서 운명을 같이하고저 하는 몸부림으로 간주한다.              그리움에 깊이 타들수록             그만큼 그 가냘픈 생명이 줄어드는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래도 하염없이 그리움에 불붙는 불붙는             한없이 아픈 초불 하나가 내게 있습니다              외로운 이 심령의 그늘을 비춰주고             서러운 나에게 희미한 위안과             끝없는 명상을 안겨주는             영원히 꺼질줄 모르는 그런 소중한 초불 하나가             내 마음에 있습니다...   시인에게 이 초불이 그토록 소중한것은 <<희미한 위안과 끝없는 명상을 안겨주는>>데 있다.     아직은 조국을 다 알수 없었던 소년에게 있어서 <<희미한>>것이였지만 그래도 그것은 마음속에 <<영원히 꺼질줄 모르는>>, <<생명의 초불>>이 되여 쉬임없이 불붙고 또 불붙고있었으니 <<아픈 초불>>이지만 <<소중한 초불>>로 간직한 이 눈물겨운 조국사랑, 기대와 희망과 자기 희생의 철학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고독의 순간이면 그는 그 조국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앞을 보니 없고 옆을 봐도 없고/ 돌아서면 틀림없이 보일것 같아/ 두리번 찾아도 행적없는...//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결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자꾸만 쟁쟁 들려오는 그 소리 -- >>     그것은 그가 고독한 청춘표류의 나그네 길에서 주저앉지 않고 목적을 향해 줄기차게 나아가게 한 힘이 되고 손길이 된 지탱점이였다. 그는 자기 삶의 목적을 조국과의 만남, 겨레와의 만남에 두고 그앞에 부끄럽지 않을 생의 좌표를 찾는다는 성스러운 자각으로 불탔다. 그의 온 삶, 그의 유감없는 죽음의 의미는 이렇게 노래된다.             만나고싶은 사람 하나 있습니다            가고싶은 곳이 하나 있습니다            맞고싶은 날이 하나 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삽니다            그곳에 가보기 위해 삽니다            그날을 맞기 위해 삽니다             그 사람을 다 만나면 죽습니다            그곳에 다 가보면 죽습니다            그날을 다 맞으면 죽습니다             그래 까짓 아무렴 곧 죽어야지            볼일 다 보고 갈 때가 되여 내가 갈적엔            서럽지도 않을 저녁노을 하나 질텐데...             그렇게 아름답게 ㅡ             두눈감고 유감없이 드디여 가야지...                 ㅡ 시 <<삽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전문     사람에 따라 이 시의 의미를 순수 인생철학의 뜻으로 풀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시의 상징적의미를 풀어 이렇게 주를 달고있다. <<만나고싶은 사람 ㅡ 흩어진 리산가족, 가고싶은 곳 ㅡ 고국, 맞고싶은 날 ㅡ 통일의 날.>>     긴 해석이 필요없이 삶과 죽음에 대한 이 철학적사색의 초점에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그의 참된 삶의 전부이고 그에 충실하는것이 그의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민족의식이 놓여있는것이다.     그는 다른 시 <<리유>>에서 이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자기가 스물두해 석달이란 세월을 <<여태껏 살아온 리유>>, <<지금도 살아가는 리유>>, <<후날까지 살아야 하는 리유>>를 노래하였다. 지금은 비록 쓸쓸한 오늘이지만 그 모든것을 이기고 래일까지 <<반드시 살아야 하고 견디여야 하는/ 그런 리유 하나>>가 있다고 하였을 때 그 리유를 꼭 찍어 밝히지 않았기에 그 불확정의 공간속에서 각이하게 풀이될수 있는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시인자신이 바로 이 리유를 <<어느날엔가는 꼭 헤여진 가족을 만나보고 조국에 찾아가보며 반드시 통일의 날을 보고야마는것이 바로 여태껏 그리고 지금도 또 장차 내가 아프게 살아왔고 살아가며 살아가야 하는 유일한 <리유>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 단 한가지 <<유일한 리유>>때문에, 이 리유를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가치로 삼은 그것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를 <<상실에 의한 고독>>의 시인으로 부르는것을 반대한다. 그는 개인적인 많은것을 상실하였다. 그는 이국땅에서 생존의 자립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고독하였다. 그러나 그 엄청난 상실의 공간, 그 가슴 미여지는 고독의 공간을 그는 더 큰 사랑, 더 큰 보람으로 메웠다.     그에게 <<두고온 대물림보배>>가 있었으니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두고온 그 대물림보배가 무엇인가고 물었을 때 할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크기는 이십이만이천평방키로메터            무게는 그걸 뜰만한 큰 저울이 없어            떠보지 못했지!            하지만 얘야, 기억해두어라            그것이 우리 가문 대물림보배란다...                  ㅡ 시 <<두고온 대물림보배>>     그렇다. 이제는 알수 있다.     가난속에서도 그는 가난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도무지 한 지게에다 질수 없는 크고 소중한 <<대물림보배>>가 있었기때문이다. 고독속에서도 그는 고독하지 않았다. 그는 고국과 함께 있었기때문이다. 그 고국과 그 겨레와 그 통일의 날과 기어이 만나려는, 그리고 유감없이 죽으려는 아름다운 희망이 있었다.     마침내 그는 고독을 이기고 고달픈 삶의 중하를 이겨낼 <<생명의 초불>>을 찾은것이다. 큰 사랑이 그를 구원하였다.   
    조선 평양출판사에서 출판된 시집 <<다리를 놓자>>에 실린 평론
                   2. <<한>>속에 비낀 소망과 분노      <<큰 사랑>>과 함께 조국과 생명을 합치였기에 조국이 겪는 수난과 아픔은 서정적주인공 ㅡ 시인의 가슴에 <<한>>의 상처를 남긴다. 설사 그것이 지리적공간과 세대적시간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것일지라도 그 상처에서는 눈물로도 씻을수 없는 피가 흐른다. 그것은 아무리 아픈것이라 해도 고결한것이며 고결하기에 그것은 아름다운것이다.     홍용암의 시에서 분렬된 조국을 두고, 갈라진 겨레를 두고 사무치게 터져나오는 <<한>>의 정서는 시집의 전반에 눈물의 강이 되여 흘러넘친다. 그에게서 상실의 아픔이란 곧 민족의 자주권이 유린당한 력사의 갈피갈피에 자기 삶의 뿌리를 묻은 리향민의 눈물이며 허리 끊어진 고국의 수난이 이국에까지 미치여 자유를 구속당한 갈라진 민족의 설음이다.     조국과 겨레를 끝없이 사랑했기에 수난당한 고국을 생각할 때 그것은 우선 눈물이였다.      두만강에 부치는 그의 많은 시편들에서 그것이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그가 두만강반에서 지은 적지 않은 시들은 <<눈물젖은 두만강>>의 선률과 잇닿아있다.              강아             너를 보러 너를 찾아 내가 왔다             못박힌듯 묵묵히 네 기슭에 섰다              설음의 강 ㅡ 두만강!             너를 한번 건너오기는 쉬워도             다시 건느기는 쉽지 않았더라              너 도도히 감도는 물결이여             너는 예나제나 다름없으련만             묻노니, 오늘따라             무슨 한많은 설음 실었느냐...?!                    ㅡ 시 <<두만강>>중에서     민족수난의 력사가 비낀 두만강반에사 서정적주인공의 심중에 어리는것은 그 거울에 비친 흰옷입은 서러운 나그네의 형상이였다. 쪽박 차고 막대 짚고 지게 지고... <<금이 간 쪽박안엔 겨떡 하나/ 휘여든 막대엔 휘친휘친 지친 몸/ 지게우엔 배고파 우는 철부지아이>>, 그리고 <<나는 그때/ 그 배고파 울던 철부지아이/ 아들의 아들의 아들>> ㅡ 이것이 그의 시상의 중심에 자리잡고있다.     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정든 고국을 떠나 해외살이의 눈물겨운 걸음을 걸어야 했는가? 시에는 그것이 노래되여있지 않다. 그러나 이 애닲은 묵상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느꼈다. 외적에게 민족의 자주권을 빼앗겼던것이다. 하기에 시인은 다른 시 <<루만강(??江)>>에서 <<두만강>>의 이름을 눈물이 넘치는 강이란 뜻에서 <<루만강>>이라 불렀다.    <<루만강(??江)>>! 한겨레의 눈물이 가득차 흐르는 비애의 강반에서 서정적주인공이 휘뿌리는 눈물도 고국을 눈앞에 두고 가지 못하는 리향민의 설음이였다.     그 눈물속에는 민족에 대한 애끓는 사랑의 감정이 방울방울 맺혀있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덥혀준다.     물론 시인의 시야에는 광복의 그날과 더불어 이 강반에 새롭게 비끼기 시작한 자주민족의 보람찬 삶의 력사가 소외되여있다. 나아가서 광복전 이 두만강을 넘나들며 조국광복을 위한 피어린 성전을 벌린 영광의 력사도 비쳐들지 않고있다. 그것은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은 육체의 골격과 함께 사상의식도 다 여물지 못했던 소년의 몸으로 자기의 시적체험을 비록 과거에 머물렀을망정 조국의 력사와 결부시키고 개인적자아의 세계를 벗어나 민족의식의 높이에서 시상을 찾아낸 그 순결한 애국애족의 정신에 감동된다.     이 시기 그가 자기 조국, 자기 겨레를 생각할 때 그 수난, 그 비운을 먼저 생각하게 된것은 너무도 응당한 일이지만 그 수난, 그 비운에 대한 감수가 단순히 비애에 머무를것이 아니라 력사의 갈피에 얼룩져있는 눈물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밑바탕에 새 력사에 대한 강렬한 지향을 깔고 보다 전망적인 리상을 펼치지 못한것은 그의 제약성으로 된다.     그렇다고 하여 민족의 수난을 자기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불확정의 상태에서나마 그 한을 되풀이하지 않을 래일에 대한 꿈을 암시한 순결한 의도가 리해되지 않는것은 아니다.     진심에 울 때 그 눈물은 고결하고 아름다운 법이다.     시인 ㅡ 서정적주인공은 시 <<력사의 이주민족>>에서 민족의 한많은 력사를 회고하며 겨레의 아픔을 나누고있다.     <<한세기전/ 험한 상처 입고/ 혼미해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던 내가/ 어느날 문득/ 심한 동통 느끼고/ 깨여났을 때>> 그는 무엇을 알았던가?             하마트면            대동맥을 끊길번한            끔찍스런 그 상처자국에서            곪아 터져나오는            흰고름 보고             나는            혈관속에 흐르는            내 피가 워낙            하얀 피였음을            처음 알았다...     <<하얀 피>>의 상징적의미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서정적주인공은 외세에 의해 민족의 자주권이 롱락당하고 망국노의 설음을 겪어온 겨레를 부여안고 가슴아파 통곡하면서 백의민족의 혈관속에서 생명의 더운 붉은 피보다 상처입은 고통의 흰 고름을 더 많이 찾아보았던것이다. 끔찍하다. 그러나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때 서서히 달아오르는 의분이 있다. 그것은 되풀이될수 없는 암담한 력사에 대한 자각이며 흰 고름을 가시고 오직 맑고 뜨거운 생의 붉은 피만이 콸콸 넘쳐흐를 민족의 장래에 대한 갈망이며 그것을 위해 한몸 서슴없이 내댈 의지인것이다.     그는 자기의 눈물을 감추지 않는다.     <<때로는 간간히 속으로 흐느끼고/ 때로는 방울방울 눈물을 떨구고/ 때로는 꺼이꺼이 대성통곡하고/ 나는 웁니다 웁니다 웁니다...>>로 시작된 시 <<운명>>에서 시인은 자기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그 눈물을 부득히 아들에게 물려주어야겠다고, 아들은 또 그 눈물을 손자에게 물려줄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그가 과연 영원히 <<한>>의 민족, 눈물의 겨레로 남아있을것을 원했던것인가? 아니다. 눈물어린 민족수난의 <<한>>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민족이 격어야 했던 눈물의 력사를 똑똑히 알고 가슴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그럴 때 다시는 그 눈물의 력사에 살지 않으려는 민족적자각이 생기고 그 눈물에 담가 비수처럼 벼려낸 민족자주의 넋을 무기로 삼아 자주성을 위한 투쟁의 대오에 용약 뛰여들수 있는것이다.     수난의 력사에 울던 시인은 마침내 그 눈초리를 현재에 돌리기 시작한다. 오늘도 우리 민족의 피는 <<흰고름>>이다. 그 <<흰고름>>의 근원은 어디인가? 외세에 의해 동강난 분렬의 장벽이며 그 장벽에 허리 잘린 조국의 고통이다.     시인은 일제의 강점으로 시작된 민족의 고통, 오늘은 미국에 의해 더욱 깊어진 민족분렬의 비극을 똑똑히 감수하고있다. 일제에 의해 우리 민족은 눈물의 강 두만강을 건너, 파도 세찬 현해탄을 건너 뿔뿔이 국경밖으로 흩어져갔다. 오늘은 미국에 의해 그 고국마저 둘로 갈라졌다. 이리하여 북과 남으로, 지구의 방방곡곡으로 갈라진 민족의 수난은 깊어간다. 그것을 감안할 때 우선은 설음이고 다음은 소망이다.     시인은 그 소망을 <<흰눈>>과 <<흰구름>>의 시상에 담아 펴내고있다.     가로 세로 논밭의 뚝을 덮으며 어디나 하얗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눈이야 올거면 한 석자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올거지            인간들이 그어놓은 세상금            모든 금을 다 덮어 지우면            마침내 세계는 일매지게            아름다운 하나가 된다             눈이 눈이 내린다            밤에도 낮에도 계속 내린다            여기 국경에도 저기 분계에도            하염없이 흰눈이 흰눈이 내린다            하-얀 소망들이 내린다            내려서 수북이 쌓인다            쌓이고 쌓이고 자꾸 쌓인다...                 ㅡ 시 <<눈이 내린다>>중에서   <<흰눈>> ㅡ 그것은 온 세계를 아름다운 하나로 만드는 <<하-얀 소망>>으로 표상되고있다. <<하-얀>> 그 빛갈속에, 참으로 순결한 그 정서속에 리념도 신앙도 정견도 재산도 다 초월하여 오로지 하나의 민족으로 자유로이 오가며 살려는 지향이 상징되여있다. 오로지 그 하나이다. 리념적, 종교적, 당파적 리익이나 편견을 뛰여넘어 한겨레, 한민족으로서 얼싸안고 살려는 그 한가지 소망을 담고 쌓이고 또 쌓이는 흰눈의 형상은 참으로 숭고하다. 이 시에서 <<세계는 일매지게 아름다운 하나가 된다>>는 말의 의미를 세계주의적관점에서 해석하면 안된다.     <<흰눈>>의 상징적의미는 북과 남, 해외의 모든 백의동포들의 마음속에 서리고 맺힌 절절한 소망을 담고있다.     그의 이러한 민족통일의 소망은 시 <<한쪼각 구름이 되여>>에서 북풍에 실려 저 멀리 제주도까지, 다시 남풍에 실려 라진까지 북과 남을 자유로이 오가는 한쪼각 구름이 되고저 하는 애모쁜 시상을 낳았으며 시 <<지도>>에서 조선지도에 분계선을 그려넣었다가 <<너무 보기 슬퍼서/ 인차 다시 고무로 지워버렸다// 내가 그린 조선지도/ 그제사 한결 보기 좋았다// 나는 웃었다/ 그린곤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는 눈물과 웃음의 시상과 시 <<가령 어느날>>에서 <<북남을 가로지른 콩크리트장/ 그 벽을 허무는 날 오거든/ 나도 가서 허물수 있도록/ 벽돌 한장만은 남겨다오>>라는 간절한 시상도 낳았다.     그렇다. 그는 시골마을 한 초가에서 하염없이 맑은 하늘만 바라고 서서 노오랗게 그리움에 불타다가 두둥실 하얀 민들레씨로 날아올라 정처없이 떠도는 한송이 흰구름으로 되였던 애어린 소년의 애잔한 감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큰 사랑>>이 그의 시야를 온 세상으로 넓혔고 그의 의지를 칼날로 벼렸으며 드디여 그 <<흰구름>>속에서 통일열망의 번개불을 키워 터뜨리는 뢰성같은 목소리를 안겨준것이다.     우리는 그의 시집에서 그의 개성의 다른 측면, 그의 성장발전의 질적비약을 볼수 있다.              힘의 격류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불의 이글거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흰눈>>도 바위를 들부시는 파도로 되고 <<흰구름>>도 대지를 쪼개는 번개로 될수 있음을 알수 있다.    너무도 상반되는듯한 이 모순된 시적개성의 두 측면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민족의식의 두 측면 외유내강의 발로라고 할가, 한없이 유순하면서도 정의에 과감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민족적기개의 표상이라고 할가.     그의 이러한 민족의식의 발로는 이전시기의 그의 애잔한 감성세계가 결코 그의 나약성의 표현이 아니였으며 반대로 그의 내면세계의 정서적풍부성, 다면성의 표현이였음을 인식하게 된다고 할수 있다.     그의 시에 깃들게 된 정론적기백은 시 <<태양은 부른다>>, <<력사에 묻노라>> 등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는 호랑이가 되고 칼날이 되고 화염이 될수 있는 <<흰구름>>의 기상을 보여준다.     민족의 통일을 바라는 절절한 념원은 그 자신이 이 길에서 몸바쳐 내닫는 전사가 되려는 확고한 신념과 의지속에서 더욱 불타오른다.     그는 북과 남, 해외의 모든 동포들을 향하여 <<너는 뼈, 나는 살, 그는 피/ 우리는 그런 관계다!>>라고 웨치면서 <<억지로 둘로 셋으로 갈라놔선/ 절대로 안되는 한시도 살수 없는/ 영원히 이 세상끝이 다할 때까지/ 오로지 하나로만 되여야 하는 우리/ 그렇게 타고나온 하나의 운명>>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누가 칼질인가? 또 누가 한숨인가??               외세도끼에 등이 찍혀              끔찍스런 상처자국이 나고              살점이 찢겨져 나가고              뼈가 더러 부서지고              피가 철철 흐르고              그럴지라도 만구할 길은 있다               우리는 죽지 않았다              혼미해 쓰러지지도 않았다              우리는 살아있다              깨여서 맑은 정신으로 살아있다              살아있기에 깨여있기에              아픔을 저림을 뼈속까지              깊이깊이 절감하고있는것이다                    ㅡ 시 <<태양은 부른다>>중에서     그는 민족이 하나될 열쇠는 <<너도 나도 선차적인 자각과/ 우리 모두의 이 두손에 달려있다>>고 하면서 <<누구의 한손도 바라지 말고/ 오로지 자기 두손으로 저절로/ 반세기 곪아온 험한 상처를/ 깨끗이 터치우고 소독하고 아물궈서/ 하루속히 원래의 양기를 회복하자>>고 호소하고있다.     여기에 그의 민족주체의식, 자기 운명의 주인된 자각의 옭맺힘이 있다. 말그대로 우리 민족이 하나되는 길에서 <<누구의 한손>>을 바랄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기 두손>>으로 분렬된 민족의 상처를 가시고 <<저기 태양이 손짓하는 세기를 넘어/ 고속 고속으로 출격, 총출격!>>하자는 열기띤 호소는 이제까지의 그의 <<한>>, 그의 눈물, 그의 그리움, 그의 기다림의 모든 의미가 여기에서 하나로 응축되여 화염으로 내뿜고있음을 확인한다.     그는 민족허무의 온갖 관념을 불사르고 시 <<력사에 묻노라>>에서 치욕의 근대력사를 불러내여 단죄한다. 우리가 여태껏 남한테 업수임을 받고 유린당하고 짓밟히기만 했던 그 원인이 도대체 이 땅, 이 나라가 작던 탓이던가고, 이 나라에 영웅, 장수가 없었던탓인가고 물음을 던지고는 그리고 스스로 그것을 부정한다. <<바위는 작아도 산보도 굳고/ 제비는 작아도 하늘을 치솟는다>>는 그 토로속에, <<살국원흉 이등박문을 쏘아눕힌/ 백의지사 안중근이 떳떳이 갔고/ 만세소리 하늘땅을 진감한/ 3.1의 봉화 오늘도 타오른다>>는 그 선언속에, <<우리가 흘린 애국의 끓는 피/ 어찌 이루어 작은 강 하나뿐이랴/ 대하가 넘쳐 넘쳐 바다로 흘렀도다>>라고 한 그 통탄속에는 수난의 력사가 삭여버리지 못한 민족적자부심과 기상이 깃들어있다.     시인은 자기 조국의 밝은 미래를 믿고 락관한다. 그리하여 자신도 하나의 통일조국의 긍지높은 주인임을 자부한다.     조국과 민족을 대할 때 주인된 자각은 매우 중요한것이다.     이국에 산다 하여, 저 하나의 생존이 다급하다 하여, 혹은 <<걱정없는>> 안락이 담보된다 하여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방관시하며 강건너 불보듯 앉아있을수는 없다.     그러기에 그의 가장 큰 소망의 하나는 설사 이국땅에서 살더라도 조국이란 큰 나무에서 떨어진 가랑잎이 아니라 주인된 몫을 다하고 <<먼- 후일/ 행여 내가 제일 처음/ 평양역에 서울역에 내렸을 때/ -- 손님, 환영합니다!/ 그런 식으로 나를 맞이하지 마십시오>>라는것이다.     그는 조국에 손님으로 오고싶지 않았다. 그저 다망한 공무로 오랜 시일 외출했다가 늦게야 제 집으로 돌아온 주인으로, 한집식구로 불러주기를 간절히 바란것이다.     이제는 그를 영원한 나그네, 떠돌이 려행자로 부르지 않아도 되는, 아니 절대로 그렇게 부르지 말아야 할 리유가 명백해진다.     비록 이국땅에서 살아도 조국을 잊지 않고 민족의 피줄을 고이고이 지켜가는 그런 사람에게 육체의 표류는 있어도 넋의 표류는 있을수 없다. 그의 정신, 그의 의식은 민족의 품에 굳건히 닻을 내리였으며 복잡다단한 이국살이의 풍파속에서도 자기의 좌표를 잃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우리 사람이 된다. 백의민족의 한 식구가 된다.                                  3. 흰옷 입고 안긴 조국의 품  
                                저자의 말
    한때 시인은 이런 시를 쓴적이 있다.               래일 웃기 위해              오늘을 실컷 운다                   ㅡ 시 <<오늘 우는 근원>>중에서     그의 인생철학을 보여주는 이 시를 보면 그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선물>>은 <<울음 세통, 웃음 한통>>이다. 어느 평자가 지적한것처럼 <<인생과 세계가 안고있는 고뇌와 행복은 울음과 웃음으로 변모되여 우리의 삶에 공존>>한다.     수난의 운명을 안고 태여나 그나마 이국의 산천에 휘뿌려졌던 시인에게 있어서 울음은 웃음보다 더 많이 차례졌다. 그러나 시인은 <<먼저 그 울음 세통을 다 쏟고나서 그다음 나머지 웃음 한통을 웃어보자>>고 하였다. 울음 세통을 다 쏟고나면 이제는 맨 웃음 한통만 남을것이다. 그러니 래일은 울려해도 나머지 울음이 없을것이다. 이렇게 그는 울음에 젖은 자기 삶의 미래를 울래야 울것이 없는 웃음으로 그려보았다.     마침내 그는 어머니조국앞에 그 마지막 웃음 한통을 쏟는 밝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그가 그처럼 그립던 조국에서 위대한 선군정치아래서 억세게 살아가며 전진하고있는 민족의 자랑찬 모습을 찾았기때문이다.     그는 선군조국의 모습을 백두성산에 비겨 이렇게 노래하였다.             구름을 치뚫고 아아히 솟은            백두산 백두산 영웅의 산            우리의 성산이여            어머니 조국의 기상이여             자꾸 쳐다보면 볼수록            저도 모르게 옷깃 여미게 되고            마음도 따라서 한없이 숭엄해지는            백두성산이여 정녕코 그대는            위대하고 장엄한 조국의 모습             그 성산을 둘러선 련봉은 총대            그대를 지켜주는 강력한 총대 있어            그대는 천년만년 우뚝 솟아있으리            땅과 함께 하늘과 함께 우주와 함께            해와 달과 별과 더불어 영존하리라!                ㅡ 시 <<백두성산의 련봉을 우러러>>중에서     여기엔 이제 눈물이 없다. 선군으로 긍지높은 조국을 찾아본 웃음만 있다. 여기엔 하늘땅을 울리는, 해와 달과 별과 더불어 조국찬가, 선군송가의 장엄한 가락만이 울린다.     백두산의 모습을 어머니조국의 모습으로 의인화한 시상은 결코 이 시에서 처음으로 찾아보게 되는것이 아니다. <<울음 세통>>을 쏟던 그때에도 그 <<울음 한통>>은 백두산기슭에 쏟은것이였다.     조국에서 남쪽기슭에서가 아니라 이국에서 북쪽기슭에서 올라 그가 무릎을 꿇고 배알한 어머니의 모습은 어떠하였던가?!             저ㅡ어ㅡ기            새햐얀 수건 쓰고 (설봉)            머리에 물동이 이고 (천지)            길다란 흰 옷고름 날리며 (폭포)            어머님 한분이 걸어오십니다             아니, 저게 누구십니까            우리 어머님이 아니옵니까             ... ...             이 불초자식 비록            어머님을 처음 뵙사오나            일찍 어머님의 신성            들은바 있어 잘 알고있사옵고            이 몸이 어머님 자식임을            한시도 잊은적 없습니다             그보다도 어머님 어머님            이렇게 남쪽 기슭에서가 아니라            북쪽기슭에서 올라            이제야 어머님을 배알하니            반가움에 서러움에 목이 멥니다            목이 메여 태산같은 묻어둔 말            도무지 더 할수가 없군요…             그저 오래동안 탈가했다            거리에서 어머님을 문득 대하는            죄 지은 초라한 아이와도 같이            어머님 발치에 엎드려            어머님 두다리를 붙잡고            자꾸만 한없이 울고 울고 울고싶음을            널리 용서빕니다 어머님-- !!!                 ㅡ 시 <<백두산기슭을 오르며>>중에서     그 백두산의 모습을 그리운 조국 -- 어머니의 모습으로 련상한 비유적착상력도 놀랍지만 무엇보다도 감동되는것은 그앞에 넙적 엎드려 아들의 큰절을 드리며 한없이 울고 울고 울고싶어지는 마음을 터뜨려 용서를 비는 서정적주인공의 곡진한 정서이다.     그것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시에서보다 다른 시각에서 후날 시인이 바라본 백두산의 모습은 시 <<백두성산의 련봉을 우러러>>에서 완전히 새롭게 부각된다. 흰 수건 쓰고 물동이 이고 흰 옷고름 날리던 어머니 -- 백두산은 지금 시인의 눈앞에서 천하무적의 총대에 옹위되여 광풍폭우에도 꿈쩍않고 뢰성벽력에도 끄떡하지 않는 불사조의 모습으로 련상된것이다. 그는 백두성산의 모습에 비유된 조국의 모습을 <<영원히 넘어뜨릴래야 넘어뜨릴수 없는/ 주체의 름름한 모습으로 우뚝 서서/ 천하무비의 호걸자태 천하에 자랑하는>>것으로 노래하였으며 드디여 지난날 어머니조국을 부여안고 터뜨리고 터뜨리던 울음을 뚝 그치고 긍지높은 호탕한 웃음을 날리고있는것이다.     두 시를 대비해보면 그의 시세계가 참으로 대조적임을 직감할수 있다. 울음과 웃음의 극적전환이 그 사이에 놓여있다. 수난자와 승리자의 공간이 그 사이에 놓여있다. 방랑자와 정착자의 계선이 그 사이에 놓여있다.     이 시편들에서 아직은 생활적감정이 좀 부족하다. 이전 시편들에서 흐르던 짜릿한 서정미도 덜하다. 그는 형상에 앞서 우선 격정을 터뜨리고 보았으며 가공이 없는 심장의 웨침을 그대로 내쏟았다. 조국의 품에서 자주로 긍지높은 인민의 생활을 더 깊이 체험한다면 그의 이 격동의 시정신은 새 생명의 즙과 향기가 차넘치는 주옥같은 시편들을 낳을것이다.     하지만 역시 진실은 아름답다.     <<흰구름>>은 조국에서 눈부신 광명에 휩싸였으며 해빛찬란한 푸른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이 광명의 근원을 보았다.     눈물로 엮어졌던 백두산송가들은 격동으로 엮어진 조국송가, 선군송가, 위인송가들로 바뀌였다.     시인앞에 새로운 시세계, 더 크고 의의있는 새로운 예술창조의 세계가 펼쳐졌다.     물론 그것은 아직 깊지는 못하지만 첫 시작부터 장엄하게 힘있게 울려나왔다. 이라하여 그는 <<하얗게>> 살다 <<하얗게>> 가려는 자기의 인생관, 운명적인 인생철학의 종착점을 발견하였다.     <<흰눈>>, <<흰구름>>, <<하얀 피>>에 체현된 상징적시상이 보여주다싶이 시인은 흰것을 사랑하였다. 정황에 따라 그 의미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역시 흰것에 대한 사랑속에 일관되게 관통하는것은 순결성이였다.     인간적으로도 순결했고 민족적으로도 순결했다. 그 순결성은 상실과 고독에 울 때도 아름다왔고 성공과 환희에 웃을 때도 아름다왔다. 그 흰것을 지켜온 시인의 심경에 마침내 붉은 피로 진하게 아로새길 노래중의 노래인 이 태양송가, 조국송가, 통일송가였으니 무한히 희고 정갈한만치 그우에 찍혀지는 송가의 선률과 리듬도 티없이 정갈하고 뚜렷하다. 그는 역시 조국에 백의민족의 순수한 흰옷차림으로 돌아온것이다.               하얗게 살다              하얗게 가야지               이른봄              하얗게 풀려 달려가는              강물과 같이               한겨울              하얗게 내려 하염없는              눈송이 같이               언제나              하얗게 끓으며 용솟는              온천과 같이               겉도 하얗고              속도 하얗게               그렇게              하얗게 하얗게 살다              하얗게 하얗게 하얗게 가야지...                   ㅡ 시 <<하얗게>> 전문     인간사랑, 조국사랑, 겨레사랑의 순결한 흰바탕을 일생동안 고이 지켜가려는 이 생의 좌우명을 시인은 지키였다.     순결은 깨끗하다. 그리하여 강하다.            4. 민족적정서가 살아있는 시의 향기  
    한국에서 출판된 통일시집 "다리를 놓자"
    홍용암시의 매력은 우에서 말한 시혼의 순결성, 그 내용의 고상성에 있음과 동시에 그 개성적인 형상의 높은 예술성에도 있다.     먼저 언급하지 않을수 없는것은 이 시집에 실린 절대다수의 시들은 현재가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습작기라고 할수 있는 홍안의 애젊은 청소년기의 소산이라는것이다. 자기의 문체를 확립하기 위한 각방의 탐구와 실험이 원고지우에 각이한 양상, 각이한 수법의 흔적을 남기였다. 따라서 우리가 이 시집에서 보게 되는것은 완성된 시인의 모습이 아니라 이렇게도 혹은 저렇게도 자기의 문체를 실험해보던 조숙한 <<문학신동>>의 모습이다.     또한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것은 그가 붓대를 쥐기 시작한 1980년대는 중국 동북지방 동포문단내에서 종래의 시풍을 벗어나 <<현대시>>, <<순수시>>에 대한 흥미가 적지 않게 류포되고있었고 그것이 어린 시인의 창작적탐구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수 없었다는것이다.     이러한 리유로 하여 그의 시작품들에는 아직 예술적으로 세련되지 못하고 메마른 시상이 그대로 로출된 미숙성도 보이며 때로는 상징적 <<이미지>>에 묻혀 주지주의적형상을 내놓은 난해성도 보인다. 또한 자기가 존경하는 선배시인들의 시풍에 대한 모방도 엿보인다.     하지만 그는 역시 천성적인 솔직성을 지닌 순수한 사실주의시인으로 우리앞에 나타난다. 일부 평자들이 <<토착정서>>라고 부른 그 사실주의적문체에는 그의 인간성이 유감없이 조명되여있으며 형성되여가고있는 그의 창작적개성의 면모가 점차 뚜렷이 인찍혀있다.     홍용암의 시문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것은 우선 뛰여난 비유적상상력이다. 그의 모든 시적착상의 기초에는 련상법, 대비법, 부정법으로 특징지어지는 비유적상상력이 놓여있다.     자신을 포함한 현실생활, 지어 자연의 모든 표상은 그의 의식속에서 새로운 련관을 맺으면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중요한것은 그 새로운 련관들의 체계속에서 우리가 아직 의식하지 못했던 생활의 본질이 더욱 선명히, 더욱 인상깊게 부각된다는데 있다.     그의 시집에 관통되여있는 <<민들레가족>>과 <<흰구름>>, <<흰눈>>, <<하얀 피>> 등 통털어 <<흰것>>의 형상부터 보기로 하자.     그는 자신을 민들레꽃으로 표상한다. <<먼- 바다 남쪽 한나산기슭에 모여 피던 하얀 민들레집거가족 꽃씨의 꽃씨의 꽃씨의 꽃씨였다>>는 나는 지금 <<그 어느 회오리선풍에 휘말려 문득 여기 낯설은 지대에 불려와 자리를 잡고 싹이 트고 자라서 꽃을 피웠>>다. 그 민들레꽃 -- 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불타고있다. <<한가득 그리움과 소망을 꽃씨처럼 펴들고 하염없이 먼 하늘 정처없이 떠있는 흰구름을 바라보며 일구월심 북편풍이 불어오기만 기다린다>>는 그 심경속에는 200만 재중동포들의 력사와 운명이 집약되여있고 그들의 소망이 상징되여있다. 그 민들레꽃은 <<마침내 두둥실/ 하얀 민들레씨로 날아올라/ 정처없이 떠도는 한송이/ 흰구름>>이 된다.     그 <<흰구름>>의 상징적의미는 시적정황과 계기에 따라 다양하게 체현된다.     이미 평론가 김룡운(재중동포)이 그 <<흰구름의 상징적이미지>>를 <<담담한 한으서의... 자아구축으로서의... 사랑으로서의... 효성으로서의... 순결로서의... 민족애로서의 흰구름의 이미지>> 등으로 상세히 고찰하였다.     실로 홍용암의 시에서 <<흰구름>>은 괴로운 삶에 대한 슬픔과 고독, 성취못한 욕망과 그리움, 그속에서 자기를 찾고 용감히 전진하는 의지와 신념, 나아가서 순결한 민족의식과 통일갈망을 표현하는 등 풍만한 양상을 보이고있다.     그 <<흰구름>>이 발산하는 <<흰빛>>, <<흰구름>>이 쏟아놓는 흰눈도 동일한 선상에서 다양한 시적의미를 획득하면서도 그의 인생관에 관통되는 순결성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이미 고찰된 시 <<하얗게>>는 그의 민족의식의 정수인 순결성의 의미를 직접 철학적인 상으로 뽑아내고있다면 다른 시작품들인 <<한여름 두만강가>>나 <<녀인의 한생>> 등에서는 생동한 생활적표상에 부쳐 보다 더 강렬하게 전개하고있다.               저마다 이야기꽃 피우며              하이얀 빨래를 빨고 너는              젊은 각시, 쳐녀, 아주머니들               그속에 세파에 바래진              백발을 풀어 드리우고 감으시는              흰저고리 할머니 한분도 보인다               하얀것을 더 하얗게              헹구고 씻고 다듬으며              정갈을 즐기는 녀인들                   ㅡ 시 <<한여름 두만강가>>중에서     한폭의 풍경화같은 이 시는 단순한 풍경시가 아니다. 모든것이 흰것이다. 빨래도 희고 할머니가 풀어감는 머리도 희고 저고리도 희고... 그런데 그 <<하얀것은 더 하얗게/ 헹구고 씻고 다듬으며/ 정갈을 즐기는 녀인들>>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우리 조선녀인들의 그 순결한 민족정서와 함께 그것을 세상에 소리높이 자랑하려는 민족적자부심이 넘쳐 흐르는것이다.     <<흰구름>>은 때로 <<흰눈>>이 되여 지상의 모든 <<경계와 분계>>를 지워버리고 세상을 아름다운 하나로 만드는 숭고한 지향, 통일갈망의 시상으로도 번져지며 미개척의 <<처녀지같은 하얀 눈길>>을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걸어간 한 인간의 순결한 량심과 굳센 의지와 도고한 자존심의 표적인양 그우에 한줄기로 또렷이 찍힌 <<하얀 감탄부호>> -- 억센 삶의 찬가로도 번져진다.     시인의 비유적상상력은 거대한 창조적환상의 날개로 되여 참으로 자유자재로 나래치고있다.     <<파아란 이끼돋은 바위>>, <<초불>>, <<별찌>>, <<구름>>... 그 어느 시를 살펴보아도 그의 이 시적착상과 철학적사색의 특징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는것이다.     일단 시인의 눈에 비쳐든 모든 사물현상은 꽃이거나 강물이거나 구름이거나 눈이거나 나무잎새거나 지어 상처에서 흐르는 피이거나 할것없이 형상적 및 론리적 전환과 비약의 공간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미의 세계, 철학세계에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시인은 <<한번도 안겨못본 고국의 품>>을 <<수륙만리 이역에서 나서 자라도/ 커갈수록 그리운 사랑의 품>>, <<어머님 품>>으로 그리면서 이렇게 읊었다.             한번도 보지 못한 어머님 미소            높으신 그 사랑 받지 못해도            혈관속에 맥맥이 굽이치는건            백색의 끓는 피            어머님의 피라네            어머님의 피라네             네거리 류랑하는 고아처럼            끝없이 타향에서 떠돌아도            언제나 어디서나 어머님 주신            흰옷을 입고서            어머님을 그렸다네            어머님을 그렸다네                 ㅡ 시 <<어머님을 그렸다네>>중에서     시인은 조국 -- 어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백의민족의 순결한 넋과 지조를 끝까지 지켜가려는 민족적자각과 의지를 <<백색의 끓는 피>>와 <<흰옷>>의 상징적표상에 담아 다 말하고있다. 이리하여 그의 시들은 길지 않으나 하나를 통해 열백을 보여주는 천만마디 사연과 이야기를 안고 함축되여있으며 시행과 시행 사이에서, 말과 말 뒤에서 다른 시, 다른 말들이 화성을 울리고있다.     홍용암의 시문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것은 다음으로 사색의 산문적점철로부터 점차 사색과 정서의 류창한 운률적조화에로 넘어가 민족적정서가 넘치는 독특한 시풍을 세우려는 자세이다.     얼핏 보면 그의 시들은 이질적인 두 문체의 결합처럼 보인다. 어떤것은 전위파 시인들의 <<현대시>>나 사상파, 주지주의 시인들의 영향 특히 <<이미지시>>의 영향이 느껴지는 <<사색적인것>>, <<산문적인것>>이며 어떤것은 전통적인 민족시가들, 특히 김소월이나 정지용, 리상화 등의 영향이 강하게 안겨오는 <<정서적인것>>, <<운률적인것>>이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으로 하는 말이지만 상징적표상들을 점철하면서 정서적, 운률적흐름보다 사색적, 산문적 표현이 앞선 그런 시들이 없는것이 아니다.     이 글에서 한번 인용한바 있는 <<력사의 이주민족>>도 그렇지만 때로 심적표상만 돌을 던지듯 점철해놓은 식으로 씌여진 <<섬>>, <<장벽>>, <<묻노니 언제가야>>와 같은 시들은 우리의 관념에 의하면 틀림없이 <<읊는 시>>가 아니라 <<읽는 시>>이다. 이런 시에는 사실상의 운률이 없으며 시행형식으로 토막친 분행이 있을뿐 류창한 정서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는다.                 섬                외로운 섬                 아무 배도                와닿지 않는                황량한                불모의 땅                 동떨어진                하나의 세계 ㅡ                  무엇인가                루루천년                그리워도 소식없는                만년고독                 기다림에                지친...                     ㅡ 시 <<섬>> 전문   인용된 이 시는 미래파(푸뚜리즘)적인 <<시각적이미지>>까지 추구한 전형적인 실례이다.     그의 시에서 주도적이고 그의 시적정서를 가장 깊이있게 대변하고있는 시들은 역시 민족적정서에 맞는 류창하고 유순한 운률을 잘 살려나간 정제된 형식을 이루고있다.     <<나는 한쪼각 흰구름>>, <<두만강>>, <<초불>>, <<한여름 두만강가>>, <<백두산기슭을 오르며>> 등 그의 대표작들이 다 이렇게 되여있다.     여기서 강하게 느껴지는것은 시인이 민족시가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전통적인 표현수법들을 현대인의 지성과 정서에 맞게 능숙하게 활용하고있는 점이다. 민족의식이 깊은 시인, 자기 문학을 민족의 운명과 결합시키려는 숭고한 자각에 불타는 시인은 필연코 자기 시가의 넋과 형식을 민족적 바탕우에 심게 마련이며 민족과 더불어 감정과 정서를 유감없이 나누려는 강렬한 지향에 따라 인민대중이 감수할수 있는 사실주의적이고 민족적인 형식탐구에로 나갈수밖에 없는것이다.     정갈한 민족정서를 구현하고 전통적인 운률조성방법에 의거한 사실주의시풍은 그의 뛰여난 비유적상상력과 결합되여 두드러진 개성적문체를 이루어놓고있다. 여기에 철학적사색이 짙은 시적표현들로 하여 지성도높은 현대 서정시의 완미한 경지를 개척하고있다.     그의 시문체가 다양하다는것 ㅡ 이것은 그의 특성인 동시에 성장과정의, 탐구과정의 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은 그 모든것가운데 시인의 사상미학적리상과 개성적취미, 기호에 맞는 하나가 선택될것이며 그때 우리는 확정적으로 시인의 개성적인 예술적사고방식과 표현형식에 대하여 말할수 있을것이다.     홍용암의 시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불확정의 수사학적물음법에 대하여 부언할 필요가 있다. 일부 평자들은 <<물음투성이>>를 그의 시적개성의 하나로 론한바 있지만 여기에는 그의 의도적이며 실험적인 탐구의 흔적이 놓여있다.     시인은 직설적인 정치표현을 피하려고 애쓴다. 이것은 시문학의 본도에 맞는 탐구정신으로 볼수 있다. 그런데 형상의 론리는 기필코 그러한 표현을 써야 할 계선에 이른다. 이때 시인은 입을 다물고 한마디의 물음을 던지고 그침으로써 그 대답은 독자에게 맡겨버리는것이다.     이 불확정된 련상의 공간속에서 바흐친이 <<대화적상상력>>이라고 일컬은 시인과 독자,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각이한 정황에 굴절되고 제나름의 독서의도에 맞게 재창조된 시적의미가 생성된다는것이 시인의 바람직한 시도였을수 있다.     이 불확정을 통한 다음성적인 대화의 원리는 수사학적물음으로 그치고마는 수법과 함께 영상의 제시로 그치는 수법에도 반영되고있다. 역시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려는 의도로부터 출발한다.               흰구름 한송이 유유히 떠도는              하늘아래              천년을 고독한 청산              그 기슭을 감돌아 흘러가는 물               슬프게도              시 쓰는 한 소년이 있다...                    ㅡ 시 <<풍경>> 전문     여기에서 확정된것은 흰구름, 고독한 청산, 물 그리고 시 쓰는 한 소년뿐이다. 풍경의 제시로 끝난 이 시의 정서적의미는 글줄밖에서 생성된다. 시인은 터져나오려는 주정토로를 애써 누르고 정황의 제시 그 자체에 머물며 독자들이 자기대로의 상상을 거쳐 시인과 주관세계를 추측하고 감득하게 하려 한다.     우리는 그의 이 창작방법, 형상수법에 대하여 가부를 론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여 이 수법은 시의 의미적내용을 다양하게 확산시키기는 하나 깊이있게 심화시키지는 못한다. 나아가서 시의 서정성을 풍만하게 돋구는데서는 제한성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물음으로 그친 시들의 불확정의 공간은 역시 공간으로 남는다.             두만강 푸른 물에 이 몸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여기로 왔소             강물도 달밤이면 목놓아 우는데            님 두고온 이 사람도 한숨을 짓소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 >>            님이여 아직도 그 노래 부르오?             그리운 님이여 내 님이여            언제나 가려나 언제나 가려나... ?!                 ㅡ 시 <<두만강애가>> 전문              흐르는 시내가에 초가삼간 짓고            양지쪽 비탈밭에 베개감자 심어놓고            잘 살아보자던 그 옛날 노래는            흘러간 아득한 노래...             팔간기와집 덩실 솟은 앞마당에            해당화며 봉선화 꽃 심어놓고            나 오늘 새삼스레 그 노래 부르며            자꾸 왜 우노?                 ㅡ 시 <<옛 노래 새 노래>> 전문     상술한 두 시는 다같이 옛 노래와 오늘의 새 노래의 대비적련상속에서 시상을 찾고 역시 찾을길 없는 대답을 묻어두고 불확정의 물음으로 끝난 작품이다.     무엇인가 옛날의 애절한 노래를 오늘 또 새삼스레 불러야 하는 그 간절한 심정이 안겨온다. 이주민족의 꿈은 아직도 실현되지 못했다는 애달픈 하소이다. 그 대답은 불확정의 공간속에서 문제로만 남아있는것이다. 정서와 생활은 있으되 사상과 철학은 약하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일부 통일주제의 시들이나 조국과 민족, 혹은 위인들에 대한 송가작품들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직선적인 정치적표현들을 주장하는것은 아니다. 정치적인것이라고 하여 풍만한 서정과 생활적정서를 떠나 생경한 구호를 로출시켜서는 안되는것이다.     정치와 형상, 사상과 정서, 철학과 생활의 통일을 실현하는것은 주체시가문학의 사상예술성을 규정하는 기본문제이다. 그런것만큼 홍용암시인도 정치성이 강한 시일수록 그에게 고유한 짙은 서정과 비유적형상으로, 생활적으로 시형상을 창조하기 위해 더욱 탐구적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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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에서 시집 <<다리를 놓자>>의 일부 시들을 나름대로 해설해보았다.     붓을 놓기에 앞서 명백하게 인식되는것은 이 시인의 시세계를 다 밝혀내기에는 우리가 아직 너무도 그를 모르며 그의 인생의 체험과 의지적노력의 깊이를 다는 헤아리지 못한다는것이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명백하다. 민족의 통일문학이라는 하나의 전선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동지를 얻었다는것이다.     북과 남, 해외의 3자련대속에서 우리의 통일시가문학은 나래를 더욱 활짝 펴고 민족의 단합과 조국통일위업에 이바지하고있다.     시인의 미래를 축복한다! 그리고 너무도 미숙한 이 글에 대해 량해를 구하는바이다.      ( 2005년 5월 조선에서 출판된 6.15공동선언발표5돐기념시집 <<다리를 놓자>>에 수록, 평자는 조선 <<통일문학>> 편집부 편집국장이고 문학박사이며 저명한 문학평론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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