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홀로그램리론의 시각으로 본 홍용암의 망향의식과 민족의식


                                             (미국) 홍군식



하느님은 저 멀리 계시지 않았다.

하느님은 바로 우리 곁에 계셨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들을 지켜보고계셨다.

그리고 그 세상만물을 통찰하고 리드하는 섭리로 서서히 두손을 내밀었다.

그다음 그 거룩하신 손으로 처연하게 피여있는 하얀 민들레꽃을 꺽어드시고 한동안 뚫어지게 들여다보시다가 하는수없다는듯 도리머리를 젓고나서 후- 하고 입김을 불으셨다.

파아랗게 돋아나서 노오랗게 피였다가 다시 하이얀 머리를 쓴 민들레꽃 그 씨앗들은 하느님의 입김에 불려 산산히 흩어진다.

그리고 둥실 두둥실 멀리 멀리 멀리 파아란 하늘 흰구름 아래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한다...

홀로그램의 우주는 그 한알한알의 민들레꽃씨에 한 족속의 슬픔과 사랑과 애환과 서러움과 즐거움과 파란만장한 창세의 프로그램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입력해놓았다.


        시골마을 한 초가에서
        민들레꽃 사랑했던 소년
        동구밖 상사나무 아래서
        민들레꽃이 되였다네
        하염없이 맑은 하늘 바라고 서서
        노오랗게 그리움에 불타다가
        마침내 두둥실
        하얀 민들레씨로 날아올라
        정처없이 떠도는 한송이
        흰구름이 되였다는 슬픈 이야기...

               -- 시 <<흰구름이 된 이야기>> 전문


홍용암은 분명히 하느님이 입깁으로 불어서 흐트러뜨린 그 무수히 많고도 많은 민들레꽃씨중의 한알이였다. 하이얀 락하산마냥 가냘픈 모낭(毛囊)을 타고 하늘을 붕붕 떠다니다가 비바람, 눈보라를 맞으며 북만의 어느 외진 한족마을에 자리를 잡은 작디작은 민들레꽃씨였다. 

그러나 홍용암의 유전인자에는 어쩌면 홀로그램우주의 섭리로 우리 민족이 겪어온 수난과 방랑과 애환의 프로그램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누구보다도 뚜렷이 새겨진듯 했다.

홀로그램이란 빛의 파동의 간섭현상을 리용하여 만든 필림에 의해 나타난 3차원영상을 말하고 홀로그래피란 홀로그램 사진기술 즉 홀로그램기술을 말한다. 이 필림의 놀라운 점은 보통의 사진필림과는 달리 모든 쪼각들이 필림 전체에 기록된 모든 정보를 담고있다는것이다. 하나의 필림은 그것을 무수히 잘라도 그 쪼각들마다에는 각기 전체상이 있어서 자르지 않은 원판과 똑같은 립체상이 나타나는것이다. 말하자면 한알의 사과를 홀로그램에 담은 뒤에 그 필림을 2등분해도 매 등분마다에 나타나는 사진은 반쪽사과가 아니라 완정한 사과이며 이것을 또다시 4등분, 8등분 하여도 여전히 매 등분마다에 나타나는 사과는 완전한것이다.

홀로그램에 대한 연구가 깊이있게 진행됨에 따라 홀로그램리론이 모든 령역에로 확장되면서 홀로그램우주에 관한 연구도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고있다. 홀로그램리론은 바로 이 우주의 시공간이 거대한 하나의 홀로그램이라는 리론이다.

이 우주의 시공간이 거대한 하나의 홀로그램이라는 생각을 떠올린 주요인물은 바로 데이비드 붐(아이슈타인이 가장 총애했고 세상사람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양자물리학자인 런던대학 교수)과 칼 프리브램(스탠퍼드대학 교수, 신경생리학자)이다. 이들의 홀로그램 모델은 현재의 과학의 설명할수 없는 령역인 텔레파시, 념력(念力), 림사체험, 우주와 립체감 등의 초상(超常, 일상적인 범주밖의 정신, 심령현상)현상도 리해될수 있어서 새로운 우주관으로서 많은 과학자들로부터 연구의 대상이 되고있다.

하나의 부분은 전체의 모든 정보를 담고있다는것이 바로 홀로그램우주리론의 핵심 개념이다. 이 리론에 따르면 인간의 두뇌 역시 우주를 닮은 하나의 홀로그램, 즉 홀로그램두뇌라는것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두뇌에서 모든 능력(기억, 인식, 련상 등) 역시 부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각 부분이 전체의 정보를 담고있음을 밝혀냈다. 인체는 우주의 일부분이지만 인체속에 완전한 우주가 갖추어져있다. 또한 인체의 어느 부분도 인체 전체를 포함하고있다. 세포 하나하나마다 그 생물 전체의 정보를 담고있다는 그런 리론이 바로 홀로그램우주, 홀로그램두뇌의 리론이다.

홀로그램우주리론은 또 인간의 모든것이 우주의 투영체라고 주장하는바 이를테면 1년은 365일인데 인간의 혈도는 365개, 1년 24절기와 맞추어 인간의 척추의 뼈마디도 24개, 인간의 신체는 또 24살에 그 성장을 멈추게 되고 24세부터 로화가 시작된다는것이 의학계의 주장이며 일부는 인간의 5장6부는 지구의 5대양6대주의 투영체라고 주장하는 등이다.

홀로그램리론은 사람은 우주의 일부분으로써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봄으로써 우주를 알수 있다는 그런 리론이다. 즉 외부적인것에서 어떤 해답을 찾기 이전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 답을 얻을수 있다는것이다.

과연 이 우주가 홀로그램우주라고 할진대, 과연 인간의 두뇌가 홀로그램두뇌라고 할진대, 우리는 얼마든지 홀로그램 피사체(被射体)를 보아낼수 있다. 은하계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담고있고, 태양계는 또 은하계의 모든 정보를 담고있으며, 지구 역시 태양계의 모든 정보를 담고있고 인간은 또한 지구의 모든 정보, 즉 인간은 비록 작은 령장류에 지나지 않지만 우주의 모든 정보를 담고있는것이다. 한방울의 물에 바다가 담겨져있다는 그런 말이 되겠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한 족속은 인류의 모든 정보를 담고있고 한 가족은 그가 소속된 족속의 정보를 모두 가지고있으며 한 사람은 그 족속, 그 가족, 그 가정이 가지고있는 정보를 모두 담고있다고 할수도 있는것이다. 이것이 유전인자에 의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우리들의 혈관속에 깊이 자리를 잡고있어 우리는 그것을 지우려고 해도 지울수 없다. 다만 때로는 치렬하게,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즐겁게 느끼고 감촉할뿐이다.

홍용암에게 있어서 그의 인생궤적은 민들레와 같은 그런 수난과 방황과 함께 만발의 영광과 결실의 기쁨으로 울긋불긋한 그런 외로운 길이였다. <<시골마을의 한 초가에서/ 민들레꽃 사랑했던 소년>>이 고향을 하염없이 그리다가 망향의 설음을 안고 <<민들레꽃이 되였다>>. 그 <<민들레꽃>>은 맑디맑은 하늘을 바라고 서서 <<노오랗게 그리움에 불타다가/ 마침내 두둥실/ 하얀 민들레씨로 날아올라/ 정처없이 떠도는 한송이/ 흰구름이 되였다>>.

민들레꽃은 봄에 일찍 피는 꽃이다. 민들레꽃은 산이든 벌이든 논두렁이든 길가든 어디라 없이 내려앉기만 하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그런 소박하고 순진하고 견인한 꽃이다. 민들레꽃씨는 다른 꽃씨들처럼 단순히 자기가 자란 그루터기에만 떨어져서 이듬해에 다시 피는 그런 꽃이 아니라 모낭을 나래달린 락하산마냥 잡아타고 바람을 따라 둥실 두둥실 멀리 정처없이 떠다니다가 땅에 내려앉으면 그대로 뿌리를 박고 삶을 영위해가는 그런 생명력이 엄청 강인한 꽃이다. 어쩌면 민들레는 그 방황의 무한함과 떠돎의 무상(無常)함으로 자기의 고향이 어딘지도, 또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쓸쓸한 <<나그네>>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홀로그램우주가 우리 하얀 족속에게, 홍용암의 유전인자에 메모해놓은 프로그램이 아니던가... ???

소년은 남몰래 민들레꽃을 사랑하고 그렇게 애틋하게 민들레꽃을 열련했던 소년은 홀로 그 민들레꽃을 짝사랑하다못해 마침내 <<민들레꽃>>이 되며 다시 <<민들레씨>>로 변하여 두둥실 하늘에 날아올라 정처없이 떠도는 한송이 <<흰구름>>이 되여버린다. 자연의 민들레꽃씨는 그런대로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땅에 내려앉아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자라나서 꽃을 활짝 피우지만 시속의 소년은 민들레꽃씨로 되여 저 하늘에 날아올라 결국 영영 바람에 정처없이 떠도는 슬픈 <<흰구름>>이 되여버린것이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조선인이거나 한국인들과 같은 피줄을 나눈 한 동포이지만 중국에 이주해서부터 그 경력과 력사는 많은 면에서 조선인, 한국인들과는 다른 양상과 측면들을 보이고있다. 조선인과 한국인들은 리조말엽의 봉건가압에서든 아니면 일제의 치하에서든지 고향을 떠나지는 않았다. 적어도 조선반도는 떠나지 않았으며 대체로 나라와 그 운명을 같이했고 사람마다 어느정도 다를수는 있지만 큰 사변들은 다같이 겪었다. 더우기 한국인들은 <<리조말엽 국가의 몰락 → 일제의 침략과 한일합방 → 항일독립운동 → 조국광복 → 6.25전란 → 독재통치 → 민주화운동 → 민주사회>> 등 이런 력사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중국조선족들의 경우는 이와 너무나도 다른 길을 걸어왔던것이다. 중국조선족들의 경우는 말 그대로 민들레와 흡사한 력사적 과정을 겪어왔다. 

조선인, 한국인들은 그것이 나라의 몰락이든 아니면 일제의 치하에서이든 갖은 수난을 겪기는 하였지만 적어도 언어의 장애는 없었고 익숙한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조선족들은 중국땅에 첫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언어의 불통과 거주의 불안으로 말미암아 인간생활에서 가장 기본으로 되는 거주와 언어소통의 여견마저 전혀 없는 가장 렬악한 상황하에서 너무나도 간거하고 생소한 생존의 길을 개척해나아가야 했던만큼 조선인, 한국인들보다도 2중, 3중의 더욱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광복이후, 조선반도에서는 비록 38선을 분계선으로 나라가 분렬된 상황이였지만 그래도 직접 경제건설에 들어서게 되였으나 조선족들은 중국땅에서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에 휩싸이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으며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뒤에도 토지개혁, 3반5반... 등 정치운동을 겪어야 했고 <<6.25전쟁>>때에는 함께 그 전란을 겪음과 동시에 중국의 정치운동도 함께 치르러야 했는바 1950년대 후반에서 시작된 가지가지 정치운동까지 모두 경과하면서 온갖 방황과 멸시와 고난을 다 겪어야 했다. 특히 원주민이 아니고 조선이나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주해왔다는 관계로 더욱 많은 불안과 초조와 수난을 겪어야 했다.

더우기 1950년대로부터 198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이데올로기의 관계로 중국조선족들은 이름할수 없는 막무가내와 선택의 방황속에서 갈팡질팡 헤매고 허덕여야 했다. 조선이나 한국과는 혈연적인 관계 -- 고향과 모국이라는 그런 뉴대를 가지고있으면서도 중국에서 살아가는 등 같지 않은 국제정치권에 속해있었던 관계로 이 모든 계선을 분명히 갈라야 했고 또 한국에 친척이나 련계가 있기만 하면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까지 수없이 겪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실지 결코 한국과만이 아닌, 중국과 다같은 공산주의진영에 속해있는 조선과도 일정한 혈연적 관계를 가지고있기만 하면 엄청 심한 의심과 수모, 기시를 받았으며 대체로 <<중국문화대혁명시기>>에는 다 그러했던것이다.

그 광란의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고 대변현의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조선족들은 또다시 력사의 격변기를 맞이한다. 40여년간의 사회주의적인 계획경제에서 중국식 개혁개방을 통한 시장경제에로 이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현훈증이 일 정도로 크나큰 변화를 겪어야 했고 그만큼 더욱 많은 정신적인 갈등을 경험해야 했다. 

이런 끝없는 변화와 지겨운 정치운동속에서 조선족들은 부득불 자기의 마음을 숨기고 살아야 했고 편안히 살기 위해서는 자꾸만 떠돌아다녀야 했다. 살길을 찾아 이사를 가고 정치운동을 피해 이주를 하고 그렇게 자주 떠돌아다니기만 하다나니 어디를 가도 그 <<뿌리>>가 옅어서 인격의 존중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자기의 발언권을 얻기가 마치 하늘의 별따기였다.


        마가을 황혼 --
        앙상한 나뭇가지에
        외로운 까마귀 한 마리
        까욱까욱 처량히 울부짖는데
        마디마디 피맺힌 그 울음
        불길의 징조라고
        난데없이 날아드는 돌멩이질에
        얻어맞고 또 쫓겨가는 설음
        속후련히 한바탕 울어볼 자유마저
        빼앗긴 그 새가
        한없이 슬프다...

               -- 홍용암 시 <<설음>> 전문 


그 파란만장했고 지지리도 기나긴 방랑과 망향의 이국땅에서 <<까마귀>>는 어느덧 <<속후련히 한바탕 울어볼 자유마저/ 빼앗긴 신세>>로 전락되였다.

이것은 불우한 그의 족속뿐만이 아니라 홍용암의 특수한 개인경력과도 관계가 되는것이다.

홍용암은 1970년 여름 중국 흑룡강성 동녕현 삼구구향 동방홍촌의 한 극빈한 농가에서 칠남매중 막동이로 태여났다. 그가 태여난지 얼마 안되여 탄광에서 일을 하던 아버지가 불행하게도 다리를 다쳐 종신불구로 되였고 설상가상으로 누나가 또 교통사고로 오른쪽 손목이 뭉턱 끊어졌으며 그후에는 둘째형이 목재실이를 하다가 사고로 사망하는 큰 액운을 치르어야 했다. 이렇게 앓아서 죽고 사고로 죽고 하다보니 그의 집에는 7남매중 결국 큰형님과 누이, 용암이까지 겨우 3남매만 달랑 남게 되였다.

련이어 들이닥친 사고와 불행으로 원래부터 신체가 허약했던 홍용암의 어머니는 그만 그 정신적 타격을 이기지 못해 신경착란이 왔고 그 가정은 점점 빚더미에 눌리워 숨조차 쉴수 없는 지경까지에 이르렀다.

홍용암이 다섯살 나던 해, 살림형편이 갈수록 내리막길로만 치달아서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렵게 된 그의 부모들은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던 끝에 그래도 옥수수떡이라도 배불리 먹을수 있도록 하기 위해 드디여 홍용암이를 머나먼 대흥안령의 산간오지에 사는 한 한족집에 양자로 주게 된다.

몇날 며칠을 완행렬차를 타고 생전 보지도 못한 완전 낯선 사람의 품에 안겨, 그것도 말도 전혀 통하지 않는 중국사람에게 끌려서 머나먼 대흥안령이란 생소한 곳에 도착한 철부지 홍용암은 과연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가? 목이 메여라 소리쳐 울면서 수없이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를 찾았을것이다.

그러나 그의 설음은 여기서만 그친것이 아니였다. 양부모네 집에 도착하니 완전히 판판 다른 세상이였다. 생전 조선족이라고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마을사람들은 그날밤 조선족아이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가 궁금하여 저마다 줄을 지어 <<조선사람 구경>>을 왔고 그는 순식간 느닷없이 빙- 둘러싼 중국사람들의 호기심어린 눈길에 포위된 동물원의 <<희귀한 참대곰>>신세가 되고말았다. 무엇이라고 서로 주고 받는지 그들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들을수 없었던 홍용암은 그저 무서움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기만 하였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집안에서 어쩌다 바깥에 놀러나가기만 하면 <<꼬리방즈>>(조선사람을 욕되게 이르는 말)라고 마구 놀려대는 마을 개구쟁이아이들의 혹심한 학대와 조롱이 대상이 되였다. 그리하여 그가 한번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마을애들이 마구 뱉은 침과 쥐여뿌린 돌멩이에 온 얼굴과 머리, 어깨에 침이 잔뜩 게발리고 시퍼렇게 멍이 들거나 눈이 퉁퉁 부어서 돌아오군 하였다.

후에는 마을애들의 그와 같은 버림을 더는 받지 않으려고 부득불 밖에 나가 놀지도 못하고 매일 홀로 집안에 붙박혀 멍하니 앉아만 있던 홍용암은 너무도 외롭고 심심한 나머지 무심결에 양아버지가 가지고 놀라고 던져준 색연필과 종이로 그림을 조금씩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매일 그림만 그리다보니 후에는 그 그림재간이 많이 늘어 썩 잘 그리는것을 본 양아버지는 장차 커서 화가가 되라고 그에게 연필과 책을 사다주었다... 

그렇게 만 3년세월이 흘렀다. 하늘이 우에서 내려보다못해 어린 홍용암이 부모님 슬하를 떠나 외롭게 기시를 받으면서 살아감을 불쌍히 여겼던 모양인지 어느날 양어머님의 친녀동생이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낳아 부득불 언니에게 맡기게 되는 바람에 홍용암은 불행중 다행으로 다시금 친부모님 곁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뜻밖의 큰 행운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조선말을 할줄 몰랐다. 이전에 양부모집으로 갈적에는 중국말을 몰라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별의별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하였는데, 이번에는 또 아이러니하게도 학교갈 나이가 되여 그 마을 소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지만 조선말을 전혀 한마디도 알아듣지도 할줄도 몰랐다. 그러자 마을의 조선족애들이 그를 <<싼둥방즈>>(중국사람을 욕되게 이르는 말)라고 놀려주고 업신여겼다.

이런 홍용암의 경력을 보았을 때 그의 시 <<설음>>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것인지 잘 알수 있다. 물론 이 시는 단순히 <<언어>>에 대한 말만이 아니다. 부동한 언어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라기보다 할말을 마음대로 시름놓고 할수 없는 그런 억압된 심정의 발로라고 해야 할것이며 불행한 한 슬픈 족속의 애환을 담은 시라고 해야 할것이다.

어쩌면 홍용암의 동년은 어제날 우리 민족의 최초 이민사와도 너무 흡사하며 또 어떤 일면에서는 우리 민족의 오늘의 상황과도 너무나 흡사하다.

고국을 떠나 부득불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와야만 했던 월경민족인 조선족과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과 부모님을 떠나 대흥안령 오지의 시골마을 한족집에 양자로 떠나가야만 했던 홍용암, 그리고 몇년뒤에 다시 친부모님 곁으로 돌아오는 홍용암과 오늘날 돈벌이를 하기 위해 한국나들이를 출세처럼 여기면서 기를 쓰고 찾아가는 조선족들,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조선말을 모른다고 기시를 받는 홍용암이나 옛고국인 한국으로 찾아갔지만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인으로서 <<3등민>>대우를 받으면서 무시당하는 조선족들이나 사실상 조금도 다를바가 없다. 우연한 상사성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홀로그램우주리론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 역시 필연적이고 엄연한 홍용암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기실상 중국에서 생활한 40-50대의 조선족들은 거의 다가 홍용암이와 비슷한 인생경력을 가지고있다. 다만 홍용암의 한몸에서 조선족들의 그 눈물겨운 이민사와 생활사, 수난사가 더 전형적이고 대표적이고 확연하게 재현되였을뿐이다.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여서부터 조선족들은 토지개혁에 이어 호조조와 합작사, <<3반5반>>, 인민공사, 대약진을 거쳐 1960년대 후반에는 력사상 류례가 없었던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거쳤다. 이런 정치운동들은 어떤것은 당시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뒤에 그 정권을 공공히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운동들이였겠지만 어떤 운동들은 사회와 국민들에게 인위적인 재난만을 가져다주는 극 <<좌>>적인 운동으로 백해무익한 운동들이였다. 중국에서는 물론 전 세계가 다 잘 알고있는, 10년간에 걸친 <<중국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바로 그중의 하나이다. 이는 사실상 일대 대재난이였으며 문명과 문화에 대한 일종 말살이였다.

1970년에 출생한 나어린 홍용암은 물론 문화대혁명에 직접적으로 참여할수도 없었고 그런 운동과 인연이 없어야 했다. 하지만 비록 어린 나이지만 홍용암은 그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너무 엄청난 충격을 받아야 했다.

비록 한족마을에서 3년간 자라면서 조선말을 새까맣게 전부 잊어버린 홍용암이였지만 부지런히 배우고 애쓴 보람으로 그는 인차 우리말을 잘할수 있게 되였으며 소학교 3학년을 다닐 때에는 공부도 잘했지만 또 각 방면에서 우수하기도 하여 반급의 학급장을 맡은것은 물론 <<홍소병>>(중국 문화대혁명시기 우수한 소년아동을 대상으로 한 조직)의 중대장직까지 맡게 되였다. 원래부터 승벽심이 강했던 홍용암인지라 그는 항상 모든 면에서 제일 앞장서려고 애썼다.

비록 공부를 제일 잘해서 각 학과목의 성적이 모두 학급에서 으뜸을 차지하였지만 유독 음악에서만은 천부가 없었던지 노래시험을 칠 때마다 70점을 별로 넘기지 못해 학기말시험 총점수에서 늘 <<꾀꼬리목청>>인 부학급장 한옥이라는 녀자애한테 몇점씩 뒤지여 2등에 주저앉군 하였다. 이에 자존심이 크게 상한 홍용암은 반급의 학기말시험총화때에 <<나는 한옥이를 타도하고/ 오늘은 1점 맞고/ 래일은 2점 맞고/ 모레는 3점을 맞고/ 장차 새 중국을 건설하겠다!>>라는 즉홍시같은 발언을 하였는데 그게 그렇게 큰 화근이 되여 순식간 그를 풍지박산으로 만들줄이야...?!!! 자기를 <<타도>>하겠다는 홍용암이의 발언을 아니꼽게 여기던 한옥이가 그 발언내용을 그대로 적어서 선생님한테 갖다 바쳤는데 학교에서는 이를 아주 <<중대한 사건>>으로 보고 엄중하게 취급했다.

당시는 바로 <<4인무리>>가 갓 꺼꾸러지고 그들이 본보기로 내세운 본보기 인물이였던 <<백지영웅>> 장철생을 호되게 비판하던 때라 학교지도부에서는 홍용암이가 시대를 거스르는 <<반동시>>를 썼다고 인정하고 전교 사생들앞에서 전형비판대회를 열고 한차례의 철저한 사상품덕교육을 진행하였다. 따라서 홍용암은 하루아침새에 목에 맨 붉은 넥타이를 회수당함과 동시에 학급장과 중대장직에서 나떨어지는 엄청 큰 타격을 입어야 했다. 어린 홍용암이 제일 참기 어려운것이 바로 학생들이 그를 볼 적마다 <<장철생이 온다!>>, <<반동시인이 온다! 대시인이 온다!>>, <<쳇, 그 주제에 뭐 시를 쓴다고... ?!>>라고 빈정대는것이였다. 이렇게 되자 평소에 그와 잘 놀며 절친하던 애들도 인차 그를 멀리했고 모두 그를 보기만 해도 온역을 피하가듯 멀찌감치 피해가군 하였다. 

이번 좌절로 그처럼 열정적이고 활발하던 홍용암은 점차 우울하고 고독하고 괴벽한 성격의 어린이로 변해갔다. 그는 평소 늘 친구도 없이 홀로 지냈다.

그리고 자주 애들의 놀림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문득 반발심이 솟구쳤다.

<<뭐? 대시인이라고? 그래 좋아, 대시인이라면 대시인이지! 너희들에게 본때를 보이는 진짜 시인이 되고야 말테다...>>

이때로부터 그는 워낙 화가가 되려던 꿈을 버리고 시쓰기에 전념한다.

이런 홍용암의 경력 역시 중국조선족들의 경력을 무척이나 닮았다. 문화대혁명기간, <<한국>>에 친척이 있거나 조선에 친척이 있어 <<남조선특무>>거나 <<북조선특무>>로 몰려 인권을 박탈당하고 <<특무>>라는 간판을 목에 걸고 대중들앞에 나서서 <<비판투쟁>>을 받은 조선족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하여 조선족들은 누구도 감히 자기의 친척이 한국이나 조선에 있다는 말을 절대 하지 못했고 또 일부 심보가 바르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의 비위에 거슬리기만 하면 그 보복과 타격의 수단으로 당시의 <<혁명위원회>>에 <<누구누구는 남조선에 친척이 있다>>느니 또 <<누구누구는 북조선에 친척이 있다>>느니 하면서 그렇게 고자질해바쳤다. 그러면 설령 실지 한국이나 북조선에 친척이 근본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몇개월간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면서 괴로운 취조를 당해야 했고 혹시 진짜 친척이 있는것으로 드러나면 그후부터는 아예 아무런 정치활동에도 참가할수 없음은 물론 그 자녀들 역시 학교나 사회의 소년아동단체나 청년단체에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완전히 소외되여버리며 중대한 참군, 대학입학, 연수추천 등에는 더욱 일절 그 자격을 전부 상실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겪었던 홍용암이기에 후날 그는 <<개들이 서로 욕지거리를 할 때 대방을 <인간같은것>이라고 욕을 한다>>고 했다. 즉 --


        인간들이 
        서로 욕지거리 한다
        -- 개같은것이...

        개들도 
        물고 뜯을 땐
        개나라에서
        가장 험한 상욕을 한다
        -- 인간같으니라구야!
        에잇, 퉷 퉤...

              -- 홍용암 시 <<욕>> 전문 


이국땅에서 갖은 정치운동을 다 거치면서 풍상고초를 많이도 겪은 족속이 바로 중국조선족들이다. 통계에 따르면 문화대혁명기간 <<계급투쟁>>으로 맞아죽은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이 연변이라고 하며 문화대혁명기간 투쟁이 가장 격렬하고 심했던 곳 역시 연변이라고 한다. 연변이 그럴뿐만 아니라 조선족들이 살고있는 기타 지역도 그 대부분이 문화대혁명기간 <<혁명투쟁>>을 가장 치렬하고 가장 철저하게 했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설음도 제일 많았고 애달픔도 제일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못생기고 가난하고 민망스럽게도 허리가 뭉턱 동강난 고향이요 모국이요 어머니나라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오매불망 목메이게 소리쳐 불러보는 기다림의 고향이요 소년이 기도(홍용암의 시 <<기도>>, 시집 <<소녀와 소년>>에서)로써 미래를 기약하는 모국이며 꿈에도 간절히 그리는 어머니나라이다. 수백년에 걸쳐 외세의 침략, 통치배들의 무능과 수탈과 독재로 고통에 고통만을 거듭해온 백의민족, 그래서 홍용암은 가슴이 아팠고 그 눈물을 억수로 흘리고싶었다.


         이른 새벽
        꽃잎에 맺힌 이슬
        모든 꽃들이 흘린 눈물
        그 눈물들을 한꺼번에 다 마시고
        그 눈물속에 깃들은
        수많은 가슴아픈 사연들을 위해
        나도 동해바다 같은
        하나의 커어다란 눈물주머니가 되여
        짜디짠 눈물들을
        끝없이 자꾸자꾸 쏟고싶다...

               -- 홍용암 시 <<동해바다>> 전문


홍용암에게 있어서 모든 꽃잎들에 맺힌 이슬은 구슬픈 눈물, 애처로운 꽃들이 흘린 수많은 가슴아픈 사연이 깃들고 그런 슬픔을 가득 담은 한맺힌 눈물이였다. 그래서 그 <<눈물>>을 보고 홍용암은 저도 모르게 자기의 가슴아픈 사연을 련상하게 된다. 아직 한번도 찾아가본적이 없는 전설의 고향, 할아버지때로부터 멀리멀리 떠나온 원 고향, 너무나도 가난에 찌들리고 억압받다못해 부득불 살길을 찾아 정처없이 등지고 허위허위 떠나온 <<조상들의 뼈를 묻>>은 그 조국... 그래서 홍용암은 눈물을 흘리고싶었을것이다. 그 수난의 하얀 족속들이 흘린 이슬같은 눈물들을 한꺼번에 다 받아마셔버리고 그도 동해바다같은 커어다란 <<눈물주머니>>가 되여 그 짜디짠 눈물들을 속후련히 한바탕 끝없이 자꾸자꾸 쏟고싶었다. 그 눈물은 타향살이의 고통과 설음과 억울함을 하나도 빠짐없이 간직한, 뼈속까지 사무치는 그 애환과 원한과 그리움이 걸쭉하게 반죽된 바다같은 랑자한 눈물이였다. 그래서인지 홍용암의 시에는 눈물이 많이도 등장한다.


        흰구름 한송이 유유히 떠도는
        하늘 아래
        천년을 고독한 청산
        그 기슭을 감돌아 흘러가는 물

        슬프게도 
        시 쓰는 한 소년이 있다...

               -- 홍용암 시 <<풍경>> 전문


보다싶이 홍용암에게 있어서 <<풍경>>도 눈물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아도 거기에 도취되고 그속에서 즐기게 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한줄기 눈물로 되여 흐른다. 즉 <<흰구름 한송이 유유히 떠도는/ 하늘아래/ 천년을 고독한 청산/ 그 기슭을 감돌아 흘러가는 물>>도 홍용암의 눈에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이는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흰구름>>처럼 정처없이 떠도는 할아버지, 할머님이 두고 온 원 고향이 련상되면서 그 고향을 그리는 <<아련한 눈물>>로 보인다. 시에 비록 <<눈물>>이라는 말은 직접 등장하지 않고있지만 <<슬프게도/ 시 쓰는 한 소년이 있음>>으로 하여 그 강물이 더더욱 구슬프게 출렁이는 <<눈물>>로 화하여 슬프게 흐르게 되는것이다.

홍용암에게 있어서 우리민족은 <<아픔에 울고있는 민족>>(홍용암의 시 <<아픔에 울고있는 민족>>, 시집 <<흰구름이 된 이야기>>에서)이요, 어머니나라는 <<하마트면 대동맥이 끊길번 하던>> 그런 수난의 나라(홍용암 시 <<력사의 이주민족>>, 시집 <<다리를 놓자>>에서)였다. 그것이 홍용암의 눈에서 샘처럼 끝없이 솟구치는 눈물을 뽑아냈다...

홍용암에게 있어서 고향은 또 숙명처럼 <<가난>>과 이어지는 그런 쓸쓸한 존재였다.

가정이 째지게 가난했던 홍용암은 소학교때부터 평소 늘 스스로 폐품과 파철을 주어 팔아 필요한 학용품을 샀고 방과후 여가를 타서 마른 소똥, 돼지똥 등을 주어 모아 학교에 바쳐서는 그 당시 <<거름줏기모범학생>>들에게 상으로 주는 학용품을 받아 쓰기도 하였으며 고등학교에 입학한 다음에는 가정교사일을 찾아하는 한편 자주 삯일도 하고 부지런히 시를 써서 발표해 그 원고료를 받는것으로 학업에서 꼭 필요한 <<비상자금>>을 마련하군 하였다. 


        헐벗은 민둥산
        강마른 논밭
        찌그러진 오막살이
        구멍난 문짝
        예가 바로 두고 온
        나의 옛고향
        그곳에다 태줄 묻고
        자라났다네

        귀빠진 삿자리
        다 해진 이불
        누데기옷 걸치고
        배고파 울던
        내 고향은 이렇듯
        가난하여도
        그 품에서 자라며
        정이 들었네

        누룽지 한덩이
        보에 싸들고
        먼길 걸어 타박타박
        학교로 가던
        지금은 변모했을
        나의 옛고향
        아, 그립고도 그리워
        잊을수 없네.

            -- 홍용암 시 <<나의 옛고향>> 전문


홍용암에게 있어서 고향은 이처럼 빈궁한 <<가난의 대명사>>인 고향이였지만 아무리 그토록 궁핍하고 어려울망정 언제 어디가나 가장 잊을수 없는것이 바로 사무치게 그리운 그 고향이요 꿈에도 목메여 불러보는것 역시 한없이 정다운 그 고향이였다.

그러나 이 역시 홍용암의 마음속 깊이에 <<뿌리>>로 간직된 진정한 고향은 아니였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고향의 의미는 무엇인가... ??? 작게는 그가 태여나서 자라난 그 개체로서의 육체적 고향이요 크게는 그와 그의 선조들이 옛날 멀리 남쪽에 두고 떠나온 하얀 족속의 원 고향... 그 모두가 그의 가슴에 깊이 각인된 소중한 고향이였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결국 진정한 고향은 종국적으로 <<흰구름>>처럼 흩어진 하얀 족속의 <<뿌리의 원 고향>>인 <<둥실둥실 북풍을 타고 가고싶은 남쪽나라>>였다.

그래서 홍용암은 시에서 백의족속의 한 후예인 자기를 늘 <<흰구름>>, <<한쪼각의 흰구름>>, <<민들레 꽃씨가 화하여 변한 한송이 흰구름>>이라 형상하였고 그런 자기의 혈관속에 맥맥이 굽이쳐 흐르는 피도 그 무슨 붉은 피가 아니라 <<백색의 끓는 피>>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오매불망 그리는 마음의 고향 -- 그 <<남쪽 나라>>는 아직도 그 허리가 뭉턱 두 동강난 <<하마트면 대동맥이 끊길번>>한 그런 불행한 나라였고 또 그럼으로 하여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그런 비극의 땅이였다. 

그래서 홍용암은 꿈에 자기도 동강난 조선반도의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 불씨를 훔치다가 백두산 절벽우에 매여달린채 신음하고있는 <<소년 프로메테우스>>(홍용암의 시 <<소년>>, 시집 <<흰구름이 된 이야기>>에서)가 되여보기도 하고 심지어 그가 어렸을 때 지은 동요에서마저 <<삼팔 삼팔/ 무엇이 삼팔?/ 남북조선 지도에/ 38분계선이 삼팔/ 38분계선은/ 온 민족이 울고 우는/ 원한의 계선!>>이라고 목메여 웨쳐 불러보기도 한다(시 <<삼팔>>, 동시집 <<사슴뿔나무>>에서).

현실속에서 인간의 육으로는 절대로 마음대로 드나들수 없는 그 마음의 고향, 뿌리의 고향에 너무나도 한번 찾아가보고싶어서 고민하고 모대기고 몸부림치다가 드디여 한쪼각 <<흰구름>>이 되여 국경선이나 삼팔분계선의 구애를 받지 않고 상상속에서나마 고향나라의 남북을 자유자재로 마음껏 오가기도 한다(시 <<한쪼각 구름이 되여>>, 시집 <<다리를 놓자>>에서).

그 뼈저린 가난과 고통과 슬픔, 그리고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망향의 한은 홍용암의 시 전체에 걸쳐 그물처럼 얼기설기 서려있으며 또 홍용암의 상술한 고난의 경력과 민족언어에 대한 콤플렉스, 그리고 자기 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은 그의 시로 하여금 많이는 완곡한 시의 표현방식보다는 직설적인 서사방식을 더 많이 나나내고있으며 복사적인 사유방식보다는 자기의 정감을 가장 격렬하고 순박하고 직접적으로 표달할수 있는 직선적인 사유방식을 많이 보이고있다. 이런 경향은 <<대성질호>>, <<다리를 놓자>>, <<태양은 부른다>> 등을 비릇한 홍용암의 시의 곳곳에서 잘 보여주고있다.

바로 고향나라의 <<통일>>을 소원하고 더 밝은 미래에로 나아가며 흩어진 <<민들레꽃>>씨앗들을 한품에 안아줄 고향을 꿈꾸는 그런 민족성원 모두의 간절한 바램을 자기의 시에 절절하게 담았기에 홍용암의 시들은 암유와 굴절과 낯설기를 거부하고있다. 이 또한 홍용암의 시의 자기의 독특한 풍격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한창 두각을 내밀기 시작하던 학생시인으로서 가난때문에 대학을 중퇴했어야 했던 홍용암, 그는 자기의 비상한 경영능력과 기업인의 예리한 안광으로 끝내 그 모든 가난과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자기의 소원대로 시와 경영과 문학과 문화가 한 울타리안에서 아름다운 하나로 잘 조화를 이루는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갖춘 <<왕국>>을 이뤄냈다.

홍용암시인이 장차 더욱 민족적 기백이 넘치고 민족의 넋을 잘 살린 훌륭한 시작들을 더욱 많이 창작해낼것을 기대하면서, 끝으로 홍용암시인의 시 <<어머님을 그렸다네>>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한번도 안겨못본 조국의 품 
        수륙만리 이국에서 나서 자라도
        커갈수록 그리운 사랑의 품
        어머님 그 품을
        잊은적 없네 
        잊은적 없네

        한번도 보지 못한 어머님 미소
        높으신 그 사랑 받지 못해도
        혈관속에 맥맥이 굽이치는건 
        백색의 끓는 피
        어머님의 피라네
        어머님의 피라네

        네거리 류랑하는 고아처럼
        끝없이 타향에서 떠돌아도
        언제나 어디서나 어머님 주신 
        흰옷을 입고서
        어머님을 그렸다네
        어머님을 그렸다네. 


            ( 2007년 3월 창작, 2017년 7월 미국 뉴욕에서 재수정. 재미동포작가 겸 문학평론가임.)



 
 


 

 

 

 

 

 

 

 

 

참고문헌:
홍용암시집: <<사슴뿔나무>> (연변인민출판사)
홍용암시집: <<흰구름이 된 이야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홍용암시집: <<려행자>> (연변인민출판사)홍용암시집: <<다리를 놓자>> (평양출판사)
홍용암소년시집: <<소녀와 소년>> (한국학술정보출판사)
홍용암동시집: <<꽃무지개>>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홍용암동시집: <<나는 시골아이>>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홍용암동시집: <<사슴뿔나무>> (연변인민출판사)
홍용암시해설집: <<함께 나누는 시의 맛과 향기>>(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홍용암시작품연구세미나기념특집: <<청춘표류의 고독한 인생고백>> (연변교육출판사)
학술평론집: <<백운 홍용암시문학연구>> (청심정출판사)
홍용암산문집: <<9년간의 하해, 그 잃은것과 얻은것>> (청춘극장사).​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