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으로부터, 고안나 시인, 백성일 시인, 이동렬 소설가, 김남희 시인 목단강 공항에서
[서울=동북아신문]◆ 설레임으로...

첫사랑만큼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이 또 있다. 여행! 언제나 처음인 듯 다시 새로운, 저 무한천공으로... 막 구겨져도 좋을 자유라는 것, 홀가분해진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본래의 혼자로 돌아간다는 귀소 또는 회귀 본능일까 그러면 어디로 돌아가 어디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일까 이유에 상관없이 풀어놓은 개구리 마냥 풀쩍거렸다. 몇날 며칠 밤잠을 설치게 하고 괜히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또 뭔가를 넣었다 다시 꺼내고, 환갑을 지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신혼여행 떠나던 딸아이의 손길 보다 더 분주해지는 것을 보면 분명 본능의 움직임이리라 사려 된다. 문을 나서면 눈에 익숙한 길들이 또 다른 길을 열어 주고 다시 길이 길을 이어주고 그렇게 하늘 길을 열고 당도하는 곳, 해마다 8월이면, 마음이 먼저 문을 열고 그 다음 몸이 당도하는 동북삼성 어느 벌판, 이미 그 길들은 눈에 익숙한 길이 되어 마음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위 사진은 흥룡사 천년의 시간을 거쳐 온 석답/ 아래 사진은 발해국 유적지 우물 옛터  

◆ 너무 많은 하늘과 너무 많은 땅으로...

2018년 8월 21일 화요일, 일행이신 두분 시인님과 함께 길림 도라지문학상 시상식을 겸한 동북삼성 문학기행이 시작되었다.

너무 많은 하늘과 너무 많은 땅, 이 무슨 사치입니까 라고 노래했던 시인의 싯귀가 생각나는 그 곳은 가고 또 갈수록 더 깊숙이 빠져드는 미지의 세계다.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시작도 끝도 없는 벌판, 자작나무 가지들이 한꺼번에 일어서서 환호하는 그 곳눈에 다 담을 수 없는 풍경들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목단강으로 향했다. '목단강' 구부러지는, 굽이치다 꺾어져 흐르는 강이라고 했다. 이제까지 핏빛 목단 꽃을 가슴에 품고 있었는데 그 꽃들의 함박웃음을 닮고 싶었는데 적포도주 고운 빛깔에 취하고 싶었는데 '구부러져 흐르는 강'이라니... 내가 알고 있던 목단은 그 흔한 신기루속의 이야기였나? 그렇다면 내 속에서 구부러져 흐르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럴듯한 표정 속에 구부러진 심보는 어디로 바쁘게 흐르고 있는지 겉과 속이 다른 나는 과연 누구인지 한참 생각 속으로 구부러져 흐르고 있었다.

목단강 공항에서 마중 나오신 이동렬 회장님과 함께 목단강 주 정부 청사 앞에서 금잔화와 셀비아와 눈인사를 나눴다. 유달리 맑고 높은 가을 하늘 아래 녕안, 명성촌을 지나 발해의 첫도읍지에 당도했다 .대조영은 온데 간데 소식도 없고 우물터와 돌비만 남아 나그네의 발길을 돌려 세웠다. 발해시대 기초만 남아있는 절터에 흥륭사라는 절을 세워 1,280년 세월을 품고 있는 석탑 위로 잠자리 떼들이 탑돌이를 하며 뭐라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모습을 감춘 발해인 들은 남아있는 성터 위에 백일홍 꽃으로 피어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붉은 혼들이 나를 반겼다. 천 년 전의 얼굴들이 바람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나비 떼의 몸짓과 꽃들의 재잘거림, 나는 수화로 주고받았다. 팡팡 눌러 되는 카메라의 셔터 소리에 숨죽이며 숨어있던 잠자리 떼가 깜짝 놀라 달아났다. 다 헤아릴 수 없는 각자 다른 마음들... 술렁거리는 묵언의 대화들...꽃밭 속에 파 묻혀, 꽃 속에 뒤엉켜, 땡볕 속에서 뒹굴다 등 떠밀려 목단강 시의 남부 근처 화산 분화에 의해 생성된 ‘경박호’ 부근에 당도했다.

 
 
발해국 유적지 뒷터전에 만발한 백일홍 꽃밭, 뜻밖의 발견... 저무는 황혼이었다. 아! 여기도 핏빛, 생의 마지막 순간은 저리도 황홀한가?
저무는 것 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절정 그 이상이란 말인가?
너무 많은 하늘의 흉배에 붉은 수를 놓는 이 누구인가?
오선지 위에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며 금(琴)을 뜯는 이는 누굴까?
이 모든 것이 궁금해지는 시간, 더 이상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하늘 문이 서서히 닫혔다.어둠의 소리를 듣자고 했다.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어둠이란 놈을 만나보자 했다.눈도 코도 입도 형체도 없는 어둠이라는 얼굴을 찾아 어둠속으로 길을 만들었다.반딧불이란 놈들이 벌써 알아차리고 서너 마리 앞장을 섰다.분명 어둠이란 놈을 만나기는 만났다 부비고 안기고 포개고...
적막이라는 고독과 어둠이라는 공포는 모두 내 안의 것들이었다.

 

◆ 경박호!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라고 말해도...

경박호의 아침, 날이 밝자 마음이 더 서두른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는 탐험가처럼 8월의 마지막 햇살을 끌고 나섰다. 줄기차게 따라나서는 땡볕이 만만치 않다. 유달리 가뭄으로 인해 경박호의 물이 말랐다고 했다. 더위에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경박 폭포마저 제 구실을 하지 못한 채 물줄기가 야위어 체면이 영 말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며칠 전 내린 비로 인해 제법 목소리가 굵어졌다고 했다. 스위스 레만호에 버금가는 호수쯤으로 알고 있었다.  관문인 듯 입구에 들어서니 붉은 글씨로 경박호라고 쓰여 있었고 조금 더 가니 등소평주석의 친필이 쓰여 있는 표지석이 그 위용를 나타내며 우리를 반겼다.

▲ 9월 중순 비가 왔을 때의 경박호 장관

 
아~~!! 푸른 하늘 아래 펼쳐 놓은 경박호!
가슴을 활짝 열어 놓은 채 가을을 담고 있었다. 바람을 가두고 구름을 담고 또 무엇을 채우려는가? 우리의 발자국 소리, 웃음소리, 숨소리, 지나가는 여인들 옷깃 스치는 소리마저도 빠짐없이 담으려는 듯 넉넉한 출렁임에 배불렀다. 천년의 갑절을 살아 온 너무 많은 물의 질량 앞에서 충만한 이 포만감은 또 무엇인가? 경박호 그 배 둘레를 다 돌지 못한 채 경박폭포로 향했다. 질풍노도의 장엄한 위용은 잠시 숨긴 채, 핸섬한 신사 마냥 점잖다. 그래도 그 품새는 과히 주눅 들기에 충분한 자태였다. 누워서 흐르다 직선으로 뛰어내리는, 절제된 움직임이었다. 너를 만나고 싶어서 비는 내리고... 왔던 발길 실망시키진 않았다. 경박호에 잠들고 싶었던, 경박폭포에 머리 박고 싶었던 그 무수한 날들이 있었다. 폭포 아래로 뛰어 내려와 곤두박질치는 물살에 손을 담구고 낙관을 찍듯이 보이지 않는 지문들을 무수히 찍고 또 찍었다.

올려다 본 하늘 위로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물보라에 튕겨 오색 무지개가 하늘에 오작교를 놓았다. 건너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 뒤로 노을이 제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어둠은 누구에게나 적막과 공포의 대상인가? 

 
 

하얀 불두화가 배웅하는 길을 따라 왔던 길을 돌아 나왔다. 조선려관이라는 우리글 간판이 눈에 띄였다. 인솔자이신 리동렬 회장님께서는 조선의 글이 있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우리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 잠시 부끄러운 마음에 덩달아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경박호의 아름다운 잔물결은 가슴속에 가뒀다. 그 소리 잊힐 만 하면 다시 꺼내 들을 것이다. 유난히 아름다웠던 경박호의 하늘빛, 물빛, 석양빛 바람의 색깔 까지 몰래 훔쳐왔다. 가슴속에 꼭꼭 숨겨왔다. 누가 뭐래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오래도록 내 것인 양 내 놓지 않을 것이다.

 
 

◆경박호의 물소리를 가슴에 품고...

경박호를 남겨두고 돈화로 오는 날, 아침부터 추적 추적 비가 내리더라.
목단강, 녕안, 해림, 발해유적지, 경박호, 경박폭포, 돈화 육정산 정각사 까지 친절하게 가이드해주신 리동렬 동포문인협회 회장님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

2018년 8월 21~24일 까지
목단강에서 돈화까지 발자국을 남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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