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연숙 약력: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시, 수필 다수 발표. '문학의강'으로 등단. 현재 울산 거주
[시/홍연숙] 가을이 드리워지고  

 1푸른 생각을 숙살하여열매는 익어갑니다나무의 새치잎은 별이 되고꽃은 시들어서이야기를 남깁니다 2애비죽인 대여섯놈이 한상에 앉아애비를 그리고 애비를 읽는다한잔으로 그리고또 한잔으로 읽다가어차피 세상은 돌아야 한다며죽어야 산다고 한다 3산은 한발한발 다가가요추조의 형벌에 한 몸을 내어놓아요은색의 살침들을 꽂고 절정으로 달음질해요한올의 숨도 남기지 않아요 4봄향기를 터뜨렸던 그대 얼굴이 보이지 않네정열적인 여름을 만지던 따뜻한 그 손이 차갑게 스쳐갔네깊은 발자국들이 나의 원망으로 흐르기만 하네 2018.9.5  컵  그때는 봄이였네요촉촉한 땅속, 질척한 어둠이 좋아기쁨 한가득 물고 나팔꽃을 피웠지요나비의 십자가에 매달려여자의 꿈을 열달동안 꾸면서 말이죠 그뒤로 여자는 바빠요땅은 서서히 말라가고 잊혀가고 버려졌지요검푸른 고독의 시간들이선분홍 잎들로 왕성하게 뻗쳐 나가고성난 핏줄들이 불거지고 2002년 월드컵에한국이 4강까지 흔들리고온 천지가 빨갛게 물 들었을때여자의 가랭이로 참고참았던 울분을 토했지요 경기도 양평 길 병원의 가위와 메스로도가니탕집의 변기통에 쏟은선분홍의 시간들을 자르고피와 살을 나눈 여자를 버리고불법체류자를 죽였지요 목마른 사막의 계절을 서울에 남기고울산의 바다바람에 꾸덕꾸덕해진수정컵이 지금, 러씨아 월드컵으로 시려서쟁그랑 소리냅니다 2018.6.17.  아버지  그 뒤를 쫓던 시선은어느새 낙엽 되어 바닥을 몸부림치고癌석으로 일어서는 죽음과 내통하는 숨언니의 손으로 완성한 녹두볶음이그렇게도 맛있다더니말똥말똥 서너알 양똥그림 그리는 긴 밤만내 팔에 걸쳐놓고 자꾸만자꾸만 미안하다 하셨다 강하지만 가난했던 56년 질긴 삶옆집 여자라도 좋아하시지가슴 아픈 사연이라도만들어보시지그냥 스치는 행복이라도 느껴보시지 이제는 허망한 전설이 되어버린울 아버지마침내분노할 줄도 사랑할 줄도 행복할 줄도 몰라버린울 아버지 누가울 아버지께 미안하다고 해줄까 2018.5.23.   엄마 내가 누워있던 궁전이다爱의 결핍으로 슬픈 궁전에아버지의 欲을 뿌려性전을 이루었던 자유롭지 못한 땅에소외된 채로 탈색되여보슬비에도 폴싹 내려앉을 것 같은그런구닥다리 같은 궁전을나는 비웃었다 파괴된 사랑과 행복을... 멸 해가는 옛 것에 야유를 던지며새로운 창조력을 과시하여 완성된 나의 궁전은허울처럼 감싸주고 있는 궁전안에 있었다 궁전이 흔들린다세상이 흔들린다가슴찢기는 고통과 함께 벗겨져 나아가는 새로운 궁전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겹겹히 쌓여가는 궁전들속에 울려퍼지는 사랑의 노래새로운 세상이 창조되고또 다른 세상이 이어진다 예나지금이나미래나다르지 않은 궁전영원한 모성애로 차고 넘치는엄마! 2018.5.15   꽃 목욕탕 바닥의 젖은 무덤에서허연 시체들이 떨어져 나와 하수구를 붙들고 통곡을 합니다 빽빽한 문장 사이들을 흘러내린 쉼표들은 검은 꽃술 속으로 숨어 들었습니다즐거운 고통으로 흐느끼던 해독 불가의 언어들을 엿듣고 빈 둥지의 사연들도 알았습니다세월을 전세 낸 일기들이설움으로 얼룩지고 멀고 먼 길을 에돌아 온 마디마디에 몽우리가 맺혔습니다 하얀 순백을 잃은 상하고 시든 이야기 하나가 질기게 늘어져섬 이 되였습니다 2018.4.17.   튤립은 알고 있다 새벽 6시떨리는 입술이 위태하다제발...반쯤만...반쯤만 피어라*아침 9시머피의 법칙이튤립으로 활짝 피어버렸다 동공 안에 피어난 검은 속살에당황한 듯 그대로 굳어지고철근을 짊어진 초침의 황소걸음으로하루가 길다 또다시새 아침이 오고시간이 촘촘히 주름지더니반쯤 열린 입술로튤립이 선명하다 벼랑 끝 까지 가봐서일까투박한 시어가 다듬질해가는그 짜릿함을절정보다는 절정으로 가는 길의그 황홀함을튤립은 어떻게 알았을까 2018.4.7*송나라 시인 소 옹의 시중에 "好花看到半开时"   개나리꽃 그래 그때가 초봄이었지찜통이 된 주방은 연신 너를 녹이고 있었지빽빽이 들어서는 고층건물로 유일한 창구마저 한 뼘도 안되는 몸뚱이를 가누지 못해 희미하게 사라지고육체의 피로와 삶의 고단함은 너를 중얼거리게 했고개나리는듣고만 있었지그냥들어주고 또 들어주고만 있었지 그러던 어느날개나리는 노랗게 한 잎으로 널 감동시키더니또 노랗게 한 아름이 되어 가더니노오란 물결 출렁이며 다가섰지어느새 너의 가슴은 노랗게 차오르고너도 노랗게 피어나고 있었지여름도 가을도 겨울도노랗게 노랗게 노랗게홍아연아숙아저기에 개나리들이 무더기로 피어나고 있어 2018.4.2  풀잎  남긴 것은 초고뿐인형편없는 시인 나비의 날갯짓에도 드러눕지만왕성한 애욕으로초야를 거느린 칼이다 저 하늘을저 우주를밤낮 쉬지 않고 쓰다듬어주는부처 같은 손길 여기저기 너부러져 있는초고들을 줍는다 2018.4.27   말발굽 소리 찍힌 밤하늘  아저씨의 자취방 골목에는나의 출퇴근 길이 좁게 나 있고내가 한밤중에 퇴근할 무렵이면골목길 옆에 쪼그린 아저씨가 가끔 화상 채팅을 한다여자목소리도 들리고 아이들 목소리도 들리는데나는 엄마를 생각하고딸을 생각한다전화에서 들려오는 숨결들에는 한결 같이 그리움이 담겨있다알아들을 수 없는 몽골말이지만내 심장에서는새파란 초원의 말들이 요란하게 투덕거린다달리는 말등에서 자라나말달리듯이 두루루루 두루루루발음으로부드럽게 한 줄로 올라가고또 한 줄로 내려오는음악 같은 리듬이 나를 사정없이 숭숭 뚫고 지난다아저씨는 모르겠지만이 밤 처럼 그 누구도 새카맣게 모르겠지만대문이 타당! 하고 닫혀도계속 이어져 그 화상 전화속으로 빠져든 밤들이 하얀 종이 위에말발굽으로 또렷이 찍힌다 2018.4.12   커피  중독되었다자살인 것 같기도 하다수분을 빼앗기는 줄 알면서도 물리칠 수가 없다오랫동안 그래왔다전생에서도 그랬는지 모르겠다그리하여푸석푸석한 살이 되고 걸죽한 피가되어 말라가는지도 모르겠다금단에 허기진 욕망은 살모사의 혀로 실룩거리며 솟아오른다 70%의 수분을 굽 낸다 너에 미친 나는아프기를 갈망해 보면서더 깊이 중독되어 가고 있다 2018.4.5   벚꽃  참았지요오래오래그러니까작년 여름부터초가을 늦가을긴긴 겨울까지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도록지나가는 이들을 다 그냥 흘려보냈지요봄바람이 사타구니를 익숙하게슬슬 어루만지자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군요. 햇빛 기껏 따스한 봄에아예 홀랑 벗고시뻘겋게 달아오른 속살을 내보였죠 자 이제 얼른 들어오세요꿀샘 마셔보세요그리고그리고그리고우리 끈적하게 서로 녹아들어요 이제 닥칠여름가을겨울을이겨요, 우리 2018.3.28  청맹과니  저는 잘 넘어집니다묵묵히 똑바로 가는 이들이 참 부럽습니다따라 하고 싶은데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목표물이 늘 불투명합니다어려운 게 싫어서그냥 청맹과니로 살아갑니다 저는 잘 넘어집니다삐뚤삐뚤 가다가도 요란하게 넘어집니다넘어진 자리에서 버둥대다가 꽃으로 피어납니다어려운 게 싫어서그냥 청맹과니로 살아갑니다 이번에 또 넘어졌습니다길에는 걸림돌이 왜 그리 많은지요어려운 게 싫어서그냥 넘어진대로 있습니다꽃들이 새여나오는 하얀입술의 저는뛸 데 없는 청맹과니입니다 2018.3.28  이 봄날에  삐걱~ 방 안에서밤새 곯았던 염증들이반지하의 계단을 타고 오른다그 뒤로 졸아든 네가 탈탈 낡은 구두에 담겨 오르고 따뜻한 봄 빛에 파르르 떨며구석구석 털리고 있는 얇고 낡은 외투는 미세먼지 기상주의보에 짜증을 날린다 친정엄마가 보내준 청국장 냄새가 산수유의 야릇한 물 거품을 그리며 희미한 데생 속에 널 담는다 햇빛 받으며 오래오래 걸어봐답이 나올거야 공식으로 펼쳐진이 봄날에 2018.3.26  동병상련  음식물 쓰레기 헤집는 들고양이의 피고름이 말라붙은 칙칙한 눈에 비친 세상의 한 모퉁이에 길들어져 걸식하는 몰골이 누추하다 2018.3.13  목련  딱딱한 나무침대에전라의 자세로 누워어느 화가가 그려주기를기다리고 기다리다가지친 몸은 생기가 가시고보잘것없이 평범하다 윤기 흐르는 장밋빛이기를아름답고 환상적인 나신이기를고대하고 고대하다가기갈된 눈에는부연 혼돈 속에추한 삼류 모델로진실되어 있다 비탄의 몸부림과 통곡은짐승 같은 신음으로만 겨우비집고파르르 파르르 새어 나온다 2018.3.22   진주귀고리 소녀의 편지  350년이 흘렀어요당신은 아직도 저를 바라보고 있네요그때도 그랬죠감추고 지켜야 할 무언가도 남아 있지 않았죠그렇게 당신은 저의 전부를 그려버렸죠 저는 항상 당신앞에서는 정숙한 여인이 되지 못했어요바늘로 귀방울을 찌르고귀고리를 달아달라며당신의 애무를 원했죠당신은 나의 귓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줬죠귀고리를 달아주고도 손을 거두지 않았죠턱과 목을 쓸어내리고얼굴선을 따라 뺨으로 부터 아래쪽 입술을 만졌죠난 소금맛이 나는 당신의 손가락을 핥았죠당신은 이내 손을 거두고젖은 입술 벌리고 이렇게 당신을 바라 보는 저를 그렸죠우리는 눈을 맞추고 있었지요 당신이 저를 훔쳐보고세오리의 머리카락을 그려넣던 날저는 골목길에서 스커트를 말아 올렸어요그 리드미클한 움직임속에서 당신을 떠올리며 희열을 느꼈어요그렇게 저는 당신이 예상못하는 놀라운 아이였어요 당신은 저의 주인이였죠그림만 다 그리면 절 잊어버릴거라고 생각했어요다시는 절 찾지 않을 거라고요그래서 도둑 처럼아이들 처럼 뛰였어요피할 수 없는 선택이였죠별이 가르키는 방향으로어김없이 달려 갔죠 오래동안 당신을 잊으려고 했어요지난 삼백여년간 무척 힘들었어요아주 가끔 당신의 모습을 그려봤죠내 몸은 얼어붙고가슴이 옥죄이고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그럴때마다당신은 나보다 그림에더 많은 애정을 기울였다고스스로 납득 시켰죠 지금당신이 절 찾는다면서요진주귀고리를 주려고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군요제가 그 귀고리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가요하녀도 그렇지만푸줏간의 안해가어찌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나요성내지 마세요신교회 뒷길, 안쪽 깊숙한 곳에다우리의 진주귀고리를 팔았어요20길더*랍니다남편에게 진 빚을 청산하고도 5길더가 남는 거죠더는 남편에게 치를 것이 없어요한 하녀가 비로소 자유를 얻은 거죠이젠 당신을 찾아 갑니다하녀가 아닌 여자로 당신곁으로 갑니다 다들 저의 눈길이 슬프다고 해요또 유혹하는 듯 하다고 해요당신이 원했던 표정이잖아요지금이렇게 야릇하게 바라보며 당신의 입술을 찾습니다어서 오세요나의 남자여  2018.4.9*네델란드 화페단위   외식   오리고기 주물럭이 뽀글대며 이야기가 끝이 없는데얼어붙은 말들은 녹지 않는다오리고기 주물럭이 바알갛게 잘 익었는데입안에서 곰팡이는 꽃을 피운다 사위, 결혼을 서둘렀으면 좋겠어 멍든 시간이 헉헉 숨 가쁘게 질주한다 어머님, 죄송합니다아직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사방에 창문들이 깨지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어쩌지요난감한 외식입니다마주 앉은 눈빛은 허공에서 헛발을 딛습니다여기를 벗어나려고 갈팡질팡 헤매지만, 딱히 갈 곳이 없습니다오리 집 가게 안은 시끄럽게 들끓고 있지만무겁게 가라앉은 29번 테이블은 한구석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습니다어쩐다지요  2018.4.16    연장체류  천 일을 동천강과 연애를 하며천 일을 태화강과 불륜을 지르며가벼워 지고 헝클어 지고 이상해 지고가버린 3년* 구겨진 이야기를 애써 읽으며반듯하게 납작하게 복사되여집문서와 결핵확인서 사이로 들어가오는 3년 그 사이에 떠 있다새 처럼 떠 있다날지 못하고 떠 있다 *장기체류비자는 3년에 한번씩 연장한다  30년을 떠돌던 이승과 저승에서의 작별인사   이 가을 새벽에 기다리는 잠 사이로 살며시 들어옵니다어릴 때의 내 짝지가 양태머리를 촉촉 드리우고 옆에 앉습니다 기여드는 한숨에 의자가 끙 소리를 내고 우르르 일어서는 뒤줄의 주먹들이 그 애의 등을 부수며 1교시가 끝나갑니다 우리들의 중학교 생활은 그렇게 멋없이 끝나갑니다 마을 안으로 도랑물이 흐릅니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각시가 빨래를 합니다 칭얼대는 서너살 계집애를 툭툭 달래며 방치질을 합니다 누구의 등을 부수듯이 탕탕 내리칩니다 우연히 친척집에 놀러 갔다가 짝지를 멀리 두고 봤습니다 푸시시한 파마머리로 바뀐 내 짝지는 아마 아직 1교시를 마치지 못했나 봅니다 또 친척집에 갔더랬습니다 궁금해 하지도 않았는데 친척이 알려줍니다 내 짝지가 죽었다 합니다 남편에게 맞아서 죽었다고 합니다 바람을 피우다가 남편에게 맞아 죽었답니다 얌전한게 뒤로 호박씨 깐다고 친척이 말합니다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 없었답니다 소리도 치지 않고 담담하게 죽어갔답니다 그때도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냥 떠도는 이야기처럼 흘러 들었습니다 그냥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흘러듭니다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냥 들어옵니다 내 짝지가 옆에 와 앉습니다 괜찮다고 이제는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니 잊어도 된다고 합니다 30여년이 지나서 작별인사를 합니다. 이제야 1교시가 끝난 모양입니다 바보 같은 내 짝지는… 2018.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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