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춘화 약력: 중국 하얼빈 교사 출신.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시, 수필 다수 발표.
다음 역은
 
나를 비운 텅 빈 서랍에
주춤, 미련 한 가닥 남기고
진열된 시간의 복도를 건너
종착역에 서서
방황하듯 눈을 맞는다
  
빈 공간에 자신을 방목하고
그 여운의 무게를 느끼며
꿈틀거리는 나의 전신(前身)

아, 호수가 깃을 펼치는
마음에서 풀어나자
푸른 향 요동치는 섬나라로
그리움 찾아 떠나자

아직 젊은 그 땅에
자그마한 간판 하나 마련할까

                      2014년 1월


어떤 만남
     

인생길에서
얼마쯤 걸어야
너를 만날 수 있었다
어느 모퉁이에 숨었는지
누구도 예언해줄 수 없는 것은
사람마다 삶의 길이 달라서
같은 만남이란 없기 때문일지라

산등성이에 오르니
아래 풍경이 참 아름답구나

내 더 높은 곳만 바라보고
숨을 헐떡이지 말고
가보지 않은 곳 가 보련다

나 지금 오솔길에 들었다
가로등도 없는
고즈넉하고 울퉁불퉁한 길
주위 풍경이 낮 설다
되돌아 갈까
좀 더 가보자
혹시 더 걸어가면
어떤 경이로움이
나를 기다리지 않을까 ?


           2015년 8월 6일

 

유화 (遗画) (1)
 

잠풍한 나날 찢으며
끼여 든 슬픔 하나
그대는 갔다. 
긴 그림 그려놓고

섬 하나 떠오른다
슬픔이 그 기슭 철석인다

어스레 저문 모퉁이를 
큰 얼굴로 다부지게 선 기억들이
똑-똑 노크한다
너 행복하니?
 
웅크린 시간 속 나를 찾아
배경을 밀어 제치고
길 열어 놓았지

빈 전화번호로
멈춘 그대의 시간
그 모습 진지해서 너무 싫다
 
수없이 철석이고
수많은 조약돌 남기고

침묵이 어울리지 않는 그대
 
어디에 묻어도
빠끔 머리 쳐드는 그대

수수께끼 남기고 떠났구나
그림 진하게 남기고서


         2018년 8월 20

 

유화 (遗画) (2)
  

 

예나 지금이나 익살꾼은
시장은 열려있다

그 옛날 어느 고을에서
세월의 계곡 뛰어 넘어
도시로 창으로 흘러 왔노?

지칠 줄 모르는 이념으로
도시의 전설 만들고
주인공이 된 재간은
하느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그 간의 어록들은 분실되고
그 간의 웃음들은 꽃잎 지고
사진만 수두룩 남아
눈이 시리다

빗발을 헤치고
웃음도 한 순간도
나누어 먹고

여름을 식히는 동굴 속에서
음악같이 흐르는 뱃길 따라
태고시절 신이 만들었다는
그림 속을 유유히 돌면서
신선이 되어 버린 우리
고금을 나르던 즐거움도
지금 전율한다
 
생각을 현실로 엮으며
벽지도 많이 밟던 인간 정(情)
널 붙잡지 못한 세월이 야속해

그대의 에너지로
전등을 만들면 몇도 일가
수력발전소도 하나 만들 수 있겠지


         2018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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