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유 금 호

[작가소개]  유금호:  42년 전남 고흥 출생.  6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소설집' 하늘을 색칠하라'  '깃발'   '새를 위하여'  '여자에 관한 몇 가지 이설, 혹은 편견' 등과 장편소설 '고려무'  '내 사랑, 풍장'   '열하일기' 등. 후광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등 수상. 현재 목포대 국문과 교수, 문학박사.


1. 조각 하나

1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는 5월이 되어 새벽 안개 같은 이슬비가 잠깐씩 도시를 휘감아 도는 것을 '잉카의 눈물'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만큼 리마는 늘 건조해 있어 흙먼지가 자주 날리고, 변두리에는 지붕 없이 벽만 있는 집들도 많다. 지붕만 덮고 기둥 사이 해먹을 걸고 사는 열대 우림 지역과는 반대로, 옛 잉카의 나라에는 지붕 없는 가옥들이 있다.

그 리마에 비가 내린 날이 있었다. 97년 2월 23일 한낮.

그때 나는 리마 국립 박물관에서 두개골 일부를 금박으로 덮은 미라 앞에 서서 뇌수술을 받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비가 내리면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길거리가 갑자기 환호로 소란스러워졌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기 바쁘게 떠나왔던 여행지, 페루.

도무지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그곳 리마에 그때 내린 비를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모치카(Mochica), 치무(Chimu), 나스카(Nazca)의 토기와 의류들, 별도로 마련된 황금의 방을 채우고 있던 황금 장신구들, 수십 구 잉카시대 미라들이 정리가 덜된 채 한 방에 무질서하게 누워 있었다. 거기에 라파엘 라르고의 개인 수집품이라는 잉카시대 성(性)에 관련된 엄청난 양의 토기와 도자기의 에로틱함에 완전히 질려 있었던 시간이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남자 성기들이 도자기며, 주전자며, 찻잔들에 달라붙은 채, 500년 세월을 건너 뛰어 현대인의 눈앞에 과시라도 하듯 늘어 놓여 있었고, 그 곁에 남녀 성행위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수십 점 토기와 도기(陶器)들 역시 관람객을 질리게 했다.

.......코리칸차(太陽神殿)의 황금내벽이나, 황금라마들은 모두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스페인으로 가져갔고, 1532년 당시 잉카 황제 아타와르파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황제가 유폐되었던 방을 황금으로 채워 그 모두를 가져갔다는 데도, 현재 남아 있는 황금 유물의 양이 우리를 질리게 합니다.....거기에 두개골 절개의 뇌수술 미라나 ....잉카인들의 성에 대한 집착은 고대 인도나, 인도네시아 오지, 아프리카의 생산적 주술과는 다른....말하자면 이곳 잉카 숨결 속에는 성이 성 자체로 독립되어 있는 그런 인상을 받아요....

문화인류학을 공부한다던 가이드 역시 빗방울이 떨어지자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아, 비가 와요. 리마에 비가 내려요. 그렇게 소리치면서.

"정말 무슨 비가, 이렇게 쏟아지지?"

문득 그녀 미스 추의 혀 꼬부라진 목소리에 나도 술 집 창문에 부딪쳐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의식하고 시계를 보았다.

술에 취해 자기 이야기에 열중하다보면 대화가 상대방과의 교류를 끊은 채 소리만으로 둥둥 떠돌고 있어 놀랄 때가 있다.

그걸 같이 느낄 때쯤이면, 대개, 우리 그만 가자. 말대가리 선생님.... 어어, 너무 늦었네. 헤어지자. 싸이코 아가씨야.... 그러면서 계산을 했고, 어둠이 깔려드는 도심에서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미로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그날은 미스 추가, 우리 그만 가지,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불쑥,

"돌아가신 아버지를 찾아 수 만리 먼 길, 잉카와 마야를 찾았다, 그래 되었어. 이제 그 잉카, 잉카는 그대로 두고....한번 묻자. 더러 외박해 본 적 있어?"

하고는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쳤다.

"외박?"

너무 의외의 질문이어서 나는 술기가 가셨는데,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그녀 얼굴빛이 평소 같지 않게 창백해 있었다.

"외박 안 하는 남자도 있나 알고 싶어서 그래. 자기 아내 말고 다른 여자하고 자는 남자 말이야."

"외박 안 하는 남자?.....어째 미스가 질문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자꾸 짜증나게 미스, 미스 하지마. 나도 버진은 아니니까....본인은 자신을 아는 거야? 몸은 어른인데 머리 속은 퇴행성 유아기적 분리 불안증세가 있다는 거. 아직도 아버지에게서 못 벗어나고 있는..... ?"

"뭐가 그렇게 길고 어려워?"

"그게 어려워? 대학 선생이....더 쉽게 이야기할까....철장 속에 갇혀 있는 환자가 내가 지나가면 날보고 실실 웃는다....이봐, 공주병 환자, 이번 아가씨 뇌수술 내가 집도하는 거 알지?......턱 아래로 침이 질질 흘러 떨어지고 있고, 실리 스마일.....하루에 한번은 누가 환자고, 누가 간호사인지 착각이 와... 그깟 월급....."

"사표 내고 아프리카로 가. 거기 세상에 있는 가축들이 다 자기네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사이 마을에 가면 말야..."

2. 조각 둘

"내가 마사이족 이야기했었나? 소똥을 이겨 집 짓고, 살아있는 소피가 주식이고.....거기에 일부다처.... 물렸다하면 잠만 자다 죽게 되는 수면병을 퍼뜨리는 채채 파리.....나, 거기서 1주일 꼬박 살았어."

"트리파노소마증. 그 수면병 이름이야. 그게....."

"나, 거기서 그때 돌아오지 않았어야 했어."

말린 소똥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킬리만자로 산정의 그 흰 이마가 어둠 속에 천천히 형체를 감추는 것을 올려다보면서 마사이족 마을의 소똥 깔린 마당에 앉아 토속주와 소주를 그때 나는 번갈아 마셨다.

오랜만에 참으로 마음이 푸근하고 평화로웠던 밤이었다.

옥수수와 카사바를 섞어 발효시켰다는 그곳 토속주는 막걸리 맛과 비슷하면서도 도수가 높아 금방 취기가 돌았다.

....이 세상을 처음 만든 렝가이 신이 모든 가축을 마사이족에게 주었다니까요..... 이 땅위에 있는 모든 가축은 마사이 것이다. 그걸 의심하는 놈이 있다면 그 놈이야 마사이가 아니지요. 다른 부족들이 가축을 가지고 있다,...그건 그네들이 우리 마사이 재산을 일시 보관하고 있는 셈이니까, 필요할 때면 언제든 마사이들이 되찾아 오는 게 당연하고요.... 싸움도 하지요. 마사이 청년들은 다 용감한 전사니까....와이코마, 와쿠리아, 수쿠마 족 같은 종족들이 우리 마사이 마을을 기습해 와서 우리가 찾아 온 가축을 도로 가져가려다 싸움이 붙어요......그러니 싸우고... 우리 마사이 남자는 모두 용감해요.... 그래도 그 파리한테는 우리도 대책이 없습니다. 물리면 잠이 와요. 계속 잠자다 죽으니까요....그 병을 퍼뜨리는 채채 파리가 사자, 기린, 하이에나.....그런 야생 동물은 아무리 물려도 상관이 없는데, 사람이나, 가축은 이놈들한테 물리면 잠만 자다 죽거든..... 아무튼 마사이 목동들은 야생동물들 사는 삼림지대하고는 이 파리 때문에 경계선을 긋고 살아요. 떨어져서 살아라, 렝가이 신이 그렇게 정하신 것도 깊이 생각하신 바가 있겠지요..... 추장 노인과 청년 둘이 토막진 영어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울타리 주변의 초원과 하늘은 천천히 음험한 검은 밤 그림자에 묻혀가기 시작했다.

그네들이 로꼬니라고 부르는 우산 아카시아 나무들이 마치 불타버린 빈 터의 타다 남은 나무 밑동같이 어둠 속에서 진한 검은 색으로 형체만 드러내고 있을 때쯤 그 검은 윤곽들 사이로 붉은 여우와 하이에나의 불을 켠 눈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때 나는 아내와 아들 생각에서 잠시 벗어나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도 벗어나 있었을까.

"정말 구제 불능이야."

그녀가 갑자기 화를 내면서 앞에 놓인 위스키 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어버렸다.

"그렇게 싸돌아다니면서 뭘 얻은 건데?"

"언제쯤 유산으로 받은 돈이 바닥나는지 보는 거지."

"EST라는 게 있어. 환자에게 갑자기 자극을 주는 치료 방법인데. 아마 들었겠지만……."

그녀가 두 손끝으로 나의 이마 양쪽 끝을 짚으며,

"여기에 전기자극을 줘. 갑자기 온몸이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이 경련이 오고…… 아, 모르겠어. 하고 싶은 얘기가 그게 아니었는데.... 저, 전기치료 한 번 안 받을래? 그 동안 보아왔지만 말대가리 선생도 정상이 아니거든. 알고 있지?"

"내가 전기치료?"

"나하고 2박 3일. 아니야, 그건 좀 지루하고. 1박 2일 정도 상호치료를 시도해 볼 의향 없어?"

"진짜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다."

내가 너무 커다랗게 웃었기 때문에 술집 안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몰려왔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미스 추하고 나하고가 말야."

"왜? 여자와 남자 사이는 말야. 원래 수컷과 암컷, 그렇게 지극히 심플한 동물적 자력 관계야. 알아? 그 위에다 문화니 도덕이니 그런 걸로 보통 치장을 하지. 그런데 우린 뭐야? 그게 정상인데…… 비참한 생각 한 들어? 영원히 대학 전임 가능성이 없는 만년 강사. 대책 없는 불쌍한 정신 병동 간호사. 둘 다 감정이 석고화 되어 가는 게, 우리 너무 닮아있지 않아?"

"간호사 아니랄까 보아 계속 이상한 용어 쓰는 거야? 바꾸어 놓고 생각해 봐. 어떤 남자가 미스 추에게서 섹스를 느끼냐? 입만 열면 정신 병동 용어들인데..."

"알아. 그러니까 비슷한 사람끼리 상호 치료를 해보자는 거지."

그녀의 제안 때문에 우린 잠시 말을 잃었다.

5년여를 술친구로 만나왔으면서도 한번도 이 여자에게서 성적 연상을 하지 못했는지 신기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싸이코 드라마가 정신질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이해하지? 일종 치료방법이니까. 억압상태의 콤플렉스를 각본 없이 발산시킴으로서 억압심리 해소에 도움을 주니까. 마음대로 떠들다보면 자기 개인이 고립되어 있지 않고 상호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암시가 되거든. 이해 해?…….우리 두 사람이 싸이코 드라마를 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처음 만난 것도 싸이코 드라마 구경을 갔던 자리였을 것이다.

그날 저녁 같이 술집에 들렸다가, 마주앉아 있기는 했지만 소통이 안 되는, 또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서로 이야기만 실컷 떠들다가 헤어졌고, 그 뒤에도 가끔 그런 식으로 만나 떠들다 헤어지고 했다.

"신(神)이 존재해도 신이 인간들 기도 하나 하나에 항상 대꾸해준다고 하면 종교는 존재하지 않을 거야. 안 그래?"

실컷 떠들고 나서, 우리 중 누가 그 말을 꺼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모처럼 서로 동의했던 유일한 명제가 '신의 침묵'이 아니었나 싶다. 만약 인간들 기도에 신이 그때그때 일일이 다 반응을 보인다면 사람들은 기도만 하던지, 결국 기도를 중지할 것이 아니냐는…… 신의 침묵으로 한도 끝도 없는 기도가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매닉(躁病)과 디프레스가 번갈아 가면서 나타날 때는 전기치료 효과가 있어."

"그럼 나 지금 완전 '디프레스' 상태야.... 하지만 우선 오줌 좀 누고 와야겠다..."

내가 큰 소리로 대꾸했기 때문에 실내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몰려왔다.

화장실에서 내가 자리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탁자에 고개를 묻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밖은 수묵화 같은 어둠이 빗물과 섞여가고 있었고, 그 어둠 속에 개똥벌레 무리 같은 도시의 불빛들이 날아다녔다.

나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다 내 곁에 바싹 앉혔다.

"생각했는데, 나 지금 여자가 필요한 것도 같아. 같이 우리 잘까 그럼? 더 이상해지기 전에 나도 치료를 받긴 받아야 할 상태야."

이번에는 그녀가 빤히 내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괜찮아? 하고 물었다.

"네가 앞서 자자고 했잖어?"

"미안해. 말대가리 선생....... 내 병이 전염되었다면."

나는 길게 숨을 들어 마셨다. 그리고 나서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창백해 보였다.

"비까지 엄청 오는데 집 쪽으로 가는 차, 잡아줄까?"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술을 더 먹어".

"괜찮아?"

"마누라가 폐기 처분한 홀아비보다는 나아."

"폐차겠지. 이 땅의 교육을 믿을 수 없다고 마누라는 이제 초등학생 아이를 끌고 외국에 나가 버렸고, 10년 넘게 공들인 대학 전임자리는 확실하게 이제 물 건너갔고....3년 후배가 학과장이 되었는데, 시간 강사도 그만 두는 게 예의 아니겠어? 학기도 끝났겠다, 그럼 뭘 해야겠어? 술 먹고 계집질하는 거지. 아버지 유산은 아직 있으니까.... 생각해 봐. 아무리 못난 보따리 장수래도 명색 지 남편, 지 애비가 선생인데, 이 나라, 교육을 못 믿겠다고, 나가서 애라도 가르치겠다....., 내가 뭘 해야지? 사실 학문이란 것도 나, 솔직히는 별로 취미가 없고.... "

3. 조각 셋

많이 취하기도 했지만 비에 섞인 창 밖 어둠이 마사이 마을에서 덮여 오던 밤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설핏하면서 나는 깜박 깜박 간헐적으로 까마득한 비 현실의 공간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초원을 멀리서부터 아버지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지고 다시 보이고 했다.

에파타 노인과 청년의 토착어와 영어가 뒤섞인 대화를 몽롱하게 들으면서 밤의 초원에 눈을 주고 있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 아버지는 한 해 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셨는데...

토속주를 연거퍼 마시던 노인과 청년 둘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그날 낮, 마을에서 보았던 마사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깨를 나란히 해서 좌우로 움직이다가 한 사람씩 차례로 껑충거리며 높이 뛰기를 하는 유령놀이 같은 춤은 아프리카 춤 가운데서도 가장 단조롭게 보였다. 그러나 그 단조로움이 며칠간 보아왔던 톰슨 가젤이나 임팔라의 경쾌한 몸 움직임과 닮았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장작개비처럼 날씬한 그들의 몸매 때문일지도 몰랐다.

남자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자 모닥불을 가운데에 두고 나는 에트하라는 노인의 네 번째 부인과 서로 바라보는 자세가 되었다. 서너 살 되어 보이는 꼬마 아이가 들어내놓은 제 어미의 젖무덤을 조물락거리고 있었다.

짧게 밀어버린 애트하의 머리와 검은 얼굴이 불빛에 윤기를 내고 있었다. 한 순간 그녀 뒤, 사바나의 검은 공간을 배경으로 그녀 눈 흰자위와 반쯤 벌린 입술 사이로 드러난 이빨만이 허공 중에 하얗게 떠있는 느낌이 왔다.

아, 그때 나는 잠시 그녀 눈의 흰자위가 한없이 확대되어 커다란 공동(空洞)으로 변해 가는 환상을 보았다.

아주 깊고 먼.

깜깜한 어둠으로 둘러싸인 사바나에서 그 흰자위의 공동이 만들어내고 있는 공간이 하나의 통로를 이루고 있었다.

"호디(여기 와도 되지요)?"

춤이 끝난 에파타 노인이 내게 던진 말이었는데, 나는 내가 그 흰자위의 깊은 굴속을 향해 그렇게 물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밀렵해 왔다던 악어 고기가 소똥 불 위에서 알맞게 익어 있었다.

"잠보. 카리부 음제.(이리 오세요. 노인 장)."

나는 황급하게 에트하의 흰 눈자위에서 빠져 나왔다.

"하바리 야코(기분이 어떻습니까)?"

"시카모 (존경의 뜻)...마라하바(대단히 좋아요)"

밤이 깊어졌을 때 저녁 공기 속으로 길고 긴장된 수사자의 신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차갑고, 불분명한 검은 대지위로 그때 사자의 울음이 들려 오자 내 몸 속으로 이상한 전류가 흐르는 듯이 느껴졌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수사자의 신음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지막한 저음이던 것이 점차 높아지다가, 이윽고 다시 낮아지면서 자기 목소리를 되찾는다. 드디어 깊고도 단조로운 으르렁 소리가 짧게, 다시 짧게 한참을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친 듯한 한숨을 길게 내쉰다. 이 모든 과정이 30초 가량. 조용한 밤이면 8km 밖에까지 그 사자의 포효소리가 퍼져나간다고 한다.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다른 수컷의 새끼들을 물어뜯어 피투성이가 된 주둥이를 치켜든 수사자와 수풀 뒤에 숨어 제 새끼들이 찢겨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암사자를 머리 속에 그렸다. 결국 새끼를 잃은 암사자는 전 남편의 새끼들이 다 죽게 되면 며칠 후 새로운 수사자를 받아들일 것이다.

야행성 몽구스 한 마리가 우리들 곁에서 우리를 빤히 올려 보다가 어둠 속으로 잠겨버렸다. 뒤이어 이번에는 사바나 원숭이 한 마리가 모닥불 건너편에 와서 쭈그리고 앉아 낯선 나그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 팔 안에 걸레조각 같은 게 들려 있었다.

죽은 새끼라고 했다. 완전히 말라 형체가 없어질 때까지도 어미 원숭이는 죽은 새끼 시체를 버리지 않고 안고 다닌다고 노인이 액센트 강한 영어로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때 잠깐 어미 손에 끌려 토론토의 노랑머리 친구들 사이에 주눅이 든 채 떠듬떠듬 영어로 말하고 있는 내 아들을 떠 올렸다.

상당히 시간이 지난 뒤에야 미스 추와 나는 차를 잡았다.

뒷자리에 쓰러지듯 나란히 앉아 유리창을 긁어대는 빗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거의 비슷하게 짙은 안개처럼 우리를 휘감아 드는 술기운 속에 잠겨 갔다.

4. 조각 넷

우람한 해송들이 바다 바람을 막고 있는 부두를 지나, 돌담 이곳 저곳이 무너져 내린 학생 네 집 앞에 섰을 때, 나는 돌담 한 구석에서 오래 묵은 한 그루 동백나무와 거기 수백 송이의 빨간 동백꽃을 보았다.

김 가공 공장 일을 나갔던 그의 누이가 동생 담임선생이 가정 방문을 왔다는 전갈을 받고, 이마에 송송 땀방울을 달고 뛰어 와, 거기 동백나무 곁에 막 도착하고 있었다.

"누..누이....누이..는..... 말을 모...못 하구만이라...."

고개를 푹 숙인 사내애는 눈 둘 곳을 몰라 제 발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작은 소리로 떠듬거렸다.

나는 등록금을 내지 못한 그 아이가 부모 없이 누이하고 생활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누이가 농아라는 사실은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시선을 마주 하지 못하고 바다 한쪽에 촘촘하게 박힌 김 양식장의 바닷말 쪽으로 눈을 보내 버렸다.

나는 처음으로 직장을 가진 스물 몇 살의 교사 초년생이었다.

그녀가 한발을 내 쪽으로 내밀었을 때 동백꽃 두어 송이가 후드득 그녀 발 밑에 떨어져 내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동백꽃 향기가 왜 그 순간 어지럽게 코 속으로 파고들었는지. 그녀 한쪽 볼에만 깊이 파인 볼우물과 동백꽃 냄새. 그 냄새를 나는 세월이 지난 후에도 겨울이 되고 바다를 생각할 때면 다시 맡는다.

1년이 지나 그 섬을 떠날 때까지 아이보다 세살 위라는 그의 누이, 순지를 두 번 더 보았다.

그의 누이는 아이 편에 내게서 시집과 소설책을 서너 번 빌려 갔고, 아주 예쁜 글씨로, 잘 읽었어요. 고맙습니다. 식의 작은 쪽지를 책 속에 끼워 놓긴 했지만 그녀를 직접 만날 기회는 만들지 않았다......순..순지 누이...말은 모...못해도 어렸을 때 혼자....글..글 읽고 ...쓰..쓰고...누이가 불쌍하구만요.. 아이는 제 누이를 화제에 올릴 때는 눈빛이 흐려졌다.

어머니도 벙어리였다고 했다. 그래서 아주 어렸던 한때는 여자들은 원래 벙어리려니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다고 했다. 작은 통통선으로 어머니는 아버지와 고기잡이를 나갔고, 누이가 살림을 꾸려 가서 언제까지고 그런 식의 생활이 계속되려니 생각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새벽 출어를 나간 부모가 둘 다 파도에 휩쓸려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된 후, 누이는 김과 미역 가공 공장으로 새벽 출근을 시작했고, 누나가 하던 일들이 그의 몫이 되었다는 거였다.

20대 후반. 내 첫 부임지의 가난한 섬 마을에서 담임을 맡은 아이가 처한 여건은 나를 여러 날 불면으로 몰아 갔다. 삶이란 건 처음부터 운명 같은 것이 주어져 있는 것일까. 먼 전생의 인연이라는 것이 현재의 삶 속에 투영되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은 그대로 진행되는 것인가. 그 섬에서 지낸 1년 동안 나는 그 아이의 삶을 늘 안고 살았던 듯 싶다.

녀석의 등록금을 대신 내 주고, 며칠이 지난 후 혼자 늦게 퇴근하던 교문 앞 골목길에서 그녀를 만난 것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저녁 해가 막 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이 발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는데 그녀는 옆얼굴 가득 그 저녁 노을을 받으면서 눈을 내리뜬 채, 내 앞에 신문지로 싼 작은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너무 뜻밖이어서 우물거리고 있는 내 손에 그 꾸러미를 들이밀며 그녀는 한쪽 볼에 깊은 보조개를 만들었다.

그 눈이 잠시 내 눈을 보았다.....고맙습니다. 동생하고 저, 선생님 안 잊겠습니다. 김이에요. 직접 뜯어다 햇볕에 말렸어요. 작은 거지만 .....눈망울이 조금씩 움직이면서 하는 이야기를 나는 그때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아무쪼록 잘 지내세요. 책은 언제든 동생 편에 빌려 가구요."

그녀 볼우물이 더 깊이 파이면서 얼굴 위로 번졌던 저녁 노을의 색깔도 훨씬 짙어졌다. 그 저녁 노을의 붉은 빛이 내 가슴 한쪽을 적셔 가고 있었던 것을 나는 그 섬을 떠난 뒤에야 어렴풋이 알았었다.

그리고 학년도가 바뀌어 섬을 떠나게 된 날 육지로 나가는 배를 기다리던 나루터에서 나는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짧은 1년이었지만 막상 섬을 떠난다는 생각이 이상하게도 사람을 감상스럽게 해서 나는 그날 새벽 일찍 하숙집을 떠나 부두로 나와 버렸었다.

비가 부슬거리는 부두를 배가 막 미끄러지고 있었을 때, 아이와 그의 누이는 시오리 길을 달려 나와, 거기 부두 끝에 막 도착해서 떠나는 배를 향해 내내 손을 흔들었다.

그때 흩뿌리던 빗방울에 섞여 내 볼 위로 뜨뜻하게 흘러내리던 눈물이 입술에 짜게 와 닿던 감촉을 나는 가끔 기억한다.

"그 벙어리랑 잤어?"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누가 바본데? 이봐. 자기, 정서의 성장 장해에 걸려 있다는 거 몰라? 스톱이 아니라, 심각한 퇴행성 쪽이라구."

그녀가 내 두 귀를 잡아 좌우로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벙어리 이야기, 한번 만 더 들으면 백 번째라는 것, 알아?…."

그녀는 두 손끝으로 나의 이마 양쪽 끝을 짚으며,

"문제가 심각해. 시간도 공간도, 의식 속에서 맨 날 뒤섞여 있는 혼돈 상태라는 것 알아? 카오스라고. 자기 상태는 오래 전부터 카오스야.…"

백 삼십, 백 사십, 백 오십…… 이 백, 그런 속도에서 순간적으로 산화되는 그런 죽음에 대한 유혹, 그 유혹을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해 온 거 같애. 결국 완전한 자유에의 갈망. 이해할 수 있을까? 난 원래 불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어. 보들레르를. 신보다 악마 쪽에 귀의해 철저히 악마의 사도가 되겠다던 그 보들레르에게서 자유의 그림자를 본 거야. 그런데…… 지금 난 영문법 가르치는 엉터리 시간 강사야. 알겠어? 시체에서 귀를 모조리 잘라내어 목걸이를 만들어 차고 다녔다는 월남전 때 어떤 친구이야기를 들었어. 이해가 되더라고 그 친구 감정 상태가..... 별거 아니야....모든 게 정답이 없어. 나, 대학원 땐 문학이었어. 오스카 와일드와 보들레르를 좋아하던……그리고 가능하다면 소설을 쓰고 싶었어.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이 있는.....알아? 그런데 뭐야? 지금 내갉…잠깐 잠이 든 듯 싶었다. 그녀가 내 어깨를 흔들었고, 나는 휘청거리면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분수가 있었다.

우리를 내려주고 호텔 정문을 빗속을 빠져나가는 택시 꽁무니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그녀가 앞서, 우리 밤새 마셔, 우리 이러다가 둘 다 가슴이 폭발해 죽을지도 몰라, 했기 때문에 호텔 지하에 있는 바로 기어 들어갔다.

"아예 위스키로 한 병을 줘요."

여자가 앞서 말했다.

우리들의 대화는 다시 제멋대로 교감 없이 독립되어 홀 안을 억울한 영혼들처럼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서서히 밀려드는 두통과 욕지기 때문에 냉수 두 사발에 아스피린을 먹었고, 그녀는 싸이코 쎄라피, 메링거, 슈가필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나는 선생님이 되려고 했어. 숙제를 조금씩만 내주는 그런 선생님. ……수녀가 될 생각도 했고, 간호사가 되어 소록도에 가서 죽은 날까지 문둥병 환자를 돌보려 했었는데. 어느 날 신부님이 말씀하셨어. 육신의 병보다 더 가엾은 병은 마음의 병이라고…… 그런데 못 견디겠어. 날마다 도망가고 싶어서, 인생이 기껏 결론을 내려놓으면 조금 있다 무의미해져 버리는 것 그게 견디기 힘들어.

"소지공양이라는 말 들어봤어?"

"소신공양 아니고?"

"몸에 불을 붙여 타죽는 소신 말고……. 소지(燒指)라니까. 손가락에 기름을 발라 불을 붙이고, 다시 발라 불을 붙이고……그렇게…….'

"관념 속에서는 가능하겠지…….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요새 소설에서 써먹은 작자가 있다면 리얼리티가 없다고 평론가들이 팍팍 밑줄 안 그을 것 같애? 나라도 그렇지 …. 그런데…현실에서는 상식이나 소설적 상상력 같은 걸 비웃는 끔찍한 일도, 감동적인 일도, 엉뚱한 일도 더러는 일어나…."

흰옷을 입은 친구의 누이가 죽은 시인의 추모 시 낭송회의 참석자들 사이에서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창백하고 정갈한 모습으로.

그 낭송회의 사람들 틈에 끼어 나는 문득 그 누이 뒤편으로 피어오르는 물안개의 환영을 보고 있었다. 시들어 가는 갈대밭과 강물을 배경으로 친구의 뼛가루가 든 상자를 안고 서 있던 1년 전의 누이의 손에 끼였던 흰 장갑.

그때 강 위로 누이의 옷과 흰 장갑 색깔의 물안개가 부옇게 피어올라 누이의 형체가 그 안개 속에 흐트러져 갈 것 같은 생각이 잠시 든 적이 있었다.

"여 봐, 미스 추."

간신히 나도 의식을 가누면서 탁자 위에 자주 고개를 묻는 그녀 어깨를 흔들었다. 술, 그만 먹지 우리. 그녀가 다시 얼굴을 들었다. 아냐. 되 먹지 못한 우리들 고정 관념이나 습관을 알콜로 소독해야 되는 거야. 모든 치료에는 항상 소독이라는 게 전제되거든. 그녀는 다시 한 잔을 홀짝 따라 마시고 내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나, 예쁜가 봐 줘. 말대가리 강사님. 눈이 잘 안 떠져."

"바보 같은 소리하지마. 전혀 이쁘지 않아."

갑자기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음악이 시끄러워졌다. 맞았어. 이런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특수한 신을 믿는 사교(邪敎) 집단의 의식이 시작되고…… 검은 두건을 쓴 사제가 긴 망토를 늘어뜨리고 나타나 닭대가리를 잘라 신도들 머리 위에 피를 뿌리고…… 아아, 나는 다시 연거푸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살인의 충동이나 자살의 유혹, 그 강렬한 증오와 유혹의 낼름대는 혓바닥을 나는 환각 속에서 보고 있었다. 위스키 한 병이 다시 바닥을 드러내었다. 혈관 속으로 작은 연어 떼들이 역류하며 횃불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아아, 아아. 의미 없는 감탄사가 자꾸 목구멍을 치밀어 올라왔다. 간호사의 정의를 말해 줘. 간호사라는 단어는 환자라는 단어와 동의어..... 새로 나온 사전에는 그렇게 실려있지. 그래. 미스 추라는 여자의 정체는 뭔데?... 그것도 몰라? 창녀야. 형편없는…… 그래, 형편없는…… 돈을 안 받고도 몸을 파는 가엾은 창녀……

나는 나도 모르게 탁자에 고개를 묻었다.

5. 조각 다섯

얼마나 지났는지 홀 안이 조용해졌고, 종업원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우리는 간신히 비틀거리며 지하실을 빠져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고, 방 하나를 배정 받았다.

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심한 욕지기 때문에 화장실로 뛰어들어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창자 모두가 거꾸로 뒤집혀오는 착각과 예리한 칼끝으로 그 뒤집혀진 창자를 차례차례 도려내는 듯한 감각 속에서 나는 오래오래 토해내었다. 뱃속이 텅 빌 때까지 오래오래 토해내고도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오래 그런 자세였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죽은 내 친구 이야기야. 시인이었어. 그 누이가 죽은 친구를 위해 손가락 끝에 기름을 발라 불을 붙이고, 다시 붙이고.....내 친구의 이복누이가 자살한 시인 친구의 영혼을 위해 실제로 손가락에다 불을 붙였다니까.... 짜식이 말야, 생전에 여자를 사랑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을 지도 몰라. 짜식이 말야, 생전에 시인이 된 까닭이 있었을지 모른다구... "

왼쪽 검지에 붕대가 감긴 그의 누이의 손을 죽은 친구의 추모시 낭송회에서 확인한 다음, 내 곁의 다른 친구는 턱까지 덜덜 떨고 있었고, 전염된 듯 내 손끝 역시 떨리기 시작해서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날 낭송회가 계속되던 저녁, 밤비가 부슬거리는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들려왔던 갈대밭을 스치며 물떼새들이 후드득 하늘로 날아오르는 소리가 내 깊은 곳에서 또 들려 오기 시작했다.

"죽은 시인 친구 이야기야. 그 이복누이 이야기라니까..."

나는 마추픽추 정상에서 그때 똑같은 양으로 계속 내리고 있는 부슬비에 젖으며 태양의 문을 나와 외따로 떨어져 있는 오두막 쪽으로 향했다. 그 오두막 곁에 우리 나라 커다란 고인돌 부피의 잘 다듬어진 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장의석(葬儀石)이라고 했다. 죽은 시신을 마지막 그 돌 위에 잠시 안치해두고 이승과의 마지막 석별의 시간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쿠스코 외곽에 있는 사크사이와만 성곽 안 초원에서 해마다 6월 24일이면 태양의 축제(Inti Raimi)가 열린다고 했다.

그 축제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라마의 뜨거운 심장을 잉카의 칼 투미(Tumi)로 도려내어 태양을 향해 바치는 잉카 왕의 모습이 비 뿌리는 산정에서 환영처럼 떠올라 오고.....

장의석을 지나 나는 150명의 태양 신전을 지키던 태양의 처녀들이 미라로 누워 있었다는 언덕으로 걸어갔다. 어깨에 둘렀던 비닐 조각은 바람에 날려 버린 채 어깨가 젖어들고 있었다. 나는 97년의 내 생일 날, 그들 태양의 처녀들이 누워 있던 언덕에 서서, 내 생일을 혼자 자축하는 팩 소주의 마개를 땄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쪽으로 신성한 우르밤바 계곡이 안개 사이로 희끗거렸다..

지난 밤, 그 강가에 무수하게도 어둠 속에 노랗게 피어 있던 야생 키니네 꽃들이 어쩌면 이들 태양의 처녀들 영혼들이고, 자살해 버린 시인 친구와 내 아버지의 영혼 역시 그 부근을 반딧불이로 날아 다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주 한 모금은 내가, 다시 한 모금은 거기 언덕의 흙에 뿌리면서 나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화장실 변기에 코를 박고 잠시 잠이 들었었나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 변기 안의 오물을 내린 뒤 간신히 화장실 문을 밀고 나왔을 때 미스 추는 새벽이 오고 있는 큰 침대 위에 신발까지 신은 채 엎어져 있었다.

가늘게 마른 어깨의 선이 쓸쓸해 보였다.

섹스를 해야 하는데, 여자와 남자가 변두리의 호텔에 들었으면 섹스를 해야 하는 건데.

예리한 칼끝으로 위장 속을 후벼파는 듯한 통증을 간신히 억누르며 비틀거리면서 나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아침이 오고 있었다.

너무 오래 같이 있었어. 셀프 케어는 실패였어. 그녀가 눈을 뜨며 그렇게 첫 마디를 내뱉을 것 같아 더욱 쓸쓸해진 기분으로 나는 열 수 있는 대로 창문을 크게 열어 젖혔다.

아직도 어둠은 비와 뒤섞여 유리창을 때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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