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시와 사랑 둘중 어느 하나도 버릴수 없었던 리옥봉

 

                                   조선시대 녀류시인들 시와 사랑 6: 

 
 
                                    온몸에 시를 감고 바다에 뛰여든 녀인                                        ㅡ 시와 사랑 둘 다 버릴수 없었던 리옥봉                                                  홍용암 (엮음)                                         당나라땅에서 출간된 옥봉(玉峰)의 시집      오래전에 어쩌다가 우연히 조선시대 녀류시인 리옥봉(155?~159?년)의 시 한수를 접하게 되였다.           近來安否?如何? 月到紗窓妾恨多!          若使夢魂行有跡 , 門前石路半成砂。          님이시여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창문에 달 비치면 첩의 한도 사무쳐요!          만일 내 꿈속 넋에게도 발자국이 있다면          님의 집앞 돌밭길이 반은 모래 되였으리.                     ㅡㅡ 옥봉 시 "꿈길(夢魂)"     님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자신에게 누군가 근래의 안부를 묻자 그녀는 한이 많아서 결코 편하게 지내지 못하고 있다고 실토하고 있다. 그 "한"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님에 대한 것인지 딱히 알수는 없지만 시적화자는 겹겹이 맺힌 그 한을 풀기 위해 꿈속에서 님의 집앞의 돌밭길이 모래가 되도록 수없이 님을 찾아갔던것으로 보인다. 헛된 행동을 반복하며 님의 사랑을 애걸하는 안타까운 녀심이 잘 전해지는 걸작품이다.      이 시의 “만일 내 꿈속 넋에게 다니는 발자국이 있다면, 님의 집앞 돌밭길이 반은 모래 되였을것”이라는 시구절은 정말 경탄스러웠으며 황진이의 유명한 시 “相思夢(꿈길에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황진이의 시에서의 "님"이 나를 찾아오는 다정한 님이라면 리옥봉의 시에서의 "님"은 내 마음을 외면하는 매정한 님이다.      이 시외에 또 다른 리옥봉의 시 “녀인의 마음1(閨情)”과 함께 그녀의 한많은 생을 알게 된 뒤에는 조선시대 많은 녀인들의 억울한 삶에 대한 울분이 생기면서 아픈 가슴이 더더욱 쓰려났다.         平生離恨成身病; 酒不能療藥不治;        衾裏泣如氷下水, 日夜長流人不知。        한평생 리별의 한이 고질병 되여서         술로도 못고치고 약으로도 못다스리네        이불속 눈물이야 얼음장밑 물과 같아        밤낮을 흘려도 그 누구가 알아주나...?!               ㅡㅡ 옥봉 시 "녀인의 마음1(閨情1)"     이 시도 보면, 평생 리별의 한이 깊어 이제는 몸에 고질병이 되였다. 리별로 인한 병은 술이나 약으로는 달랠수 없다. 그 병은 오직 님만이 고칠수 있는것인데 님은 영영 볼수 없으니 저혼자 이불속에서 소리없이 울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눈물은 아무리 밤낮을 흘려도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는다. 리별의 슬픔이 한으로 이어져 끝내 병을 얻은 시적주인공의 애처로움을 너무 잘 표현하고 있는 시작품이다.     그런데 그녀는 어찌하여 이렇게 가슴아픈 시들을 남겼을가? 도대체 리옥봉은 누구인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수 없지만 그 사료(史料)를 찾아 보면서 처음 접한 글들은 나에게 실로 매우 충격적이였다...      조선 인조때의 일이다.    운강(雲江) 조원(趙瑗)의 정실 소생인 승지 조희일(趙希逸)이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의 한 명망높은 원로대신의 집에 들려 잠간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무심히 “조원을 아느냐?”고 묻는 물음에 조희일이 자신의 부친이라 대답하자 그 원로대신은 서가에서 <<리옥봉시집(李玉峰詩集)>>이라 씌야진 책 한권을 꺼내여 보이는것이였다.      조희일은 깜짝 놀랐다. 리옥봉은 조희일의 아버지 조원의 소실로서 그녀의 생사를 전혀 모른지도 어언 40년이 되였기때문이다. 그런 리옥봉의 시집이 어떻게 돼서 본국인 조선도 아닌 머나먼 중국 명나라땅에 불쑥 나타나게 되였는지 조희일로서는 꿈에마저 근본 상상도 짐작조차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당혹감에 빠진 조희일에게 원로대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40년전쯤 중국 동해안에 괴이한 주검 한구가 떠다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바다물에 빠진지 퍽 오래되여 그 시체가 푹 퍼져서 너무나 흉측한 몰골이라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 자꾸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계속 떠돈다는것이였다.     마침내 원로대신이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십겹 칭칭 감고 노끈으로 꽁꽁 묶은 녀자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보니 종이는 물이 번지지 않도록 기름을 잘 먹인 종이였고 그 종이에는 빽빽이 시가 적혀 있었는데 "해동 조선국 조원의 첩 리옥봉"이라고 씌여져있었다.      읽어본즉 너무나도 버리기 아쉬운, 하나같이 빼여난 시작품들이라 자신이 걷우어 이렇게 시집을 만들었다고 했다.  
 
                                           천재적인 녀류시인 옥봉의 시와 삶      실제 리옥봉의 시와 삶은 조원의 고손인 조정만이 고조부인 조원, 증조부 조희일, 조부 조석형 등 3대의 시문을 함께 모아서 숙종 30년에 간행한 문집 <<가림세고>>에서 그 부록으로 옥봉의 시 32수를 게재하여 "리옥봉행적"을 남긴것과 또 그의 남편 조원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일부 기록, 당대 문사들의 기타 여러가지 기록... 등으로도 재구성하여 다시 잘 살펴볼수 있다.     옥봉(玉峰, 玉峯) 리씨, 그녀의 이름은 원(媛)이고 호가 옥봉이다. 충북 옥천군수를 지냈던 리봉(李逢)의 서녀(어머니가 기생)였고 조선 제14대왕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서 어려서부터 전주 리씨 왕손의 후손답게 당당하게 자랐다.      옥봉은 어린 나이에 총기가 밝고 재기가 있어 시문에 매우 능하였다. 이에 아버지 리봉이 그 딸을 몹시 아껴서 옥돌이 솟아오른듯 아름다운 봉오리, 즉 옥봉이라 호를 지어주고 딸의 시공부를 위한 책들을 아낌없이 사다주었다.     옥봉은 비록 서녀였지만 자신이 왕실의 후예라는 점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五日長干三日越, 哀詞吟斷魯陵雲;         妾身亦是王孫女, 此地鵑聲不忍聞。        닷새는 강을 끼고 사흘은 산을 넘으며        슬픈 노래 부르다 로릉의 구름에 끊어졌네        이 몸 또한 왕손의 딸이니        두견새 울음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               ㅡㅡ 리옥봉 시 "寧越道中(영월도중)"      이 시는 영월을 지나면서 단종의 애사(哀史)를 생각하며 지은것으로, 그는 같은 왕가의 사람으로서 느끼는 처연한 심정을 담아내고 있다. 더불어 그는 자기 또한 ‘왕손의 딸’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호의식을 강하게 표명하고 있다.      하기에 시집갈 나이가 되여서도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자부하여 재주와 문망이 일세에 뛰여난 사람을 구해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던중 운강 조원(1544~1595년)이 그 풍채와 문장이 뛰여남을 알고 마음속으로 몹시 사모하여 스스로 그의 첩이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여염집 녀인네가 시(詩)를 짓는다는것 자체가 정숙한 일이 못된다는 고루한 선비사상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조원은 옥봉의 그 청을 거절한다. 옥봉이 몹시 고민하자 아버지 리봉이 그 심사를 눈치채고 운강의 장인인 신암(新菴) 리준민(李俊民)을 찾아가 그 사정을 말하며 부탁하니 그 장인이 다시 사위에게 옥봉을 받아들일것을 잘 설득하여 마침내 조원은 자색과 재능을 모두 겸비한 그녀를 소실로 맞아들였다. 대신 옥봉이 스스로 앞으로는 절대로 시를 짓질 않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는것을 그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사랑에 끌려서 비록 약속은 그렇게 하였지만 시집간 후에도 옥봉의 가슴속에서 룡트림하듯 가끔씩 번뜩이는 시상(詩想)의 감흥들이 억제할수 없을만큼 무지개처럼 피여올라 그녀는 자신도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시작행위를 남편 조원이 눈치채지 못하게 뒤에서 가만히 늘 했다고 한다.      조원은 남명(南冥) 조식(趙植)의 문인으로 1564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여 1575년 정언이 되였으며 리조좌랑, 삼척부사를 거쳐 1593년에는 그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옥봉을 첩실로 맞아들인후 남존녀비의 봉건사상이 골수까지 깊이 농후했던 조원은 한사코 옥봉이 계속 시를 쓰는것을 별로 썩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는 원체 재기발랄하고 참신하고 풍치와 품위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높이 평가해왔다.           雲葉散邊殘照漏; 漫天銀竹過江橫。         구름 흩어진 가장자리, 해빛이 새여나오고         하늘 가득 은빛참대가 강을 가로 지나네.                       ㅡㅡ 옥봉 시 "비(雨)"      당시 유명한 천재녀류시인이였던 허란설헌의 아우 허균이 이 시구를 보고 몹시 감탄하여 평하기를 "기발하고 고운것이 화장품냄새를 단꺼번에 씻어갔다"고 하면서 자신의 누이 허란설헌과 나란히 일컫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더불어 그녀를 한갓 녀인의 가벼움을 벗어나 초탈한 중진시인으로 한껏 치켜세웠다.     또한 조선중기의 이름난 시인 신흠(申?, 1566-1628)도 옥봉의 시구절을 천고(千古)의 절창(切創)이라고 극찬하며 옥봉을 "고금의 시인중에 누구도 이에 비견될 시구를 지은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江涵鷗夢?; 天入雁愁長。          강물에 몸을 담근 갈매기 꿈은 넓고          하늘나는 저 기러기 근심은 길구나!                  ㅡㅡ 옥봉 시 "죽서루(竹西樓)"     이 시는 짧으면서도 당시 녀성이 썼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자연과 인생 그리고 우주에 대한 폭넓은 세계관을 보이고 있다. 옥봉은 죽서루의 절경에 대한 현실적인 이미지를 자신의 인생과 결부시켜 초현실적인 세계로 옮겨놓았고 드넓은 하늘로 이전시킴으로써 형이상학적인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결혼전에는 병마사에게 주는 시를 짓고, 목사 서익의 소실에게도 감사의 시를 써서 보내고, 단종의 릉에 가서는 그를 위로하는 시를 짓는 등 활달한 시작(?作)활동을 하며 마음껏 시재를 자랑했던 천재시인 리옥봉, 하지만 이런 성격과 시재(詩才)가 결국 결혼후 오히려 큰 화근을 불러온다.   
 
                                    시와 사랑 둘중 어느 하나도 버리지 못한 옥봉      어느해, 남편 조원이 강원도 삼척부사로 부임되자 소실인 옥봉도 따라서 동행하게 된다.      조원 집 옆에 사는 잘 아는 한 아낙네가 찾아와서 그의 산지기남편이 억울하게 소도적루명을 쓰고 관가에 잡혀갔는데 옥봉의 남편인 운강공더러 글 한통만 써서 해당부서 목사에게 보내주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옥봉이 이를 매우 딱하게 여겼으나 감히 직접 남편에게 부탁할수도 없고 하여 혼자 고민하던 끝에 자신이 대신 손수 "위인송원"이란 장사(狀辭)시를 한수 써서 파주목사에게 보내주었다.              洗面盆爲鏡, 梳頭水作油;             妾身非織女, 郞豈是牽牛?            세수대야로 거울을 삼고            맹물을 머리기름 삼아 바른다네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닐진대            내 랑군이 어찌 견우이리오?                  ㅡㅡ 옥봉 시 "爲人訟寃(위인송원)"     옥봉이 시를 어찌나 절묘하게 잘 썼던지 그 시를 받아본 파주목사가 깊은 경탄과 감동을 받아 곧 그 산지기를 면죄하여 풀어주었다.      후에 해당 관서의 당상관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원은 “결혼할 때 시를 써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더우기 부녀자가 함부로 공사에 관여한다"고 크게 나무라고 꾸짖으며 즉시 그녀를 집에서 쫓아냈다.      옥봉이 울며 빌었으나 랭혹한 조원은 끝끝내 돌아선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조원은 탄핵을 받아 내직에서 밀려나서 오랜 외직생활을 하던 끝에 겨우 다시 서울로 올라간 때라 만약 그 일이 탄로나면 자칫하면 동인들의 공격을 또 받을수 있기때문에 옥봉을 내친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일로 옥봉은 운강 조원과 영원히 헤여졌으며 그후 다시는 조원을 만나지 못하고 산수와 시로 자오(自娛)하면서 또 녀도사(女道士)로 자칭하며 남은 여생을 홀로 쓸쓸히 보냈다고 한다. 지금의 서울시 뚝섬 왕십리 부근에 오막살이 집터를 잡고 자나 깨나 독수공방으로 조원을 그리워하며 외롭게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옥봉의 시에는 늘 님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마음을 담은 시가 매우 많다. 소실이라는 신분 자체가 님을 기다리고 그리워해야 하는 불쌍한 처지인데다 더우기 친정으로 쫓겨난 더욱 불행한 처지여서 그리운 님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더욱 간절해질수밖에 없었다.  
 
          有約郞何晩, 庭梅欲謝時;           忽聞枝上鵲, 虛畵鏡中眉。          약속을 해놓고 님은 어찌 이리 늦나          뜨락의 매화는 다 지려고 하는데          갑자기 나무우에 까치소리 들리니          헛되이 거울 보며 다시 눈섭 그리네.                   ㅡㅡ 옥봉 시 "閨情2(규정2)"     이 시에는 온다고 약속한 때가 지나도 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는 한 녀인의 마음이 잘 나타나있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속신에 의지하여 오늘은 혹시라도 님이 오지 않을가 하는 헛된 기대속에서 다시 화장을 하는 녀인의 딱한 모습이 너무나도 애처롭게 느껴지는 시이다.      하지만 옥봉은 그렇게 시때문에 불행하게 시집에서 쫓겨난 후에도 자신의 시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은적도 있다.           妙譽皆童稚, 東方母子名;           驚風君筆落, 泣鬼我詩成。          묘한 재주 어릴적부터 자랑스러워          동방에 우리 모자 명성을 떨쳤네           네가 붓을 대면 바람이 놀라고           내가 시를 지으면 귀신도 운다네.                  ㅡㅡ 옥봉 시 "아들에게(贈嫡子)"      이 시는 옥봉이 조원의 정실부인에게서 난 아들에게 보낸 시로, 아들과 자신의 문재(文才)에 대한 자긍심을 표출하고 있다. 운강 조원에게는 희정(希正), 희철(希哲), 희일(希逸), 희진(希進) 등 네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 시가 누구에게 준것인지는 딱히 알수 없지만 그들 모두 글재주가 뛰여났다고 한다. 그는 먼저 아들이 쓴 글씨의 위력을 칭찬한 뒤, 그 뒤를 이어 자신의 글솜씨 역시 뛰여나다는것을 드러내고 있다. "읍귀(泣鬼)"는 하지장이 중국 당나라때의 대시인 리백을 평할 때 "귀신도 울게 할 신선(泣鬼神)"이라고 한데서 따온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본다면 결국 옥봉은 자신의 뛰여난 시재를 스스로 천하에서 가장 소문높은 그 유명한 리백에 견주고 있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렇게 한평생 천성적으로 시를 차마 버리기도 힘들어하고 또 그리운 남편에 대한 사랑도 도무지 떨쳐버릴수 없었던 (운명적으로 둘중 어느 하나도 절대 버릴수 없었던) 조선중기의 천재적인 녀류시인 옥봉은 제1차임진왜란이 거의 끝나가는 어느날 문득 그토록 무정하지만 그녀가 평생 변함없이 사랑하고 못잊어하고 그리워하던 남편 조원이 급병으로 죽었다는 부고를 접하게 되지 일시에 그동안 그래도 아주 묘연한 요행을 바라며 실날같이 품어오던 마지막 남은 그 일루의 희망마저 와그르르 모조리 무너짐을 의식하며 철저한 절망끝에 얼마후 한평생 써두었던 수백수의 시들을 허리에 감고 스스로 푸덩실 사품치는 바다물에 뛰여든다.      아마도 죽어서도 그 시를 갖고 그리운 그 매정한 남편 운강 조원을 찾아갔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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