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류배지까지 찾아가 사랑을 나눈 진옥

 조선시대 녀류시인들 시와 사랑 5: 

 

 

 

                                         대문호 정철이 감탄한 기녀의 화답시                                          ㅡ 류배지까지 찾아가 사랑을 나눈 진옥                                                            백운 (엮음)                                                한밤중에 문득 나타난 절세가인      쓸쓸한 가을밤, 온갖 잡생각으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못드는데 문득 똑똑똑 조심스레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ㅡ, 이 밤중에 누구시오...?!"      세상만사가 귀찮아진 정철(1536~1593년)이 자리에 비스듬히 누운채로 심드런하게 반응하니, 이윽고 문이 살며시 열리면서 소리없이 사뿐사뿐 들어서는 한 녀인... 금시 어둡던 집안이 환히 밝아지는것 같았다.      (어ㅡ, 이거 혹시 내가 여우귀신에게라도 홀리운게 아닐가...???)      하얀 장옷으로 얼굴을 살짝 가린 녀인의 느닷없는 출현에 정철은 끔쩍 놀랐다. 하지만 그가 더욱 놀란것은 그 녀인이 반쯤 덮어쓴 얄포름한 장옷을 천천히 벗자 안개가 걷히듯 서서히 드러나는 눈부신 화용월태(花容月態) ㅡ 꽃같은 얼굴과 달같은 자태의 절세가인이였다.      들어온 그 녀인이 곱게 무릎을 꿇고 삼가 엎드려 큰절을 올리더니 아미를 다소곳이 숙인채 자아소개를 하는것이였다.      "소녀는 천기(?妓) 강아 진옥(眞玉)이라 하옵는데, 일찍부터 대감의 성망을 익히 들어 흠모했었사오며 더우기 대감의 글도 많이 보고 가르침도 많이 받아보았나이다..."      정철은 두눈이 더더욱 휘둥그래졌다.     "어ㅡ?! 강... 강아... 진옥...???"      진옥이가 "그럼 제가 거문고를 타올릴가요?"하고 말하고는 들고온 거문고를 타면서 랑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는다.            居世不知世, 戴天難見天;           知心唯白髮, 隨我又經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을 모르겠고           하늘아래 살면서도 하늘 보기 어렵구나          내 마음을 아는것은 오직 백발 너뿐인데           나를 따라 또 한해 세월을 넘는구려!     외롭고 힘들고 곤고한 귀양살이와 살같이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는 무정한 세월의 무상함... 그러한 지쳐가는 정철의 피페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생생히 표현한 시이다.      당시 조정의 대신이였던 정철(鄭澈)은 광해군(光海君)의 세자책봉을 건의하다가 선조(宣祖)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1591년 6월에 평안도 강계(江界)로 귀양을 오게 되였던것이다.      정철(鄭澈)이 류배지(流配地)에 우거해있을 때 문득 찾아온 이 아릿다운 녀인이 바로 진옥(眞玉)이라는 기생인데, 사실 정철이 선뜻 그녀를 알아보지를 못해서 그렇지 그들 사이의 만남은 그것이 처음이 아니였다. 도리여 아주 오래전인 언녕부터 깊은 인연이 맺어진, 서로에 대한 정분이 꽤나 두터운 사제간이였다.      10년전인 1581년 12월,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된 46세의 송강 정철은 남원에 내려갔을 때 감영에서 자미(紫薇)라는 아주 예쁜 동기(童妓)를 처음 만난다. 그 소녀의 원래 이름은 진옥(眞玉)이고 자미는 관아에 등록된 기명(妓名)이였다.      당시 불과 열여섯살의 애티나는 동기 자미는 송강과 한방에서 함께 밤을 보냈지만 워낙 동정심이 많고 결백한 성품의 문사인 정철은 그날밤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송강의 인간다움에 깊이 감복한 자미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 흠모하게 되였고 송강 또한 아름답고 총명하지만 너무 어린 자미에게 음심(淫心)을 버리고 오히려 인자한 글스승이 되여 짬짬이 시문(詩文)을 가르치며 정신적 교감을 나누게 된다.      자미(紫薇)는 일심으로 송강을 숭배한 나머지 후에 정철의 호인 "송강(宋江)"의 "강(江)"자에 녀자라는 의미의 "아(娥)"자를 붙여 자기의 호를 "강아"라고 지었다고 한다. 즉 "송강의 녀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러한 호시절도 잠시간, 송강은 도승지로 제수되여 열달만에 다시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리별의 눈물을 흘리는 자미에게 송강은 석별의 시를 주며 따뜻이 위로했다.              자미화를 읊다(詠紫薇花) / 정철        一園春色紫薇花, ?看佳人勝玉釵;       莫向長安樓上望, 滿街爭是戀芳華。      봄빛이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핀 그 얼굴은 옥비녀보다도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 모두 너를 사랑하리라!     그후, 강아는 언제든 다시 송강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인고(忍苦)의 십년을 버텨낸다. 그러나 얼마전에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송강이 북쪽 강계로 귀양을 갔다는것이고, 또 그곳에서 홀로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너무나 외롭고 초라하고 쓸쓸하게 지낸다는것이였다.      강아 진옥은 못잊을 스승인 정철을 만날수 있다는 희망으로 어느날 녀분남장(女扮男?)을 한채 보짐을 싸가지고 타발타발 혼자 꼬박 삼천리 멀고 험한 길을 걸어서 마침내 초막집에 "위리안치(圍籬安置, 가시나무에 둘러싸여 집밖으로의 출입이 금지되는 류배)"되여 홀로 책을 읽고있는 송강을 찾아낸다.      오래동안 험한 길을 걸어오느라 몹시 초라하고 어지러워진 자신의 행색을 깊이 감촉한 진옥은 마음같아선 한달음에 달려가 와락 송강의 품에 안겨 대성통곡하고 싶었지만 애써 울컥 솟구치는 눈물과 그리움을 억누르며 진정을 했다.       먼저 부근에서 누구도 없는 계곡의 맑은 내물을 찾아가 깨끗하게 목욕재계하고 갖고온 보짐에서 제일 고운 옷을 꺼내 정히 갈아입은다음 정철을 위로할 술과 음식, 거문고를 들고 이렇게 한밤중이 되여서야 불쑥 나타나게 된것이다.     시를 다 읊고나서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만 쏟고있는 진옥을 송강은 처음에는 선뜻 알아보지 못했다. 얼마후 자초지종의 사연을 듣고나서야 정철은 믿기지 않는 눈앞의 현실에 그저 그 모든것이 꿈만 같고 얼떨떨하여 정신이 혼미해질뿐이였다...                                     귀양온 류배지에서도 사랑은 불타오르고      그날밤, 그렇게 眞玉(1566~?)을 만나고난 후로부터 정철은 한동안 그녀의 지극한 뒤바라지와 보살핌, 학이 너울너울 춤추며 날아예는듯한 거문고의 선률속에서 점차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이고 기대이며 잠시나마 정배살이의 우울함을 잊을수 있었다.     험악한 류배기간이라 그야말로 견디기가 너무 어려웠을 로구(老?)로 말하면 하늘에서 문득 내려온 선녀와 같은 강아 진옥의 뜻밖의 출현은 참으로 불행중 천만다행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점점 가까와진 두사람 사이의 애틋한 정과 사랑의 감정은 더더욱 무르익어갔고, 드디여 정철은 10여년전의 그 애티나는 너무 어린 소녀가 아니라 인젠 완전 탱탱 무르익은 성숙한 숙녀로 된 그토록 사랑스러운 그녀를 가슴에 꼭 품어주고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갈마들었을것이다.      교교한 달빛이 창문새로 살며시 스며드는 어느 황홀한 밤, 두사람은 그날도 진옥이 정성껏 차려갖고온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련거퍼 술 몇잔이 들어가자 울컥 오른 취기에 거나해진 송강이 마침내 조선의 풍류를 아는 대문호답게 참지 못하고 매혹적인 그녀에게 로맨틱한 련애시 한구절을 날린다.     "권화악부(權花樂府)"에 나오는 "정송강여진옥상배답(鄭松江與眞玉相酬答)"이란 시(詩)이다.        옥이 옥이라커늘 반옥(半玉)인줄 알았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적실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어 뚫어볼가 하노라!      송강 정철(鄭澈)의 노래가 끝나자 거문고를 뜯던 진옥(眞玉)은 기다렸다는듯이 조금도 우물쭈물하지 않고 데꺽 응수하기를 ㅡㅡ       철이 철이라커늘 섭철(攝鐵)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골풀무 있어 녹여볼가 하노라!      순간, 정철은 입이 딱ㅡ 벌어지게 깜짝 놀랐다. 그녀의 즉석 화창(和唱)은 조선 제일의 시인 정철을 두손 바짝 들 정도로 완전히 탄복시켰던것이다. 정철의 시조에 자자구구(字字句句) 대구(對句)형식으로 서슴없이 불러대는 眞玉은 정녕 뛰여난 시인이였다. 참말로 뛰여난 그 스승에 뛰여난 그 제자였다.       두사람의 은유적 표현 역시 참으로 뛰여나다.       "반옥"은 진짜 옥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인조옥(人造玉)이고, 살송곳은 육(肉)송곳으로 남자의 성기를 은유하고 있는데, 眞玉은 그 뜻을 듣자마자 쉽게 알아차리고 있는것이다.      뿐더러 오히려 한술을 더 뜬다. "반옥(半玉)"에 대해서는 "섭철(攝鐵)", "진옥(眞玉)"에 대해서는 "정철(正鐵)", "살송곳"에 대하여는 "골풀무"의 대구(對句)로 응수하며 놀라운 절창을 뽑는데 너무나도 절묘한 기지와 재치와 해학이라고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섭철(攝鐵)은 잡것이 섞인 순수하지 못한 쇠를 말하고, 정철(正鐵)은 잡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철(鐵)이며, "골풀무"는 불을 피울 때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인데 여기서는 남자의 성기를 녹여내는 녀자의 성기를 은유하고 있는것이다.      시조집 "권화악부(權花樂府)"에 수록한 기생 진옥의 그 시조작품의 작자를 "송강 첩(松江妾)"이라고 기록되여있는데, 시조문헌중에 "누구의 妾"이라고 기록되여있는것은 오로지 그녀가 유일하다. 眞玉도 기녀(妓女)임에 틀림없는데, "松江妾"이라고 기록된것은 송강 정철의 지위와 명성때문일것이다. 조선의 사회제도속에서 량반의 축첩은 조금도 허물이 아니였는데, 이런 기록이 더 많이 있을수 있으련만 유독 "松江妾"이라는 기록은 眞玉에게서만이 보인다.      그 누가 이들의 노래를 추잡한 시정잡배들이 오입질하기 위하여 기생(妓生)을 유혹하는 방탕한 노래라고 할수 있겠는가?!      평소 흠모하던 은사이자 대문장가인 정철이 가장 곤궁에 빠졌을 때 조금도 서슴없이 그런 그에게 향한 일편단심 충성스런 녀인의 육체와 정신이 합일을 이루는 숭고한 행위는 진실로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행위 그 자체였을것이다.      그날밤, 서로 철철 정이 넘쳐 흐르는 26세의 요조숙녀와 56세의 귀양온 나그네는 특수한 신방인 류배지의 한 초가집에서 마침내 뜨거운 한몸이 되였다...   
 
                                기녀(妓女) 자미에서 다시 비구니(女僧) 소심으로      선조 25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정철이 그해(1992년) 5월 오랜 류배생활에서 풀려나와 다시 높은 벼슬길(전라, 충청도지방의 도체찰사)에 나가게 되였을 때 진옥(眞玉)은 매우 기뻐하면서도 한편 리별하기 아쉬워 눈물을 흘리였다. 송강(松江)역시 적소의 생활을 청산하는 기쁨속에서도 진옥(眞玉)과 헤여지는 일이 너무 마음아팠다.      마지막으로 송강(松江)을 환송하는 자리에서 진옥은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人間此夜離情多, 落月蒼茫入遠波;        惜間今硝何處佰, 旅窓空廳雲鴻過。       리별하는 이 밤은 아쉬운 정 더 많아       슬프도다 망망한 물결우에 달이 지네        오늘밤 그대는 어디에서 묵으려나        외로운 기러기만 창가에 울고 가네.              ㅡ 진옥 시 "송강을 보내며(送松江)"      송강이 떠나간후 진옥은 정철과의 사랑했던 그 나날들을 생각하며 밤마다 뜬눈으로 지새웠다.       후에 그 소문을 들은 송강의 부인 유씨는 깊이 감복되고 느껴지는바가 있어 한양으로 올라온 정철더러 그 眞玉을 데려오도록 권하였다.      감개무량한 정철(鄭澈)역시 편지를 보내여 진옥(眞玉)에게 그 뜻을 물었으나 그녀는 이제 금방 복직한 송강에게 혹시 불리한 루가 될가봐 끝내 거절하였고 강계(江界)에서 계속 혼자 남아 어렵게 생활하면서 가끔 정철과의 짧았지만 아름다왔던 그 인연을 회상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드디여 그리움을 참지 못한 진옥은 다시 송강을 만나기 위해 홀로 멀고 험한 길을 떠난다. 하지만 전란때문에 끝끝내 송강을 더 만나지 못하고 왜병에게 붙잡히자 적장을 유혹하여 평양성탈환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한다.      이듬해(1593년), 송강 정철은 왜구들을 물리치는데 일조할 지원병을 요청하러 중국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다. 그러나 귀국후 명(明)나라에서 조선에 군사를 파병할 뜻이 없는것처럼 거짓보고된 동인(東人)들의 모함을 받아 부득불 스스로 사직을 자청한다. 그리고 재상의 직함은 보류한채 잠시 강화도 송정촌(松亭村, 지금의 숭뢰리)으로 물러나 청빈한 생활을 하다가 그해 12월 18일 58세의 나이로 너무 청렴한 탓에 그만 굶어죽고 만다.      정철은 이듬해인 1594년 2월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 조촐하게 장사되였는데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1624년(인조 2년)에 관작이 회복되고 그후 또 1665년(효종 6년)에 그 무덤이 다시 충북 진천으로 이장되였으며 1684년(숙종 10년)에는 마침내 임금으로부터 그의 공적을 높이 기리는 "문청"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철이 세상을 떠나가자 진옥은 송강의 무덤이 있는 부근의 절로 들어가 머리를 깍고 법명 "소심(素心)"이라는 녀승(女僧)이 되여 날마다 송강의 묘를 돌보고 그 명복을 기원하는 념불을 하며 참선을 다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소심보살도 죽자 그녀가 소속된 사찰에서는 린근마을 사람들과 함께 그녀의 생전의 유언과 뜻에 따라 그녀를 정송강의 묘곁에 정성껏 묻어주었다.      야속하지만 후에 송강의 묘가 충청북도 진천으로 이장되여 지금은 외로운 강아 진옥의 묘만 홀로 남아있다.       조선시대 전라도 남원의 기생이고 녀류시인이였던 진옥(眞玉)은 력사나 문학사에 그리 많이 알려진 바는 없지만 파란많은 인생을 살다가 간 문신 송강(松江) 정철(鄭澈)로 인해 후세에도 기억되는 아름다운 녀인이다.      그녀는 오직 송강 정철을 위해 평생의 사랑을 깡그리 바쳤다.     진정한 사랑이란 국경을 넘고 나이를 초월하고 환경과 조건을 따지지 않고 그냥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해주는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보다 상대방의 행복을 원하고 위하고 더 기도해주는것이리라!      요즈음 허위적인 온갖 쇼를 하며 거짓사랑으로 사람을 수태 웃기는 아이러니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옛날의 기생이였던 강아 진옥의 의로운 그 사랑이 오히려 얼마나 더 순수하고 진솔하고 고귀한가를 새삼 다시 느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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