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연숙 약력: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시, 수필 다수 발표. '문학의강'으로 시 등단. 현재 울산 거주
[서울=동북아신문]친구들이 여름휴가로 다녀갔다. 이틀 동안 한 무더기 개망초 몽우리들이 방울방울 터뜨려 화방 속에 빠진 듯 했다. 시집과 친정 땜에 힘들었던 일, 남편과 애들 땜에 속태웠던 일, 직장상사와 동료 땜에 스트레스가 쌓였던 일들을 툭툭 던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켜켜이 묵은 비밀들도 겉치레를 벗어 던지고 솔직하게 숨김없이 턴다. 가감 없이 주고 받는 내면을 흔드는 이야기들에 나도 용기 내어 어릴 적에 학부모의 재력이나 권위만 보는 얍삽한 선생들이나 공부는 지랄같이 못해도 부모 덕에 장마에 소똥처럼 쉽게 쉽게 풀리는 친구들이 미웠었다고 뿜어내고 말았다. 그랬었지 하는 친구들의 공감에 솟아오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과거사가 아차 하는 순간에 그만 터져버리고 말았다.

사실 나의 할아버지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이 땅을 버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할아버지는 중국 흑룡강성 소흥안령의 어느 산자락에 정착을 하고 열심히 손 풍구를 만들어 팔아 70여명의 머슴을 둔 지주로 되였으니 아마도 어마어마했을 거다. 그쯤에서 그쳤으면 내 인생이 과분하게 달라졌을려는지 모른다. 과욕으로 욕을 부르는 게임을 멈출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토비들에게 총과 쌀을 팔아 넘기며 인민의 대역죄인이 되고 말았다. 형장에서 할아버지의 시신을 묻어주고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업혀있는 아들을 구들에 눕혀놓고 대들보에 목을 매였다. 그때 할머니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세 살 된 아들에게는 반혁명분자라는 패쪽이 지키고 있었다. 부조리한 현실은 아버지를 광란의 히스테리로 몰아갔고 아버지는 결국 산골짜기에서 자연인으로 살다가 암으로 불행한 삶을 마쳤다. 열심히 가족만을 위해 돈을 벌고 가족의 미래를 위해 그 무서운 전쟁마저도 기회로 삼고 생존경쟁의 우승자를 꿈꿨던 할아버지의 삼십 년 일생은 결국 꽃밭에서 뿌리 채로 뽑힌 개망초의 인생이었다. 이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던 희망과 긍지와 기대와 자부심들을 무참하게 허물어 버린 사실이다. 엄마의 잦은 재혼으로 집으로 가는 길은 땅속으로 꺼져 드는 듯 했고 학교에서 잘난 친구들과 어울리며 점점 커져가는 열등감은 목을 조였다. 천한 피 내림, 나의 개망초 살이는 결국 평탄하고 자유로운 감동이 없는 학교시절을 보내다가 중퇴하고 말았다. 어느 시인이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고 했던 것 같다.  명치끝이 아픈 사연은 개망초 뿌리에 깊이 파묻혔다가 그렇게 서로서로 들어주고 공감해주면서 밥풀 같은, 계란 프라이 같은, 쪽 팔리게 그렁이는 눈물 같은 보잘 것 없는 꽃으로 하얗게 피운다. 친구들을 보내고 집 근처의 동천강으로 나갔다. 울산에서 거의 십 년을 함께 해온 동천강이다. 무거운 마음을 덜어 주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 주고 아픈 마음을 씻어 주는 친구 같고 형제 같고 애인 같은 동천강이다. 동천강의 6월은 개망초꽃들로 강변을 덮는다. 멀리서 보면 자잘한 것들이 안개꽃으로 착각을 안겨준다. 은은하게 다가오는 향기는 꽃이라는 명분을 지켜가는 개망초꽃의 처절한 외침 같기도 하다.  17년 전 어느 겨울 나는 불법체류자갈 데가 없다강남의 구룡 마을 94세 할머니 집에 얹혀개포동 상가의 광주 해장국집으로출근할 때 짐을 싸고 퇴근할 때 보따리 싼다 화장실도 나무판자 땅값은 비싼데고향 산골짜기보다 더 째졌다퇴근하고 들어서니 할머닌 싸늘하다후닥닥 달려가 뚫어져라 내려다보니 멀건 두 눈 번쩍 뜨고 오싹하게 노려본다뜨거운 물은 사용금지라 양푼에 찬물 붓고 대충 문댄다다시 옷을 주어 입고 미군부대 담요를 덮고 할머니 곁에 눕는다바람소리인가? 잠결에 깼다시커먼 할아버지가 날 내려다본다소리도 못 치고 후닥닥 일어나 쏘아보는데 할머니의 아들이라 한다난 짐을 싼다하룻밤 자는데 큰 일이냐는 영감의 소리를 뒤로하고 문을 차고 나온다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떨린다 정거장의 차가운 의자가 나를 반기고사위는 내 눈치를 보느라 고요하다터질 것 같은 가슴을 찬 바람에 진정시키고 전화번호 책을 꺼낸다깨알같이 적은 번호들 그날따라 어색하다그날은 최고로 추운 겨울 밤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질기고도 긴 그 삶은 매 맞은 듯 아프고 서럽고 외롭다. 최하층의 직종으로 최하층의 대우를 받으며 참고 이겨나가는 고달픈 돈벌이는 열심히 일하라는 이 세상의 낚시에 끌려간다. 눈치 없이 비벼대던 곁방살이부터 옥탑 방으로, 월세 방에서 전세방으로, 주택에서 아파트로 쉬임 없이 앞만 보고 간다. 밑도 끝도 없는 돈벌이에 지쳐가는 영혼은 점점 굶주림에 허기져 죽어간다.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데 마음이 저 혼자 헛헛하다. 내 삶을 돌아보고 내 삶의 가치를 알아가며 시간의 모서리가 가시랭이로 일어서는 그런 날에는 도서관으로 서점으로 간다. 한 권, 두 권 사다가 보다 나니 이젠 몇 천 권으로 늘어나고 책장을 채우다 보니 방 하나가 서재로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돈벌이에 포박된 가슴속에 희미하게나마 남은 그림들이 점점 선명해지고 그토록 가고 싶었던 꿈의 세계로 겁 없이 달린다. 반백의 나이에 시를 쓴다고 설치며 칭찬과 응원과 또 따르는 눈총도 받는다.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시가 좋아서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서 시를 사랑해서 시인을 좋아하는 것 뿐이다. 어렵고 고달프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순간은 행복하다. 개망초꽃을 한줌 꺾어와 꽃병에 꽂고 서재의 책상 위에 살며시 놓았다. 싱그러운 꽃 내음이 나를 겨냥하여 코로 가슴으로 온 몸으로 퍼지며 부드럽게 쓸어준다. 아무데서나 돋아난 생명이라 하더라도 그윽하기를 원하고 멍든 줄기로 온 힘을 다하여 숨을 들이쉬는 개망초의 눈물겨운 삶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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